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50화
50.
“어떻게 알았는지가 중요한가. 특별히 눈여겨보는 상대라면 전에 안 보이던 것도 보일 때가 있지.”
“…….”
“너도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느낀 것들이 있잖아.”
부정할 수 없는 하임은 대답 대신 핫초코를 한 모금 마셨다. 너무 달지도 쓰지도 않은 딱 적당한 온도와 맛이었다. 혀보다 속이 먼저 풀리는 느낌에 긴장도 덜해졌다.
하임이 음료를 천천히 비우는 동안 무혁도 침대에 걸터앉아 커피를 마셨다. 그녀는 커피 광고를 보는 듯한 광경에 잠시 넋을 놓기도 했다. 그는 그녀가 어느 정도 기운이 돌아오고 난 후에 본격적으로 집 구경을 시켜 주었다.
집 안을 한 바퀴 도는 데에는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바닥 또한 발소리를 삼키는 재질이었고 코너마다 조명이 은근하게 숨겨져 있어 어두운 구석이 없었다.
크고 개방감 있는 주방은 이미 채워진 식재료들로 정갈하게 꾸며져 있었다. 거실 한쪽에는 소파와 테이블, 그 뒤로는 두툼한 커튼이 달린 창이 있었다. 창틀 안쪽에도 방음 패널이 덧대어져 있어 바깥 소음이 거의 스며들지 않았다.
“집 안은 어디든 자유롭게 돌아다녀도 됩니다. 먹고 싶은 건 뭐든 꺼내 먹어요.”
문득 창밖을 향하던 그의 눈빛이 사뭇 서늘해졌다.
“다만 창문에는 가까이 가지 말고. 공기 정화는 공기 청정기가 해 줄 테니 되도록 열지 말아요.”
“왜요?”
“안전을 위해서.”
짧고 단호한 대답이었다. 하임도 수긍하는 바였기에 굳이 한 번 더 묻지 않았다.
2층도 역시나 커튼과 차음 구조가 겹겹이 마련돼 있었다. 아기자기한 내부는 연신 하임의 감탄을 자아냈다. 무혁은 그 반응을 유심히 살피다가 마지막으로 1층 끝에 섰다.
문손잡이를 당기니 곧장 계단이 보였다. 계단 아래에도 눈에 잘 띄지 않는 문 하나가 보였다.
“지하실입니다. 저곳엔 절대 내려가면 안 됩니다.”
엄중하면서도 담담한 그의 말투는 경고에 가깝게 느껴졌다.
“지하실은 왜 내려가면 안 되는 건데요?”
“알 필요 없는 곳이니까. 어차피 아무것도 없어서 궁금할 것도 없어.”
무혁이 문을 가볍게 밀어 닫았다. 이중문에다가 바깥에 잠금쇠까지 거는 걸 보니 어지간히 신경 쓰는 곳인 듯했다.
하임은 조금 찜찜한 기분이 들었으나 그의 규칙을 지키고 싶었다.
“약속해요. 절대 내려가지 않겠다고.”
“…….”
“무슨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도 그냥 무시하는 겁니다. 알았어요?”
이상한 소리라니. 괜스레 오싹해진 하임이 두 팔을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혁은 그런 그녀의 긴장을 풀어 주겠다는 양 뺨을 약하게 콕 찔렀다.
“출출할 테니 밥 먹자.”
무혁이 하임의 등을 부드럽게 밀었다. 지하실 문을 곁눈질하는 그의 동공이 찰나 싸늘하게 가라앉았다가 되돌아왔다.
* * *
새집을 경계하면서도 은근히 마음에 들어 하던 하임은, 벽만 한 초고화질 TV로 OTT를 보다가 잠이 들었다. 화면을 뚫고 나올 듯한 해상도에 감탄을 금치 못하던 모습이 어찌나 깜찍하던지.
무혁은 화면 대신 하임을 흥미롭게 구경하다가 새근새근 자는 그녀를 침실로 옮겼다. 방해할 사람 없는 단둘만의 공간에서 이사 기념 섹스를 하고 싶었지만 할 일이 있었다.
“아, 단둘은 아닌 건가.”
온갖 흡음재로 둘러싸인 이 집에서도 특히나 방음이 잘 되는 방이었다. 방문을 닫고 돌아선 무혁이 여상히 중얼거렸다.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느긋하게 계단을 내려간 그는 곧바로 지하실로 향하는 첫 번째 문을 열었다.
흔적을 지우듯 연 문을 꼼꼼히 닫으며 마지막 문을 여는 순간, 위층과는 딴판의 풍경이 그를 맞았다.
의자에는 지난날과 그리 다르지 않은 행색의 하루타가 묶여 있었고, 바닥에는 피 칠갑을 한 채로 정신을 잃은 누군가가 뻗어 있었다.
“읍, 읍……!”
무혁은 저를 보고 흥분한 하루타에게 다가가 검지를 입에 갖다 댔다.
“목소리 크게 냈다간 이 새끼처럼 될 줄 알아.”
하루타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무혁이 입을 가린 테이프를 떼어 내자 그가 호소하듯 간절한 눈으로 보았다.
“하루타 살려 준다고 해짜나…….”
“살아 있잖아.”
무혁이 고개를 비딱하게 기울였다. 그가 하루타를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 역시 하임이었다. 심문과 고문을 왔다 갔다 하며 어느 정도 기억을 되찾은 하루타를 그곳에 두고 오기엔 리스크가 컸기 때문이다.
I.D.C나 청명국에게 넘겨지는 꼴을 보느니 직접 데리고 있는 편이 더 관리하기 쉬웠다.
“지금 내가 네게 줄 수 있는 선택권은 세 가지야. 잘 들어.”
“하, 하이.”
“하나, 다시 대가리가 망가진 채로 아무 기억도 없는 머저리로 산다.”
“…….”
“둘, 여기서 죽을 때까지 평생 갇혀 있는다.”
“…….”
“셋, 그냥 바로 죽는다.”
안색이 창백해진 하루타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무혁은 선택권은 주었지만 결정권은 제게 있다는 듯 권태로운 낯으로 턱을 매만졌다.
“셋 중에 뭐가 좋을까.”
하루타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의 시선이 숨이 붙어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신원 미상의 인물에게 향했다. 피가 말라붙은 자국을 보는 순간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이, 이 사라믄 누, 누구인지…….”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고.”
“…….”
“널 뒤쫓고 있던데. 너야말로 이자가 누군지 모르나.”
무혁이 발로 무성의하게 밀자 반 바퀴 뒤로 넘어간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하루타는 피떡이 된 얼굴을 기겁한 채로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움찔거렸다.
그러한 반응을 놓치지 않은 무혁은 남자의 소지품을 뒤져 찾아낸 위조 신분증을 하루타의 허벅지 위에 툭 던졌다.
“현재 쓰는 가명은 사토 겐지. 신분을 파 보니 I.D.C 처리조 중 한 명이더군.”
공기가 한 박자 늦게 가라앉았다. 이내 숨이 거칠어진 하루타는 몰려오는 두통에 미간을 찌푸렸다.
별안간 머릿속에서 끊긴 기억들이 서로 맞물리듯 이어졌다. 연구동 복도, 낮은 목소리로 주고받던 호출명, 역할 분담이 확실했던 연구원과 현장 요원들. 정리, 봉합, 소거. 늘 멀찍이서 지켜보기만 했던 그 역할을 떠올리는 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처리조.”
하루타가 말라붙은 입술로 중얼거렸다. 남자의 실체가 명확해지는 순간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처리 대상이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의 누군가일 때도 있다는 걸,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그 ‘누군가’가 자신이 될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을 뿐이었다.
“네 사정을 I.D.C가 모를 리 없었을 테고. 그쪽에서 무슨 이유로 널 진작 제거하지 않고 내버려뒀는지는 내 알 바가 아니고, 어쨌든 내 정체가 노출된 순간부터 계산이 바뀐 거겠지. 널 잘라 내는 쪽으로.”
“…….”
“I.D.C는 이미 널 포기했다. 내게서 도망가 봤자 넌 살해 당할 운명이라는 건 마찬가지지.”
반박할 수 없는 하루타의 어깨가 축 처졌다. 분노보다 배신감이 먼저 밀려왔다. 살려 달라고 매달릴 의지가 들기는커녕 오히려 허탈함과 무력함에 지배당하는 기분이었다.
자신은 아직 쓸모가 있다고 믿었다. 회복 중이니 조금만 시간을 더 가지면 다시 제가 원래 속해 있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여겼다. 그 모든 희망이 일방적인 착각이었음을 인정하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말문을 열었다가 닫는 하루타의 표정은 상당히 복잡해 보였다. 이제껏 반은 연기하듯 흐릿한 기억을 가장해 왔지만, 더는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사실 난…… 나는 기억이…….”
무혁을 흘끗 올려다보는 순간 그는 속으로 한 번 더 탄식하고 말았다. 상대는 이미 전부 알고 있다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속일 수도, 넘어설 수도 없는 상대였다는 걸 받아들인 하루타가 조심스레 고백했다.
머저리 같은 표정과 흐릿한 눈빛, 어눌한 말투가 물에 씻긴 듯 순식간에 지워지며 정상적인 말투가 흘러나왔다.
“……생체 조사관. 기억이 전부는 아니어도 대부분 떠올랐습니다. I.D.C 소속 생체 조사관이라는 걸 숨기고 시간을 벌면 될 줄 알았습니다.”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하루타에게서 마지막 미련이 떨어져 나갔다. 핏덩어리가 된 처리조의 모습이 제가 맞이하게 될 미래일지도 모른다고 상상하는 순간 현실과 빠르게 타협했다.
“생체 조사관이라.”
무혁은 그가 자기 연민에 허덕이든 말든 차갑게 명했다.
“무슨 지령을 받은 건지 말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