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EP040-본모습
“더스트.”
“네, 지부장님.”
“조사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진전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오히려 확실하군.
레나 로마노프에게는 조력자가 있다.
그게 누구인지 알지 못하면 감시와 조사도 무의미한 일이 될 터.
“특이 사항으로는, 오늘부터 승윤 씨를 진찰하는 빈도를 높이겠다고 합니다.”
“…헤이즈는?”
“사흘 전에 피임약 지급했습니다.
“그걸 물어보는 게 아니잖나.”
“…아니었습니까?”
“더스트.”
“네, 지부장님.”
어제 일을 신경 쓰고 있는 건가?
…설마.
“혹시, 어제 사용하셨습니까?”
“그건 왜 묻지?”
“사용이 끝났다면 다시 지급해야 하기에 그렇습니다.”
“…사용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앞으로도 사용할 일은 없을 거라는 말이 턱 밑까지 올라왔지만… 뱉지 못했다.
어제는 조금 위험했다.
앞으로 그런 부탁은 자제하는 편이 좋을 거라는 말을 전해야겠어.
나에게도, 헤이즈에게도. 그리고 승윤 씨에게도.
잠깐. 지난번 호텔에서 새로운 사진을 촬영할 때 약을 소품으로 사용했지.
깜빡할 뻔 했어.
“다시 생각해보니… 피임약, 사용했다.”
“…그렇습니까? 언제 사용하셨습니까?”
“사흘 전.”
“사흘 전이라면… 피임약을 지급한 날입니까?”
“…….”
뭔가 오해를 사고 있는 것 같은데.
모든 일이 쉽지 않군….
***
“그쪽에 앉아요. 아, 차고 왔나?”
“뭘… 찹니까?”
“정조대.”
“…….”
진료를 시작하고 제일 먼저 한다는 말이 그거야?
어이가 없네.
“어차피 바지를 내릴 일이 없으니 알 필요 없지 않나요.”
“왜 없다고 생각하는 거지?”
“없을 겁니다.”
“글쎄.”
“…진료나 하죠.”
커피를 홀짝, 한 모금 마신다.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을 진정시키는 데에는 카페인이 나름 도움이 된다.
“어제 동영상을 보다가 묘한 불쾌함을 느끼고 피학 증세가 순간 멎었다고.”
“…네.”
“괴로움을 쾌감으로 인지하도록 조작된 상태에서 그걸 무시할 정도로 강한 불쾌함을 느꼈다는 건….”
“…….”
“흥미롭네. 재미있어.”
“재미없으니까 설명이나 좀 해주시죠?”
“감정적인 경우를 뺀다면 가장 설득력 있는 가능성은… 어제 그 동영상을 볼 때 쌓인 욕망이 없었던 거지.”
“…그게 왜요?”
“괴로워지고 싶다는 욕구가 아주 작은 상태에서 그런 걸 보면 당연히 불쾌하지 않겠어?”
“하지만 처음에는… 흥분했는데요.”
“그건 이제 당신 성향이 그쪽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증거고.”
“…….”
“농담인데, 좀 웃지.”
“…허.”
“특성이 완전히 제거된 상태가 아니니 일시적인 흥분 상태는 평범한 반응이지.”
…순간 조금 걱정했다.
정말로 내 성향이 그쪽으로 변해가고 있는 건가, 그런 걱정이 순간적으로 머릿속을 스쳐갔다.
하지만 장난이라니까, 뭐….
“…그런데 왜 쌓인 욕망이 없었죠?”
“무슨 뜻?”
“어제… 전 자기만 했는데요.”
“자는 동안 욕망이 풀릴 수도 있지.”
“…….”
“왜 그러지?”
“제가 자는 동안… 무슨 짓, 했습니까?”
“뭐… 했을 수도 있고.”
벌떡.
의자를 거칠게 박차고 일어났다.
이건… 아니다.
“뭐하자는 겁니까?”
“앉아. 오히려 나한테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
“뭐라고요?”
“만약 어제 욕망이 쌓여 있었다면, 당신. 여친 따먹히는 동영상 보면서 발정 나가지곤 한참 더 망가졌을 텐데.”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요.”
“오… 그래? 그럼 지금 여친한테 전화해. 마조랑 주인님 컨셉으로 또 떡치고 오라고. 아, 컨셉이 아닌가? 그거 보면서 딸이나 쳐.”
“…….”
“그건 싫지? 봐. 나한테 고마워해야 해.”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대체 뭐냐고, 이 여자.
“그럼 저, 적어도 뭘 한 건지는 알려주세요.”
“별 거 안했어.”
“그건 제가 판단할 테니까 그냥 알려주세요….”
“대충… 자지랑 불알 같이 좀 밟아줬는데.”
“…….”
“농담이니까 좀 웃지?”
“그런 농담 좀 그만하면 안됩니까?”
역시 난 은지처럼 어설퍼도 귀여운 여자가 좋다.
이런 여자는 정말이지… 질색이다.
“아무튼, 오늘은 지난번에 말한 것처럼 저자극 위주의 치료를 시도할 계획이에요.”
“뭘 할 생각인데요?”
“그 전에 정조대 찼는지 말부터.”
“…….”
“내가 당신 바지 앞섬을 더듬어서 확인하는 쪽을 원하는 건 아닐 테니까.”
“…찼습니다.”
***
“헤이즈.”
“…….”
“은지.”
“…아. 어, 언니?”
“아직도 이름이 익숙하지 않은 거야?”
순찰 임무가 끝난 뒤, 협회 건물의 옥상에서 잠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치료 센터가 있는 건물 쪽 하늘을.
“헤… 헤헤, 그런데 무슨 일이예요?”
“자, 받아. 피임약.”
“…네?”
“지난번에 준 건 썼다며? 받은 날 바로.”
아… 아니, 그, 그렇긴 한데… 진짜로 한 건 아니고 그냥 촬영 소, 소품으로 쓴 건데…!
“어, 언니! 이건 그… 그게 아니라….”
“그래. 뭔가 사정이 있었겠지. 승윤 씨의 상태가 특수하니까.”
“…….”
“어제는 어땠지? 지부장님한테 거칠게 해달라는 부탁을 했다며.”
“그… 그렇긴 한데, 앞으로는 그런 부탁은 드리지 않을 거예요.”
“왜? 기분 좋았잖아.”
“어, 언니!”
“지부장님도 어제 좋았다고 하시던데?”
“…네?”
이…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그리고 이런 얘기, 별로 하고 싶지 않은데….
“몰랐어? 지부장님은 원래 그런 성향이야.”
“모, 몰라도 되는 거잖아요…!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았어요!”
“어제 네 부탁을 받고 연기를 한 것보다는, 그냥 본모습을 살짝 꺼내신 거라는 말이지.”
“…다른 얘기해요, 언니. 다른 얘기. 저, 저녁 드셨어요?”
“난 먹었어. 지부장님은 아직.”
“…….”
이 언니가 오늘따라 왜, 왜 이래…?
나는 진짜로 관심 없다구….
게다가 어제 오빠한테 한 잘못도 있고, 앞으로는 정신 똑바로 차릴 거야.
“내가 왜 이런 얘기를 하는 것 같아?”
“모, 모르죠, 전….”
“하아아… 헤이즈, 남자친구를 위하려는 마음은 알겠는데 넌… 조금 더 신중해야 해.”
“…네?”
“지금은 지부장님이 감정은 배제한 채로 네 상대를 해주고 계시잖아?”
“그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감사로 될 일이 아니라고.”
더스트 언니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더니, 나에게 내밀며 화면을 보여준다.
화면 위에는 내가 어제 전부 삭제했던… 이, 익숙한 방의 모습이….
“꺄아아아악!!! 어, 언니, 이거 어디서 났어요!”
“이거 봐. 어제는 하는 데 정신이 팔려서 몰랐지?”
“네? 뭐, 뭘 몰라요?”
“지부장님이 찍은 거야, 이거.”
“…에, 에.”
“하는 도중에 찍은 거라고. 말했지? 그게 지부장님 본모습이라니까.”
더스트 언니의 손가락이 휴대폰 화면을 톡, 건드린다.
그러자 일시정지 되어있던 동영상이 재생된다.
화면은… 침대에 누워있는 매튜 씨의 시점.
그리고 그 위에는 내가….
‘보지 조여.’
‘네, 네에♡ ‘
‘더 꽉.’
‘네♡’
‘허락없이 보지로 가지 마.’
‘네에♡ 네♡’
“꺄아악!! 어, 어, 언니이이!! 지워요, 지, 지워주세요오!!”
“일단 봐. 승윤 씨에게 보려주려고 연출한 상황극이라는 건 알고 있으니까.”
“으… 에, 에으….”
‘다음 주.’
‘후, 후으, 후-♡’
‘같은 요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
‘후아, 하, 하아-♡’
‘여기로 와라. 알겠다고 대답해.’
‘네에♡ 아, 알겠어요-♡’
‘콘돔은 가져오지 마. 대답하면서 허리 내려.’
‘네에♡ 으, 으읍-♡ 후-♡ 후우-♡’
“이, 이건 그, 제가 연기를 부, 부탁드려서….”
“말했잖아. 지부장님은 연기가 아니라 본모습이라고.”
“…….”
“만약 지부장님이 이걸로 널 협박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네? 아니, 그… 그럴 리가 없잖아요….”
“있으니까 이런 말을 했지.”
더스트 언니는 내가 보는 앞에서 동영상을 삭제한다.
하지만 난… 뭔가 쉽게 말을 꺼낼 수가 없다.
“조심해. 지부장님이 내색하지는 않아도 너, 지부장님 취향에 꽤 맞는 것 같으니까.”
“…….”
“…아니면 네 몸이 취향에 맞거나.”
“이, 이런 것도 다 옛날의 일들 때문 아니에요…?”
“그래, 맞아. 이제 와서 고치기엔 늦었지. 그걸 알면서도 지부장님은 너랑 승윤 씨를 도와주려고 나섰어.”
“…에.”
“그러니까 너도 조심해. 최대한 지부장님을 자극하지 말고, 이런 잔재들이 남지 않도록.”
어… 어떡하지.
어제 내가 저지른 실수, 쉽게 넘어갈 일이 아니게 되어버린 것 같아.
그래도 내가 한 일이니까 수습도 내가 해야 하는데….
“저기 승윤 씨네.”
“어, 어디요?”
“저기, 센터 건물 입구. 이제 치료 끝났나?”
더스트 언니의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려보니 저 멀리 지상 쪽에서 오빠의 모습이 보인다.
조금 지쳐 보이기도 하고, 살짝 개운해 보이기도 하고…?
“언니! 저 퇴, 퇴근! 퇴근해도 괜찮죠?”
“그거 입고 퇴근하겠다고? 가능하면 환복하고 가지.”
“아… 안돼요! 오빠랑 같이 갈래요.”
“그러던가. 눈에 띄면 안되니까 그냥 들고 이동해.”
“네! 마, 맞다! 사진! 남은 사진 있으면 지워주세요! 꼭!!”
언니에게 손을 흔들면서 그대로 옥상에서 점프.
집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가는 오빠 옆에 도착하는 건 순식간이다.
“오빠아아아!!”
“어, 은지? 이제 일 끝나고 집 가는 거야?”
“웅! 같이 가자, 내가 들고 가면 훨씬 빨라!”
“그, 그래. 아직 좀 무섭긴 한데… 부탁해.”
“히히… 의사 선생님 만나고 온 거야? 오늘은 뭐 했어?”
“어, 어… 집에 가서 말해줄게.”
여기서 말하기 어렵나?
호, 혹시… 아니지, 그것도 하고 갔는데, 오빠.
…내가 해달라고 한 게 아니라 오빠가 하, 하고 가겠다고 한 거지만!
“웅! 얼른 가자, 그럼.”
“꽉 잡아줘…? 나 아직 이렇게 가는 거, 적응이 안됐거든….”
“히히히, 걱정 마! 가자,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