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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27화


27. “…….” “지난번에 이장이라는 사람이 찾아왔었다더니. 그 사람이 울렸나.” “그런 거 아니에요.” 하임은 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말을 아꼈다. 무혁이 독촉하듯 머리칼을 살살 어루만지자 먹먹해진 목소리가 얇게 울렸다. “제가 부족해서 그래요. 능력도 안 되고, 돈도 못 벌어서…….” 홀린 듯 중얼거리다가 흠칫한 하임이 두 눈을 깜빡였다. “아, 시, 실언한 거예요. 방금 한 말은 못 들은 척해 주세요.” “돈이 필요한 건가?” “어, 그게 그러니까, 사람은 누구나 돈이 필요한 거잖아요. 생계를 위해서는 당연히 돈을 벌어야 하고…….” 그녀는 당황할 때마다 작은 손을 꼼질거리며 두서없이 늘어놓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살아야겠죠? 하하. 안 그래도 겨울에는 다른 일도 해 보려고요.” “…….” 무혁이 미간을 지그시 모았다. 여기서 일을 더 늘리겠다니. 하임의 하루를 자세히 들여다본 적은 없지만 그녀가 스스로를 갈아 넣는 데 주저함이 없는 타입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작고 여린 몸이 닳아 없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얼마나 부지런히 사는지도. “최대한 빨리 일을 구할 거라 앞으로는 여기에 자주 못 올지도 몰라요. 대신 삼동이가…….” “그건 안 되겠는데.” “네?” “난 하임 씨를 봐야만 겨우 숨통이 트이는 사람인데, 나보고 그쪽 얼굴도 못 보고 이 감금 같은 생활을 버티라고?” “…….” “내가 도와줄 테니까 일은 구하지 말아요.” 하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괜찮아요. 천종 씨한테 그런 도움받을 수 없어요.” “왜. 내가 기억 상실증 걸린 머저리라서?” “그런 뜻이 아니에요.” “그럼 됐어요.” 무혁은 하임의 턱을 더 높이 꺾는 동시에 고개를 내렸다. 두 입술이 빈틈없이 맞물리는 순간, 놀란 그녀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그의 옷깃을 쥐었다. 도톰한 입술 사이를 가른 무혁이 소심하게 숨은 혀를 건드렸다. 연하디연한 살덩이를 빨고 치열을 훑자 하임의 입술이 더 벌어졌다. 그는 부족하다는 듯 목뒤를 단단히 받치고서 더 깊이 혀를 욱여넣었다. 여린 숨결을 모조리 삼키며 속살을 거칠고 느리게 헤집었다. 맛이 날 리가 없는데, 왜 이리 맛있을까. 무혁은 가늘게 떠는 하임을 고쳐 안고서 속살을 마음껏 맛보았다. 그런데 갈증이 해소되기는커녕 음탕한 본능이 똬리를 틀기 시작했다. “……흡.” 한층 더 대담해진 입맞춤에 하임은 초점이 흐릿해졌다. 아랫배 어딘가가 간질간질한 것도 같았고, 전신으로 저릿한 전기가 흐르는 기분이었다. 무혁은 바르작거리는 그녀를 놓아주기는커녕 노골적으로 둔덕을 제 남근 위로 꾹 눌렀다. “…….” 모를 수 없는 존재감에 하임이 밭은 숨을 토해 내며 얼굴을 붉혔다. 무혁은 그녀의 허리춤을 잡고 너울을 타듯 앞뒤로 잔잔하게 움직였다. 대놓고 성적 암시가 담긴 움직임에 하임이 어쩔 줄 몰라 하는 반응을 보였다. 옷 위로도 또렷하게 느껴지는 그의 물건이 제 음부를 찔러 댔다. 의지와 상관없이 아래에 열이 고이며 다리 사이가 축축해지는 느낌이었다. “하임 씨.” “네, 네에.” “내가 해결해 줄 테니까 앞으로도 매일 나 보는 겁니다.” “흣…….” “알았어요?” 무혁은 고작 이 정도로 눈이 풀려 가는 하임을 보며 턱을 다물었다. 저만 독점하고 싶게끔 만드는, 순진하고 야한 얼굴이었다. 돈 문제인 거 같은데, 이장이 아니라면 그 장 씨라는 새끼인가. 누구든 간에 저와 그녀 사이에서 걸리적거리는 놈들은 치워 버릴 생각이었다. “대답해야지. 어서.” 이내 그가 하임의 허리를 감싸고는 제 쪽으로 휙, 당겼다. 화들짝 놀란 하임이 반사적으로 그의 목을 껴안으며 고개를 파묻었다. “내가 말 안 들으면 어떻게 한다고 했죠?” “……떠나지 마세요. 말도 없이 떠나시면 저는 너무 슬플 것 같아요.” 하임이 서글픈 목소리로 속삭였다. 언젠가 그를 보내 줘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고 싶었다. ‘무엇보다 나쁜 사람들이 천종 씨 집 주변에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안전해질 때까지만이라도 내가 보호해 주자.’ 곰곰이 상념에 잠겨 있던 하임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당장 사라질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위험성을 알려 줘야 할 것 같았다. “저, 천종 씨. 근데 있잖아요.” “말해요.” “……이거는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그 나쁜 사람들이 천종 씨 집을 알고 있다면, 천종 씨를 찾으려고 근처에서 잠복하고 있지 않을까요?” “…….” “그 사람들도 시신이 없어졌다는 걸 아니까 살아 있다고 의심할지도 모르고, 또 그러면 다시 잡아가려고 할 수도 있으니까요. 이, 이건 천종 씨 겁주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걱정되어서 하는 말이에요.” 묵묵히 듣고 있던 무혁의 눈빛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안 그래도 성기에게 전해 들은 상황이 하임의 입에서 흘러나오다니. 이게 과연 우연일까. 그는 하임이 그날 산에서 무언가를 들었으리라 짐작했다. 동료들의 사망을 언급한 것도 그렇고. “일리 있는 말이군요. 아마도 그럴 확률이 높겠지.” 그녀의 시선을 제게로 돌린 무혁이 넌지시 물었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 “평생 여기에 숨어 살까?” “우, 우선 기억부터 찾으면 그때 같이 고민해 봐요.” “그래요.” 하임의 마음은 복잡하기만 했다. 그의 기억이 돌아오길 바라면서도 한편으론 무서웠다. 모든 걸 되찾은 뒤엔 제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 버릴까 봐서. 어쩌면 그의 곁엔 이미 누군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연인이든 배우자든. 이런 촌구석은 더는 거들떠보지 않고 제자리로 돌아갈 테지. 하임은 설사 미련이 남더라도 그를 일상으로 돌려보내 줘야 한다고 다짐했다. 무혁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하임이 갑자기 몸을 물렸다. 손이 허전해지자 심기가 불편해진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어디 가요?” “……생각해 보니까, 어쩌면 천종 씨한테는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르잖아요. 주의하는 게 좋을 거 같아서요.” “…….” “지금은 기억이 없다지만, 나중에 되찾고 나면 천종 씨도 죄책감 때문에 힘드실 수도 있어요. 상대분에게도 상처가 될 거고요.” 무혁은 멋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하임의 모습에 기가 찼다. 혼자 심각한 꼴이 우습기도 하고 좀 깜찍하기도 하고.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엉뚱함에 그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실소를 억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어요. 그건 확실해요.” “……?”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대비해서 사랑하는 누군가가 생기면 몸 어딘가에 문신을 새깁니다. 그런데 내 몸은 깨끗하기만 한데.” 무혁의 잇새로 거짓말이 술술 흘러나왔다. “문신을 새긴다고요?” “보안상 상대의 이름이나 특정할 수 있는 건 제외하고, 증표가 될 만한 걸 새기겠죠.” “증표…….” “하임 씨도 봐서 알잖아요. 내 몸엔 그 어떠한 흔적도 없다는 거.” “……그렇구나아.” 하임의 뺨이 불그스름해졌다. 그렇다면 다행이었다. 적어도 그가 곁에 있는 동안은 떳떳하게 좋아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어? 근데, 그건 어떻게 확신하세요? 또 무언가가 떠오르신 거예요?” “……말하고 보니 그렇군요.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기억이 조금씩 돌아오나 봅니다.” 왜인지 입을 꾹 다문 하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아차 싶은 표정으로 그새 음식이 식었다며 울상을 지었다. “괜찮아요. 식어도 맛있으니까.” 무심히 받아친 무혁이 숟가락을 들었다. * * * 무혁은 성기가 긁어모아 준 자료 덕분에 단기간에 적지 않은 정보를 손에 넣었다. 그중엔 단순히 수상하다는 수준을 넘는, 예상 밖의 소식이 섞여 있었다. “기록이 45년 전부터라고.” -예, 대략 그쯤부터고 그 이전은 전부 공백이에요. 출생지, 이전 주소, 가족 관계 전부 다요. 행정상 그 시점부터 새로 재등록되었으니, 이전 기록은 의도적으로 말소된 거라고 봐야겠죠. “…….” 무혁의 시선이 노트북 화면에 고정됐다. 임봉주. 약 45년 전을 기준으로 인생을 깨끗하게 도려낸 흔적을 보아 결론은 하나였다. “신분 세탁이라는 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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