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도서관
19화. 도서관
“여기 주문하신 커피 나왔습니다.
종업원이 탁자 위에 내려놓은 커피 위로 따뜻한 김이 피어올랐다.
그윽한 향과 함께 한 모금 머금자 씁쓸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으음….”
커피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값비싼 돈을 주고 마실 만한 음료라는 건 알 것 같았다.
나는 잠시 멈췄던 일을 다시 이어갔다.
현재 우리는 남부의 아르세인이라는 도시에 와 있었다.
티몽 백작의 의뢰를 끝낸 뒤, 혹시 모를 귀족들의 의심과 보복을 피하기 위해 서남부를 서둘러 벗어나 인근의 대도시로 향한 것이다.
아르세인은 남부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거대 도시령이었다.
중부에서 제도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대(大) 라이히 강에서 갈라진 소(小) 라이히와 연결된 도시였고, 거대한 수운망을 기반으로 성장한 곳이었다.
덕분에 여러 지역에서 온 수많은 사람들이 뒤섞여 도시 전체의 분위기 역시 자유롭고 활기찼다.
예술과 학문의 도시 아르세인
그런 기풍 덕분인지 대학들도 여럿 세워졌고,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대도서관 역시 이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 도서관에서 어떤 자료를 찾고 있었다.
“《인간의 은밀한 충동과 정신 구조》”
나는 손에 든 책의 제목을 나직이 읽었다.
저택에서 돌아온 뒤, 그녀들과의 관계에서 제대로 된 만족을 할 수 없었다.
눈앞의 그 천상의 몸매가 나와 몸을 섞고 있는데도 어딘가 부족했다.
오히려 혼자 있을 때 그녀들이 저택에서 겪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흥분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자괴감도 들었고 그녀들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기도 부끄러웠다.
다행히도 그런 상태가 오래 이어지지는 않았다.
나와 그녀들 모두 저택에서의 일로 힘들어했고, 서로 그때의 기억을 덧씌우기 위해 자주 정사를 나누다 보니 어느샌가 우리들은 다시 평소대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나 또한 더이상 그때의 일을 상상하며 흥분하지 않았다.
물론 그 이후 갑자기 불이 붙어 버린 두 사람이 내 정력을 모조리 털어갈 정도로 달라붙기는 했지만…….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그런 일을 겪고 나니 내 안의 무언가가 잘못되어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서 마침 대도서관이 있는 아르세인에 오게 되었을 때, 관련된 자료를 직접 찾아보기로 한 것이다.
마침 루크레치아와 엘레노아 역시 각자 볼일이 있다고 했기에, 오랜만에 서로 떨어져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다시 책 표지를 내려다봤다.
결국 내가 이 책을 들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지금 내 안에서 대체 무엇이 변해 버린 건지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이런 책이 도서관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책장을 넘기자 다양한 도착증들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도대체 어디서, 누가, 왜 이런 걸 연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의외로 상세하고 세밀한 내용에 나도 모르게 집중됐다.
“프레이(Prey).”
나는 책장을 넘기며 짧게 중얼거렸다.
사냥감.
상대에게 쫓기고 붙잡히며 지배당하는 상황 자체에서 흥분을 느끼는 성향이라고 적혀 있었다.
“디그레이디(Degradee).”
모욕과 수치, 굴욕적인 취급을 당하는 것으로 정신적 자극을 느끼는 유형.
책에는 자존심이 짓밟히는 상황에서 강한 흥분을 느끼는 경우도 존재한다고 적혀 있었다.
세상에는 사람 수만큼 다양한 취향이 존재한다지만…….
지배당하고 모욕당하는 데서 쾌락을 느낀다니, 아무래도 평범한 사람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스스로 노예 같은 취급을 원한다는 것 아닌가.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다음 장을 넘겼다.
“스팽킹(Spanking).”
손이나 도구를 이용해 엉덩이 같은 부위를 때리는 행위.
단순한 폭력과는 다르게, 고통과 쾌락을 동시에 이용하는 행위라고 설명되어 있었다.
“마조히스트(Masochist).”
고통이나 굴욕, 지배당하는 상황 자체에서 만족감과 쾌락을 느끼는 사람.
나는 잠시 책에서 시선을 떼고 미간을 눌렀다.
정말 이런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하는 걸까?
아픈 걸 좋아한다고?
맞는 것만으로 흥분한다니…….
어쩌면 천부적인 전사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투에서 느끼는 고통조차 쾌락으로 받아들일 테니까.
……아니, 오히려 너무 흥분해서 제대로 싸우지 못할지도 모르겠군.
한동안 책장을 넘기던 나는 어느 한 문단 앞에서 손을 멈췄다.
“관음증(Voyeurism).”
타인의 은밀한 행위나 노출된 모습을 바라보며 만족감을 얻는 성향.
책에는 단순한 호기심과는 다르게, ‘보는 행위’ 그 자체에서 강한 정신적 자극을 느끼는 경우라고 설명되어 있었다.
나는 문득 개척촌에서 엘레노아가 내게 자위하는 모습을 보여줬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 나는 평소보다 훨씬 강하게 흥분했었다.
고블린을 쫓던 도중 투시 능력으로 그녀의 속옷을 봤을 때 역시 마찬가지였다.
급박한 상황이었음에도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관음증인 걸까?
일단은 기억해 두기로 하고 다음 장을 넘겼다.
“네토라레(Netorare).”
연인이나 배우자가 다른 상대에게 빼앗기거나 관계를 맺는 상황에서 강한 정신적 자극을 느끼는 성향.
단순한 배신감이 아니라 질투와 패배감, 상실감 같은 감정 자체가 흥분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고 적혀 있었다.
“하아…….”
읽자마자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설명만 읽어도 혐오감이 들었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는 모습을 보며 흥분한다고?
이런 쓰레기 같은 취향을 내가 가지고 있다고?
단순히 생각해 보면 그동안 단 한 번도 그런 걸 원한 적은 없었다.
아카데미 시절에도, 그녀들과 처음 여행을 시작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단 한 번도 그녀들이 다른 남자의 품에 안기길 바라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그런 생각 자체를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부정할 수만은 없었다.
루크레치아가 황태자와 키스하며 가슴이 만져지던 것과 복도 창문에 가슴을 눌린 모습을 보며 음란한 말을 쏟아내던 귀족들.
엘레노아가 가슴과 허벅지 사이가 모두 모르는 남자들의 자지에 유린당하고 그들의 정액에 범벅이 된 모습.
그리고 그 모든 장면을 바라보던 나는…….
분명 흥분하고 있었다.
나는 책을 덮지 못한 채 한동안 그 문장을 내려다봤다.
정말로 내가 이 기괴한 성도착증에 빠져 버린 걸까.
“루멘시아 폰 아르케인…….”
책 맨 끝의 적힌 저자의 이름은 특이하게도 귀족이었다.
나는 그 이름을 머릿속에 새겨 둔 뒤 천천히 책을 덮었다.
하지만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이런 성향 분석이 아니었다.
도서관에 온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다름아닌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끔찍한 미래시였다.
루크레치아와 엘레노아가 처참하게 무너져 내리던, 그 미래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던 거대한 괴수에 대해 조사하고 있었다.
강당 전체를 가득 채운 거체와,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검은 촉수들…….
그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나는 깊게 숨을 내쉰 뒤 다시 책장 사이를 훑기 시작했다.
《고대 마수》
《심연의 괴수》
《봉인된 마물》
지금 당장 단서 하나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미래시 속에서 본 괴수의 모습도 지나치게 단편적이었다.
이 상태로는 특정한 존재를 추려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결국 하나씩 직접 확인해 보는 수밖에 없겠지.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쉰 뒤 근처 책장에 꽂혀 있던 책들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제목만 봐도 머리가 아파오는 책들이 탁자 위로 점점 쌓여 갔다.
아무래도 오늘 안에 끝날 일은 아닐 것 같았다.
“끄응!”
한동안 하염없이 책들을 바라보며 단서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딱히 이렇다 할 정보는 없었다.
아무리 읽어봐도 미래시에서 봤던 괴수가 떠오르는 내용은 없었다.
머리가 지끈거리기만 했다.
머리라도 식힐 겸 도서관 창문 밖을 내다봤다.
이제 막 해가 뉘엿뉘엿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면서, 도시 전체에 아름다운 노을이 짙게 깔리고 있었다.
“음?”
그때 인파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루크레치아였다.
평상복을 입고 나왔는데도 눈에 띌 정도로 아름다웠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살짝 미소가 지어졌다.
노을보다 더 아름답고, 시선을 잡아끄는 저 여자가 내 연인이었다.
그런 행운아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한 성도착증이나 생겨버리다니…….
복에 겨운 놈이 따로 없었다.
그녀는 볼일을 이미 끝마쳤는지 느긋하게 도시를 구경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숙소에서 개인 훈련을 했을 테지만, 이런 큰 도시에서는 혼자 조용히 훈련하기가 굉장히 어렵기 때문에 오늘만큼은 잠시 휴식을 취하는 모양이었다.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루크레치아는 천천히 광장 쪽으로 걸어갔다.
노을빛이 짙게 내려앉은 광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거리의 악사들은 연주를 하고 있었고, 화가들은 캔버스 위에 붉게 물든 도시의 풍경을 담아내고 있었다.
아이들은 분수대 주변을 뛰어다녔고, 노점상들은 분주하게 손님들을 상대했다.
루크레치아는 잠시 한 노점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는 종이봉투 하나를 받아 들었다.
뭘 샀는지는 이 거리까지 들리지 않았지만, 그녀가 가끔 봉투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먹는 걸 보니 간단한 군것질거리라도 산 모양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느긋하게 광장을 돌아다녔다.
가끔 발걸음을 멈춰 거리의 그림을 바라보기도 하고, 연주하는 악사 쪽으로 시선을 돌리기도 했다.
언제나 검과 훈련밖에 모르던 루크레치아가 저렇게 평범한 사람들 사이를 걷고 있는 모습은 어쩐지 신기한 기분이었다.
그러던 그때였다.
젊은 남자 하나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옷차림을 보니 예술가인 모양이었다.
손에는 스케치북 같은 것을 든 채, 긴장한 듯 한참이나 머뭇거리다가 겨우 그녀 앞에 섰다.
루크레치아는 고개를 내려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는 뭔가를 열심히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 거리에서는 당연히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묘한 감정이 들었다.
자세한 상황은 여기선 알 수 없으나 얼굴을 붉힌 채 허둥거리는 태도와 주변에서 힐끔거리며 웃는 사람들의 반응만 봐도 무슨 상황인지는 대충 알 수 있었다.
“푸흡.”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아무래도 대놓고 들이댄 모양이었다.
루크레치아는 잠시 남자를 내려다보더니 무심한 표정으로 짧게 뭐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남자의 어깨가 눈에 띄게 축 처졌다.
거절당한 거겠지.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몸을 돌려 광장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곧 그녀는 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한동안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며 복잡했던 머릿속을 식혔다.
노을 아래를 거닐던 루크레치아의 모습 덕분인지 조금 전까지 머리를 짓누르던 불쾌한 감각도 어느 정도 가라앉은 듯했다.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책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슬슬 다시 단서를 찾아봐야 했다.
미래시에서 봤던 그 괴수에 대한 정보라도 찾아내지 못한다면 오늘 하루를 통째로 날린 셈이니까.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책 더미 쪽으로 손을 뻗으려던 순간이었다.
“……응?”
처음 보는 책 한 권이 맨 위에 올려져 있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없던 책이었다.
나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그 책을 집어 들었다.
검은색 가죽 표지에 오래된 책 특유의 낡은 질감, 그리고 표지 중앙에는 처음 보는 문양 하나가 희미하게 음각되어 있었다.
도서관에서 흔히 보이는 대중적인 서적과는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이런 책이 있었나…?”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천천히 책장을 넘겼다.
그러자 낡은 종이 냄새와 함께 기묘할 정도로 차가운 감각이 손끝을 타고 스쳐 지나갔다.
페이지 곳곳에는 처음 보는 괴물들의 삽화가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단순한 마물과는 어딘가 달랐다.
지나치게 인간을 닮아 있었고, 동시에 기괴할 정도로 뒤틀려 있었다.
어떤 존재는 수십 개의 팔을 가진 채 사람들을 끌어안고 있었고,
어떤 존재는 짐승의 형상을 하고 있으면서도 얼굴 부분만 기묘하게 사람처럼 표현되어 있었다.
또 어떤 것은 거대한 산맥만 한 육신 위에 수없이 많은 눈과 입이 달린 형태였는데, 설명에 적힌 문구는 하나같이 섬뜩했다.
버려진 자들의 분노가 응축된 형태
잊혀진 숭배가 뒤틀려 탄생한 존재
죽은 신앙이 남긴 저주
나는 천천히 페이지를 넘겼다.
책은 그런 존재들을 하나하나 기록하고 있었다.
나는 무심코 다음 장을 넘기려다가 순간 손을 멈췄다.
“…잠깐.”
방금 스쳐 지나간 그림 하나.
그건 분명….
내 미래시에 나타났던 괴수와 비슷했다.
페이지 전체를 뒤덮고 있는 삽화….
그건 지금까지 봤던 마물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새카만 심연 같은 육체.
끝없이 꿈틀거리는 촉수들.
그리고 중심부에 자리한 거대한 입.
아니…….
저건 입이라고 표현하는 것조차 이상했다.
마치 꽃처럼 벌어진 거대한 구멍 내부에 수백 개의 이빨이 소용돌이치듯 겹쳐 있었고, 그 중심에는 눈동자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천천히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 주변으로는 셀 수도 없이 많은 눈들이 떠 있었다.
삽화인데도 살아 움직이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손끝에 힘을 줬다.
분명했다.
미래시에서 봤던 괴수였다.
절대 잊어버릴 수 없는 형상이었다.
나는 빠르게 책 아래쪽의 설명을 읽었다.
《심연의 사도(使徒)》
-버려진 신앙이 끝내 증오로 변질되었을 때 태어난 존재.
-그 시선은 인간의 정신을 침식하며, 그 목소리를 들은 자는 결국 스스로 심연으로 걸어 들어간다.
“우욱….”
갑자기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나는 다급히 책에서 시선을 떼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한동안 도서관 바닥만 바라보며 정신을 추슬렀다.
그 후에야 겨우 고개를 들어, 펼쳐져 있던 장을 빠르게 넘겨버렸다.
맨 끝장에는 이 책의 저자인 듯, 펜으로 휘갈긴 사인이 적혀 있었다.
“루멘시아 폰 아르케인…….”
아까 전에 봤던 성도착증에 관한 책의 저자와 동일한 이름이었다.
나는 다급히 그 책과 이 이름 없는 책을 집어 들고 도서관 사서에게 다가갔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혹시 이 책을 쓴 사람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루멘시아 폰 아르케인, 유명합니다. 아르세인에서 모르는 사람이 드물죠.”
“…!”
“그야……. 그녀는 마법사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