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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여담 마을 관광 개발 추진안.
첫 장을 넘길 때까지만 해도 무혁은 별다른 표정을 짓지 않았다. 프로젝트 제목은 무난했고 형식도 문제없었다. 민통선 해제 지역을 대상으로 한 소규모 체험형 관광, 고령화 지역 활성화, 전통문화 보존. 어디서든 한 번쯤 본 문구들이었다.
“…….”
다만 페이지를 넘길수록 그의 시선이 묘하게 느려졌다.
CCTV 배치, 방문객 동선 분리, 임시 통제 구역, 주민 분포표, 상주인구 변동 그래프.
체험 프로그램 설명은 짧은 반면, 외부 인력 출입 관리와 연결된 항목은 유난히 세세했다. 관광 제안서라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수익성 분석도 쉽게 납득되지 않았다. 여담 마을의 규모와 접근성을 고려하면 큰 수익을 기대하기 어려운 구조였다. 그런데도 예산은 안정적으로 짜여 있었고, 투자 회수 시점 역시 무리 없이 설정돼 있었다. 민간 개발안에서 흔히 보이는 공격적이고 기대 편향적인 계산이나 위험 요소에 대한 조정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곧바로 이 문서가 위장 문서라는 걸 알아차린 무혁이 다음 자료를 열었다. 여담 마을 관광 개발을 추진한다는 민간 법인의 등기부와 자본금 변동 내역 및 계열 구조였다.
수도권에 본사를 둔 법인. 형식상으로는 이미 몇 차례 지역 재생 사업을 진행한 이력도 있었다. 겉보기엔 흠잡을 데가 없었다. 문제는 자금의 흐름이었다.
자본금 증자 시기와 투자 주체가 일정하지 않고 매번 달라졌다. 해외 법인을 경유한 자금은 지나치게 단순한 투자 흐름을 거쳐 다시 빠져나갔다. 회계상 하자는 짚기 어려워도, 민간 투자치고는 변수가 너무 적었다.
무혁은 화면을 넘기지 않고 잠시 그대로 두었다. 이 정도면 우연으로 치부할 수 있는 구간은 이미 지났다. 그는 제안서의 첫 장으로 돌아가 아까와는 다른 관점으로 자료를 훑기 시작했다.
관광 개발이라는 외피를 걷어 내고, 누가 이 판에 손을 댔는지를 보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법인 설립 시점, 사업 목적 변경 내역, 투자 유입 시기. 그중 몇 군데에 표시가 남았다. 전부 최근이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청명국이 해외에서 움직였던 시점과 크게 어긋나지 않았다.
무혁은 외주 항목 옆에 붙은 내부 코드를 눈여겨보며 머리를 굴렸다. 숫자 뒤에 알파벳이 붙은 형식으로, 어딘가에서 본 듯한 배열을 머릿속에 정리했다.
알아볼 사람만 알아보라고 남긴 청명국의 암호화 방식이었다. 역시 여담 마을 관광 개발 추진은 그저 명목일 뿐이며, 이 문서에서 말하는 ‘개발’은 곧 청명국이 민간인을 가장해 들어오는 통로 개척이나 다름없었다.
“…….”
그렇다면 역시 여담 마을의 민통선이 해제된 것 또한 우연이 아니었을 수도.
무혁은 곧장 기존에 갖고 있던 자료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여담 마을 민통선 관리 이력, 해제 이후 변경된 통제 기준, 그리고 그 결정이 내려진 시점을 나란히 놓고 비교했다.
“……재밌네.”
타이밍이 묘하게 맞아떨어졌다. 관광 개발 제안이 처음 올라온 시점, 민통선 출입 규정이 완화되던 시기, 그리고 특정 구역이 ‘위험 없음’으로 재분류된 날짜가 거의 겹쳤다. 안보와 직결된 행정 절차를 통과하는 안건치곤 지나치게 빠른 속도였다.
결재 라인을 따라 올라간 무혁의 눈길을 붙든 건 국토부 산하 TF, 지역 개발 명목의 파견 인력보다 더 위, 최종 검토 의견에 찍힌 이름 하나였다. 그는 곧바로 성기에게 전화를 걸어 짤막한 명령을 날렸다.
“당장 전(前) 신철민 대령에 대한 프로필 준비해서 넘겨.”
-신철민 대령이라면?
“전(前) 민통선 관리 작전 담당 군 간부. 현재는 국방·안보 자문 위원이자 민통선 해제 지역 개발 관련 위원회로 활동 중. 그자가 관여한 타 지역 사례까지 전부 조사해.”
무혁은 확신했다. 안보와 지역 개발을 동시에 아는 사람, 그리고 ‘안전하다’는 말을 공식 문서에 남길 수 있는 위치. 이건 청명국과 I.D.C.만의 판이 아니었다. 분명 그들 세력이 움직일 수 있게 안쪽에서 길을 열어 준 사람이 있었다.
무혁은 그 흐름을 짧게 정리했다. 이 계획이 끝까지 굴러간다면 남한 영토 안에서 북한의 기밀 조직과 국제 방산 평의회의 공모 계획이 쥐도 새도 모르게 성립될 터였다.
내부 고위 인사가 얽혀 있으니 책임을 묻기 어려운 건 당연지사. 일이 드러나는 순간 외교 문제와 안보 책임이 동시에 폭발하고, 국정원과 군, 정부가 한 줄로 엮인다. 국제 협약 위반이라는 결론까지 가는 데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지금 막지 않으면 이건 개인 사건이 아니라 정권 단위의 재앙으로 번질 판이었다. 그래서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이건 보고 후 명령을 기다릴 일이 아니라 먼저 잘라 내야 할 판이었다.
* * *
예상보다 늦은 시간에 귀가한 무혁이 현관 안으로 발을 들였다. 기척을 듣고 1층으로 내려온 소진이 그에게 눈인사를 해 왔다.
“하임이는.”
“잠 들었어.”
무혁이 하임에게 주려고 사 온 디저트 박스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는 와이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었다.
“도우미 일이 할 만한가 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무엇보다 깜찍한 햇병아리 보살피는 재미가 아주 쏠쏠해.”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은 소진이 습관처럼 전자 담배를 입에 물었다가 아차 싶은 표정으로 뺐다. 이 집에서 절대 담배와 술은 안 된다는 집주인의 엄포가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나 무혁이 조용히 책망하듯 바라보자 그녀가 밉지 않게 눈을 흘기며 전자 담배를 소파 위에 휙 집어 던졌다.
“걱정 마. 하임 씨 앞에선 담배의 ‘담’ 자도 안 꺼내거든?!”
“언제는 끊었다더니. 또 골초가 되려는 모양이군.”
“미친, 너 지금 나 놀리는 거지? 이 상황에 담배가 안 당기게 생겼어? 하, 진짜 생각할수록 너무 열받아. 이중성 씹새끼…….”
소진은 내 눈앞에 나타나면 정말 죽여 버릴 거라며 온갖 욕을 중얼거렸다.
배소진, 30세. 무혁과 입사 동기이지만, 둘이 같은 공간에 있었던 시간은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무혁이 비인가 부서인 NEXA에 몸담고 있다면, 소진은 내내 대외 안보 조정실 소속이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교류가 생길 이유도 없거니와 소속으로만 따지면 적대적인 관계나 마찬가지였다.
지금의 소진은 조정실을 떠나 정보 분석국 국외 위험 분석과로 소속이 바뀐 상태였다. 공식적으론 조직 개편에 따른 인사 이동이었지만 실상은 완충 지대로 쫓겨난 셈이다. 조정실에서도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내치지도 못한 인력. 소진이 지금 그 애매한 위치에 놓이게 된 데에는 분명한 계기가 있었다.
3년 전, 동북아 협조 작전 중 조정실 파견 요원과 마찰이 생겼을 당시, 함께 파견되었던 소진이 그대로 노출되면서 위기였던 순간이 있었다. 그때 그녀의 동선은 애초에 보호를 전제로 짜인 게 아니었고, 정보 통제가 느슨해지면서 곧이곧대로 위치가 드러났다.
그 상황에서 가장 먼저 움직인 건 무혁이었다. 그는 상부 지시는 무시한 채 소진을 후방으로 밀어 내고 그 자리를 대신 채웠다. 결과적으로 그 선택 덕에 소진은 현장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일 이후의 책임과 후속 조치는 전부 무혁이 떠안게 되었다.
당시 마찰을 일으킨 파견 요원이 자신을 감싸는 조정실 뒤에 숨은 것과 달리, 소진은 그 일 이후 입을 다물지 않았다. 무혁의 판단이 옳았다는 점, 파견 요원의 대응이 과했다는 점을 내부에 강하게 피력했다. 그 덕에 무혁의 징계가 흐지부지되었던 것이었고, 그는 훗날 다른 이를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사건 이후에 소진과 별다른 교류는 이어지지 않았으나 특이점이 하나 생겼다. 그녀가 중성의 연인이 되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앙숙과도 같은 부서 사람끼리 사내 커플이 되었다는 걸 아는 이는 없었다. 둘 다 최대한 이 사실을 숨기려고 했고, 우연히 두 사람을 목격한 무혁은 당사자들에게도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둘의 관계 자체가 처음부터 계획된 접근이었다는 사실을, 무혁도 소진도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중성이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 소진에게 접근했으며 그 과정에서 기밀 정보를 훔쳐 간 것이다.
중성이 필요했던 정보는 무혁의 외조부에 관한 것이었고, 그 정체가 탄로 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