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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6화


6. 무혁은 떠올랐다가 추락했다가 버텼다가, 다시 끝없이 가라앉았다. 무저갱에서 허우적거리며 심판을 기다리던 순간, 어디선가 한 줄기 빛이 스쳤다. 불에 그을린 듯한 의식 사이로 낯선 얼굴 하나가 떠올랐고, 눈이 마주쳤다. 흔들리는 시야 너머로 마주친 그 눈동자는 올곧게 저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까 그 여자다. 여자의 실루엣이 환영인가 싶던 때에 무혁은 다시 극한의 어둠으로 빨려 들어갔다. 어느 순간은 검은 강 위에 떠 있었고, 어느 순간은 사막의 모래 더미 아래에 묻혀 있었다. 무혁은 언젠가 동유럽의 이름 없는 작전지에서 쓰러졌던 기억을 보았다. 폐허가 된 교회당 아래, 사다리도 없는 지하실에서 몇 시간을 숨죽였던 그날. 그때도 이렇게 어딘가가 타들어 가듯 고통스러웠고, 숨 쉴 때마다 입안엔 비릿한 금속 맛이 돌았다. 독이 퍼졌던 감각이 되살아남과 동시에 관자놀이를 치는 열과 통증이 솟구쳤다. 곧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흐려지고, 깊은 잠에 빠지길 반복했다. 그 모든 혼란이 차츰 식어갈 무렵, 무혁의 의식이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몸과 정신이 완전히 깨어나기까진 시간이 걸렸다. 가장 먼저 들려온 건 낮게 웅웅 울리는 기류의 떨림이었다. 몸 위를 덮은 솜덩어리의 낯선 촉감, 공기 중에 흩어진 먼지의 흐름, 어디선가 풍겨 오는 지극히 사적인 냄새들. 무혁은 움직임 없이 제 몸 상태를 감각만으로 스캔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기묘한 저림이 한쪽 다리에 눅진하게 깔려 있었다. 그러나 통증은 현저히 줄어든 상태였다. ‘살았다.’ 그걸 깨닫는 데도 짧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분명 자신은 차디찬 흙 속에서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완전히 마비된 하반신과 상체를 강타한 고통에 꼼짝할 수 없었고, 작은 산소 캡슐은 금세 쓰임을 다한 터였다. 중성과 피 튀기며 사투를 벌이던 중, 또 다른 새끼가 나타나는 바람에 상황은 2:1이 됐다. 끝내 완전히 마비된 다리와 비정상적인 체온, 치사량에 근접한 과다 출혈 탓에 무혁은 기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그의 인생에 있어서 이렇게 굴욕적이고 더러운 패배는 처음이었다. 그들이 침하된 지반의 구덩이에 저를 던져 넣고 매장할 때까지도 무혁은 의식이 흐릿하게 남아 있는 상태였다. 그는 막판에 자신이 중성의 옆구리에 칼을 꽂아 넣었던 걸 상기하며, 그 배신자 새끼도 지옥으로 떨어지길 바랐다. 하지만 뭐가 됐든 먼저 뒤지는 건 저였나 싶었다. 무혁은 목숨을 완전히 끊어 놓지도 않고 생매장으로 피날레를 장식하는 개새끼들의 잔인함에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귀신이 되어서라도 니들 잡으러 간다, 씨발.] 죽음의 공포라고 해 봤자 무혁을 잠식한 분노와 살기를 넘어설 순 없었다. 그는 삶에 대한 미련이고 뭐고, 저승에 가서도 그 원수들을 어떻게 잡아 족칠지 궁리하며 욕을 중얼거렸다. 그것이 무혁이 기억하는, 땅속에서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그런데 살아남았다. 처음엔 저세상에 왔나 싶었으나 지나친 현실감이 그를 일깨워 주었다. 이곳이 어디인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무혁은 숨소리를 낮춘 채 감각을 하나하나 분리해 내기 시작했다. 며칠이 지나자 정신은 또렷해졌고, 누워 있어도 더는 무력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눈꺼풀을 닫은 채로 짐승처럼 기회를 기다렸다. 지금은 움직여선 안 된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숨죽인 긴장이 정적보다 더 무겁게 방 안에 배어들었을 때, 이따금 무의식 속에서 울리던 목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다. “오늘도 약수를 먹여 드릴게요. 다리에 퍼진 독은 이제 거의 다 해독된 거 같아요.” 조심스러우면서도 청아하고 맑은 음색은 제가 들어 본 적 있는 목소리였다. 그 여자인가. 여자의 목소리는 치료를 알리는, 일종의 예고였다. 이번에도 역시나 작은 손이 제 머리를 받쳐 들고선 한약 맛이 나는 액체를 목구멍으로 흘려 보냈다. 이것이 저를 살렸음을 알아챈 무혁은 순순히 받아들였다. “어서 깨어나셔야 할 텐데.” 저를 걱정하는 말투는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애달팠다. 그는 속으로 비웃음을 삼켰다. 뭘 안다고.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주제에. 저를 보살피는 손길은 담백하고 부드러웠고, 수줍을지언정 어떠한 사심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혁은 그럴 때마다 몸을 완화하며 긴장감을 어느 정도 내려놓게 되었다. 그리고 여자는 할 일이 끝나면 ‘삼동아’를 부르며 이런저런 말을 했다. 여자의 이름은 하임. 남자의 이름은 삼동이. 세 번째 목소리는 없었다. 항상 그 두 명이었고 역할이 뚜렷하게 나뉘어 있었다. 삼동이라는 놈은 저를 씻기고 옷을 입혔고, 미음과 일반 의약품을 먹였다. 제게 닿는 손길은 투박하고 엉성한데 보살핌은 제법 살뜰했다. 다만 저를 ‘형아―’라고 부르며 혼잣말할 때마다 주둥이를 한 대씩 후려갈기고 싶었다. ‘어린 애새끼도 아닌 게.’ 몇 살을 처먹었길래 호칭이 그따위인가 싶었다. 걸걸한 목소리를 보아 변성기가 한참 지난 사내새끼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밤마다 ‘군인 형아, 좋은 꿈 꿔.’라고 하던 놈이 ‘형아, 내 꿈 꿔.’라고 지껄였을 땐 참지 못하고 눈을 뜨고 말았다. 이 개새끼가. 뭐? 형아, 내 꿈 꿔? 씨발. 이중성, 그 배신자 씹새끼가 보낸 새로운 유형의 암살자일지도. 살아남은 이래 처음 눈을 뜬 것이었고, 문은 닫힌 뒤였다. 무혁은 차게 식은 눈으로 천천히 눈을 굴려 방을 훑었다. 간이 조명조차 없는 공간은 달빛이 스친 자리만 윤곽이 보일 뿐, 나머지는 어둠이 층층이 내려앉아 있었다. 시멘트 대신 오래된 합판으로 채워진 벽은 눅눅한 목재가 습기를 머금은 채 얇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가정집 특유의 생활 냄새나 난방의 온기랄 것도 전혀 없었다. 대신 수십 년 묵은 교실 특유의 나무 냄새와 분필 가루 같은 먼지 냄새가 희미하게 배어 있었다. 천장은 낮았고, 외풍이 드나드는 틈이 군데군데 벌어져 있었으며, 오래전에 무언가를 매달아 두었던 고리가 녹슨 채 흔적만 남아 있었다. 침대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간이 침상, 거친 교실 마룻바닥, 한쪽 구석에 쌓여 있는 낡은 철제 걸상들. 무혁은 그 조각들을 재빠르게 조합했다. ‘역시 가정집은 아니군.’ 이곳은 어느 시골의 폐분교인 모양이었다. 소리 없이 몸을 일으킨 그가 창가 벽에 비스듬히 서서 창밖을 살폈다. 관리가 되지 않은 작은 운동장은 무성한 잡초들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다. 상업 지구나 주거지와는 다른, 외딴 산골짜기의 공기. 심지어 밤의 고요가 너무 깊었다. 인간의 기척이 거의 없는 곳이라는 뜻이었다. ‘그 여자가 사는 마을인가.’ 이곳이 어디든 간에 죽지 않았다는 건 확실했다. 무혁은 제 목숨줄이야말로 더럽게 질기다고 자조하며 억눌린 숨을 고르게 들이쉬었다. 몸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다리를 스치는 통증은 잔향처럼 남아 있었고, 질긴 피곤이 뼛속에까지 스며 있었다. 며칠을 잠들었던 건지 온 근육이 찌뿌둥하다며 아우성을 쳐 댔다.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돌리는 그의 시선이 천장에 향했다. 텅 빈 형광등 자리엔 가느다란 비단실 같은 거미줄이 오랜 세월 방치되었다는 걸 증명하듯 겹겹이 포개어져 있었다. 몇 시쯤 됐으려나. 산등성이 너머로 잔광이 아주 얇게 깔려 있었다. 달이 그리 높게 뜨지 않은 걸 보면 아직 밤이 깊게 내려앉은 건 아닌 듯했다. 대충 아홉 시쯤 됐겠군. 오랜 현장 경험에서 굳어진 감각으로 대충 시간을 짚어 낸 무혁이 돌아섰을 때, 발끝에 치인 무언가가 저만치 튕겨 나갔다. “…….” 그가 손바닥만 한 천 주머니를 집어 들었다. 직접 만든 듯 촘촘하게 바느질된 면직물 안은 온기를 품은 팥알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난방이라고 부를 만한 시설이 전무한 이 건물에서 유일하게 따듯한 것이었다. 무혁으로선 굳이 추측하지 않아도 이것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있었다. 여자가 두고 간 것이었다. 움켜쥔 팥 주머니에서 시선을 떼던 찰나 바깥 어딘가에서 숨죽인 기척이 느껴졌다. 누군가가 오고 있음을 기민하게 알아챈 무혁의 눈매가 냉하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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