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EP0076-0071화-슬럼가의 술집 (수정)
멀리 보이는 발테리아의 성벽은 칙칙하기 그지없었다.
잦은 비를 오랫동안 맞아 온 탓에 회색 석벽 곳곳에는 이끼가 잔뜩 끼어 있었고, 마치 오래된 유적 같은 느낌이 들었다.
비가 내리면 길이 질척거리고, 햇빛이 제대로 들지 않는 골목은 대낮에도 어둡고 위험하다고 했던 발테른 공국의 옛 수도 발테리아….
엘레노아의 말대로 공국의 수도라고 하기엔 너무 음울한 곳이었다.
“음….”
잠깐 주위를 둘러보다가 성문 위로 눈길이 향했다.
한때 공왕가의 문장이 있었을 성문 위에는 로엔덤의 문장이 대신 걸려 있었다.
신의를 저버린 자신들의 행동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발테른의 상징을 짓밟듯 덧씌운 문장.
그 역겨운 상징이 비에 젖은 채 바람을 따라 느리게 흔들렸다.
엘레노아는 그 깃발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만 봤다.
“엘레노아. 괜찮아?”
“응. 괜찮아.”
담담하게 얘기하는 그녀의 대답과 달리 그녀의 몸은 그리 온전치 못햇다.
며칠 동안 숲과 비바람을 헤치고 온 탓에 옷 곳곳이 찢어지고 진흙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나마 도중에 운 좋게 발테리아로 가는 마차를 얻어 탔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아직도 길 위를 헤매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이곳이 발테리아야. 로엔덤 후작가의 도시. 딱히 변한 건 성벽 위의 깃발말곤 없네.”
엘레노아가 낮게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고향에 돌아온 사람의 반가움이 조금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분노에 차 있는 것도 아니었다.
너무 오랜 시간이 흐른 탓일까….
그저 낯익은 풍경을 확인하듯 담담하게 도시를 바라볼 뿐이었다.
나도 그녀를 따라 한동안 도시의 전경을 물끄러미 살펴보다가 성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발테리아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병사들에게 검문을 받고 있었다.
병사들은 사람과 짐을 생각보다 꼼꼼하게 살폈다.
지금처럼 제복이 찢어지고 진흙투성이가 된 상태로 다가간다면 괜한 의심을 살 가능성이 컸다.
“어떻게 할까?”
엘레노아는 잠시 성문을 살펴보다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딱히 좋은 목적으로 찾아온 건 아니잖아. 정문으로 들어갔다가 로엔덤에게 우리가 왔다는 사실만 알려줄 필요는 없지.”
“그럼?”
“성벽을 넘자.”
엘레노아가 당연하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
“카엘군이 활약할 시간이야.”
우리는 성벽 주변을 살핀 뒤 해가 완전히 저물 때까지 기다렸다.
어둠이 내려앉고 성벽 위를 순찰하는 병사들의 모습이 희미해졌을 무렵, 나는 엘레노아 앞에 등을 보이며 몸을 낮췄다.
그녀가 익숙하게 등에 올라타 두 팔로 내 목을 감쌌다.
“카엘군. 잘 부탁할게!”
아까 전까지의 가라앉은 모습과 달리 목소리가 한결 밝아져 있었다.
“한 번에 이런 낡은 성벽 따위 넘어버려!”
“말은 쉽지….”
등 뒤로 전해지는 가슴의 푹신한 감촉에 얼굴이 조금 달아올랐다.
“카엘군. 지금은 여기에 집중해줘. 나중에 실컷 만지게 해줄테니까…!”
“크흠. 엘레노아. 조용히. 들키겠어.”
“헤헤.”
나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엘레노아의 허벅지를 단단히 받쳐 들고, 성벽 위를 올려다봤다.
“꽉 잡아.”
“응!”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다리에 마력을 집중했다.
성벽 위를 오가는 횃불의 움직임을 살피며 미래시를 통해 순찰병들의 동작을 살펴봤다.
그리고 빈틈이 생겼을 때….
탁!
다리에 모아둔 마력을 한꺼번에 터뜨리며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후우!”
단숨에 넘기에는 조금 높은 성벽이었다.
일단은 성벽 중간쯤에 튀어나온 돌 틈을 한 손으로 붙잡아 매달렸다.
“다시 갈게. 꽉 잡아.”
“응.”
성벽 중간에서 곧장 성벽 위를 넘어 반대편으로 몸을 날렸다.
안쪽 벽면 중간쯤에 튀어나온 돌을 붙잡아 한 차례 속도를 죽인 뒤, 아래쪽 골목으로 뛰어내렸다.
착!
두 발이 축축한 바닥에 닿으며 무릎과 허리에 충격이 전해졌다.
나는 자세를 낮춘 채 잠시 주변을 살폈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행히 들키지 않은 것 같았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성 안의 모습을 찬찬히 바라봣다.
성벽 안쪽의 풍경은 밖에서 보았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조금 이상한 점이 있다면, 한밤중이라고는 해도 동남부에서 손꼽히는 도시라면 늦게까지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을 법했는데….
돌아다니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한적하다기보다는 인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아 오히려 기묘했다.
“으으…….”
등 뒤에서 엘레노아가 앓는 소리를 냈다.
그녀는 내 어깨를 짚으며 조심스럽게 바닥으로 내려왔다.
두 발이 땅에 닿자마자 허리를 뒤로 젖힌 채 주먹으로 등을 두드렸다.
“카엘경. 아주 멋진 착지였어. 오호호…….”
엘레노아는 억지로 우아한 웃음소리를 흉내 냈다.
“덕분에 공주의 등허리가 전부 부러진 것 같지만 말이야.”
“미안. 최대한 조심한 건데.”
“사실 카엘군의 배려는 잘 느꼈어! 마지막에 날 위해 속도를 줄여줬잖아.”
그렇게 말하면서도 엘레노아는 한동안 허리를 두드리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잠시 뒤, 엘레노아는 앓는 소리를 내며 허리를 바로 세웠다.
“끄응. 이제 좀 나아졌어. 아직 조금 욱신거리긴 하지만 걸을 수는 있어.”
우리는 목소리를 낮춘 채 어두운 골목 안쪽으로 들어갔다.
당장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며칠 동안 쌓인 피로를 풀고, 넝마가 된 옷부터 정비해야 했다.
대로변에 있는 번듯한 숙소를 찾는 것은 피하는 편이 좋았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머물 만한 곳이 있어?”
내 물음에 엘레노아가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슬럼가 쪽으로 가면 있을 거야. 돈이 부족한 용병들이나 신분을 숨기려는 사람들이 이용하던 숙소가 있었던 걸로 기억해.”
“가본 적 있어?”
“어릴 때 호위 기사들을 따라 몰래 돌아다니다가 한두 번 정도.”
엘레노아는 조금 자신 없는 표정으로 골목 너머를 바라봤다.
“오래전 일이라 길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찾을 수 있을 거야.”
“그럼 안내를 부탁할게.”
“공주님만 믿으라고!”
엘레노아를 따라 좁은 골목을 몇 차례 꺾어 들어가던 중, 길 한쪽에 낡은 천 조각들이 버려져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중 비교적 깨끗한 천을 골라 먼지를 털어낸 뒤 엘레노아와 내 몸을 둘렀다.
엘레노아는 자신의 몸을 감싼 천을 내려다보다가 작게 웃었다.
“이제 정말 수상한 사람들이 된 것 같네.”
“적어도 제국 기사처럼 보이진 않잖아.”
“그건 확실해.”
우리는 서로의 어설픈 차림을 한 번 확인한 뒤, 다시 발테리아의 어두운 골목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슬럼가에 가까워지자 그제야 사람들의 모습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골목 어귀와 건물 벽 아래에 기대앉은 이들이 반쯤 널브러진 채 고개만 들어 우리를 바라봤다.
나는 엘레노아를 최대한 가리듯 곁에 붙인 채 걸음을 옮겼다.
미래시와 투시를 사용하며 혹시 모를 습격에 대비했지만 당장 위험한 움직임은 느껴지지 않았다.
흔히 슬럼가에서 볼 법한 부랑자나 뒷골목의 건달들과는 조금 달랐다.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날 선 기색이 없었다.
그저 무슨 일이 벌어져도 상관없다는 듯, 힘없이 우리를 바라볼 뿐이었다.
엘레노아도 그들의 모습을 이상하게 여겼는지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상해. 슬럼가가 좋은 곳은 아니었지만, 이렇게까지 기운 없는 곳도 아니었어. 오히려 과할정도로 활기찬 곳이었는데….”
엘레노아는 옛 기억과 현재의 모습을 비교하며 주위를 살피는 듯 했다.
로엔덤은 이 도시에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엘레노아의 뒤를 따라 한동안 골목을 걸었다.
주변을 살피던 엘레노아가 어느 골목 어귀에서 걸음을 멈췄다.
낡은 건물의 창문과 문틈 사이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마 여기인 것 같아.”
가까이 다가가자 조금 전까지의 적막과 달리 안쪽에서 사람들의 목소리와 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엘레노아는 몸을 감싼 천 자락을 더욱 단단히 여민 뒤 내 옆에 바짝 붙었다.
나는 그녀를 반쯤 가리듯 앞에 서서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끼이익
문이 열리는 순간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우리에게 향했다.
그중 몇몇에게서는 묘한 살기와 노골적인 경계심까지 느껴졌다.
하지만 낡은 천을 뒤집어쓴 우리의 초라한 차림을 확인하자 이내 흥미를 잃은 듯 하나둘 시선을 거뒀다.
“흐음…. 손님인가?”
카운터 뒤에 서 있던 험상궂은 남자가 다가왔다.
두꺼운 팔뚝과 얼굴을 가로지른 흉터만 보면 숙소 주인이라기보다는 용병에 가까워 보였다.
그는 우리 앞에 손바닥을 내밀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하루 숙박은 은화 두 개. 식사는 반 개, 술은 한 개. 여자는 세 개.”
나는 안주머니에서 은화 다섯 개를 꺼내 건네주었다.
“숙박과 식사를 준비해줘.”“다섯 개인데?”
“씻을 물과 갈아입을 옷도 필요해.”
“이정도면 충분하겠군.”
나는 몸을 조금 기울여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목소리를 낮췄다.
“품이 넉넉한 여자 옷이 필요해.”
주인은 천을 뒤집어쓴 엘레노아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엘레노아가 내 등 뒤로 조금 더 몸을 숨기자 그는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한 걸로 준비해 주지.”
그는 술잔이 담긴 쟁반을 나르고 있던 꼬마를 불렀다.
“야. 저 둘 방으로 안내해.”
꼬마는 쟁반을 내려놓은 뒤 말없이 우리에게 손짓했다.
안내받은 방은 예상대로 그리 좋지 않았다.
그래도 며칠 동안 길 위를 떠돌았던 것을 생각하면 지붕과 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우리는 문을 잠근 뒤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방 안에 앉아 있었다.
잠시 후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자 조금 전의 꼬마가 빈 통과 낡은 수건을 들고 서 있었다.
그는 빈 통을 바닥에 내려놓은 뒤, 작은 물병으로 뜨거운 물을 몇 번이나 퍼 날라 통에 부었다.
통 안에 김이 피어오를 만큼 물이 차오르자 낡은 수건을 가장자리에 걸쳐두고 말없이 방을 나갔다.
“후우. 이제야 좀 씻을 수 있겠네.”
김이 피어오르며 방 안에 따뜻한 온기가 돌자 그제야 긴장이 조금 풀리는 듯했다.
나는 물통을 두드리며 엘레노아에게 양보했다.
“엘레노아가 먼저 씻어.”
“카엘군은?”
“나는 잠깐 아래에 내려가서 상황을 좀 살펴보고 올게.”
엘레노아는 뜨거운 물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 있지는 마.”
“금방 돌아올게.”
나는 검을 챙긴 뒤 방문을 열고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가자 카운터 안쪽에 있던 주인이 나를 바라봤다.
“식사는 지금 먹을 건가?”
그 말을 듣는 순간 잊고 있던 허기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생각해 보니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은 게 언제인지도 가물가물했다.
나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하지.”
주인은 턱짓으로 빈자리를 가리켰다.
나는 구석에 놓인 자리에 앉아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험상궂은 사내들이 테이블마다 둘러앉아 술을 마시거나 카드를 펼쳐 놓고 도박을 하고 있었다.
조금 전 밖에서 느꼈던 음침한 분위기와 달리, 안쪽은 욕설과 웃음소리로 제법 시끌벅적했다.
슬럼가의 허름한 숙소라기보다는 개척도시에서 용병들이 자주 드나드는 술집에 가까운 분위기였다.
나는 사람들의 대화를 흘려들으며 한동안 내부를 살폈다.
그러다 맞은편 테이블에 앉아 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손에 든 카드를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던 자였다.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 않은 채 시선을 돌리려던 순간,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이, 형씨.”
남자가 손에 든 카드로 빈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한 게임 할래?”
사람 좋은 미소를 지은 채 나를 바라보는 뱀눈의 남자에게서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아카데미 시절, 훈련만 바라보며 살던 나를 도박판으로 끌어들여 한몫 단단히 챙기려 했던 데런이 짓곤 하던 표정과 비슷했다.
물론 그 녀석은 나와 한두 번 게임을 한 뒤, 다시는 이 바닥에 발을 들이지 말라며 비장하게 경고했지만….
그러게 누가 투시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 도박을 하자고 했나.
식사가 나오려면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 있었고 엘레노아도 방 안에서 씻고 있을 터였다.
나는 남아 있는 여행 경비를 대충 가늠해봤다.
조금쯤 불려도 나쁘진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남자의 맞은편에 앉았다.
처음에는 단둘이 카드를 주고받았다.
승패는 적당히 오갔다.
처음에는 동화 몇 닢을 거는 내기로 시작해서 어느 순간 은화로 바뀌면서 판돈이 커졌다.
투시로 살펴본 바로는 아직 별다른 속임수는 쓰지 않고 있었다.
드르륵!
그때 갑자기 의자를 끄는 소리와 함께 두 남자가 옆자리에 앉았다.
“우리도 끼어도 되겠나?”
둘 다 뱀눈의 남자와 비슷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우연히 합석한 척하면서도 서로 눈빛을 주고받는 모습이 뻔히 보였다.
내가 그 정도조차 알아채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제국 기사를 너무 우습게 본 것 같았다.
두 사람이 판에 끼어들자 뱀눈 남자의 손놀림이 달라졌다.
카드를 섞고 나누는 손이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일부러 내 패를 다른 이들보다 한 단계 높게 만들어 아슬아슬하게 이기는 기분을 맛보게 했다.
내게 몇 차례 승리를 안겨 경계심을 풀게 한 뒤, 판돈이 커질 때마다 내 패를 상대보다 한 단계 낮게 만들었다.
결국 큰돈을 걸도록 유도한 뒤 한꺼번에 털어먹으려는 수작이었다.
나는 모르는 척 당해주었고 예정대로 크게 졌다.
뱀눈의 남자는 아깝다는 듯 혀를 차더니 자신이 가져간 동전 중 몇 닢을 다시 내 쪽으로 밀어놓았다.
“아슬아슬했어, 형씨. 이 정도는 남겨줄 테니까 한 판 더 하지?”
그래.
저쪽도 능력 아닌 능력을 쓰고 있으니, 나도 슬슬 능력을 써서 한번 제대로 보여줘야…….
“아, 그리고 가진 돈을 전부 잃어도 걱정할 필요 없어.”
뱀눈 남자의 말이 내 생각을 끊고 끼어들었다.
“다른 걸 걸면 되니까.”
“……그게 무슨 뜻이지?”
“내가 눈썰미가 좀 좋거든.”
그는 상체를 살짝 기울여 내게만 들릴 만큼 목소리를 낮췄다.
“돈이 없으면 네 일행으로 대신해도 돼.”
가늘게 휘어진 눈이 계단 쪽을 향했다.
“아까 잠깐 봤는데, 여자지?”
두근!
심장이 내려앉았다.
“걱정마. 그리 험하게 다루진 않을테니까. 그냥 요즘 발테리아 사정이 어렵거든. 지금 같은 때 발테리아에 온 걸 보니 물정 모르는 외지인 같은데…. 굳이 얘기하자면 창관들이 문을 전부 다 닫아서 물 뺄 데가 없어.”
“그게 무슨…….”
뱀눈의 남자는 왜 모르는 척 묻느냐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뭐긴 뭐야. 네가 데리고 온 여자로 물 좀 빼자는거지. 어차피 이딴 구석까지 그 꼴로 들어온 거 보면 귀한 몸도 아닌데 좀 나눠쓰자고. 달아올라 있는 애들이 많거든. 더도 말고 한 다섯번만 빼자고. 뭣하면 화대로 돈 좀 던져줄테니까.”
그러면서 뱀눈은 같은 테이블에 앉은 다른 두 남자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자. 뭐해. 카드 안받고?”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당연히 거절해야 했다.
카드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난 뒤, 저 뻔뻔한 입을 다시는 열지 못하게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자, 그럼 이번 판은 이 정도로 시작하지.”
뱀눈의 남자가 테이블 중앙으로 동전을 던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내 손에 카드가 들려 있었다.
나는 말없이 투시를 사용해 테이블 위와 남자들의 손에 들린 패를 확인했다.
이번에도 내 패가 가장 약했다.
이대로라면 질 수밖에 없었다.
아니, 지더라도 아직 돈은 남아 있었다.
이번 판만 넘기고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면 된다.
그때 내 옆에 앉은 남자가 자신이 가진 동전을 모조리 앞으로 밀었다.
여기서 패를 접으면 그만이었다.
그저 돈을 조금 잃는 것으로 끝낼 수 있었다.
드르륵.
내 앞에 놓여 있던 동전들이 울퉁불퉁한 테이블 위를 긁으며 중앙으로 밀려갔다.
뱀눈의 남자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오, 형씨. 생각보다 남자다운 구석이 있잖아?”
내가 가진 돈을 전부 걸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진다.
이대로면 그냥 완전히 져버린다.
그럼….
엘레노아는….
“하하! 이번에도 내가 이겼는걸?!”
“젠장.”
양 옆에서 진심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아쉬운 탄식이 들려왔다.
하지만 나는 그저 멍하니 내 카드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이, 형씨. 그렇게 넋 놓고 있을 것 없어.”
뱀눈의 남자가 짐짓 위로하듯 내 어깨를 두드렸다.
“도박이란 원래 따는 날도 있고 잃는 날도 있는 법이잖아. 오늘은 운이 조금 나빴다고 생각해.”
그는 자신이 가져간 돈 가운데 은화 세 개를 집어 내 앞에 던졌다.
짤랑
“그래도 빈손으로 보내면 섭섭하지. 이걸로 술이나 한잔해.”
뱀눈의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정리했다.
함께 판을 벌였던 두 남자도 웃음을 참지 못한 채 그 뒤를 따라 일어나 그와 함께 윗층으로 올라갔다.
나는 테이블 위에 떨어진 은화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은화 세 개.
이곳에 들어왔을 때 주인이 여자를 원하면 내야 한다고 말했던 금액과 정확히 같았다.
이제 그들은 거침없이 내 방으로 들어가서 씻고 있을 그녀를 무참히 유린할 것이다.
새하얀 나신에 걸쳐진 단 한장의 수건을 손쉽게 벗겨버리고 원하는 만큼 주무르고 즐기겠지.
“아….”
똑똑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 해, 형씨. 카드 안 받고?”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남자들은 여전히 테이블에 앉아 있었고, 뱀눈의 남자는 카드 한 장을 내 쪽으로 내민 채 내가 받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어서 카드를 받으라는 듯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마치 그 뒤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사람을 유혹하듯이….
당연히…….
“자, 그럼 이번 판은 이 정도로 시작하지.”
또 받아버렸다.
잠깐….
잠깐만…….
이러면 안되잖아.
방금 심연의 사도가 보여준 미래시를 통해 확인했는데….
그랬는데….
뱀눈의 남자가 동전을 테이블 중앙으로 밀어 넣었다.
다시 판이 시작됐다.
카드가 한 장씩 돌아가고, 판돈은 내가 보았던 미래와 똑같은 흐름으로 불어났다.
이윽고 선택해야 할 순간이 찾아왔다.
가진 돈을 전부 걸거나 여기서 패를 접고 일어나거나….
나는…….
쿵!
커다란 맥주잔이 테이블 한가운데에 세차게 내려꽂혔다.
잔 안의 거품이 넘쳐 카드와 동전 위로 흘러내렸다.
“오늘 판은 여기까지야.”
험상궂은 주인이 무표정한 얼굴로 남자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뱀눈의 남자는 잠시 그를 올려다보다가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쯧. 그래, 그래. 알았다고.”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카드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함께 있던 두 남자도 아쉬운 표정으로 의자를 밀어냈다.
뱀눈의 남자는 떠나기 전 은화 한 닢을 내 쪽으로 튕겼다.
짤랑
“나중에 생각이 바뀌면 얼마든지 우리 방으로 와.”
그가 계단을 가리키며 빙긋 웃었다.
“2층에서 제일 안쪽 방이니까. 아 물론 올 때 우리 물 빼줄 여자도 잊지말고.”
“썩 꺼져.”
주인의 차가운 말에 뱀눈의 남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무섭기도 하지.”
그는 함께 있던 남자들과 낄낄거리며 계단을 올라갔다.
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주인이 이번에는 나를 지긋이 노려봤다.
“외지인이면 괜한 분란 일으킬 짓 하지마.”
낮고 거친 목소리가 이어졌다.
“적당히 쉬다가 날이 밝으면 빨리 꺼져.”
주인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테이블 위의 맥주잔을 집어 들고 다른 자리로 향했다.
나는 말없이 눈앞에 놓인 접시를 바라봤다.
갓 나온 음식에서는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접시를 들고 계단을 올라갔다.
방문을 열자 따뜻한 수증기와 함께 엘레노아의 모습이 보였다.
아직 마르지 않은 갈색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닦던 그녀는 나를 발견하자 환하게 웃었다.
“카엘군?! 나를 위해 가져와준거야?”
그녀는 방금 전까지 아래층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짐작조차 못했을 것이다.그렇기에 이렇게 환한 미소로….
사랑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나를 반겨 주겠지.
하지만….
내 뒤에 그 남자들과 함께 올라왔다면….
그때도 그녀는 나를 사랑해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