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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토벌 작전 3


47화. 토벌 작전 3 “카엘!” ​ 루크레치아의 외침과 동시에 몸이 움직였다. 마법파인 엘레노아를 적의 근접전 안에 그대로 노출시킬 수는 없었다. 나는 곧장 그녀의 앞으로 나서며 검을 들어 올렸다. ​ 그 순간 루크레치아가 손을 뻗었다. 그녀의 등 뒤에 있던 실버 팽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로엔하임 가문의 가보, 실버 팽이 낮게 울며 공터 위를 가로질렀다. “피해!” ​ 앞장서 달려오던 거점조 기사 하나가 외쳤다. 하지만 실버 팽만 놈들을 향해 날아든 것이 아니었다. 루크레치아가 다른 손을 아래로 내리자 적들의 발밑으로 냉기가 빠르게 번져 나갔다. ​ 쩌저적! ​ 축축한 흙바닥 위로 얼음이 넓게 깔렸다. 거점조 기사들 중 빙판에 미끄러지는 멍청한 놈은 없어보였다. 그들은 발끝에 마력을 실은 채 얼어붙은 바닥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전원 검을 들고 있었기에 모두가 육체파일 거라 예상했는데, 보기 좋게 들어맞은 것 같았다. ​ 그리고 그들이 공중에 뜬 순간 엘레노아가 손을 움켜쥐었다. 허공에 퍼져 있던 마력이 가느다란 실처럼 엮였다. 투명한 마력의 실이 공중으로 뛰어오른 기사들의 발목을 동시에 휘감았다. ​ “뭐……!” ​ 엘레노아가 손을 아래로 끌어내렸다. ​ 휙! ​ 두 명은 재빨리 실을 잘라내고 벗어났지만 다른 두 명은 동시에 빙판 위로 떨어졌다. 그러자 허공을 날아가던 실버 팽이 방향을 틀었다. ​ 콰직! ​ 실버 팽이 바닥에 쓰러진 기사의 가슴을 그대로 꿰뚫었다. ​ “로만!” ​ 누군가의 경악이 터져나왔다. 아직 살아 있는 기사가 재빨리 빙판에서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 콰직! ​ 하지만 그보다 더 빠르게 빙판에서 솟구친 얼음 가시가 등을 꿰뚫고 가슴 앞으로 튀어나왔다. 기사는 눈을 크게 뜬 채 몸을 떨며 입에서 피분수를 토해냈다. 이내 그의 몸이 힘없이 널부러졌다. 순식간에 둘이 쓰러졌다. ​ 이제 남은 것은 거점조 기사 둘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 하나. 우리도 셋. ​ 수만 놓고 보면 같아졌다. 적들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하긴 루크레치아와 엘레노아는 아카데미에서 수석을 다투던 기사들이었다. 아카데미에서 가장 치열하게 성적을 가르는 것은 결국 기사끼리의 대련이었고, 둘은 같은 인간, 같은 제국 기사를 상대로 싸우는 데 누구보다 익숙했다. ​ 마물은 대다수가 덩치가 크고 인간보다 훨씬 단단한 육신을 지녔다. 검으로 깊게 베어내도 치명상이 아닌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인간의 몸은 달랐다. ​ 조금만 깊게 베여도 전투를 이어가기 어려웠고, 목이나 심장 같은 급소를 허용하는 순간 그 상처는 곧 치명상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루크레치아와 엘레노아는 그런 약점을 찾아내고 한순간의 빈틈을 죽음으로 바꾸는 데 이골이 나 있었다. ​ 루크레치아가 손을 움켜쥐자 피에 젖은 실버 팽이 다시 허공으로 떠올랐다. 엘레노아 역시 손끝에 새로운 마력을 모았다. 나는 검을 고쳐 쥐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 “젠장! 뭘하고 있는거야!” ​ 여자가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그녀는 양손에 단검을 쥔 채 곧장 달려들었다. 남은 두 기사 역시 방금 전의 당황을 지운 얼굴로 그녀의 양옆을 따라붙었다. 셋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 루크레치아가 손끝을 움직이자 실버 팽이 낮게 회전하며 두 기사의 뒤편으로 돌아갔다. 대검의 궤적을 의식한 놈들이 뒤를 경계하는 순간 전방에서는 차가운 냉기가 바닥을 타고 번졌다. ​ 쩌저적! ​ 얼음이 갈라지며 날카로운 가시가 솟아올랐다. 동시에 엘레노아가 만들어낸 마력의 화살들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들었다. 두 기사는 앞을 막아내면서도 뒤에서 날아드는 실버 팽을 의식해야 했다. 검을 들어 얼음 가시를 쳐내고 몸을 틀어 마력 화살을 피하는 사이 그들의 동작은 눈에 띄게 둔해졌다. ​ 그쪽은 두 사람으로 충분해보였기에 눈 앞의 상대에 집중했다. 그녀는 다른 둘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였다. 낮게 몸을 숙인 채 두 자루의 단검을 들고 내게 파고들었다. 숨을 짧게 들이마시며 미래시를 발동했다. 여자의 모습이 눈앞에서 여러 개로 갈라졌다. 왼쪽으로 파고드는 모습. 오른손의 단검을 던지는 모습. 허리를 낮춘 채 내 다리를 노리는 모습. 서로 다른 가능성이 겹쳐졌다. 실현될 가능성이 낮은 미래부터 하나씩 지우고 그중 가장 현실성 높은 움직임만 골라내려 했다. ​ 그런데 갑자기 미래의 상들 한가운데서 검붉은 기운이 튀어 나왔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 기운은 다름 아닌 나를 오랫동안 괴롭혀 온 옛 신의 기운이었다. ​ 검붉은 기운은 남아 있던 미래의 상들로 빠르게 번져 나갔다. 서로 다른 궤적을 그리던 여자의 잔상들이 하나같이 같은 모습으로 일그러졌다. ​ 팔과 다리의 윤곽이 흐물거리며 녹아내리고 살점 같은 것이 피부 아래에서 꿈틀거렸다. 그리고 인간의 몸의 겉과 속이 뒤집히며 전체가 흐물거리는 살점 덩어리로 변해버렸다. 이윽고 바로 앞까지 다가온 형체가 옆으로 길게 벌어지며 갈라진 몸통 안쪽에서 검은 돌기들이 이빨처럼 드러났다. 그 순간 안쪽에서 검붉은 기운이 짙게 모여 있는 살덩어리가 보였다. 그러나 그건 거의 찰나에 불과했고 어느새 쫙 벌려진 살덩이가 나를 집어삼키듯 감싸버렸다. ​ 순간 미래시가 끊겼다. 여자가 여전히 막 단검을 든 채 내게 달려들고 있었다. 아직은 인간의 모습이었지만 그녀와 나 사이의 거리가 반 정도 좁혀지자 여자의 몸에서 검붉은 기운이 폭발하듯 퍼져 나왔다. ​ “카엘군!” ​ 엘레노아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뒤로 물러서지 않고 맞섰다. 미래시에서 본 갈라진 몸통 안쪽에서 보이던 검붉은 기운이 가장 짙게 응축된 살덩어리. 그게 저 여자의 약점일 가능성이 높았다. 찰나였으나 한번 본 이상 충분했다.​ 여자의 오른발이 바닥을 박찼다. 동시에 그녀의 팔과 옆구리가 축 늘어졌다. 피부 아래에서 살점이 부풀어 오르더니 단검을 쥔 손과 허리가 물에 젖은 천처럼 흐물거리며 옆으로 넓게 펼쳐졌다. ​ 흐물거리는 살덩이가 내 몸을 향해 덮쳐 왔다. 늘어난 살점 끝이 어깨를 스치며 지나가자 차갑고 끈적한 감촉에 등골이 저릿해졌다. 조금만 더 닿았어도 그대로 휘감긴 채 끌려 들어갔을 것이다. ​ 미래시에서 본 것처럼 갈라진 몸통 안쪽이 벌어지며 검은 돌기들이 요동쳤다. 그리고 더 안쪽에 검붉은 기운이 뭉친 살덩어리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곳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 푹! ​ 검끝이 살덩어리를 꿰뚫었다. ​ “끼에에에엑!” ​ 여자의 입에서는 나올 수 없는 기괴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나를 집어삼키려던 살덩이가 일제히 경련했다. 검붉은 기운이 사방으로 튀어 오르고, 흐물거리던 몸이 제멋대로 뒤틀리기 시작했다. 나는 검을 더 깊게 밀어 넣었다. ​ “죽어!” ​ 쾅! ​ 검끝에서 터져 나온 충격이 응축된 기운을 흔들었다. 살덩어리가 터지며 검붉은 기운들이 솟구쳤다. 곧 거대한 살점이 힘을 잃은 듯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고 점점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검붉은 기운이 완전히 흩어지고 나서야 바닥에는 인간의 형체를 간신히 되찾은 여자의 시체가 남았다. 나는 검을 뽑아냈다. 검끝에서 검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 옛 신의 기운. 그것이 왜 저 여자의 몸에서 나온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하나는 분명했다. 변절했다고 알려진 그 두 명의 제국 기사들부터 실종된 기사들, 거기다가 토벌대에 숨어 있던 자들과 이 여자까지……. ​ 모두 옛 신과 관계된 자일 확률이 높았다. ​ “카엘군” ​ 고개를 돌리자 루크레치아와 엘레노아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남아 있던 두 거점조 기사 역시 이미 쓰러져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쪼그라든 여자의 시체로 향했다. 엘레노아의 얼굴이 굳었다. ​ “이 여자는 도대체 뭐죠?” “방금 전 내가 느낀건 옛 신의 기운이었어. 그걸 마치 자신의 힘처럼 다루는 건 처음보는데…….” ​ 루크레치아가 시체 근처에 멈춰 섰다. 그녀는 한동안 검붉은 흔적이 남은 바닥을 내려다보다가 낮게 입을 열었다. ​ “제물이라고 했어요.” ​ 엘레노아가 고개를 들었다. ​ “아…….” “여자를 살려 두라고 했어요. 제물로 바치겠다고.” ​ 제물. ​ “옛 신을 믿는 자들이 따로 있는 걸지도 몰라.” ​ 엘레노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 “교단 같은 거. 사람을 잡아가고 제물을 바치면서…… 옛 신의 힘을 얻는 게 아닐까?” “그럴듯한 얘기야.” ​ 나는 검붉은 피가 묻은 검을 내려다봤다. ​ “토벌대 안에 숨어 있던 놈들도 이 근처에서 움직이는 변절 기사들도 같은 놈들이라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위험할지도 몰라. 그보다 이제 어떻게 해야하지? 다른 수색조가 오길 기다리거나 아니면 다른 임시 야영지로 이동해야할까? 신호탄은 어떻게 하지?” 원래 계획대로라면 습격당하면 신호탄을 통해 지원을 부르는 게 원칙이었다. 하지만……. “신호탄은 쓸 수 없을 것 같아.” 엘레노아가 고개를 저었다. “지부장의 경고가 현실이 된 이상 신호탄을 보고 온 자들도 안심할 수 없어. 오히려 우리가 찾아가는 거라면 몰라도 저들이 오길 바라며 주도권을 내주는 건 위험해.” ​ 그녀의 말은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그럼 본대는 안전할까?​” “본대도 안심할 순 없어요.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 같네요.” “카엘군. 어떻게 할 거야?” ​ 엘레노아가 주변의 어두워진 숲을 바라보며 물었다. ​ “본대로 돌아갈까? 아니면 다른 수색조가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릴까?” ​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여기를 떠난다면 돌아오는 수색조가 아무것도 모른 채 다른 함정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계속 머문다면 본대에 이 사실을 알리는 시간이 늦어진다. 루크레치아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눈을 내리깔았다. ​ “제가 본대에 가서 보고할게요.” ​ 나는 그녀를 바라봤다. ​ “루크레치아 혼자?” “카엘은 엘레노아와 여기 남아 계세요.” ​ 루크레치아는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그들이 이번 토벌대를 노린 거라면 결국 가장 큰 전력이 모인 본대를 노릴 가능성이 높아요. 황태자가 있는 곳이니까요.” “그럼 더더욱 셋이 같이 본대로 가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요.” ​ 루크레치아가 짧게 고개를 저었다. ​ “저희가 모두 본대로 돌아갔을때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적의 규모가 커서 감당할 수 없으면 오히려 허사가 되요. 거기다가 이 소식을 모르는 수색조들은 계속 흩어진 채 수색을 이어갈테니 아무런 도움조차 못 줄거에요.” ​ 그녀의 시선이 어두운 숲길을 향했다. 어느새 엘레노아가 진중한 표정으로 그녀의 말을 이어받아 설명을 이어나갔다. ​ “루크레치아의 말이 맞아. 카엘군. 그 상태로 이처럼 수색조가 습격을 받으면 각개격파당할 거야. 적어도 이곳에 남아 돌아오는 수색조들에게 사실을 알리고 다른 야영지의 인원과 합류해서 가능한 한 전력을 모아야해.” 루크레치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카엘. 그러니 저는 본대로 가서 황태자와 지휘부에 보고할게요. 카엘과 엘레노아는 여기서 다른 수색조를 기다려 주세요.” “본대가 이미 습격당해서 위험할 수도 있어.” ​ 내 반박에 엘레노아가 고개를 저었다. ​ “그래도 황태자가 있는 이상 아직까진 안전할거야. 이들도 처음부터 대놓고 공격해온 건 아니니까. 아무래도 어느정도 간을 보고 있는 상태겠지. 촌각을 다투는 상황일지도 몰라.” ​ 그 말이 틀리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하필이면 그녀가 황태자에게……. ​ 냉정하게 생각한다면 결국 그녀가 가는게 맞았다. 엘레노아는 마법파라 근접전을 펼치는 건 어려우니 혼자 보낼 수 없었고, 나와 엘레노아가 본대로 간다면 혹시라도 재차 습격이 왔을때 루크레치아 혼자 감당하기 어려울 수도 있었다. 그리고……. ​ 루크레치아는 나보다 더 강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이유가 된다. 결국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 “걱정말아요. 카엘. 보고하고 곧장 돌아올테니까.” “루크레치아…….” “자자. 두 사람. 그렇게 바라만 있지 말고 시간 없잖아” “어어…!” ​ 어느새 엘레노아가 나와 루크레치아의 등을 밀며 가까이 붙여주었다. 결국 나는 루크레치아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 잠깐 닿았다 떨어진 입술 끝이 아쉬웠지만 지금은 붙잡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루크레치아는 내게서 한 걸음 물러난 뒤 평소처럼 차분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 “조심히 다녀와.” ​“루크레치아. 조심히 다녀와요. 카엘군하고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금방 다녀올게요.” 그 말만 남긴 채, 그녀는 본대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나는 멀어져가는 루크레치아를 보며 엘레노아의 손을 잡았다. 내 불안함을 달려주려는 듯 엘레노아는 내 손을 나보다 더 꽉 잡아주었다. ​ 그리고 그날 밤이 지나고 아침 해가 떠올랐고 또다시 밤이 찾아왔을 때까지도…. 루크레치아는 돌아오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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