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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50억


오전 8시. 발신자 표시제한. 진동모드로 떨리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누구지?’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사이, 통화 버튼을 누르자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오늘 17시. 서울시 영등포구 선유동1로 20. 외부 누설 금지. 반드시 혼자 오시기 바랍니다.” 뚝. 기계음이 끝나자마자, 통화는 일방적으로 종료됐다. 심장이 묘하게 쿡 찔리는 기분이었다. 그냥 광고 전화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광고가 그런 식으로 오진 않는다. 그날 오전, 출근했다. 김영선을 찾았다. 김영선은 반갑게 나를 보며 인사했다. "진태유씨, 지난번 우리쪽 영업팀에서 요청한 개발은 잘 되고 있어요?" 무슨 개발? 나한테 뭘 요청했지? "진태유씨, 우리 옥상에서 잠깐 진행사항 얘기좀 할까요?" 나는 그를 뒤따라 옥상으로 향했다. “진동지, 무슨 일이라도 있소?” 나는 망설이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방금, 이상한 전화를 받았습니다. 발신자 표시제한이었고… 기계음으로 어떤 장소를 지정해서 오라고 하더라구요.” "KSL이군요" 김영선의 얼굴이 단번에 굳었다. “진동지… 그건 위험한 호출이오.” "그럼, 저는 어쩌죠?"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들이 당장 당신을 해치진 않을 거요. 마스터 계정도 있고… 아직은 당신이 자산이오. 하지만 중요한 건, 어떤 경우에도 마스터 계정을 넘겨선 안 된다는 거요. 그렇게 되면 우리 쪽도 막을 수 없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들은 처음엔 회유를 할 가능성이 높소. 김도훈처럼" "그러면요?" “그럴 경우엔, 그들이 원하는 것보다 5배를 요구하시오.” “...5배요?” “그들이 처음에 ‘돈’으로 당신을 회유하려 들면, 당신이 탐욕스러운 사람이라 믿게 해야 해요. 그게 가장 의심을 피할 수 있는 길이오. 그들에게 돈은 거의 휴지조각 같은거라서.” “…예를 들어 1,000만원 주겠다면, 5,000을 달라고 하면 된다는 거군요.” “맞소. 실제로 그 돈을 쓰시오. 그들이 감시하고 있을 수 있으니, 돈이 목적임을 확신시켜 주는게 좋소.” 나는 어이없게 웃었다. 개이득이네. 5,000이면 개똥 중고차부터 바꿔야지... “진동지.” 김영선은 진지한 눈빛으로 내 어깨를 짚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들에게 협조하는 척 하시오. 그게 당신의 안전을 지키는 길이오. 위험한 상황이 오면… 바로 내게 전화하시오. 도청이든 뭐든 나중 문제요.” “네.” “진동지의 안전은… 우리 서명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없이 그의 손을 내려다봤다. 주먹을 쥔 그의 손이 조금은 믿음직해 보였다. "근데, 말투는 왜 그래요?" ㅡㅡㅡㅡㅡ 도착한 곳은 조용한 주택가 골목. 주소가 가리킨 건물은 간판도 없고, 마치 비어 있는 창고처럼 보였다. 허름하지만 누군가 숨겨놓은 티가 났다. ‘띵동.’ 건물 앞의 키패드를 통해 벨을 눌렀다. 기계음이 울렸다. “패스워드 16자리를 입력해주십시오.” 패스워드? 김도훈이 메모로 남겨준 그 숫자들… 내가 기억한 바로는 16자리였다. ‘삑.’ 문이 열렸다. 안쪽은 좁고, 어두웠다. 길은 단 하나. 복도를 따라 천천히 걸어 들어가자, 안쪽에 철제문 하나가 서 있었다. 나는 문을 두드렸다. …아무 응답도 없다.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돌렸다. ‘딸깍.’ 문이 열렸다. 방 안은 의자 하나, 테이블 하나. 테이블 위엔 서류 한 장뿐. 그때, 천장 스피커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기계음도 아니고, 사람 목소리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 “진태유 씨, 보이는 의자에 앉아주세요.” 나는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숨소리가 안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진태유 씨는 마스터 계정을 가지고 있습니까?” “…네.” “마스터 계정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는?” “가임자를 불임으로 조작하고, 케어사로 배정했더군요.” 숨소리조차 없는 적막. 3분 쯤 흘렀을까?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에게 그 계정을 넘길 의향이 있습니까?” “…아뇨. 안 넘길 겁니다.” “이유는요?” “…그게 제 밥줄이라서?”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러더니 조금 부드러워진 목소리. “사실 우리도 그 계정을 직접 받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 계정을 가지면 여러모로 피곤해지거든요. 국가 감시도 있고, 내부 갈등도 생기고…” “…?” “그렇다면, 당신이 계속 관리를 하고 우리가 정당한 보수를 지급하는 것에 동의하십니까? 김도훈처럼. 당신은 우리가 시키는 일만 가끔 해주면 됩니다." “보수는... 얼마요?” “10억 어떠십니까?” 헉. 천만원이 아니라 10억이라고? 한번만, 믿어보자. 김영선... 제발. “아뇨. 50억은 받아야 합니다.” “음…좋습니다. 돈은 세탁된 계좌로 송금될 거고, 계좌와 연결된 카드가 오늘 택배상자에 배송 될 것입니다." 뭐야. 이걸 그냥 바로 OK한다고? “테이블 위 계약서의 금액란에 50억이라고 쓰고, 서명해주세요.” 나는 떨리는 손으로 펜을 들었다. “…저기요. 50억이 공이 몇 개죠?” 대답은 없었다. 나는 혼잣말로 중얼이며 써 내려갔다. "일십백천......억, 십억..." ₩5,000,000,000 싸인했다. 씨발, 될 대로 되라지. 그 순간, 스피커에서 다시 목소리가 흘렀다. “아, 깜놀이는 잘 크고 있나요?” 숨이 멎었다. 깜놀이? “……뭐라고요?” “당신이 협조하지 않는다면, 가족의 안전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깜놀이. 아린이와 시아. 그리고 나만 알고 있는, 우리 아이의 태명. 이 새끼들, 도대체 뭘 알고 있는 거야… 아니, 언제부터…? 어떻게? ㅡㅡㅡㅡㅡ 깜놀이를 알고 있는 놈들... 우리 집에 도청장치가 있을까? 혹시, 아린이가? 절대 그럴리는 없었다. “택배요—” 심장이 순간 쪼그라들었다. 나는 현관문을 열기도 전에 외마디 비명처럼 튀어나갔다. 택배기사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상자. 가볍다. 너무 가볍다. 뚜껑을 열자— 카드 딱 한 장. 검은색. 왼쪽 상단엔 작게 적혀 있었다. S PLATINUM. 손에 쥔 카드가 너무 얇았다. 이게 50억짜리라고? 소파에 주저앉아 멍하니 바라봤다. 50억을 쓰려면... 5천만 원짜리 차를 100대 사야해… 씨발... 김영선은 이돈을 최대한 쓰라고 했다. ㅡㅡㅡㅡㅡ "제일 비싼 거요!" 내가 그렇게 외쳤을 때, 매장 전체가 멈춘 것 같았다. 직원 한 명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옆 직원 팔을 툭 쳤다. 그리고는 우르르 몰려들어왔다. "어떤 브랜드를 찾으세요?" "아뇨, 그런 거 없고요. 그냥 최고가 제품으로 우리 세명, 완전 세팅해주세요." "세… 분이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뒤에 서 있던 시아랑 아린이 동시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야… 랑이 너 왜 이래요?" 시아가 귓속말하듯 물었고, 아린은 날 슬쩍 잡아당겼다. "혹시 로또 됐어요? 아니면… 누굴 털었어요?" 나는 헛웃음 섞인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응. 좀 큰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잘 돼서… 성과급 받은 거야." "도대체 얼마를 받았길래..." 시아가 황당하다는 듯 웃었고, 아린은 입을 틀어막으며 가방을 내려놓았다. "진짜 사줄 거예요?" "오늘은 걱정 말고 그냥 골라. 나 진짜 기분 좋아서 그런 거니까." 두 사람은 눈치를 보다가도, 어느 순간부터 서로 가방을 보여주며 신나게 웃고 있었다. 직원들은 이미 샴페인을 내오고, 우리를 VIP룸으로 안내했다. 가방, 옷, 구두 등등등 카드는 조용히 긁혔다. ㅡㅡㅡㅡㅡ “제일 비싼 차 얼마예요?” 내가 묻자, 전시장 매니저가 슬쩍 눈썹을 올렸다. “요즘은 한국차가 제일 비싸죠. 어떤 모델 찾으세요?” “제일 비싼 거요.” 그 한마디에 매장 공기가 묘하게 바뀌었다. 직원들 사이로 빠르게 눈빛이 오갔고, 몇 명은 허둥지둥 자료를 들고 뛰어갔다. 잠시 뒤, 유광 블랙의 괴물 같은 차 한 대가 쇼룸 한복판에 들어왔다. “이 모델은 9억 원입니다. 하지만 일시불 결제 하시면 8억 오천만원까지 드릴 수 있습니다.” “씨발, 누가 니 맘대로 깎으래?” 직원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네?” 나는 천천히 카드를 내밀었다. S PLATINUM 직원은 어버버 하더니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키 드리겠습니다.” “응, 그리고 등록이랑 보험이랑 전부 ‘진태유’로. 오늘 몰고 나갈 거니까.” 차 문이 올라가듯 열리고, 운전석에 몸을 실었다. 시아랑 아린은 밖에서 눈이 휘둥그레진 채 서 있었다. "야! 타~" 50억. 아직 40억도 넘게 남았어. 씨발, 써도써도 안줄어. ㅡㅡㅡㅡㅡ “오늘 목욕시켜주는 사람, 천만 원.” 시아랑 아린이 동시에 돌아봤다. “…진짜야?” “당연하지" 둘이 눈치 보더니, “그럼 난 물부터 틀게!” “샴푸는 내가 할께!” "자지는 내가 닦아." "나는 똥꼬?" “자지 먼저 만져서 좆물 나오게 하면 1억.” “꺄악—!” “아 미쳤냐고ㅋㅋㅋ” “진심이야?” 나는 카드 꺼내서 책상에 툭 올렸다. “S플레티넘. 한도 없음.” 그리고 아린이 먼저 내 다리 사이로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시아는 옆에서 부들부들. “언니 반칙이야…” “1억이잖아. 너도 와.” “똥꼬 대면 2억.” “꺄아악!!” “진짜 미쳤어, 이놈아!!” 그날 밤, 내 자지는 두 여자한테 박박 닦이고, 뽑히고, 시원하게 퍼졌다. ㅡㅡㅡㅡㅡ 시간이 지나고 시아와의 어쩌면 마지막, 조용한 밤이었다. 시아는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보고 있었다. 등을 돌린 채, 조그맣게 입술을 깨물며. “시아야…”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눈가가 젖어 있었다. “혹시… 나, 안 된 거면 어떡하지…” 두 손을 꼭 쥔 채, 시아가 속삭였다. “하느님, 이 남자 옆에 남게 도와주세요.…” 나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우리는 천천히 서로에게 다가갔다. 말이 필요 없었다. 시아의 손이 내 셔츠 단추를 풀었다. 그녀의 손은 조심스럽고, 절실했다. 그녀는 내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속삭였다. “내 보지에 넣어줘요. 꼭 임신할꺼에요…” "우리, 홍당무,, 이젠 보지 소리도 능숙해졌네..." 나는 그녀를 안았다. 우린 느리게, 오래도록 이어졌다. 시아의 몸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이, 눈물이 되어 내 어깨를 적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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