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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EP0078-0073화-엘렌브룩


“자기 체면과 가문의 이름만 챙기던 놈들이 모여서 뭘 할 수 있었겠습니까.” ​ 게르하르트는 노골적인 경멸을 드러내며 혀를 찼다. ​ “입으로는 공왕가에 대한 충성을 떠들었지만 정작 자기 목숨과 재산이 걸리자 가장 먼저 달아난 자들입니다. 그런 놈들이 공주님을 앞세운다고 한들 달라질 건 없었겠지요.” “……할아범.” ​ 엘레노아는 옛 가신들을 신랄하게 깎아내리는 게르하르트를 보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 “그런 오합지졸들이 며칠 전부터 이곳에 귀한 손님이 찾아올 거라고 떠들어댔습니다. 로엔덤의 압제에서 벗어날 길을 열어줄 분이라고 말입니다.” ​ 게르하르트가 엘레노아를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 “그게 공주님이실 줄은 몰랐습니다. 기다리던 사람이 약속한 때가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는다며 초조해하더니, 자기들끼리 모여 무언가를 쑥덕거리기 시작하더군요.” ​ 그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 “그러다 어느 날 주동자 다섯 놈 모두 반란을 꾀했다는 죄목으로 광장에 매달렸습니다. 뒤늦게 나머지 놈들의 행방을 수소문해봤지만 살아남은 자들은 이미 전부 모습을 감춘 뒤였지요.” “그럼 할아범은 괜찮아?” ​ 엘레노아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게르하르트를 바라봤다. ​ “그자들과 접촉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할아범도 위험해질 수 있잖아. 더군다나 여기가 접선지라는 건 할아범도….” “로엔덤은 이런 늙은이 따위에는 관심도 없는 모양입니다.” ​ 게르하르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었다. ​ “공왕가의 전속 장인이었다고는 해도, 지금은 대장간 한구석에서 망치나 두드리는 노인일 뿐이니까요.” ​ 엘레노아는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했지만 더는 묻지 않았다. 대신 막막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 “어떻게 할까?” ​ 내가 묻자 엘레노아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언제나 해결책을 찾아내던 그녀도 이번만큼은 뚜렷한 답을 내놓지 못한 모양이었다. 몸 옆으로 늘어뜨린 손이 아주 조금 떨리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그 손을 붙잡았다. 엘레노아가 놀란 듯 나를 바라봤다. ​ “천천히 생각해도 돼.” ​ 내 말에 굳어 있던 그녀의 손가락에서 힘이 빠졌다. 그러고는 오히려 내 손을 마주 쥐었다. 우리 둘을 잠시 바라보던 게르하르트가 입을 열었다. ​ “두 분은 묵으실 곳이 있습니까?” “없어.” ​ 엘레노아가 힘없이 대답했다. 잠시 침묵하던 그녀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할아범. 혹시 제도로 가는 마차를 구할 수 있을까?” “돌아가시려는 겁니까?” ​ 게르하르트의 반문에 엘레노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그들이 모두 반란죄로 처형당했다면 이미 끝난 일이야. 지금 우리가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없어.” ​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 ​ “단신으로 로엔덤을 찾아가 사람들을 괴롭히지 말라고 할 수도 없어. 오히려 가신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걸 명분으로 나까지 구속하려 들겠지.” ​ 엘레노아는 무기력한 자신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한숨을 푹 쉬었다. “하아….” “공주님.” “그리고….” ​ 엘레노아는 잠시 말을 흐렸다. 그러다 나를 한 번 바라본 뒤,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 “지금 내게는 지나간 과거보다 소중한 게 있으니까.” ​ 그녀는 애써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 “발테른의 사람들이 나를 원망하더라도, 과거에 얽매여 지금 가진 것들까지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아. 날 비겁하다고 욕해도 돼. 아니, 비겁한 게 맞아. 한때 내 백성이었던 자들을 저버린 망국의 공주니까….” ​ 게르하르트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엘레노아를 바라봤다. 이윽고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이해합니다. 공주님께서 돌아오셨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책임을 짊어지실 필요는 없지요. 다만 리자드맨들 때문에 제도로 향하는 마차를 하루 만에 구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마차를 알아보는 동안이라도 제 집에서 쉬시지요.” “정말?” ​ 침울하게 가라앉아 있던 엘레노아의 얼굴에 다시 밝은 기색이 돌아왔다. ​ “그럼 오랜만에 할아범 신세 좀 질게.” ​ 그녀는 곧바로 내 쪽을 돌아봤다. ​ “카엘군도 괜찮지?” ​ 나는 미련과 죄책감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 “물론이야.” ​ 이미 옛 가신단마저 사라진 이곳에서 게르하르트라면 엘레노아가 믿고 의지할 수 있을 테니, 나도 충분히 안심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기분이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다면 하루 정도 머무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 그날 저녁, 우리는 게르하르트의 집에서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따뜻한 음식과 푹신한 침실은 물론이고 엉망이 된 옷을 대신할 새 옷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특히 엘레노아는 게르하르트가 내민 옷을 펼쳐보고 눈을 크게 떴다. ​ “이거…. 예전에 내가 입던 옷이랑 비슷하네.” “아내가 몇 벌 만들어 두었습니다. 공주님께서 살아 계신다면 이제 이 정도로 자라셨을 거라며…. 옛날 생각을 하곤 했지요.” ​ 게르하르트가 그리운 듯 웃었다. 엘레노아가 내게 살짝 귀띔해 준 바에 따르면 그의 아내는 과거 공왕가의 전속 재봉사였다고 한다. 게르하르트가 공왕가의 무기와 장신구를 만들었다면 그의 아내는 공왕가 사람들이 입을 옷을 책임졌다. 부부가 나란히 오랜 세월 공왕가를 섬겨 온 셈이었다. ​ “어때, 카엘군?” ​ 게르하르트가 건네준 드레스로 갈아입은 엘레노아가 내 앞에서 가볍게 빙그르르 돌았다. 풍성한 치맛자락이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부드럽게 퍼졌다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예전에 입던 옷과 비슷하다는 엘레노아의 말처럼, 단정하면서도 기품이 느껴지는 드레스였다. 무엇보다 엘레노아에게 무척 잘 어울렸다. ​ “……예뻐.” ​ 한참을 바라보다 겨우 내뱉은 말에 엘레노아가 환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한때 한 나라의 공주였던 여자가 지금 내 앞에서 드레스를 입고 빙글빙글 돌며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 “허허…. 여전히 아름다우시고 참 잘 어울리십니다.” 게르하르트의 칭찬에 엘레노아가 치맛자락을 살짝 내려다봤다. ​ “이런 기분을 다시 느끼게 될 줄은 몰랐네.” ​ 그녀는 옷자락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린 뒤 게르하르트를 향해 미소 지었다. ​ “고마워, 할아범. 그런데 할멈은 어디 있어?” ​ 게르하르트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목이 타는 듯 탁자 위의 잔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 “딸아이의 집에 가 있습니다.” “딸?” “예. 웬 놈팡이 같은 녀석과 결혼해서 살고 있지요. 저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데, 아내는 딸이 보고 싶은지 틈만 나면 찾아가곤 합니다.” ​ 게르하르트는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러다 문득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 “남자라면 그래도 공주님 곁에 계신 이 듬직한 기사님 정도는 되어야지요.” ​ 갑작스러운 칭찬에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멋쩍게 웃었다. 저녁 식사 시간에는 자연스럽게 옛이야기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게르하르트는 공왕가 시절 엘레노아가 궁전에서 얼마나 많은 사고를 치고 다녔는지, 내가 모르는 이야기들을 하나씩 들려줬다. ​ “그만해, 할아범! 카엘군은 더 들으면 안 돼에!” ​ 엘레노아가 나를 노려봤지만 이미 늦었다. 나는 웃음을 참느라 고개를 숙였고 게르하르트는 오히려 신이 난 듯 다음 이야기를 꺼냈다. 그렇게 우리는 오랜만에 마음 편한 저녁 식사를 즐겼다. 식사가 끝난 뒤, 게르하르트는 우리를 침실까지 안내했다. ​ “오늘 밤은 푹 주무십시오. 내일 당장 제도로 향하는 마차를 알아보겠습니다.” “응. 고마워, 할아범.” ​ 엘레노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 “그리고…. 미안해.” ​ 게르하르트는 무슨 뜻인지 알고 있다는 듯 웃었다. ​ “개의치 마십시오.” ​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나와 엘레노아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닫힌 문을 바라봤다. 그러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마주 보며 작게 웃었다. 엘레노아는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 “너무 오랜만에 옛날 이야기를 해서 그런가. 기분이 조금 좋아졌어.” ​ 입가에는 미소가 남아 있었지만, 곧 표정이 어두워졌다. ​ “그래서 오히려 죄책감이 들어. 지금도 누군가는 로엔덤 때문에 고통받고 있을 텐데…, 나만 이렇게 웃어도 되는 건가 싶어서.” ​ 나는 그녀의 곁에 앉아 굳은 어깨를 천천히 어루만졌다. ​ “세상의 모든 일을 네 탓으로 돌리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엘레노아.” “카엘군….” ​ 엘레노아가 물기 어린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맞물렸다. 왠지 모르게 이대로 입을 맞추게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나도 모르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려던 순간이었다. ​ “하아암….” 엘레노아가 갑자기 크게 하품하며 두 팔을 위로 뻗었다. ​ “미안, 카엘군. 내가 너무 피곤했나 봐.” “괜찮아. 계속 긴장하고 있었으니 그럴 만해.” ​ 나는 아쉬움을 감추며 침대를 가볍게 두드렸다. ​ “오늘은 일찍 자자. 제도로 돌아가면 로엔덤의 행동을 조금이라도 제약할 방법이 있는지 찾아보면 돼.” “으응….” ​ 엘레노아는 어딘가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나도 뒤늦게 피로가 몰려왔다. 우리는 거의 동시에 침대에 몸을 뉘었다. 이상할 만큼 눈꺼풀이 무거웠다. ​ “옷… 갈아입어야 하는데….” ​ 엘레노아는 희미하게 중얼거리다가 이내 눈을 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런 그녀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곧 나 역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 ​ * * * ​ ​ ​ ​ ​ 덜컹! 덜컹! ​ 갑작스러운 소음과 진동에 눈을 떴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어딘가로 옮겨지고 있다는 것만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무언가가 몸을 구속하고 있었다. 도대체…? ​ “엘레노아!” ​ 나는 다급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 끼이익―! ​ 그때 내 목소리를 들은 것처럼 머리 위에서 나무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곧이어 닫혀 있던 덮개가 열리며 쏟아진 햇빛이 눈을 사납게 찔렀다. 나는 눈살을 찌푸린 채 고개를 들었다. 눈부신 빛 너머로 어딘가 낯익은 얼굴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일어났네.” ​ 길게 늘어진 보랏빛 머리카락과 같은 색의 눈동자. 볼프람과 함께 있던 여자, 세레나…. 그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엘렌브룩에 도착한 걸 환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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