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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EP0072-외전-공주의 유년


발테른 공왕가의 문장이 새겨진 마차가 엘렌브룩의 입구에 멈춰 섰다. 화려한 장식도, 마차 앞뒤를 빽빽하게 둘러싼 호위대도 없이 고작해야 마차 한 대와 호위 기사 몇 명이 전부인 단출한 행차였다. ​ 마부가 문을 열자 가장 먼저 발테른 공왕이 밖으로 나왔다. 뒤이어 공왕비가 모습을 드러냈고 두 사람은 마차 안으로 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이 내민 손을 하나씩 붙잡고 어린 엘레노아가 마차에서 내려왔다. ​ 세 사람의 복장은 공국을 다스리는 공왕 일가의 차림이라고 보기 어려울 만큼 수수했다. 그들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길가로 모여들었다. ​ “공왕 전하. 올해도 찾아주셨군요.” “올해는 날씨가 좋아서 밀도 과일도 아주 잘 익었습니다.” “공왕가의 축복 덕분이지요.” ​ 마을 사람들은 공왕 부부를 향해 자신들이 수확한 것들을 보여주었다. 갓 수확한 과일이 담긴 바구니를 보며 엘레노아가 입맛을 다시자, 주민 중 한 명이 잽싸게 과일을 천으로 반들거리게 닦아 그녀에게 건넸다. ​ “맛있댜….” ​ 엘레노아는 우물우물 씹어먹으며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 “올해도 풍년이라니 다행이군.” ​ 발테른 공작이 바구니에서 붉게 익은 과일 하나를 집어 들며 웃었다. ​ “내가 아니라 엘렌브룩 사람들이 부지런히 일한 덕분이겠지.” “그래도 공국이 평안해야 저희도 마음 놓고 밭을 일굴 수 있지 않겠습니까.” ​ 마을의 노인이 공작에게 고개를 숙인 뒤 그 옆에 서 있던 엘레노아를 바라봤다. ​ “공국의 안녕과 공왕가의 번영을 기원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공주님께서도 지금처럼 밝고 건강하게 자라시기를 빌겠습니다.” ​ 주변에 모인 사람들이 저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 “공주님의 앞날에 늘 축복이 함께하기를….” ​ 사람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모이자 엘레노아는 잠시 부모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러다 공왕비가 등을 가볍게 밀어주자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엘레노아는 치맛자락을 양손으로 잡고 궁정에서 배운 대로 무릎을 살짝 굽혔다. ​ “고맙습니다. 올해도 모두 건강해 보여서 기뻐요.” ​ 마을 사람들은 흐뭇한 얼굴로 박수를 쳤다. ​ “저희는 올해도 별장에서 며칠 쉬다가 돌아가겠습니다.” ​ 공왕비가 사람들에게 인사하며 말했다. ​ “불편을 끼치는 일이 있다면 언제든 찾아와 말씀해 주세요.” “불편이라니요. 공왕 전하의 가족께서 찾아 주시는 것만으로도 마을의 영광입니다.” ​ 어른들의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엘레노아는 자꾸만 마을 안쪽을 바라봤다. ​ 낮은 돌담과 나무로 지어진 집들 사이로 익숙한 골목이 보였다. 골목 모퉁이에서는 작은 얼굴 몇 개가 벽 뒤로 숨었다가 다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엘레노아가 공왕비의 손을 살짝 당겼다. ​ “어머니.” ​ 그녀가 골목을 가리키기도 전에 공왕비는 기다렸다는 듯 손을 놓아주었다. ​ “다녀오렴. 대신 저녁 식사 전에는 별장으로 돌아와야 한다.” “네!” ​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엘레노아가 치맛자락을 걷어 들고 달려 나갔다. ​ “너무 멀리 가지 말고!” ​ 뒤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엘레노아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손만 크게 흔들었다. 골목으로 뛰어든 순간, 담장 뒤에 숨어 있던 아이들이 한꺼번에 모습을 드러냈다. ​ “엘리다!” “엘리!” “왜 이렇게 늦게 왔어?” ​ 아이들이 엘레노아를 둥글게 에워쌌다. 궁정에서는 공왕 부부 말고는 아무도 부르지 못하는 그녀만의 애칭이었다. 그러나 엘레노아는 그들의 행동이 익숙한 듯 활짝 웃으며 가장 가까이 있던 아이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 “작년하고 똑같은 날에 왔는데?” “우린 아침부터 기다렸어.” “올해도 며칠 있다가 가는 거지?” “응. 그리고 오늘은 어머니가 저녁 전까지는 마음껏 놀아도 된다고 하셨어.” ​ 그 말이 떨어지자 아이들이 동시에 골목 안쪽으로 달려갔다. 엘레노아도 망설이지 않고 그 뒤를 따라갔다. ​ 아이들은 좁은 골목과 돌담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 흙먼지가 치맛자락에 묻었지만 엘레노아는 신경 쓰지 않았다. 마을을 한 바퀴 돈 아이들은 그대로 숲으로 향했다. 나뭇가지로 수풀을 헤치고 쓰러진 고목을 넘어 산기슭까지 올라갔다. ​ 엘레노아는 아이들이 가리키는 나무 아래에 서서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목에 있는 팔찌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과일이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 “엘리! 그건 반칙이야!” “도구를 쓰면 안 된다는 말은 없었잖아?” ​ 엘레노아가 웃으며 바닥에 떨어지기 직전의 과일을 받아 들었다. 아이들은 잘 익은 것만 골라 옷자락과 주머니에 담았다. ​ 산기슭을 내려온 뒤에는 작은 개울가로 향했다. 나뭇가지를 깎아 만든 낚싯대에 실을 묶고 돌 사이에서 찾은 벌레를 미끼로 달았다. 엘레노아는 신발과 양말을 벗어 옆에 가지런히 놓은 뒤 맨발로 바위 위에 올라갔다. ​ 물고기는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아이들이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물장난을 시작하자 엘레노아도 낚싯대를 내려놓았다. 처음에는 치맛자락이 젖지 않도록 조심했지만 얼굴로 물이 한 번 튀자 곧 두 손으로 물을 퍼 올려 그대로 되갚아주었다. 고요하던 개울가에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퍼졌다. ​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할 무렵, 아이들은 하나같이 엉망진창이 된 모습으로 마을로 돌아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떠들고 웃으며 마을 어귀에 도착했을 때였다. ​ 길 한가운데에 낯선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마차 주변에는 제복을 갖춰 입은 호위 기사들이 늘어서 있었고, 그 앞에는 또래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서 있었다. ​ 풍성한 장식이 달린 상의와 몸에 딱 맞는 바지를 입은 아이는 엘렌브룩의 소박한 풍경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 통통한 얼굴과 둥근 몸집까지….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눈에 띄었다. ​ 남자아이는 엘레노아를 발견하자 옷매무새를 바로잡고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한 손을 가슴에 얹으며 배운 그대로 허리를 숙였다. ​ “발테른의 공주님을 뵙습니다. 로엔덤 가문의 볼프람이라고 합니다.” ​ 엘레노아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코를 찡긋거렸다. 뺨이 간지러웠는지 손등으로 문지르자 말라붙은 흙이 조금 떨어졌다. ​ “우리 아버지를 만나러 왔어?” “아닙니다.” ​ 볼프람은 흙투성이가 된 엘레노아의 모습을 보고 잠시 말을 잃었지만 곧 다시 점잖은 표정을 지었다. ​ “공주님께서 이처럼 외진 곳에 머무시는 동안 적적함을 느끼실까 염려되어, 제가 말벗이 되어 무료함을 달래 드리고자 찾아왔습니다.” ​ 어린아이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지나치게 격식을 차린 말이었다. 엘레노아는 그의 말을 끝까지 들은 뒤 고개를 갸웃했다. ​ “난 괜찮은데?” ​ 그러고는 자신의 뒤에 모여 있는 아이들을 돌아봤다. ​ “여기 친구들이 있거든.” ​ 엘레노아는 마치 대단한 것을 자랑하듯 양손을 허리에 올리고 어깨를 쫙 폈다. 그 모습을 본 아이들도 덩달아 가슴을 내밀며 볼프람을 바라봤다. ​ 볼프람의 시선이 아이들에게 향했다. 젖은 옷과 흙 묻은 얼굴, 제각각 헝클어진 머리를 훑어본 그의 눈썹이 서서히 찌푸려졌다. ​ “공주님께서 저런 천한 것들과 어울리셔서는 안 됩니다.” ​ 엘레노아의 표정이 곧바로 굳었다. ​ “천한 것들이라니?” “천한 평민들과 어울리다 보면 공주님의 품위까지 흐려질 수 있습니다. 저들은 공주님과 함께 놀 자격이 없는 자들입니다.” ​ 엘레노아의 눈썹이 잔뜩 모였다. ​ “내 친구들을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 뒤에 있던 아이들도 참지 않고 한마디씩 거들었다. ​ “맞아!” “엘리는 우리랑 노는 걸 좋아해!” ​ 그러다 누군가 볼프람을 향해 혀를 내밀었다. ​ “뚱땡이가 뭘 안다고 그래!” ​ 아이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볼프람의 통통한 뺨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 “뭐, 뭐라고?” “뚱땡이래요!” “시끄러워!” ​ 볼프람은 발을 구르며 아이들을 노려봤다. ​ “감히 로엔덤 가문의 후계자를 모욕해? 너희 같은 천한 것들은 평생 진흙이나 밟으며 살다가 죽을 거야! 공주님의 옆에 설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마!” ​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멎었다. 엘레노아도 당황한 얼굴로 눈을 크게 떴다. 볼프람은 화를 참지 못한 채 계속해서 모욕적인 말을 쏟아냈다. ​ “당장 공주님 앞에서 사라져! 너희 부모들도 제대로 된 교육조차….” “그러지 마!” ​ 엘레노아가 앞으로 달려들어 두 손으로 볼프람의 몸을 밀었다. 볼프람은 갑작스러운 힘에 중심을 잃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쿵 소리와 함께 땅에 주저앉은 그는 잠시 멍한 얼굴로 엘레노아를 올려다봤다. 이내 얼굴을 잔뜩 찡그리더니 커다란 울음을 터뜨렸다. ​ “으아아앙!” ​ 주변에 있던 호위 기사들이 당황해 곧바로 달려왔다. ​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 기사들은 울음을 멈추지 않는 볼프람을 일으켜 세웠다. 볼프람은 엘레노아와 아이들을 번갈아 노려봤지만 눈물이 가득 고인 탓에 조금도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 결국 호위 기사들은 그를 달래며 마차 쪽으로 데려갔다. 볼프람의 울음소리가 멀어지자 엘레노아는 다시 허리에 양손을 올렸다. 그리고 제법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친구들을 돌아봤다. ​ “봤지?” ​ 잠깐 조용하던 아이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 “공주님 최고야!” “엘리가 이겼어!” “뚱땡이를 한 번에 쓰러뜨렸어!” ​ 엘레노아는 칭찬이 마음에 든 듯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 “너희는 전부 발테른의 백성이잖아.” ​ 아이들이 하나둘 입을 다물고 그녀를 바라봤다. 엘레노아는 조금 전보다 진지한 얼굴로 가슴을 폈다. ​ “그러니까 누가 너희를 괴롭히면 내가 지켜줄게. 내가 공주니까 언제든 너희 편이 되어주겠다고 약속할게.” ​ 아이들은 서로 눈을 마주봤다. 그러다 누군가 두 팔을 번쩍 들었다. ​ “공주님 만세!” “발테른 만세!” “엘리 만세!” ​ 아이들이 엘레노아의 주위를 빙빙 돌며 목청껏 외쳤다. 엘레노아는 두 손을 허리에 얹은 채 만족스럽게 눈을 감았다. 마치 정말로 수많은 백성의 찬사를 받는 위대한 공주라도 된 것처럼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 그때 한 아이가 등 뒤에 숨기고 있던 손을 슬쩍 엘레노아의 얼굴로 가져갔다. 살포시 쥔 주먹 안에는 개울가에서 잡아온 작은 개구리가 얌전히 앉아 있었다. 아이는 웃음을 참으며 개구리를 엘레노아의 코 위에 살며시 올려놓았다. ​ “응…?” ​ 축축하고 차가운 감촉이 코에서 느껴지자 엘레노아가 의아한 얼굴로 눈을 떴다. 바로 눈앞에서 개구리의 둥근 눈과 마주친 순간, 엘레노아의 녹빛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 “꺄아아악!” ​ 엘레노아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펄쩍 뛰었다. 개구리는 바닥으로 떨어져 풀숲으로 뛰어들었고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 사방으로 흩어졌다. ​ “도망쳐!” “공주님이 화났다!” “잡히면 죽었어!” “거기 서!” ​ 엘레노아가 치맛자락을 걷어 올리고 아이들을 쫓아 달려갔다. ​ “잡히기만 해 봐! 전부 가만 안 둘 거야!” ​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마을 곳곳으로 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장 느린 아이 하나가 엘레노아에게 붙잡혔다. ​ “잡았다!” “으아악! 살려주세요. 공주님!” ​ 엘레노아는 도망치려는 아이의 등을 붙잡고 놓아 주지 않았다. 붙잡힌 아이가 과장되게 비명을 지르자 주위에 숨어 있던 아이들이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아이들이 골목을 뛰어다니는 사이, 마을 너머로 해가 천천히 저물어갔다. ​ “아아악! 살려줘!” ​ 붙잡힌 아이의 과장된 비명과 주변에서 터지는 웃음소리가 노을 진 골목을 가득 채웠다. ​ ​ ​ ​ ​ * * * ​ ​ ​ ​ ​ ​ 과거 발테른 공왕가의 별장이 있던 자리에는 이제 로엔덤 후작가의 별장이 들어서 있었다. 어린 엘레노아가 가족과 함께 머물렀던 소박한 건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값비싼 대리석과 화려한 조각으로 치장한 저택이 엘렌브룩을 내려다보듯 자리 잡고 있었다. “아아악! 살려줘!” ​ 그 저택 안쪽, 빛조차 제대로 닿지 않는 지하실에서 희미한 비명이 새어 나왔다. 테라스에 앉아 마을의 풍경을 감상하던 볼프람은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에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 “집사장.” “예. 후작님.” ​ 뒤에 서 있던 집사장이 허리를 숙였다. ​ “마굿간지기에게 전해. 너무 소란스럽게 만들지 말라고.” “알겠습니다.” ​ 집사장은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 “그래서 진행하던 일은 어떻게 됐지?” “아무래도 미끼를 문 듯합니다.” ​ 그 말을 들은 볼프람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 “생각보다 오래 걸렸군.” ​ 그는 손가락으로 찻잔의 가장자리를 천천히 쓸었다. ​ “마굿간지기에게 조만간 새 동물을 받을 준비를 해 두라고 전해. 말과는 달리 젖소니까 잘 다뤄야 한다고 말이지.” “그리 전하겠습니다.” ​ 집사장의 대답에는 한 치의 동요도 없었다. 볼프람은 남아 있던 차를 천천히 비운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 테라스 아래로 펼쳐진 마을은 평온해 보였다. 그 풍경을 내려다보던 볼프람의 머릿속에 오래전 보았던 얼굴들이 떠올랐다. 그때의 당돌한 얼굴들이 지금은 어떻게 망가져 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 볼프람은 집사장을 뒤에 남겨 둔 채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갈수록 공기는 서늘하고 눅눅해졌다. 지하실로 이어지는 철문 앞에 도착하자, 희미했던 비명이 한층 또렷하게 들려왔다. ​ “아아악! 제발……!” ​ 볼프람은 잠긴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기대에 찬 미소를 지으며 지하실의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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