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EP0090-0085화-귓가의 속삭임 1
“엘레노아.”
“루크레치아.”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하…. 하하. 그때랑 달리 이번엔 우리가 알몸이네요.”
“우리…?”
루크레치아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이전 광신도 토벌전에서는 루크레치아가 벌거벗은 채였지만, 이번에는 제복을 입고 백마에 올라 있었다. 반대로 엘레노아와 카엘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고 있지 않았다.
“카엘은?”
“카엘군은 무사해요.”
엘레노아는 아직 정신을 잃은 카엘을 품 안에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카엘의 몸에서 전해지는 체온을 확인하듯, 두 사람의 몸이 자연스럽게 맞닿았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루크레치아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
잠시 말없이 바라보던 그녀가 안장에 걸려 있던 망토를 집어 들었다.
펄럭!
망토가 허공을 가르며 엘레노아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두르고 있어. 나 혼자 온 것도 아니니까.”
“앗. 고마워요.”
엘레노아는 서둘러 망토를 받아 카엘과 자신의 몸을 함께 감싼 채 주위의 전장을 둘러보았다.
햇빛을 받은 수많은 창과 검이 번뜩이며 눈부신 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그보다 저 군대는….”
“근위대야.”
루크레치아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황실의 힘을 빌렸어.”
“네? 하지만 로엔덤은 황실을 지지하는 가문일텐데…. 어떻게 그게 가능했죠?”
“무슨 소리야? 카엘의 편지에는 분명….”
말을 잇던 루크레치아가 잠시 멈추고 두 사람을 내려다봤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
루크레치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내 그녀는 고삐를 세차게 잡아당겼다.
“일단 나중에 다시 얘기해!”
히이이잉…!
백마가 앞발을 치켜들며 크게 울었다.
루크레치아가 말의 옆구리를 박차자 백마가 그대로 전장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두두두!
“루크레치아?!”
엘레노아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지만 루크레치아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가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파지지직!
차가운 마력이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오며 허공에서 서로 엉겨 붙었다.
순식간에 수십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얼음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리자드맨들이 일제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Khrâg?! Sserakh-var!”
“Zarkhâsh! Zarkhâsh-nar!”
루크레치아가 손을 내렸다.
콰아아앙!
거대한 얼음 검이 리자드맨들의 전열 한가운데 그대로 내리꽂혔다.
얼음 파편과 흙더미가 폭발하듯 솟구치며 밀집해 있던 전열이 순식간에 갈라졌다.
“지금이다!”
제국군의 고함이 전장을 울렸다.
쿠구구궁!
기다리고 있던 근위기병대가 일제히 돌진했다.
붕괴된 전열 사이로 중갑 기병들이 파도처럼 들이닥쳤다.
“Khrâg! Vrakhtâl! Sserakh!”
“Sskhar! Sskhar!”
리자드맨들이 다급하게 무기를 치켜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한 번 무너진 전열은 좀처럼 복구되지 않았다.
기병의 돌진에 밀려난 리자드맨들이 서로 뒤엉켰고 그 틈으로 뒤따라온 근위보병대가 파고들었다.
사기가 꺾인 리자드맨들이 하나둘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곧 패주는 전염되듯 번졌다.
하지만 인간들은 멈추지 않았다.
기병들은 도망치는 리자드맨들을 악착같이 추격해 숨통을 끊어놓았고 보병들은 무너진 폐허 사이로 숨어든 놈들까지 추격해 말살시켰다.
그렇게 엘렌브룩의 폐허는 한동안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Ghrâââk! Zhar… khrâg!”
악에 받친 마지막 외침이 전장에 울려 퍼졌다.
쿵!
마지막까지 버티던 리자드맨이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그 뒤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폐허 곳곳에는 부서진 무기와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 사이를 따라 흘러나온 피가 낮은 곳으로 모여들어 붉은 물줄기를 이루었다.
전투는 그렇게 끝났다.
* * *
여긴….
여긴 어디지?
나는 눈을 뜨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힘을 줘도 눈꺼풀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몸은 마치 거대한 바윗덩이에 짓눌린 기분이 들었다.
“…….”
고함이라도 질러보려고 했지만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몸을 움직일 수 없으니 입도, 목도 움직이지 않는 건가….
눈을 감은 채 꼼짝도 할 수 없으니 내가 어디에 누워 있는지, 주변에 누가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때 머릿속을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
볼프람 그리고 엘레노아….
로엔덤의 저택에서 보았던 끔찍한 광경이 기억 속에서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분명히 나는 그 저택에 있었다.
엘레노아를 구하려고 했지만 세레나한테 들켜버렸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엘레노아가 처절하게 능욕당하는 모습을 봐야만 했다.
게다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세레나에게 손으로 애무당해버렸다.
연인이 능욕당하는 걸 보며 다른 여자에게 가버리는 남자라니….
참 볼품 없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다음부터 기억이 뚝 끊겨 있었다.
분명 무언가를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장엄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던 것 같은데….
하지만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째깍 째깍
그저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이라곤 어디선가 끊임없이 들려오던 태엽 소리뿐이었다.
이제는 그 소리의 기억마저 점점 옅어지고 있지만….
부스럭!
그때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군가 이곳에 있었다.
누구지? 엘레노아? 아니면 루크레치아…?
저벅 저벅
천천히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점점 가까워지던 소리는 이윽고 바로 내 옆에서 멈췄다.
그리고 잠시 뒤에 얼굴 위로 따스한 온기가 닿았다.
누군가의 손이 내 뺨을 조심스럽게 쓰다듬고 있었다.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손길에는 익숙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엘레노아다.
이건 분명 엘레노아의 손이었다.
루크레치아의 손은 오랫동안 검을 잡아온 탓에 조금 더 단단하고 거칠었으니까….
그렇다면 엘레노아는 무사한 건가?
우리는 어떻게 된 거지?
로엔덤의 저택에서 빠져나온 건가?
그게 아니라면….
순간 머릿속에 끔찍한 가정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아직도….
“카엘군. 몸은 좀 어때?”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나 엘레노아였다.
나는 당장 괜찮다고 대답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엘레노아는 한동안 내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다가 천천히 손을 내려 내 가슴 위에 올렸다.
“아직도 이렇게 심장은 세차게 뛰고 있는데…. 카엘군이 얼른 일어났으면 좋겠어.”
뭐? 엘레노아,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럼 내가 지금…, 쓰러져 있는 건가?
“엘렌브룩에 있었던 게 벌써 일주일 전인데, 카엘군은 아직도 잠만 자는구나.”
일주일?
그때가 일주일 전이라고….
“잠꾸러기.”
엘레노아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키스를 받고 깨어나는 건 왕자가 아니라 공주님이라니까.”
곧 얼굴 가까이로 그녀의 기척이 다가왔다.
익숙한 향기가 희미하게 코끝을 스쳤다.
그리고 입술 위로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내려앉았다.
“…….”
아주 짧은 입맞춤이었다.
그녀의 입술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내 입술에 그 온기가 남아 있는 기분이었다.
“거봐….”
엘레노아는 어딘가 씁쓸한 느낌으로 나직이 말했다.
“공주님이 아니라 안 깨어나잖아.”
어느새 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울음에 잠겨 있었다.
……움직여야 했다.
손가락 하나라도 좋았다.
뭐라도 좋으니까…!
뭐든 좋으니까 움직여!
제발.
“…….”
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마력을 끌어올리려 해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젠장…!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저 몸을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이 조금 답답하고 불편하게 느껴졌을 뿐이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달랐다.
마치 멀쩡한 정신만 움직이지 않는 몸속에 갇혀 버린 것 같았다.
갑자기 숨이 막히는 듯한 공포가 밀려왔다.
이대로 계속 깨어나지 못하면?
오늘, 내일뿐만 아니라 한 달, 아니 몇 달이 지나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그녀들의 목소리를 듣고만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말 그대로 끔찍했다.
지금껏 겪어 본 그 어떤 상황보다도 최악이었다.
미칠 것만 같았다.
엘레노아!
나 여기 있어!
다 듣고 있다고!
그러니까 제발…….
내 목소리 좀 들어줘.
하지만 아무리 간절히 바라도 내 정신은 이 굳어 버린 몸 안에 갇혀 있을 뿐이었다.
“……”
엘레노아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내 가슴 위에 손을 얹은 채 가만히 있었다.
아마 기껏해야 몇 초에 불과했을 텐데.
내게는 그 침묵이 끝도 없이 길게 느껴졌다.
아무 말도 들리지 않을수록 불안은 점점 커졌다.
영원히 이어질 것 같던 침묵은 결국 그녀의 작은 목소리와 함께 끝났다.
“……가볼게.”
엘레노아의 손이 천천히 내 가슴에서 떨어졌다.
“다음에 또 올게. 카엘군.”
안 돼! 가지 마!
저벅 저벅
엘레노아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엘레노아.
조금만 더 있어줘…!
하지만 전달되지 못한 내 바램은 이뤄지지 못했다.
그렇게 다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과 적막만이 남았다.
그 안에 남겨진 것은 오직 나뿐이었다.
내 간절한 마음은 이 굳어버린 몸과 검은 공간을 끝내 벗어나지 못했다.
아아아아아!
아아아!
아무리 목이 터져라 외쳐도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저 내 머릿속에서만 처절한 아우성이 울려 퍼질 뿐이었다.
루크레치아! 엘레노아!
둘 중 누구라도 좋으니까 다시 와줘.
제발! 내게 와줘.
아무리 외쳐도 내 목소리는 누구에게도 닿지 않았다.
아…….
어느 순간 끝없이 치솟던 감정도 한계에 다다른 것 같았다.
너무 오랫동안 격하게 끓어올랐던 탓인지 정신이 갑자기 툭 끊어질 것처럼 흐려졌다.
어떻게든 정신을 붙잡고 있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마치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듯 생각할 힘마저 사라져 갔다.
방금 전까지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아우성도 점점 멀어졌다.
루크레치아.
엘레노아.
두 사람의 이름을 마지막으로 떠올린 순간.
의식이 다시 깊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끼이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가라앉아 있던 의식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얼마나 잠들어 있었던 거지?
한 시간? 하루?
아니면 또 며칠이 지난 건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시간의 흐름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그보다 방금 들린 문 소리는 누가 들어온 소리인가?
순간 흐릿하던 정신이 또렷해졌다.
나는 들려오는 작은 인기척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곧이어 일정한 박자의 발소리가 들렸다.
터벅 터벅
이건 루크레치아의 발소리다.
엘레노아보단 힘 있고 균일한 박자감이 느껴지는 발소리.
분명히 그녀였다.
터벅 터벅
점점 가까워지던 발소리는 이윽고 내 바로 옆에서 멈췄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카엘.”
루크레치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그녀가 맞았다.
루크레치아.
난, 난 지금 멀쩡하게 깨어 있어.
제발 나를 알아봐줘.
네 목소리, 네 숨소리 모두 듣고 있다고…!
그러니까 제발 나를 봐줘.
“카엘은 아직도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네요.”
하지만 내 기대는 무참히 빗나갔다.
루크레치아의 목소리는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날 엘레노아와 카엘을 구하기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건 전부 했다고 생각했는데….”
잠시 말이 끊겼다.
“그래도 부족했던 걸까요.”
……루크레치아가 나와 엘레노아를 구했다고?
정말로 그게 맞다면 로엔덤의 저택에 갇혀 있던 우리를 루크레치아가 구해낸 모양이었다.
“내가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그녀의 목소리엔 짙은 회한이 서려 있었다.
당장이라도 일어나서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품에 안은 채 그녀의 마음을 위로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그저 바람일 뿐이었다.
사락
천이 스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작은 금속 장식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바닥으로 흘러내리는 듯한 기척이 이어졌다.
“카엘.”
다시 내 이름을 부르는 루크레치아의 목소리가 조금 떨려왔다.
곧 그녀의 따뜻한 손이 내 손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녀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내 손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곧 따뜻하고 부드러운 피부의 감촉과 함께 딱딱한 뼈가 느껴졌다.
굴곡진 모양을 보니 쇄골 언저리인 것 같았다.
루크레치아는 도대체 내게 뭘 해주려는 걸까….
내 손이 그녀의 손을 따라 천천히 위로 움직이며 매끄러운 피부가 스쳐 지나가는 걸 느꼈다.
“……?”
그때 전혀 다른 감촉이 손가락 끝에 걸렸다.
무언가 그녀의 목에 걸려 있었다.
루크레치아는 내가 그것의 형태를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내 손을 천천히 움직여 주었다.
손가락을 조금 더 움직이자 매끈하게 다듬어진 가죽 같은 느낌이 들었다.
거기다가 차갑고 딱딱한 금속 장식 같은 것도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손끝으로 느껴지는 형태는 목에 꼭 맞게 둘러진….
마치 목줄 같은….
느낌이었다.
“카엘. 레오폴트 황태자가 준 목걸이에요.”
그녀의 목소리가 천둥보다 더 크게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