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EP0050-0050화-토벌 작전 6
안쪽에서 들려오는 레오폴트의 목소리에 몸이 살짝 뻣뻣해지며 긴장감이 차올랐다.
순간 레오폴트가 이미 광신도들과 손을 잡았다면 어쩌나 하는 우려가 스쳤다.
하지만 이미 결정을 내린 이상 우유부단하게 망설일 수는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루크레치아가 어떤 위기에 처해 있을지 몰랐으니까.
“전하.”
복도를 지나 안으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레오폴트였다.
그는 안쪽 탁자 앞에 서 있었다.
손에는 여전히 목줄이 쥐어져 있었고 그 곁에는 아까 보았던 황금빛 개가 엎드린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천막 안을 빠르게 훑었다.
침상과 탁자, 정리된 물건들…….
여자는 보이지 않았고 사람 한 명 숨을 만한 곳도 딱히 없었다.
그렇다면 방금 그 신음은 내 착각이었던 건가….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레오폴트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카엘.”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지나치게 태연했다.
“올 줄은 알았다. 다만 생각보다 조금 빠르군.”
“제가 올 거라고 생각한 이유가 뭡니까?”
레오폴트는 손에 쥔 목줄을 한 번 내려다봤다.
“루치아가 이틀 전에 이곳에 왔었으니까.”
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
나는 곧장 그를 노려봤다.
“루크레치아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카엘. 여전히 오만하구나.”
그의 얼굴엔 재미난 걸 발견했다는 듯한 미소가 걸렸다.
아카데미에서 그리고 티몽 백작의 의뢰로 갔던 저택에서도 봤던 그 표정이었다.
“루치아의 행방이 궁금한가?”
레오폴트는 느긋하게 의자에 앉아 목줄을 잡아당겼다.
황금빛 개는 약간 으르렁거리더니 레오폴트가 살짝 눈살을 찌푸리고 다시 목줄을 세게 잡아당기자 곧 고개를 숙이고 레오폴트의 발 밑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레오폴트가 녀석의 몸을 들어 올려 자신의 무릎에 올려놓고 쓰다듬으며 나를 거만하게 쳐다봤다.
“궁금하지 않은 건가? 나를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아라.”
“그야…….”
나는 대답하려다가 문득 레오폴트가 쓰다듬는 개가 어딘가 불편한 듯 낑낑대는 걸 보며 안쓰러운 감정이 들었다.
싫은데도 불구하고 목줄에 채여 억지로 레오폴트에게 안겨 있는 그 모습이 지금의 내 처지와 묘하게 겹쳐 보였다.
하필이면 그에게 루크레치아의 행방을 애원해야 하는 입장이라니…….
“부디 말씀해 주십시오, 전하.”
레오폴트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무릎 위의 황금빛 개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나를 지그시 바라볼 뿐이었다.
“루치아는 변절한 기사들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이 수색조를 습격했다는 것 그리고 본대까지 위험할 수 있다는 말을 내게 전했지.”
“…….”
“그게 전부다. 보고를 마친 뒤에는 다시 떠났다.”
나는 잠시 그를 바라봤다.
“그 말을 정말 믿으라는 겁니까?”
레오폴트의 표정이 아주 조금 굳었다.
“카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고작 평민 주제에 황태자에게 그런 불손한 언행을 하는 것이냐?”
그는 다시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그러고 보니 틸렌의 미궁에 대한 정보를 알아온 공으로 서훈을 받는다고 했던가. 기사 작위라도 받게 되면, 네 처지가 달라질 거라 생각하는 모양이군.”
그 말을 듣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서훈 이야기는 틸렌에서 의뢰 결과를 보고했을 때 오갔던 말이었다.
제국의 황태자가 하루에도 수많은 제국 기사들이 올리는 의뢰 보고들 중 콕 집어, 틸렌에서 있었던 일과 그 뒤에 오간 서훈 이야기까지 알고 있다는 건 이상했다.
매번 마주칠 때마다 마치 우연인 것처럼, 우리에게는 별 관심이 없는 듯 행동하면서도 뒤에서는 계속 정보를 얻고 있었던 것 같았다.
루크레치아를 그저 장난감처럼 대하며 초연한 척했지만 실상 레오폴트는 그녀를 갖길 원하는 게 아닐까…….
나는 이를 악물고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아까 전하와 이야기하던 검은 로브의 자들은 누구입니까?”
레오폴트의 붉은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루크레치아가 말한 광신도들이 아닙니까? 설마 제국의 황태자께서 그런 자들과 손을 잡은 건 아니겠지요.”
순간 황금빛 개의 몸이 움찔했다.
레오폴트가 녀석의 몸을 쥔 손에 힘을 주고 있었다.
개는 낮게 낑낑대며 몸을 비틀었지만 목줄에 붙잡힌 탓에 그의 무릎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레오폴트는 싸늘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감히 나를 의심하는 것이냐?”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노려보며 천막 안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저 레오폴트의 손아귀에 있는 불쌍한 개만이 애처롭게 울어댈 뿐이었다.
-끼잉! 끼잉!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
“제가 본 것만으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만 지부장은 하루종일 보이지 않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로브를 입은 자들과 그 곁에 있던 기사들은 전하께 예를 갖추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레오폴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무엇보다 전하께서도 그들을 달가워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잠시 숨을 골랐다.
“혹시 전하께서도 저들에게 붙잡혀 계신 겁니까?”
레오폴트의 눈빛이 한층 차가워졌다.
“만약 저들이 루크레치아가 말한 광신도들이라면 이미 주둔지는 그들에 손에 넘어갔겠군요. 전하께선 그들의 인질이 된 것 아닙니까? 이대로라면 남부 경계로 들어온 제국 기사들은 누구도 무사히 돌아가지 못할 겁니다. 전하께서도 그런 결과를 바라시는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한동안 레오폴트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지금 그의 얼굴에는 평소처럼 느긋한 미소도, 나를 오만하게 내려다보던 표정도 없었다.
그저 아카데미 복도에 걸려 있던 황제의 초상화처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조금도 읽을 수 없는 얼굴만이 남아 있었다.
“옛 신이란 존재가 있다. 자세한건 굳이 알지 않아도 돼. 그저 이종족이 믿던 신정도로만 생각해라. 그들을 믿는 변절자들이 제국에 존재하지. 아마도 이번 일은 그들이 마련한 함정일 것이다. 평소처럼 벌레마냥 죽어가던 자들이 이런 반격을 할 줄 몰랐기에 당했군.”
“…….”
레오폴트도 옛 신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니….
“지부장은 죽은 게 아니다. 그들의 수장이지.”
레오폴트는 무릎 위의 개를 쓰다듬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아마도 철저하게 함정을 준비한 모양이더군.”
“지부장이…….”
보이지 않던 지부장이 그들에게 당한 게 아니라 처음부터 이번 함정의 핵심에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주둔지가 유독 무사해보였던 것도 이해가 갔다.
아무리 그래도 본대가 습격받았는데 주둔지가 이토록 멀쩡한 게 이해가 안갔다.
지부장이 문을 열고, 들어온 적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을 순식간에 처리했을테지…….
“네가 단순히 루치아를 찾으러 온 것뿐이었다면 나는 너를 저들에게 넘겼을 것이다.”
레오폴트는 느긋하게 의자에 몸을 기댔다.
“하지만 네가 한 말은 내 흥미를 끄는구나. 이 정도 일은 충분히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있다만 좋은 여흥이 되겠어.”
그는 무릎 위의 황금빛 개를 한 번 쓰다듬었다.
“좋다. 너를 도와주마.”
“루크레치아는 정말 무사합니까?”
“걱정하지 마라. 루치아 역시 내 도움을 받아 안전한 곳에 있으니. 그녀가 이곳에 왔을 때부터 이미 주둔지는 그들의 손에 넘어갔다. 만약 내 도움이 없었다면 루치아는 그들의 제물이 되거나 한낱 정액받이가 됐을 것이다.”
“…큭!”
정말 그 말을 믿어도 되는 걸까.
의심은 남아 있었지만 지금으로서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레오폴트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문득 무릎 위의 개를 내려다봤다.
“잠깐 궁금한 것이 있다만, 카엘. 이 개를 어떻게 생각하지?”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황금빛 개를 바라봤다.
녀석은 레오폴트의 손길 아래에서 몸을 조금 움츠리고 있었다.
“……털색이 아름다운 개로 보입니다.”
“그렇지.”
레오폴트가 작게 웃었다.
“나쁘지 않은 개다. 다만 예전에 길들이려 했을 때는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다른 놈에게 꼬리를 흔들더군. 천박한 암캐마냥…….”
레오폴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무릎 위의 개를 내려다봤다.
“내 손을 떠났기에 그냥 놓아줄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자기 분수조차 깨닫지 못하는 짐승에게는 그 사실을 똑똑히 알려 줄 필요가 있지.”
그의 손이 목줄을 잡아당겼다.
황금빛 개가 짧게 낑 소리를 내며 고개를 숙였다.
“다행히 다시 길들이려는 노력을 조금 기울이니 이렇게 내 손 안에 돌아왔더군. 앞으로는 평생 자기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잊지 못하겠지.”
레오폴트는 녀석의 목덜미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아직도 반항기는 남아 있다만…. 한 번 주인을 잊은 짐승은 몇 번이고 되새겨 줘야 순응하는 법이니까.”
나는 그가 왜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지 알 수 없었다.
“…전하. 갑자기 그런 얘기는 어째서…….”
그때 레오폴트가 천막 입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천막에는 그들이 설치한 함정이 있다.”
그의 입가에서 미소가 지워졌다.
“아마도 곧 찾아오겠지.”
그때였다.
천막 바깥에서 여러 사람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레오폴트는 곧장 품 안에서 자그마한 반지 하나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이걸 끼워라.”
나는 잠시 반지를 바라보다가 받아 들었다.
“그리고 저쪽 벽에 붙어 있어라. 그러면 안전할 것이다.”
그가 천막 한쪽을 가리켰다.
“절대 마력은 쓰지 마라. 놈들은 마력을 감지할 수 있다.”
갑작스러운 말에 망설임이 들었다.
하지만 바깥의 인기척은 이미 천막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지금은 레오폴트를 믿는 수밖에 없는 걸까….
결국 나는 반지를 손가락에 끼운 뒤 그가 가리킨 벽으로 다가갔다.
등을 붙이자 천막의 천이 살아 있는 생물처럼 내 몸을 감싸더니 눈 깜짝할 사이 나를 벽 안쪽에 파묻듯 숨겼다.
눈앞에는 얇은 천 너머의 모습만 희미하게 비쳤다.
갑자기 눈 앞이 가려지자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방금 레오폴트가 한 경고 때문에 투시를 사용할 수는 없었다.
상대가 마력을 감지할 수 있다면, 섣불리 능력을 쓰는 순간 내 존재를 들키게 될지도 몰랐다.
나는 그저 얇은 천 너머로 흐릿하게 비치는 천막 안쪽을 가만히 지켜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사람의 그림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전하.”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자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이곳에 누군가 들어온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자를 내놓으십시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 레오폴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지금 누구에게 명령하고 있는지 잊은 모양이구나.”
그의 목소리에는 방금 전까지의 느긋함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나올 생각이라면 네놈들의 제안은 하나도 들을 가치가 없다. 내가 죽는다 해도 황제 폐하가 계시는 한, 너희가 제국을 넘볼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마라.”
천막 안의 공기가 단숨에 차가워진 듯했다.
검은 로브를 쓴 자들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다른 누군가가 한결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 진정하십시오. 날파리 한두 마리가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한들 이미 준비된 계획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는 한 박자 쉬었다.
“전하께서도 그 사실을 너무 늦기 전에 받아들이시길 바랍니다.”
잠시 뒤, 그자의 목소리에 묘한 웃음기가 섞였다.
“밤이 길면 적적하실 텐데. 몸을 데울 사람 하나 정도는 남겨 두겠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 천막 입구 쪽에 낯선 그림자가 하나 더 드리워졌다.
흐릿한 실루엣만으로도 여자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천 너머로 드러난 몸선은 옷을 걸치지 않은 것처럼 낯설게 선명했다.
누굴까….
잠시 불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레오폴트의 말을 믿기로 했다.
루크레치아를 안전한 곳으로 보냈다는 그의 말을.
“너는 누구냐?”
레오폴트의 목소리가 천막 안에 낮게 울렸다.
잠시 뒤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사입니다. 전하.”
여자의 목소리에는 두려움도 강요받고 있다는 기색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
레오폴트가 짧게 숨을 내쉬었다.
“너도 제국 기사면서 제국을 배신한거냐?”
“배신이라니요.”
여자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저는 그저 진실된 주인을 섬길 뿐입니다. 더는 썩어 빠진 제국과 무능한 자들의 명령을 따를 생각이 없을 뿐이지요.”
천막 안에서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오늘 밤만큼은 제가 전하의 몸을 데워 드리겠습니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천막 벽 안쪽에 몸을 숨긴 채 흐릿한 그림자만 바라봤다.
그 말을 들은 뒤에도 레오폴트는 한동안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러다 의자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레오폴트는 여자의 팔을 붙잡은 채 그대로 천막 밖으로 나갔다.
다른 손에는 여전히 황금빛 개의 목줄이 들려 있었고 천 너머로 낮은 개의 그림자가 그 뒤를 따라 끌려가는 모습도 보였다.
여자의 시중을 거부하려는 건가…?
잠시 뒤 안으로 들어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내 예상과 달리 황태자는 여자의 시중을 거부한 건 아닌지, 두 개의 그림자가 바짝 겹친 채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천막 안쪽에서 여자의 격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하으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