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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화 82화


82. “요즘 자격증 공부한다더니 경호원 자격증이었어?” 하임이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물을 건네며 물었다.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삼동이가 타올로 땀을 닦았다. “형아들이 그랬는데, 운동 신경을 키우면 감각도 더 예민해진대. 하임이 이제 전처럼 못 들으니까 삼동이가 대비해 줘야지. 경호원 자격증도 따고 다른 공부도 많이 할 거야.” 멈칫한 하임의 어조가 한층 조심스러워졌다. “……내 병에 대해 알고 있었어?” “응.” “언제부터?” “음, 처음부터?” “……근데 왜 아는 척 안 했어?” “하임이가 비밀로 하고 싶어 했으니까.” 그녀가 힘없이 푸시시 웃었다. 그러고 보니 삼동이와 어릴 적부터 함께 하면서 느슨하게 군 적이 종종 있었을 것이다. 그가 아는 체를 하거나 물어본 적이 없었기에 눈치챘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한 터였다. “미리 말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리고 비밀 지켜 줘서 고마워, 삼동아.” “하임이는 삼동이의 하나뿐인 친구라 소중해. 아프지도 말고 다치지도 마.”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삼동아. 넌 내 하나뿐인 친구잖아. 경호원 같은 것도 안 해 줘도 되니까 네가 하고 싶은 거 마음껏 해.” “그게 삼동이가 하고 싶은 거야. 엄청 강해져서 사랑하는 사람들 지켜 주는 거.” 삼동이가 헤헤 웃자 하임도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봄기운이 막 올라오기 시작한 마당 위로 두 친구의 웃음이 아무렇지 않게 오래 머물렀다. 하임은 삼동이가 마저 운동하는 걸 구경하다가 마칠 때쯤 아이스크림을 들고 왔다. 야외 벤치에 나란히 앉아 시간을 보내던 중, 삼동이가 작게 중얼거렸다. “우리 마을 사람들 보고 싶다.” “그러게. 누가 제일 보고 싶어?” “동민이랑 보민이. 그리고 말숙 할머니랑 심순 할머니. 이장님은, 음, 솔직히 안 보고 싶어.” 하임이 조그맣게 웃었다. “다시 마을로 돌아가고 싶어?” 삼동이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돌아가도 하임이랑 영감님은 없을 거잖아. 삼동이는 여기도 좋아.” 뒤늦게 집이 불에 홀라당 탔다는 걸 알게 된 하임은 봉주가 그랬다는 사실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 하마터면 방화로 처벌을 받을뻔했지만, 상황이 상황이었던 만큼 무혁이 손을 써 준 덕에 조사만 받고 풀려났다고 했다. 다만 이장님은 그들의 정체를 몰랐다고 해도 직접 접촉하고 결과적으로 사건에 가담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하여 관련 혐의로 현재 조사를 받고 있었고, 처벌을 피하긴 어려울 것으로 보였다. “하임이랑 형아 결혼할 때 삼동이가 축가 부르면 안 돼?” “그렇게 해. 나야 고맙지.” “바울이 형아랑 같이 부를까? 바울이 형아 노래 잘해. 찬양팀도 했대.” “그분이 너 복싱도 가르쳐 주신다며. 다재다능한 분이시네.” “응. 근데 바울이 형아는 무혁이 형아가 최고라고 그랬어. 최고의 상사. 왜 그런지 알아?” “왜 그런 건데?” “공포와 보복의 리더십. 거기선 그게 이거래. 카리스마로 조직을 이끌고, 적들에겐 어떻게든 당한 걸 응징하는 거.” 삼동이가 엄지를 치켜들자 그녀가 입꼬리를 흐릿하게 끌어 올렸다. “다들 형아 무서워하지만 존경한다고 했어.” “존경? 그건 그럴 만하지.” 무혁 씨가 얼마나 멋있는데. 어색하게 시작된 미소가 어느새 자연스럽게 번져 있었다. 무혁을 칭찬하는 말에 당연하다는 양 고개까지 끄덕이고 있는 스스로가 조금 우스웠다. 무서운 상사든 공포의 리더십이든, 그런 건 상관없었다. 하임에게는 무혁이라는 이름 하나로 충분했다. 삼동이가 뭐라 더 덧붙이려는 순간, 차고 쪽에서 자동문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가 울렸다. “형아 왔나 보다.” “……!” 그녀는 곧장 벌떡 일어나 옆집 차고 쪽으로 뛰어갔다. 막 운전석에서 내린 무혁에게 돌진하듯 안기자 그가 든든하게 받쳐 안으며 낮게 웃었다. “넘어지면 어쩌려고 뛰어와.” “오늘 일찍 왔네요?” 하임이 눈을 반달처럼 접으며 올려다보자 무혁의 시선이 잠깐 머물렀다. 그때, 옆에서 또 한 번 차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이어졌다. 순간 흠칫하며 돌아본 그녀는 반가운 얼굴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어? 소진 언니?” 보닛을 돌아오는 소진의 입가에는 익숙하고도 조금 짓궂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하임 씨, 며칠 사이에 안색이 너무 좋아졌는데요? 역시 사랑이 최고의 보약인가 봐. 부러워서 못 살겠네, 정말.” “언니! 여긴 어쩐 일이세요?” 소진이 한 손에 들고 있던 묵직한 봉투를 들어 보이며 덧붙였다. “다 같이 파티하고 싶어서 이 인간 좀 졸랐어요.” “파티요?” “하임 씨 완쾌 기념, 그리고 내 퇴직 기념으로?” 퇴직이라니. 하임은 내심 놀랐으나 어딘가 홀가분해 보이는 소진의 모습을 보며 질문을 도로 삼켰다. “하임 씨랑 술 한잔하고 싶은데 이 인간이 하도 빡빡하게 굴어서 알코올 프리로 사 왔어요. 괜찮죠?” “네, 그럼요.” “마침 성기도 와 있다면서요. 얼른 가요.” 하임에게 팔짱을 낀 소진이 친근하게 몸을 붙이며 웃었다. “집 구경도 시켜 줄 거죠? 이렇게 좋은데 구경도 못 하고 가면 서운하잖아.” 소진이 그녀를 이끌다시피 발걸음을 옮기자 무혁도 묵묵히 뒤를 따랐다. * * * 손님들이 모두 돌아간 뒤 집 안은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식탁 위엔 잔과 접시들이 아직 그대로였고, 한동안 이어졌던 웃음과 말소리의 여운만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하임은 거실 소파에 축 늘어진 채 반쯤 눈을 감고 있었다. 볼에는 은은하게 핑크빛이 올라온 데다가 숨결이 평소보다 조금 느슨하게 흘렀다. 처음엔 무혁이 건네준 무알코올만 마시다가, 어느 순간부터 삼동이가 마시던 과실주가 자꾸 눈에 들어온 터였다. 색도 예쁘고 향도 달아서 별생각 없이 한 모금 뺏어 마신 게 시작이었다. 그게 몇 번 더 이어지고, 들키지 않게 슬쩍슬쩍 입을 대다 보니 어느새 잔이 비어 있었다. 평소 술을 입에 대지 않던 몸이라 그런지 금방 술기운이 올라왔다. ‘소진 언니는 디자이너도 잘 어울리겠다.’ 사직서를 제출했다던 소진은 본격적으로 디자인 쪽으로 진로를 바꿀 거라고 했다. 원래 위장용으로 써 온 직업을 이제는 진짜로 해 보려 한다며, 드레스 디자이너인 친언니의 스튜디오로 출근한다고 했다. 미련보다는 정리가 끝난 사람 특유의 여유가 멋있는 한편, 하임은 자신의 진로에 대해서도 고민이 생겼다. ‘난 이제 뭘 해야 하지.’ 지금까진 병 때문에 할 수 있는 게 산을 타고 약초를 캐는 것뿐이었지만, 저도 이제 다른 걸 꿈꿀 기회가 생긴 거나 다름없었다. 경험해 보고 싶은 것, 공부하고 싶은 것들투성이라 무얼 하나 꼽기도 어려웠다. 잡념과 싸우다 보니 머리가 더 무겁게 느껴졌다. 기분도 나른한 것이, 눈을 감고 있으면 그대로 잠이 들 것 같았다. “하아암―” 하품을 쏟아 내며 취기에 잠식된 동안, 가볍게 정리를 마치고 온 무혁이 하임을 번쩍 안아 들었다. 곧장 마스터 룸 욕실로 향한 그는 그녀를 씻기고는 친히 머리까지 말려 주었다. 무혁은 요즘 부쩍 하임을 먹이고 씻기는 게 소소한 낙이라도 되는 양 굴었다. 마치 애가 된 듯한 기분에 민망해진 그녀가 거부했지만, 그가 되레 섭섭한 기색을 비치는 탓에 결국 굽힐 수밖에 없었다. 하임은 샤워 가운 차림으로 무혁의 손길을 누리다가 끔뻑끔뻑 졸기 시작했다. 그는 머리칼이 보송하게 마른 뒤에야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는 그 위에 올라탔다. “……흡.” 비몽사몽이던 하임의 눈꺼풀이 게슴츠레 열렸다. 갑자기 두툼한 혀가 입안으로 밀려 들어온 탓이었다. 취기로 풀린 눈으로 올려다보자 무혁이 혀를 쯧, 낮게 찼다. “술도 못 마시면서 누가 몰래 깔짝대래.” 그의 손짓 한 번에 매듭이 풀리며 가운이 힘없이 벌어졌다. 어깨 한쪽을 내리며 쇄골 위에 입을 맞추자 그녀가 웃으며 그의 목을 껴안았다. “헤헤, 무혁 씨이…….” “…….” “안아 주세요오…….” 흐트러진 이성으로 덤비는 적극적인 태도에 무혁이 기가 찬다는 듯 웃었다. 하임이 아랑곳하지 않고 품을 더 파고들자 슬슬 그의 눈빛이 불순해지기 시작했다. 막 분위기가 달아오르던 순간, 무혁의 단말기가 짧게 진동하며 울렸다. 본부에서 걸려 온 비상 연락이 화면 위에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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