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85화
85.
“이보게, 일재. 나일세.”
이내 봉주가 막걸리 한 잔을 따른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가 뭐로 날 기억하는진 몰라도 이제 내 이름은 임봉주일세. 그동안 잘 지냈는가?”
툭 던지듯 건넨 말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온기는 분명했다.
“서로 생사도 모른 채 세월이 이리 흘렀는디, 자네와 이렇게 다시 인연이 맺어질 줄 누가 알았겠나.”
그는 더 말을 잇지 않았다. 대신 한 발짝 물러난 채, 눈앞의 자리를 오래 바라보았다. 긴 시간 동안 쌓여 온 기억을 꺼낼 필요 없이 그저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자리였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무혁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굳이 끼어들 필요도, 의미를 덧붙일 이유도 없는 시간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바람이 한 번 지나갔다. 나뭇가지가 미세하게 흔들리고, 풀잎이 서로 스치는 소리가 잔잔하게 번졌다. 그 소리가 잦아들 즈음, 봉주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표정에는 아무런 동요도 남아 있지 않았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얼굴로, 그저 할 일을 끝낸 사람처럼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이만 돌아가야겠구먼.”
무혁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나란히 발걸음을 옮겼다. 내려가는 길은 올라올 때보다 더 조용했으나, 그 침묵은 어색함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여운에 가까웠다. 굳이 나누지 않아도 되는 이야기들이 그 사이를 채우고 있었다.
등 뒤로 멀어지는 자리는 다시 고요 속에 잠겼다.
이름 하나 남지 않은 채, 누군가의 기억 속에만 겨우 붙들려 있는 자리였지만, 그날만큼은 분명히 누군가가 다녀간 흔적이 남아 있었다.
* * *
어느새 계절은 완전히 여름으로 넘어와 있었다.
짙어진 초록이 시야를 가득 채우는 요즘, 하임은 도시에서의 생활에 조금씩 발을 붙이고 있었다.
화요일과 목요일에는 약초를 베이스로 한 건강 차 카페에서 일했다. 말린 약재의 향을 구분하고, 물의 온도와 우려내는 시간을 조절하는 일은 생각보다 손에 잘 맞았다. 손님 대부분이 중장년층이나 노인들이라, 차를 내어 주며 건네는 짧은 설명에도 자연스럽게 귀를 기울여 주었다.
“이건 폐 쪽에 좋고, 이건 열 내리는 데 좋아요.”
손님들은 어느새 그녀를 ‘심마니 아가씨’라 부르며 친근하게 대했다. 돌아갈 때면 손에 쥐여 주는 간식이나, 따뜻한 말 한마디가 따라붙었다.
주말이면 수목원으로 향했다. 넓게 펼쳐진 녹지 사이를 오가며 식물 해설을 맡았는데, 낯설 줄 알았던 일이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어떤 식물이 어디서 자라고,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설명하는 일은 몸에 밴 감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식물은 직사광을 오래 받으면 엽면이 쉽게 손상됩니다. 반그늘 환경에서 수분 유지가 잘 되는 토양을 선호하는 편이에요.”
차분하게 이어지는 안내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문 용어를 어렵지 않게 풀어내는 방식이 인상적인지, 끝날 즈음이면 여기저기서 긍정적인 반응이 따라붙었다.
그사이에서 하임은 또 하나의 재능을 발견했다. 사진이었다.
무혁이 선물해 준 카메라를 처음 손에 쥐었을 때만 해도 그저 기록을 위해 셔터를 눌렀을 뿐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시선이 달라졌다. 빛이 떨어지는 각도, 바람에 흔들리는 잎의 방향, 꽃이 가장 또렷하게 살아나는 순간을 자연스럽게 잡아내고 있었다.
구도 감각은 타고난 것에 가까웠고, 기계 다루는 법 역시 빠르게 익혔다. 찍을수록 결과물이 달라졌다.
그래서 월, 수, 금요일에는 따로 시간을 내 사진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낯선 도시의 하루가 그렇게 하나씩 자리를 잡아 가고 있었다.
세찬 여름 소나기가 쏟아지던 어느 주말, 수목원 대신 카페로 향하는 발걸음이 자연스러웠다. 이런 날에는 해설 프로그램이 일찌감치 취소되기 마련이라, 출근해 줄 수 있냐는 카페 사장의 연락이 오곤 했다.
유리창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일정한 리듬으로 이어졌고, 실내에는 따뜻한 김과 약재 향이 은은하게 번졌다.
하임은 인삼을 얇게 저며 찻잔에 넣고, 물의 온도를 맞춰 천천히 우려냈다. 쓴맛이 튀지 않도록 시간을 조절한 뒤 찻잔을 받침 위에 올려 내놓았다.
“인삼차입니다. 맛있게 드세요.”
단골 어르신이 찻잔을 받아 들며 흐뭇하게 웃었다. 한 모금 천천히 음미하던 그녀가 슬쩍 시선을 올렸다.
“하임 양, 남자 친구는 없죠?”
“네?”
“손 보니까 반지도 없고, 깨끗하길래.”
어르신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으로 떨어졌다.
“아.”
하임도 제 손을 내려다봤다. 일할 때는 반지가 상할까 싶어 빼 두는 게 습관이 된 참이었다. 아무것도 끼지 않은 손이 유난히 허전하게 느껴졌다.
“이번에 우리 손자가 해외에서 유학하다가 들어왔는데, 한 번 만나 볼래요?”
하임이 입을 열기도 전에 설명이 덧붙었다.
“내가 괜히 말 꺼낸 게 아니에요. 우리 손자가 좋아하는 아이돌이 있는데, 하임 양이랑 어찌나 닮았는지. 딱 보면 바로 반할 거라니까.”
잔을 내려놓으며 어르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법대 졸업했는데 허우대도 멀쩡하고, 애도 성실하니 착해. 한 번만 만나 봐요, 응?”
하임은 난처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작게 웃었다.
“저 결혼했어요, 어르신.”
하지만 어르신의 반응은 미묘했다. 믿지 못하겠다는 눈치가 역력했다.
“에이, 그럴 리가. 이렇게 앳됐는데? 20대 초반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네. 근데 정말 남편 있어요. 결혼한 지도 얼마 안 됐는걸요.”
덧붙여진 말에도 어르신의 의구심은 좀처럼 풀리지 않는 듯했다. 여전히 믿기 어렵다는 기색으로 그녀의 얼굴과 손을 번갈아 바라보던 순간이었다.
“하임이 남편, 여기 있습니다.”
낮게 깔린 음성이 등 뒤에서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고개를 돌린 하임의 눈이 크게 뜨였다.
“……무혁 씨?”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이었다. 순간 놀란 기색이 스쳤다가 이내 얼굴이 환하게 풀렸다. 문가에 서 있던 무혁이 느긋한 걸음으로 들어왔다. 빗방울이 묻은 셔츠 소매를 대수롭지 않게 털어 내며 하임의 옆에 섰다.
“퇴근 시간 맞춰서 데리러 왔어.”
평소와 다르지 않은 말투였지만, 옆에 서는 순간 공기가 묘하게 달라졌다. 하임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어르신 쪽을 돌아봤다.
“어르신, 이분이 제 남편이에요.”
그들의 시선은 이미 무혁에게로 옮겨 간 상태였다. 잠시 그들 사이에 관찰하는 듯한 침묵이 흘렀다. 객관적으로 봐도 눈에 띄는 외모에, 말없이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압도하는 기세가 자연스럽게 묻어 있었다.
“아이고, 남편도 허벌나게 멋있네…….”
헛기침으로 어색한 분위기를 넘긴 어르신은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무혁은 별다른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저 하임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은 채, 여유 있게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 그녀가 시계를 힐끗 보더니 옅게 웃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잠깐만 기다려요.”
머지않아 퇴근 시간에 맞춰 카페를 나오는 그녀의 손엔 따듯한 유자차가 들려 있었다. 비 오는 날엔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드라이브를 즐기는 것이 일상 속 소소한 행복이었다.
차가 도심을 벗어나 교외로 접어들수록 도로 위의 차는 점점 줄어들었고, 빗줄기는 더 굵어졌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다, 시야가 트이는 지점에서 무혁이 차를 멈췄다. 잔잔한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자리였다.
비가 세차게 내리는 탓인지 주변에는 다른 차량 하나 보이지 않았다. 고요함 속에서 빗소리만이 균일하게 차를 두드리고 있었다. 따로 말을 꺼내지 않아도, 지금 이 순간이 충분히 좋다는 걸 서로 알고 있는 듯했다.
그때, 무혁이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허벅지를 가볍게 두드렸다.
“올라와.”
짧게 떨어진 말에 하임은 망설이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몸을 움직여 그의 허벅지 위에 올라앉았다. 서로 마주 본 상태에서 시선이 겹쳤다. 무혁의 손이 느슨하게 그녀의 허리춤을 매만졌다.
“그러게, 내가 반지 끼고 다니라고 했을 텐데.”
낮게 깔린 목소리에 하임이 고개를 작게 저었다.
“기스 나는 거 싫단 말이에요.”
짧게 답하자 무혁이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하여간 고집은.”
그녀를 느른하게 어루만지는 손길엔 여유와 애정이 흘러넘쳤다. 하임은 편히 머리를 기댄 채 무혁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익숙한 동시에 자꾸만 새롭게 느껴지는 미모를 보자면 심장이 괜히 한 번씩 콩닥거렸다.
이내 충동처럼 몸이 기울며 하임의 입술이 그의 것에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무혁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치 한 번 더 해 보라는 듯, 느긋하게 기다리는 눈빛이었다.
“사랑해요.”
“…….”
작게 내뱉은 고백이 빗소리 사이로 스며들었다. 그 말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다시 입술이 맞닿았다. 이번에는 조금 더 깊게 파고드는가 싶더니 무혁이 그녀의 목덜미를 단단히 감쌌다.
그의 혀가 밀려 들어오기 무섭게 차 안의 공기가 서서히 달아올랐다. 밖에서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안쪽의 온도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서로의 숨결이 가까워지며 빗소리는 점점 멀어졌다.
그날의 풍경은 그렇게,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은 채 오래도록 이어졌다.
<산삼보다 더 귀한 신랑을 캤습니다.> 본편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