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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정수정의 임신


눈을 떴을 때, 하진의 토끼귀 머리띠가 내 눈앞에 삐죽 올라와 있었다. 그 귀 밑에선, 부스스한 얼굴로 내 팔을 베고 새근새근 자고 있는 하진이가 있었다. 입술은 벌어져 있고, 숨결은 따뜻했다. 모습은 마치 유리로 만든 작은 인형 같았다. 반대쪽 팔에는 아린이가 조용히 기대 자고 있었다. 보송한 얼굴을 내 어깨에 묻고선, 잔잔하게 숨을 내쉬는 모습섹시했다. 그런데, 가랑이 쪽이 축축했다. 시선을 내려다보자, 시아가 내 자지를 손에 꼭 쥐고 있었다.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한참 울다 지친 표정 그대로 잠들어 있었다. …이렇게라도 나한테 안겨 있고 싶었던 걸까? 나는 조용히 손을 뻗어 시아의 머리를 쓸었다.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체온이 전해졌다. “피크닉이나 갈까…” 요즘 서명의 일로 아내들을 잘 보살피지 못했다. “피, 피크닉이요?” 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린은 놀란 듯 나를 바라보았고, 하진은 박수를 쳤다. “대박! 대박! 내가 도시락 만들께! 토끼 도시락!” 그 말에 아린도 살짝 웃었다. “좋네요. 한강 쪽 그늘진 데, 요즘 바람 좋던데요.” "랑이, 너무너무 좋아요!!! 제가 주먹밥 만들께요" 그렇게, 하진은 토끼 도시락을, 아린은 계란말이와 반찬들을, 시아는 조그마한 주먹밥을 만들었다. 부엌은 분주했다. 서로 말은 적었지만, 묘하게 조화로웠다. 나는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봤다. 토끼 머리띠를 한 채 주방을 어슬렁거리는 하진, 조용히 반찬을 담는 아린, 어색한 손놀림으로 주먹밥을 굴리는 시아. 도시락 가방 위엔 시아가 쓴 쪽지가 놓였다. “랑이... 사랑해요. 우리 셋은 모두, 당신 거예요.” 강가. 돗자리 위에 도시락을 펼쳤다. 나는 시아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시아는 내 귓볼을 만지면서, 콧노래를 불렀다. 아린은 조용히 과일을 깎아 내 입에 넣어주었다. 하진은 아직도 토끼 머리띠를 하고, 돗자리 주변을 깡총거렸다. 아직 컨셉에서 벗어나지 못한 눈치다. 바람이 불고, 우리 넷만 있는 듯한 조용한 세계가 펼쳐졌다. “랑이, 주먹밥… 맛있어요?” 시아가 수줍게 물었다. “응. 진짜 맛있어.” 말하자마자, 시아의 얼굴이 핑 도는 복숭아처럼 물들었다. 하진은 깔깔 웃으며 외쳤다. “사실… 하진 토끼도시락은 다 실패했어요! 안에 김만 있어요!” 우리는 한 박자 늦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린조차, 소리 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 순간, 나는 생각했다. 왜 이런 평화로움을 한달짜리 아슬아슬한 줄타기로 살아가야 하는지. 이 나라의 시스템이라는 것에 치가 떨렸다. 생각할수록, 서명의 길이 옳은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진이 도시락 가방에서 채찍 하나를 꺼내며 내 귀에 속삭였다. “태유야, 오늘 밤엔… 너가 강간당할 차례니까...” 시아가 하진을 향해 눈을 부라렸고, 아린은, 무심한 듯이 보이면서도, 나를 향해 살짝 웃었다. 나는, 이 네 사람과 함께하는 지금이— 정말로 꿈처럼 좋았다. ㅡㅡㅡㅡㅡ KSL로부터 두번째 지령이 왔다. 16자리 패스워드를 단말기에 입력하고, 지령을 확인했다. > [KSL-접속 확인] [2차 미션] 첨부된 여성 104인의 D레벨 여성에 대하여, ▷ 배우자 자동배정 알고리즘에서 제외하시오 ▷ 별도의 추가 명령이 하달되면, 해당 여성들을 추가 지시에 따라 수동 배정하시오. ▷ 배정될 남성 배우자 리스트는 추후 전달 예정 ※ 보안 철저 ※ 사전준비 : 당월 28일까지. 스크롤을 넘기자, 여성 이름과 등록번호가 정렬된 엑셀 시트가 나타났다. 나는 박정우를 불렀다. "아. 저도 말씀드릴 것이 있어, 찾아뵈려던 중 이었습니다" 궁금한 것들이 많던 나는 일단 KSL의 단말기를 그에게 보였다. "부위원님, 이 요구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저희가 가진 정보에 따르면, KSL은 배정 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배정 장사요?" "네, D레벨 남성들은 자동으로 배우자가 지정되는데, 그들도 사람인 이상,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사귀던 여자가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네, 그렇겠죠" "D레벨이라고, 다 가난한 건 아니니까, 사업에 성공을 하거나, 유산을 받거나... 어쨌든, 돈을 KSL로 내면, 원하는 여성과 배정해 준다고 합니다." "아... 그 돈이 얼마나 되죠?" "보통 2억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럼... 104명이면... 208억원..." "네, 맞습니다" 매달 208억... 내게 준 50억이 푼돈인 이유가 있군... "혹시, 그 D레벨 여성이 임신을 한다거나 하면...." "보통 그 여성들도 좋아하던 남자와 배정을 기다리기 때문에, 은밀하게 피임을 하기도 하고.. 환불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박정우는 말을 이어갔다. "D레벨만이 아닙니다. A에서 C레벨도 배정장사를 합니다." "아니, 왜요? 그들은 선택권이 있잖습니까?" "다만, 선택 가능한 시간은 월 말일 몇 시간뿐이고, 늦으면 조건 좋은 사람들은 사라집니다. 그래서, 선택권을 미리 행사하려는 A에서 C레벨 남성들이 KSL에 돈을 냅니다." "선택 자체를 사전에 고정 시키려고?" "네. KSL은 사전 명단을 보내고, 그걸 시스템에서 ‘선택된 것처럼’ 미리 배정하게 만듭니다." "나에게 사전 수동배정을 하게 한다?" "네, 맞습니다. 엄청난 규모의 잇권 사업이지요." "정말 나쁜놈들이군요..." "이건 그들이 하는 여러가지 비리의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수익사업 말고도, 그들의 사적 욕망을 위한 다양한 조작들도 많을 겁니다" "네..." 나는 주먹을 쥐었다. "그럼, 이번 지령은 어떻게 하지요?" "당장은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때를 기다려야지요. 증거를 잘 모아두면 좋을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아참, 그리고 저에게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신건...." 박정우가 조용히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잠시 망설이더니, 화면을 나에게 넘겼다. “…직접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영상이 시작되자, 정수정의 얼굴이 떴다. 나는 숨을 멈췄다. 거칠게 묶은 머리. 바랜 후드티 위로 얼룩이 져 있었고, 어깨는 깡말랐지만 눈빛만큼은 또렷했다. 오래된 나무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낡은 벽지를 등진 채. 그녀는 똑바로 렌즈를 쏘아봤다. "야, 씨발놈… 진태유~" 하… 첫 마디 들었을 뿐인데, 눈물이 쏟아졌다. "병신, 자꾸 기집애처럼 쳐울면 내가 니 자지 뽑아버린다고 했지?" "응… 누나…" 나는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영상 속 수정은 카메라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야. 너 아빠된다." 뭐…? 순간 멈췄다. "너, 아빠 된다고, 병신아. 나 지금 임신 3주차야. 방금 검사했어." 숨이 멎는 느낌. 이해가 되지 않았고, 되려는 순간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니가 이 영상을 볼 땐, 난 검찰에 있을 거야. 조금만 기다려. 이 누나가, 너 지켜주러 간다. 씨발놈, 울지말고 기다려" 수정이 누나의 눈에도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영상이 툭, 끊겼다. 나는 폰을 내려놓지도 못한 채 그 화면을 계속 바라봤다. 낡은 벽지, 희미한 조명, 그 속에서 끝까지 눈을 떼지 않던 그 여자. 정수정 눈에도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눈물이 다시 고였다. 박정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방금 영상, 저희 측 요원이 직접 찍은 것입니다.” “…정말… 임신한 게 맞습니까?” “네. 저희 조직 의료진이 직접 확인했습니다. 임신 3주차입니다.” 강원도 산속 허름한 시골집. 3주전 나는 그녀와 미친듯 사랑했다. “근데 검찰에는 왜...?” 박정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출산관리법 제1조 제8항. 임신부의 권리. 대한민국 내 모든 임신부는, 범죄 여부를 불문하고 법이 정한 모성보호 기간인 출산 후 2년까지 형사소추를 유예한다." 박정우는 또렷한 목소리로 이어갔다. "출산관리법은 모든 형법과 국가보위법 위에 있는 특별법입니다. 사실상 대통령의 불소추 특권과 동일한 효력을 갖습니다. 저희 조직 법률전문가들도 확인했습니다. 안심하셔도 될것 같습니다." "정수정 동지는 최고위원님께 오기 위해, 자수한 겁니다." "아!!! 그래서, 지금 검찰에..." "네. 현재 검찰에서 보호조사 중입니다. 며칠 내로 조사를 마치고 나면, 아마도 최고위원님 댁으로 귀가 조치될 겁니다." "그럼 2년 후에는요?" "기소되고, 처벌되겠죠."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2년 후에는 제가 지킬겁니다. 반드시..." “그 말씀, 꼭 지켜주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그 약속 하나 믿고 싸울 겁니다.” 수정이가 오고 있다. 나에게... ㅡㅡㅡㅡㅡ 불도 안 켰다. 소파에 주저앉은 채, 폰만 멍하니 쥐고 있었다. 정수정의 영상은 끝났는데, 나는 거기서 못 나왔다. 숨은 쉬는데, 속은 비어 있었다. “…임신…” 입에서 흘러나온 단어는 꿈처럼 멍청했다. 이 집에 정수정의 자리를 만들어 둬야 했다. 나는 아린, 시아, 하진을 거실로 불렀다. 세 사람 모두 말없이 내 앞에 앉았다. 서로 눈치를 보며, 숨죽인 채 분위기를 살폈다. 나는 소파에 기대 앉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가슴엔… 아직도 박혀 있는 큰 돌이 하나 있어." "내 첫번째 아내, 정수정.” 말을 꺼내는 순간, 세 아내의 표정에 살짝 그늘이 스쳤다. “시아, 아린, 하진이. 난 너희 다 사랑해. 진심이야. 하지만…” 나는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정수정은 나와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국가를 거부했고, 반정부 조직에도 들어갔던 사람이야.” “그녀가 지금, 임신했어. 그리고 곧 이 집으로 오게 돼.” 숨소리가 얕게 흔들렸다. 세 사람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상의하려고 부른 게 아니야. 무조건, 이 집에 정수정의 자리를 만들어줘.” 내 표정이 어느 때보다 차가와 보였을 것 같다. “그게 싫다면… 이 집에서 나가도 돼.” 짧은 정적. 하진이 뭔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눈이 잠깐 흔들렸지만, 곧 단념한 듯 고개를 돌렸다. 시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랑이가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면, 나도 노력해볼게요.” 조용한 목소리였다. 아린은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다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난… 그냥… 버리지 않으면 돼.” 계속 머뭇거리던 하진이, 웃으며 말했다. “그 정수정 언니 말인데… 나보다 예쁘진 않겠지? 하핫~" 하진이에겐, 나도 그냥 웃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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