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EP036-상담
이거 조금… 위험한 것 같다.
내가 지금 처한 상황, 은지의 노력, 그리고 수상한 의사의 등장까지 전부 포함해서 말이다.
“…….”
내 옆에 곤히 잠들어 있는 은지의 표정은 한없이 평온하다.
오늘 자기가 나를 나름 만족시켰다는 성취감과 기쁨 덕분일 거다.
하지만, 나를 처음으로 진료했던 의사는 분명 내가 점점 더 강한 자극을 찾게 될 거라고 말했다.
그 말은 즉….
“…안돼. 이걸 계속 하면 안돼.”
상냥한 은지가 나를 비웃으면서 매튜 씨와 하는 섹스가 더 기분 좋았다고 말하는 순간은 정말 짜릿했다.
그 중독적인 쾌감에 내가 익숙해지면… 여기서 더 강한 자극을 원하게 된다면?
의사처럼 나를 경멸하면서 욕설로 매도하는 은지라도 보고 싶은 거야, 나는?
내가 흔들리면 안된다. 그건 은지를 불안하게 만들면서 더 적극적으로 뭔가 해보려고 하는 상황을 불러올 뿐이야.
그렇다면,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이성적인 판단은 뭐지?
“…의사를 만나보자.”
물론 그 사람… 레나 말고 다른 의사.
***
“오빠, 나 오늘부터 조금 바빠질 수도 있어.”
“왜? 무슨 일 있어?”
“누군지는 아직 모르는데 빌런 쪽에서 테러 예고를 했거든. 지부장님을 암살하겠다면서.”
“…뭐라고?”
“나도 처음엔 좀 놀랐어. 막상 지부장님은 일 년에 다섯 번 정도는 받는 협박이라며 아무렇지 않아 하시더라.”
오늘은 슈트가 아닌 정장 차림으로 출근 준비를 하는 은지.
슈트는 살짝 손을 볼 곳이 있어서 하루 수선을 맡겼다고 하는데… 사진에서 봤던 슈트의 구멍과 연관이 있는 건가?
어쨌든… 정장을 입은 은지도 역시, 예쁘다.
“그래도 다행이다! 바빠지기 전에 오빠를 도와줄 수 있었잖아.”
“…맞아. 어제는 정말 잘 해줬어.”
“이러면 오빠도 며칠 동안은 망상 때문에 힘들어할 일 없을 테니까~ 후후후.”
나와 내 욕망을 만족시켰다는 사실이 은지에게 있어서는 무척 뿌듯한 모양이다.
내가 느끼고 있는 긴장감과 애써 다음을 기대하지 않으려 들이는 노력에 대해서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거다.
이건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고, 은지는 내 여자친구가 맞지만 동시에 S급 히어로의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럼 갔다 올게! 이따 연락해, 오빠~!”
“그래. 조심하고.”
***
치료 센터에 도착한 뒤, 접수처에서 심리 상담을 신청했다.
몇 분이 지나고, 상담실로 가면 된다는 안내를 따라 이동하자 미약한 조명 하나만 켜진 어두운 방에 도착했다.
“불은 왜 다 꺼져 있는 거야…?”
“내가 어두운 걸 좋아해서.”
“…….”
왜… 왜 이 여자가, 여기에….
“…뭡니까?”
“음?”
“저는 분명 심리 상담을 요청했는데요.”
“그래서 내가 여기 있는 거죠.”
“당신은 정신 계열 담당이잖아요.”
“이 자리에서 정신과 심리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다면 내 조수로 채용하고 싶은데.”
말문이 막혔다.
…돌아가자. 괜히 접점을 만들고 싶지 않아.
은지에게 이 여자를 만난다는 이야기를 하지도 않았고.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
“설마 감정적인 이유 때문에 학계 최고 권위자인 내 상담을 거부하겠다는 건가?”
“…….”
“그 정도로 멍청한 사람인 줄은 몰랐네. 벌써 머리가 맛이 가기 시작했나….”
자기 입으로 자신을 학계 최고 권위자라고 말하는 거야?
뻔뻔하네.
“먼저 어제는 어땠는지 말해보죠? 했을 거 아니야. 동영상 들고 가서.”
“…멋대로 상담 시작하지 마세요.”
“말할 생각 없다? 그럼 먼저 듣기만 해요.”
“…….”
“상담의 기본은 마음을 여는 거니까… 좀 두드려 볼까? 마음.”
매번 생각하지만, 짜증나는 여자다.
똑똑한 건 자기가 제일 잘 안다는 듯이, 모든 걸 마음대로 정해버리고 있어.
“여기에 다시 찾아와서 심리 상담을 신청했다는 건 뭔가 불안함을 느낄 요소가 있었다는 뜻이겠지?”
“…….”
“하지만 효과가 부족해서 망상이 다시 올라오는 문제였다면 심리 상담이 아니라 나를 찾았을 거야.”
“…….”
“그럼 반대로 효과가 너무… 좋았다면? 그래서 불안해졌다면?
이런 식을 반복하면 나중에는 어떤 짓까지 하게 되는 건지 걱정이 되기 시작한 거라면?”
정말이지 실력은… 확실하다.
나는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는데 대략적인 정황을 전부 파악했어.
…그래서 더 짜증이 나.
“게다가 앞으로 여자친구는 한동안 바빠질 거고.”
“그건 어떻게….”
“지부장을 타겟으로 한 테러 예고. 당분간 측근이 밀착해서 호위를 할 테니까.”
“…….”
“A급 히어로인 비서가 있지만… S급 히어로가 있다면, 비서에게는 업무 처리를 맡기고 S급이 경호를 맡는 편이 효율적이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죠?”
“듣기나 해. 망상을 가볍게 자극하면서 반응을 보는 거야.”
내가 왜 이 여자가 하는 말을 듣고 있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일단 이것도 상담이라고 하니까… 잠자코 들어보기로 한다.
“지금도 네 여자친구와 지부장은 단둘이 움직이고 있는데.”
“…….”
“과연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확신하는 건가?”
“제가… 두 사람을 믿지 못했다면, 처음부터 이런 짓을 맡기지도 않았어요.”
“그건 처음이지. 이제는 지금까지 한 일이 있는데? 떡정이라는 말이 왜 있겠어.”
“…그만하죠.”
“일어나지 마. 내 말 들어.”
붉은색 눈동자가 번뜩이면서 나를 노려보고 있다.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바퀴로 파고들어 머릿속에 스며든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다.
“대충, 이동하던 중에 네 여친 몸을 보고 지부장이 갑자기 꼴려버렸다고 생각해봐.”
“…….”
“주변에 사람도 별로 없고, 그대로 손을 내려서… 커다란 엉덩이를 콱- 움켜쥐는 거지.”
“…….”
“네 여친은? 저항할까? 소리라도 질러? 아니, 순간 놀라긴 해도 가만히 있을 걸.”
“…….”
“이미 둘이 출장까지 가서 존나게 떡치고 온 사이인데 엉덩이 좀 만지는 게 어때서?”
망상을 가볍게 자극하는 거라는 말을 하긴 했지만, 이건 좀… 심하다.
모함이고, 험담이다.
하지만 망상의 재료가 되기에는 더없이 적합하다.
“주무르기만 할까? 치마 살짝 젖히고, 안쪽으로 손가락 슬쩍 넣어서 팬티 위로 보지 꾸욱, 꾸욱- 눌러주는 건 어때.”
“그만… 그만해요.”
“벌써부터 박힐 생각 하면서 보지 젖은 것도 다 들켜버린 네 여친이, 호텔로 가자는 지부장 말을 거부할 수 있겠어?”
“…….”
“너 같이 소심한 마조 새끼들은 잘 모르겠지만… 지부장 같은 남자는, 옆에 있는 여자가 자기 거라는 걸 과시하려고 하거든.”
“…….”
“호텔 로비에 들어가자마자 남들이 보던 말던, 어깨에 팔 두르고. 한 손으로 가슴 꽈아악, 쥐고… 주무르고.”
눈을 질끈 감았다.
의사가 하는 말대로 선명하게 그려지는 망상을 억누르기 위해 천천히… 숨을 내쉰다.
“체크인하는 동안에도 주물주물. 직원이랑 투숙객이 보는 앞에서 이건 지부장 여자라고 확실하게 알려주는 거지.”
“…….”
“밀착 경호는 맞네. 엉덩이가 단단한 허리에 꽉 눌려서 질싸 당하는 것도 아무튼 밀착이니까.”
심장이 미세하게 움찔, 떨린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깊은 숨이 오고 간다.
지부장 밑에 깔려 침대 시트를 부여잡은 은지와, 그런 은지의 안쪽에 처박혀 꿈틀대며 정액을 쏟아내는 매튜 씨의 자지가 보이는 것만 같다.
“후… 하아. 이제, 그만….”
“자. 어때요? 망상, 반응 있어요?”
“그걸 지금… 마, 말이라고….”
“그럼 그렇지. 여친이 허접하게 따라해봤자 효과가 얼마나 있겠어? 끽해야 하룻밤이지 뭐.”
피식, 웃음을 흘리면서 의사가 손에 든 노트에 무언가를 휘갈긴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 그렇게 말을 하니까 반응이 오는 건 당연한 거죠…!”
“틀렸어. 방금 내 말을 끊지도 못하고 가만히 앉아서 듣기만 했죠?”
“…그런데요?”
“망상에 압도된 거야. 굳이 내가 말해준 이야기 때문이 아니라, 뭔가 트리거만 있으면 언제든지 그렇게 될 수 있었다는 거지.”
분명 은지가 어제 해준 말들도 나에게는 충분히 자극적이었다.
보여준 사진들 역시 따끔한 괴로움이 섞인 쾌감을 은은하게 안겨주었고.
…하지만, 이 여자가 했던 것보다는 분명 어딘가 어설프고 부족했다는 차이 역시 사실이다.
“저는… 어제 같은, 그리고 방금 같은 자극을 일부러 받을 생각 없습니다.”
“이유는?”
“특성에 내성이 있으니까요. 앞으로 점점 더 심한 자극으로 망상을 잠재워야 하는데.”
“음.”
“오늘 여기 온 것도 당신이 권하는 과격한 방식이 아닌, 다른 방법을 구해보려고 왔다고요.”
“왜 내가 과격한 방식만 사용한다고 생각하는 거지?”
들고 있던 노트를 탁- 소리가 나게 덮는 의사.
“효과가 미미할 뿐이지, 자극이 적은 치료나 검사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뭔데요?”
“지금 상태로는… 제일 먼저 수면 검사. 뇌파랑 호흡이 망상 진행 중일 때와 얼마나, 어떻게 다른 지 봐야 해.”
“…….”
“그래야 요구대로 저자극 위주의 치료를 알맞게 처방해줄 수 있으니까.”
잠시 고민을 해본다.
이 여자의 말을 믿어도 될 지.
하지만 생각해보면 수면 검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잠만 잘 뿐인데 내가 너무 의심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 그렇지만 이 여자는 의심하고도 남을 정도로 충분히 괴상해.
“…잠깐만요.”
“음?”
“전화 좀 한 번 하고요.”
휴대폰을 꺼내서 은지에게 전화를 걸어본다.
통화 연결음이 한 번, 두 번… 끝나지 않고 반복된다.
바쁜가? 그럼 매튜 씨에게 전화를….
“많이 바빠 보이네? 여자친구.”
“…….”
“바쁜 건 나도 마찬가지인데. 바쁜 이유는 좀 다르겠지만.”
…됐다. 난 어차피 두 사람을 믿으니까.
내가 아무 부탁도 하지 않았으니,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