63화 EP063-히어로 (완)
“그러니까, 기억을 덮는 특성이 아직 남아 있다고요.”
“네! 지난 검사에서 특성이 발견되지 않은 건, 음… 음… 으음… 모르겠네요?”
“…네?”
“그야~ 특성이 발현되는 조건도 아직 파악하지 못했는데, 특성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게 불가능하다고 단정을 지을 수도 없으니까요.”
조금 혼란스럽다.
검사 결과에 아주 약간이라도 기대를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정말 남아있을 줄은 몰랐는데.
“그래도 가장 가능성이 높은 가설로 설명해보자면… 역시 감당할 수 있는 출력 이상으로 특성을 사용해서 과부하?”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렇죠? 히어로들도 마지막으로 무리해서 싸우다가 특성을 상실하는 경우가 많고.”
“그런데 아직도 특성이 남아있다는 건….”
“아마도 이 망상 – 피학, 이게 중간다리 역할을 해준 것 같아요.”
아냐 씨가 내 진단서에 적혀있는 망상 – 피학이라는 글자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말한다.
이제는 글자의 중간에 굵은 검은색 선이 그어져 있는, 나와는 관계가 없어진 말이다.
“승윤 씨의 특성은 기억을 삭제하는 게 아니라 평범하고 무난한 일상으로 덮어씌우는 거잖아요?”
“네.”
“그래서 그 안에 있던 기억들이, 이 망상 – 피학을 치료하면서 한 일들이랑 얽혀 있다 보니까.”
“아… 잊고 있던 기억을 건드렸다?”
“네! 맞아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특성에 대한 기억도 살아나고.”
“아하.”
“승윤 씨 뇌도, 어라? 나 이런 특성이 있었나?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하면서 다시 특성을 자연스럽게….”
“그게… 말이 돼요?”
“각성의 원리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르니까요. 흐으음… 혹시 관심이 있으시다면 이 참에 이쪽 학계로-.”
“아, 아뇨. 그건 아니고요.”
망상 – 피학은 이제 나를 괴롭힐 수 없다.
그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레나, 그 여자가 자신이 한 짓을 스스로 거두고 사라진 건지.
아니면 내 특성이 다시 발현되면서 망상 – 피학을 자연스럽게 밀어낸 건지.
그것도 아니면… 병에 걸려 끙끙 앓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낫듯이, 내가 스스로 극복을 해낸 건지.
“아무튼! 축하드려요~ 앞으로는 여기서 트라우마 케어 프로그램 진행하면서 상태를 살피기만 하면 되겠는데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건… 개인적으로 궁금한 건데, 물어봐도 돼요?”
“네? 아, 말씀하세요.”
“망상 – 피학으로 힘들었던 일들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덮는다고 해도 아무도 뭐라고 못할 것 같은데.”
그 빌런 때문에 고통을 받았던 나, 그리고 은지… 그리고 가장 큰 도움이 됐던 매튜 씨까지.
내 특성을 사용한다면 힘들고 수치스러웠던, 괴로웠던 날들을 무난한 일상으로 채우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최선의 선택은 아닌 것 같다.
“그래도… 기억해야죠. 항상 좋은 일만 있을 수는 없잖아요.”
“음! 히어로다운 대답이네요!”
“…저 히어로 아닌데요.”
“엣, 하실 생각 없으셨어요? 아, 아님 말고.”
레나 로마노프.
그래, 악인이지. 나쁜 빌런이지.
그래도 굳이 꼽으라면 고마운 점이 한 가지 있긴 해.
당신이 남긴 이 저주 같은 특성 덕분에 결국 나랑 은지의 기억이 돌아왔다는 점.
그 여자는 나를 괴롭히면서 무언가를 얻으려고 했던 걸까?
그냥 재미있으려고, 내가 괴로워하는 꼴을 즐기려고 했던 건 아닌 것 같다.
이해할 수 없는 여자라니까? 끝까지.
“설명드릴 부분은 다 드렸고~ 진료 끝! 이제 돌아가셔도 좋아요~”
“…감사합니다.”
은지에게 좋은 소식을 전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래도… 은지도 은지지만, 여기서 만나야 할 사람이 한 명 더 있지.
***
똑, 똑-
“들어오십시오.”
사무실의 문이 열리고 들어오는 한 남자.
A급 히어로… 아니, A급 특성 보유자. 김승윤.
“승윤 씨, 아나스타샤에게 진료에 대한 보고를 받았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아… 아뇨, 축하를 받을 만한 일을 한 것도 아닌데요.”
“저를 만나서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고 들었습니다.”
“…네.”
사실 대충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다.
이 남자가 나를 찾아온 이유는, 아마….
“제 특성을 쓰면, 매튜 씨의 트라우마를 덮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
“평균적인 출력은 반나절 정도라고 하지만, 이미 한 번 해보기도 했고… 가능할 것 같아서요.”
“…그렇습니까.”
나는 분명 과거의 기억에 여전히 시달리고 있다.
가장 최근에는 믿고 있던 최측근, 비서까지 여전히 나를 놓지 않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종마… 그 프로젝트에 매달린 사람은 나 뿐만이 아니라는 소리지.
“제안은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사양하겠습니다.”
“…그러실 것 같았어요.”
하지만 나는, 서서히 극복하고 있다.
이번 지하실에서의 일이 내 생각을 뒷받침한다.
앞으로 적어도 몇 년은 비슷한 생각을 품은 이들이 나에게 접근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내 힘으로 이걸 극복할 거다.
나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나를 믿는다.
“이미 예상하셨다고 하니 이유를 설명드릴 필요는 없겠죠.”
“하하… 그러고보니, 도그마 씨는 어떻게 됐어요?”
“도그마는 빌런과 결탁한 일을 포함해 민간 건축물을 폭파시킨 혐의가 합쳐져 무거운 처벌을 피하지 못할 겁니다.”
“…더스트 씨는요?”
“더스트는….”
더스트.
협회의 최상부 속에 남은, 여전히 종마 계획의 1순위 후보로 나를 꼽고 있는 인물들과 손을 잡은… 나의 비서.
더불어 헤이즈까지 큰 위험에 빠트릴뻔한 더스트의 죄 역시 상당히 무겁다.
“헤이즈는 최소한 히어로 생활에 적응하도록 도와준 점은 진짜였다며 처벌의 수위를 저에게 맡겼습니다.”
“…….”
“승윤 씨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은지가 그렇게 말했다면… 저도 뭐라고 덧붙일 수가 없네요.”
“…저는 더스트를 계속 비서로 둘 생각입니다.”
“네? 계속… 그대로요?”
더스트를 해고하거나 다른 지부로 발령을 보내는 건 오히려 위험 인물을 내 눈 밖에 두는 것과 같다.
더스트의 유능한 능력까지 부정할 수는 없고… 역추적을 위해 배신자를 포섭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
…물론 앞으로 더스트와의 육체 관계는 없을 예정이다.
“괜찮으시겠어요? 제일 가까운 사람에게 배신을 당한 건데….”
“그러니 제가 직접 교정을 할 생각입니다. 제가 두 번이나 같은 일에 당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습니다.”
“…….”
“승윤 씨. 히어로는 자신을 공격한 사람을 생각보다 쉽게 용서합니다.”
“…그런가요?”
“하지만…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건드린 적은 용서하기 어려워하죠. 그게 본인을 공격한 것보다 더 큰 아픔이니까요.”
피학 – 망상.
당신의 가장 큰 괴로움이 당신의 연인으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은 우연이었을까? 빌런의 의도였을까?
“승윤 씨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네?”
“히어로, 말입니다. 특성을 보유하셨으니 히어로 협회 서울 지부의 대표인 저는, 스카우트 제안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아… 히어로요.”
“협박은 물론 아니지만… 특성을 보유한 채로 일반인 신분을 유지한다면 상당한 제약이 따라와 많이 불편하실 겁니다.”
전투보다는… 이번에 지원을 온 아나스타샤와 비슷한 치료 센터 쪽에 배정된다면 큰 도움이 될 것 같긴 하다.
물론 선택은 이 남자의 몫이다.
“…지금 바로 대답해야 하나요?”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 은지랑 얘기를 좀 해보고 싶네요.”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그 대답도 당신답군.
***
집으로 왔다.
협회에서 제공하는 안전가옥이 아닌, 우리가 원래 살던 집으로.
“와… 거의 다 그대로 있네? 청소도 했나? 쌓인 먼지도 없어, 오빠!”
“우리가 집을 비워도 협회에서 관리를 해줄 거라는 말을 듣긴 했지.”
급하게 이사를 가게 됐던 날이 생각난다.
집 앞에서 나를 기다리던 매튜 씨, 그리고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미라지 씨….
그곳에서 계속 살아도 된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나는 이곳이 더 좋다.
은지도 마찬가지다.
“짐만 적당히 챙겨서 돌아오면 바로 살 수 있겠는데?”
“내일 가져오자. 오늘은 그대로 있는지 가볍게 살펴보러 온 거니까.”
“여기로 오니까 진짜… 뭔가, 원래대로 돌아왔다는 기분이 들어.”
“…….”
하루 사이의 변장이 끝나고, 은지는 다시 각성한 뒤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아쉽냐고? 조금은 아쉽지, 당연히.
내가 잊고 살아온 예전의 은지를 오랜만에 꺼내서 보는 것만 같았는데.
그래도… 지금의 은지가 더 사랑스럽다고 생각해.
더 예뻐졌다는 뜻이 아니라, 더 사랑해주기로 약속을 했으니까.
“가자. 내일 다시 오자.”
“웅!”
“내일부터 바로 업무 복귀야?”
“으음… 지부장님은 필요하면 며칠 쉬다 와도 된다고 했는데.”
“그럼 쉬는 것도 좋겠네. 지하에서 나올 때 많이 무리했다며.”
“아! 오빠는? 다시 특성 쓸 수 있다며! 이제 그럼 오빠도 히어로야?”
“그건 아직 정하지 않았어. 어떻게 할까….”
오늘 밤에 할 얘기의 주제가 정해진 것 같다.
내일 다시 돌아올 우리집에서 돌아서는 우리의 손은 이미 서로의 손을 잡고 있다.
누가 먼저 잡았는지는… 글쎄, 그게 중요한가?
결국에는 이렇게 우리가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이 훨씬 더 중요하고, 더 소중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