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마사지 후
36화. 마사지 후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머리는 무겁고, 몸은 깊은 잠에서 억지로 끌려 나온 것처럼 나른했다.
나는 한동안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여기가 어딘지 한참이 지나서야 간신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사지실이었다.
“……루크레치아?”
갈라진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이 없었다.
“엘레노아?”
역시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방 안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다들…! 읏…….”
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순간 하복부 깊은 곳에서 묵직한 통증이 올라왔다.
마치 아랫배 안쪽에 뜨겁게 달아오른 돌덩이가 들어앉은 것 같았다.
다리에는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나는 의자 팔걸이를 붙잡은 채 그대로 다시 주저앉았다.
“하아…… 하아…….”
숨이 거칠게 흘러나왔다.
몸 안쪽에서 무언가를 억지로 쥐어짜낸 뒤, 텅 비어버린 듯한 감각만 남아 있었다.
하복부와 허리, 그리고 더 깊은 곳까지 저릿한 여운이 남아 있었다.
그제야 나는 내 상태를 확인했다.
나는 완전 나체 상태였다.
그리고 자지는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군데군데 허여멀건한 자국들이 말라붙어 있었다.
-가버려…. 이대로 가버리라고 카엘.
“…….”
손끝이 떨렸다.
눈앞의 방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깨끗했다.
내가 기억하던 풍경과는 전혀 달랐다.
너무나도 조용했다.
그녀들의 신음소리, 살과 살이 부딪히는 소리, 남자들의 웃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방 안 가득 채우던 분홍빛 연기도 사라졌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수건도, 침대 다리를 타고 흘러내리던 정체 모를 액체도 보이지 않았다.
두 개의 마사지 침대는 새로 정리된 것처럼 깨끗했다.
주위를 둘러싼 커튼도 가지런히 묶인 채 양옆으로 걷혀 있었다.
침대 옆에 늘어서 있던 오일병과 수건들도 처음 봤을 때처럼 정돈되어 있었다.
하지만 내 몸에 남은 흔적은 달랐다.
하복부 깊은 곳의 뻐근함이 방금 전의 일이 완전히 거짓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진짜였을까….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환상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전부 현실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이 드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깨어나셨습니까?”
문 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낯선 얼굴의 종업원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씻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종업원은 문을 열어둔 채 조용히 기다렸다.
나는 수건으로 하체를 가리며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종업원에게 안내받은 곳은 작은 욕탕이었다.
따뜻한 물이 담긴 욕조와 깨끗한 수건, 그리고 갈아입을 옷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나는 멍하니 그것들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물속으로 몸을 담갔다.
따뜻한 물이 피부를 감싸자 굳어 있던 몸이 조금씩 풀렸다.
하복부의 뻐근함도, 머릿속을 뒤흔들던 소리들도 아주 조금씩 멀어지는 듯했다.
한참 뒤에야 욕탕에서 나왔다.
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자, 그래도 조금은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젖은 머리카락을 대충 넘긴 채 문밖으로 나오니 아까 그 종업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행분들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말에 심장이 다시 내려앉았다.
루크레치아와 엘레노아.
그녀들은…….
그 모든 게 나만 본 환상이라면, 나는 두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반대로 정말 있었던 일이라면…….
나는 도대체 어떤 얼굴로 그녀들을 봐야 할까….
종업원은 말없이 나를 복도 안쪽으로 안내했다.
걸음이 무거웠다.
문 하나를 지날 때마다 심장이 점점 더 빠르게 뛰었다.
그리고 마침내 한 방 앞에서 멈춰 섰다.
안쪽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루크레치아 그리고 엘레노아의 목소리였다.
나는 문 앞에 선 채 침을 삼켰다.
입 안이 바짝 말라 있었다.
문고리에 손을 올렸지만, 쉽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괜찮냐고 물어야 하나?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어야 하나?
그것도 아니면 정말 내가 본 것이 맞는지 물어봐야 하나…?
나는 한동안 문 앞에서 멈춰 있었다.
그러다 결국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도망칠 수는 없었다.
문고리를 돌렸다.
딸깍
문이 열렸다.
나는 굳은 얼굴로 안으로 들어섰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가장 먼저 나를 발견한 것은 엘레노아였다.
“카엘군!”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었다.
방금 전까지 내 머릿속을 뒤흔들던 흐릿한 얼굴과는 전혀 달랐다.
싱그럽게 휘어지는 눈매와 장난기가 살짝 묻어나는 목소리.
언제나처럼 나를 먼저 반겨주는 밝은 표정.
그 모습이 너무 평소의 엘레노아라서, 나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왜 그렇게 멍하니 서 있어?”
엘레노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 옆에 앉아 있던 루크레치아도 나를 바라봤다.
그녀는 평소처럼 침착한 얼굴이었다.
조용하고 차분한 푸른 눈동자.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한 미소.
“괜찮아요? 카엘.”
그 목소리 역시 내가 아는 루크레치아의 것이었다.
흔들림도, 수치심도, 원망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문 앞에 선 채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
엘레노아는 평소처럼 밝았고, 루크레치아는 평소처럼 차분했다.
두 사람 모두 방금 전 내 눈앞에서 무너졌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던 것처럼…….
너무 평소와 같아서,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카엘군?”
엘레노아가 다시 나를 불렀다.
“얼굴이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니…….”
대답은 했지만,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무엇을 물어봐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내가 본 모든 광경이 현실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카엘군, 진짜 괜찮아?”
루크레치아도 미소를 거두고 나를 살폈다.
“안색이 좋지 않아요.”
두 사람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때 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일어났네. 카엘”
“……루멘시아”
엘레노아보단 조금 더 옅은 색의 녹빛 눈동자가 나를 쳐다보며 싱긋 웃었다.
또각 또각 또각 또각
털썩
그녀는 문 맞은 편에 있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루멘시아를 보니까 어쩌면 이 모든 게 다 그녀가 보여준 환상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카데미 시절의 환상을 봤을 때를 떠올렸다.
나는 그것이 환상이라는 자각조차 하지 못했다.
눈앞에 펼쳐진 모든 것이 현실처럼 느껴졌고, 들려오는 목소리와 보이는 광경 모두가 진짜라고 믿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같은 게 아닐까….
마사지를 당하며 음란하게 울부짖던 그녀들, 끝끝내 낯선 남자들을 받아들이고 헐떡이던 그 광경이 모두 루멘시아가 만들어낸 환상이라면…….
두 사람이 저렇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도 설명이 됐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가슴속에 검은 덩어리처럼 엉겨 붙어 있던 불안감이 아주 조금씩 사그라드는 기분이었다.
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그래서.”
방 한쪽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마 소감은 어땠어?”
순간 몸이 굳었다.
그녀는 다리를 꼰 채 턱을 괴고, 마치 재미있는 실험 결과라도 기다리는 사람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루멘시아…….”
내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반응한 것은 루크레치아와 엘레노아였다.
조금 전까지 나를 향해 걱정스럽게 웃고 있던 두 사람의 표정이 동시에 깨졌다.
엘레노아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
루크레치아 역시 나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바닥을 내려다봤다.
“…….”
“…….”
그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
나는 두 사람을 바라봤다.
아까까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였던 얼굴들이었는데, 루멘시아의 한마디에 무너져 내렸다.
가슴속에서 겨우 사그라들던 불안감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너희.”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엘레노아는 입술을 깨문 채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루크레치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무릎 위에 올린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우리 셋 모두 네가 보는 환상을 같이 봤거든.”
“어……?”
“뭘 그렇게 멍청하게 되물어? 네가 보던 환상을 다 같이 봤다니까?”
루멘시아는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그녀들도 이제 네 속에 들어 있는 그 옛 신이 만들어낸 뒤틀린 욕망이 얼마나 위험한지 깨달은 거지.”
“하…… 하하…….”
나는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었다.
그녀들의 표정이 어두운 건, 내가 상상한 가장 끔찍한 현실이 벌어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적어도 루크레치아와 엘레노아가 내 앞에서 다른 남자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물론 내 안에 응어리져 있던 추악한 욕망을 두 사람이 직접 보게 되었다.
그 사실은 견디기 힘들었다.
차라리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던 속살을 모조리 벗겨진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그게 현실은 아니었다.
내가 두려워했던 최악의 형태로 현실이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안도할 수 있었다.
“앉아. 제대로 설명해줄 테니까.”
“…….”
나는 루멘시아의 맞은편 의자에 천천히 앉았다.
내가 자리에 앉자, 루멘시아는 품 안에서 작은 유리 용기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에는 검붉은 액체가 담겨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붉은빛과 검은빛이 뒤섞여 있었고, 안쪽에서는 아주 미세하게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평범한 액체는 아닌 것 같았다.
“……그게 뭡니까?”
루멘시아는 유리 용기를 가볍게 흔들었다.
검붉은 액체가 천천히 안쪽에서 출렁였다.
“네가 환상을 보고 흥분해서 사정한 액. 한마디로 카엘의 정액.”
“아니 그런 걸 왜 들고 있는 겁니까?”
“뭘 그렇게 놀라? 여기 온 이유가 이걸 채취하기 위함인데?”
루멘시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네 안에 쌓여 있던 옛 신의 기운이 응어리진 결과물이지.”
“옛 신의 기운이…….”
“그래.”
그녀는 유리 용기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처음 네가 얘기를 들은 게 반년 전이었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후로 너, 네 안에 생긴 관음증이나 네토라레에 가까운 욕망을 제대로 충족시킨 적 있어?”
“…….”
대답하지 못했다.
루멘시아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없지?”
그녀의 말대로였다.
나는 단 한 번도 그 욕망을 정면으로 마주한 적이 없었다.
물론 그와 비슷한 상황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미궁에서 엘레노아가 볼프람이 그녀의 몸에 올려둔 촉수 벌레에게 당할 뻔했을 때, 내 안쪽에서 끔찍한 욕망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결국 나는 그녀를 구했다.
그 광경을 보며 자위하지도 않았고, 그녀가 더 망가지도록 내버려두지도 않았다.
그러니 그 일을 충족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나는 욕망을 따라간 게 아니라, 그 상황을 끝냈다.
결국 그 순간에 내가 선택한 것은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었다.
외면하고, 부정하고, 더 깊은 곳으로 밀어 넣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루멘시아가 말한 ‘쌓였다’는 표현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나는 그동안 그 욕망이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아니, 사라졌다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내 안쪽 어딘가에 계속 고여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이 검붉은 액체가 되어 눈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루멘시아의 말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지는 이미 얘기했지?”
그녀는 머리가 터지는 시늉을 하며 웃었다.
“억누르고, 외면하고, 참고, 부정할수록 네 안에서 계속 쌓여.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단순한 충동이 아니라, 이렇게 형태를 갖기 시작하지.”
루크레치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럼 방금 본 환상은…….”
“카엘 안에 쌓인 욕망과 옛 신의 기운이 뒤섞여 만든 것.”
루멘시아는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미궁에서 검은 기운이 너희에게도 흘러들어갔다고 했지? 그 연결 때문에 같이 본 거야.”
엘레노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카엘군이 원해서…… 우리한테 보여준 건 아니란 거죠?”
“그건 아니야.”
루멘시아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 대답에 엘레노아의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하지만 루멘시아는 곧바로 덧붙였다.
“하지만 카엘 안에 그런 욕망이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어. 그래서 이제부터가 중요해.”
루멘시아는 유리 용기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이걸 계속 쌓이게 둘 건지.”
그녀의 녹색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아니면 네가 감당할 수 있는 방식으로 조금씩 빼낼 건지.”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탁자 위의 유리 용기만 바라봤다.
그것은 마치 내 안쪽에 고여 있던 가장 추악한 부분을 그대로 떠낸 것처럼 보였다.
“이번에는 네 안에 깊게 쌓인 욕망을 끄집어내려고 일부러 판을 깔았어. 이곳도 빌리고, 내 마법으로 환상까지 동원했지. 그래서 이렇게 많이 뽑아낸 거야.”
“그런가요….”
“그러니까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조금씩이라도 해소해. 다음번에도 이렇게 오랫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버티다가 내가 짠하고 나타나서 해결해줄거라고 믿지말고….”
루멘시아는 나를 살짝 흘겨보며 대답했다.
나는 최대한 감사한 마음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가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그런데 루멘시아는 어떻게 그렇게까지 잘 알고 있는 겁니까?”
내 질문에 루멘시아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뭘?”
“옛 신에 대해서요. 책도 그렇고, 검은 기운도 그렇고…….”
나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루크레치아와 엘레노아를 힐끗 바라봤다.
두 사람은 아직도 쉽게 표정을 풀지 못하고 있었다.
“미궁에서 흘러들어간 검은 기운 때문에 두 사람도 제 환상을 같이 봤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루멘시아는 대체 어떻게 그걸 알고, 또 어떻게 우리 셋이 같이 환상을 보게 만든 겁니까?”
루멘시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탁자 위에 놓인 유리 용기를 바라봤다.
검붉은 액체가 안쪽에서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한동안 조용히 그것을 내려다보던 그녀는 이내 작게 웃었다.
평소처럼 능청스럽고 가벼운 웃음은 아니었다.
어딘가 씁쓸함이 섞인 미소였다.
“그건 숙녀의 비밀이야.”
“……그걸로 넘어갈 생각입니까?”
“응.”
루멘시아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네가 알아야 할 건 내가 뭘 숨기고 있느냐가 아니야. 네 안에 있는 게 생각보다 위험하고, 그걸 계속 방치하면 안 된다는 거지.”
“하지만…….”
“카엘.”
루멘시아가 내 말을 끊었다.
장난기 없는 목소리였다.
“사람은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진실부터 알아야 해. 한꺼번에 전부 들이부으면 이해하는 게 아니라 무너져.”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녹색 눈동자는 차분했다.
마치 농담처럼 말하면서도, 그 안쪽에는 쉽게 건드릴 수 없는 무언가가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고 나도 아직 모르는 게 많아.”
루멘시아는 유리 용기를 다시 품 안에 넣었다.
“이건 가져가서 조금 더 살펴볼 거야. 네 안에서 나온 것인 만큼, 옛 신의 기운이 어떤 식으로 응어리지는지 확인할 수 있겠지.”
“그걸 연구하겠다는 겁니까?”
“걱정마. 이번엔 부족하다곤 안할테니까.”
루멘시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만한 표본은 흔하지 않아. 아니, 솔직히 말하면 다시 구하기도 힘들어. 네 입장에선 끔찍하겠지만, 연구자 입장에선 꽤 귀한 자료야.”
“…….”
“그렇게 보지 마. 적어도 네게 해가 되는 방향으로 쓰진 않을 테니까.”
루멘시아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의자 다리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조용한 방 안에 작게 울렸다.
“조만간 한 번 더 부를 거야.”
“저를요?”
“너희 셋 모두. 당분간은 최대한 아르세인에 있어. 연구하다가 확인할 게 생기면 바로 불러야 하니까”
그녀는 나와 루크레치아, 엘레노아를 차례로 바라봤다.
“오늘 본 것 때문에 서로 어색해질 수도 있겠지만, 가능하면 도망치지 마. 특히 너.”
루멘시아의 시선이 다시 내게 돌아왔다.
“혼자 숨기고, 혼자 참고, 혼자 망가지는 짓은 이제 그만해. 그게 제일 위험하다는 건 오늘 봤잖아. 해소하고 익숙해지지 않으면 중요한 순간에 멈출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될거야.”
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자, 설명은 여기까지.”
그녀는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이 방은 내가 조금 더 써야 하니까, 세 사람은 이제 나가서 이야기해.”
“……나가서요?”
“응. 오늘 용건은 이제 끝이야.”
루멘시아는 나와 루크레치아, 엘레노아를 차례로 바라봤다.
“어차피 이제부터 필요한 건 내 설명이 아니라 너희끼리의 대화잖아.”
그 말에 방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루크레치아와 엘레노아는 여전히 나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두 사람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루멘시아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손을 까딱였다.
“가. 나도 채취한 걸 정리해야 하니까.”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에 힘이 완전히 돌아온 것은 아니었지만, 더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루크레치아와 엘레노아도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세 사람 모두 아무 말이 없었다.
문 쪽으로 걸어가던 나는 잠시 멈춰 섰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루멘시아를 바라봤다.
“루멘시아.”
“왜?”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습니다.”
루멘시아는 대답 대신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감사는 나중에 해. 네가 안 미치고 버티면 그때 받지.”
“…….”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루크레치아와 엘레노아가 먼저 열린 문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용히 복도 쪽으로 걸어가는 발소리만이 희미하게 멀어졌다.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문고리를 잡은 채 잠시 멈춰 섰다.
가슴 속에 숨겨둔 질문이 하나 있었는데, 묻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아니, 묻지 않고는 이 방을 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루크레치아와 엘레노아의 발소리가 충분히 멀어지고, 더 이상 이쪽의 대화가 들리지 않을 만한 거리가 되었을 때…….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루멘시아는 여전히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검붉은 액체가 담긴 유리 용기를 바라보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루멘시아.”
“왜?”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겠습니다.”
루멘시아의 시선이 내게 돌아왔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환상은…… 처음부터였습니까?”
“…….”
“내가 그 방에 들어간 순간부터 전부 환상이었던 겁니까? 아니면 중간부터였습니까?”
내 목소리는 생각보다 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어디까지가 현실이었고, 어디서부터 환상이었는지…….”
루멘시아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웃는 얼굴은 아니었다.
어딘가 뒤틀린 듯한 미소였다.
마치 내가 그 질문을 하길 기다렸다는 것처럼.
“그건.”
루멘시아가 느릿하게 말했다.
“네 상상에 맡길게.”
“…….”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애매한 한마디가 오히려 더 깊게 파고들었다.
정말 모든 것이 환상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환상이라고 믿고 싶은 현실이 그 안에 섞여 있었던 걸까.
목 안쪽이 바짝 말라붙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루멘시아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저 유리 용기를 품 안에 넣고, 다시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고개를 돌렸을 뿐이었다.
나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방을 나섰다.
딸깍.
문이 닫혔다.
복도의 공기는 방 안보다 훨씬 차가웠다.
나는 잠시 문 앞에 선 채 움직이지 못했다.
저 멀리 복도 끝에서 루크레치아와 엘레노아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내가 따라오지 않는 것을 알아차린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둘 다 내가 사랑하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그 얼굴 위로, 조금 전 환상 속에서 보았던 얼굴들이 겹쳐졌다.
그 쾌락에 잠식된 얼굴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눈앞에 있는 것은 분명 루크레치아와 엘레노아였다.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는.
-네 상상에 맡길게.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에게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더 세게 뛰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멈춰 있을 수는 없었다.
도망칠 수도 없었다.
나는 떨리는 숨을 삼키며, 나를 기다리는 두 연인에게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