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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화 174화


173 소멸이라.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여원은 명안이 한 말을 되새기며 그대로 멈췄다. 환생도, 윤회도 아닌 소멸. 분명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결말일 텐데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고요했다. “소멸하면 전 어떻게 되는 건가요?” 여원이 차분하게 묻자 명안은 먼 곳을 응시하며 잠시 침묵했다. 잠깐의 침묵에서 여인이 말을 고르게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 잠깐 동안 여원은 명안에게 범접할 수 없는 거리감을 느꼈다. [……모든 만물은 순환하지. 어제의 꽃이 내일의 나비가 될 수 있고 한낱 미물이 사람으로 태어날 수도 있는 것처럼. 그래, 가령 그 새끼 여우 두 마리. 청실이랑 홍실이랬나? 그 둘은 정당한 죗값을 받으면 또 가족으로 환생할 거란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명안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인간의 삶이란 꼬아 놓은 새끼줄과 같아서 복잡하지만, 단단히 엮여 있어 쉽게 풀리지 않지. 육신이 썩어 흙으로 돌아갈지라도 혼은 순환하여 다시금 인세에 내려온단다. 인간은 그렇게 삶을 이어가는 게다. 우리와는 다른 형태의 영생이지.] 명안이 잠시 숨을 골랐다. 투명한 얼굴 뒤에서 망설임이 엿보였다. [하지만 네가 지금 신월의 곁을 선택한다면 너는 그 자격을 영원히 박탈당하게 될 게다.] 그녀가 여원을 내려 보며 나직이 속삭였다. [자격을 잃은 인간은 인세와 관련된 모든 고리가 끊기지. 이를테면 천륜. 환생의 문 앞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는 네 가족도 말이다.] 뜻밖의 단어에 여원의 눈이 커졌다. “가족들이요?” [그래.] 그 말에 여원은 아연했다. 소멸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 더 충격이었다. 동시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기쁨과 슬픔이 뒤섞인 복잡한 마음이 술렁거렸다. “……할머니는요?” [그녀는 인과를 거슬렀으니 약간의 제약이 따르겠지만 환생할 수 있단다. 자세한 건 말해 주지 못하지만, 그녀 또한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지.] “…….” 여원이 입술을 꾹 물었다. 눈물을 참는 얼굴에 안도가 스며들었다. 다행이야. 더는 할머니가 괴롭지 않아서. 그것만으로도 여원은 남은 죄책감을 모두 덜어 낼 수 있었다. 한결 평온해진 얼굴로 고요히 웃은 그녀가 고개를 들어 명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연한 갈색 눈에는 무언의 확신을 담고 있었다. 얼굴에 담긴 의지를 눈치챈 천신의 표정이 슬프게 바뀌었다. “일단 묻겠는데 제가 지금 환생하는 걸 택하면 신월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글쎄, 잠시 구금되어 있다가 죗값을 치르겠지.] “제가 원한다면 곁에 있을 수 있다 했으니 제가 남으면 신월은 당장 벌을 받지 않아도 되는 거죠?” [그래, 200년쯤이야 기나긴 삶을 사는 우리에게는 찰나에 불과하니 그 정도 시간쯤이야 유예할 수도 있을 게다. 다만.] 천신은 슬픈 눈으로 여원을 보며 진중하게 말했다. [신중하게 택하렴. 선택하면 돌이킬 수 없단다. 신월만이 아니다. 너는 천륜을 포기해야 하고 혼의 순환 또한 멈춘다. 소멸된 인간은 천계도 지옥도 가지 못해. 200년 뒤 네가 갈 장소는 우리조차 모르는 하늘의 너머야.] 소멸이란 그런 의미였다. 윤회, 환생은 물론이고 과거, 미래에 이어져 있는 모든 연결 고리를 포기하는 것. 고작 20년 정도 밖에 못 산 인간은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른다. “괜찮아요. 인사를 못 하는 건 아쉽지만, 이해해 주겠죠. 다들 상냥하고 다정한 분들인걸요.” 그녀가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떠오르는 아침 해가 그녀의 얼굴 한 면에 닿았다. 햇빛에 둘러싸인 여원에게는 조금의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가족들은 곁에 있어 줄 사람들이 있지만 신월에게는 저뿐이니까요.” 천신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녀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이 인간이 신월에게 유일무이한 존재이자 그의 폭주를 막는 하나뿐인 존재이니 말이다. 같은 태초의 존재도, 비슷한 시간을 살아온 명안조차도 그녀의 대신이 되어 주지 못한다. 여원이 죽고 신월이 악귀로 변해 버린 시점에서 모든 게 증명된 것이다. “언제 만날지도 모르는 미래를 기다리는 것보다 지금 신월의 곁에 있어 주고 싶어요.” 아침 해처럼 그녀가 찬란하게 웃었다. “그리고 저를 살려 준 여우가 그랬거든요. 할 수 있을 때 말하지 않으면 말하고 싶을 때 말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제게는 그게 지금인 것 같아요.” 이제야 서로, 아주 긴 시간을 넘고 넘으며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마음이 이어졌다. 여원은 더 이상 자신의 마음을 외면하지도 않을 것이고 지금 해야 할 일을 미래로 넘기지도 않을 것이다. 청실과 홍실이 준 두 번째 인생이니 더는 아무 후회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신월이 바라지 않을 텐데.] “그래도 상관없어요. 내가 곁에 있고 싶어서 남는 거니까.” [네가 죽고 신월이 또다시 폭주하게 되면 어쩌려고.] “그렇게 두지 않을 거예요. 남은 시간 동안 질릴 때까지 말해 줄 예정이라.” [무엇을?] 여원은 조금 부끄러운 듯 수줍게 웃어 보였다. 옅은 홍조가 떠오른 얼굴은 사랑에 빠진 여인의 감정을 잘 나타내 주고 있었다. “사랑한다고요. 언젠가 내가 없어져도 나와 함께했던 시간은 없어지지 않고 내가 신월을 사랑한다는 마음만큼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그가 견딜 수 있을까?] “그런 생각도 안 들게 행복하게 해 줄 거예요.” [예를 들어?] 여원이 턱을 잡고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짓궂은 얼굴로 씩 웃어 보였다. “비밀이에요.” 천신이 눈을 감았다.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퍼졌다. 우습게도 그 순간 명안은 신월의 마음을 이해해 버리고 말았다. 그가 사랑한 이 아이는 참으로 강하고 아름답고 올곧아서. 햇살이 환생한 것처럼 너무나 따뜻하고 자상해서. 사랑받고 또 사랑을 주기 위해 태어난 존재 같아서. 그래서 너는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구나. 돌연 여원이 합장하듯 손뼉을 치며 탄성을 내뱉었다. “아, 그렇다고 제 운명을 수긍하는 건 아니에요. 방법을 찾을 거예요. 시간이 걸려도 그의 곁으로 돌아올 수 있게요.” […….] “이것도 죄가 될까요?” 명안은 기어코 맥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럴 리가.] 명안이 손을 들어 여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또 모르지. 악귀 속에서 신월을 구해 낸 너와 그런 네게 돌아오기 위해 동화된 악귀마저 떨쳐 낸 신월이니 또 방법을 찾을지도 모르겠구나.] 동그란 머리를 따라 뺨으로 내려오니 여원이 간지럽다는 듯 코를 찡긋거렸다. [삶에는 원치 않는 변화도 있는 법이니.] 명안은 말없이 그녀에게 한 가지 도술을 걸었다. 오래전 신월이 문아에게 걸었던 그 도술과 더불어 한 가지 선물도 남겼다. 구태여 말해 주지 않는 것은 아주 약간의 심술이었다. 바보 같은 친구 때문에 이리 고생했으니 이 정도 심술은 괜찮겠지. 명안이 손을 떼고 한 발짝 물러서 여원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여원이 흠칫 놀랐다. [네게는 어떤 감사를 해도 모자라겠구나. 전대 천신으로서 그리고 신월의 친우로서 감사를 전하마. 고맙구나. 신월을 구해 주어서.] “아, 아니에요. 전 어떻게 한 것인지도 모르는데…….” [그래서 대단하다는 거란다.] 당황한 여원이 두 손을 흔들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천신이 숙였던 허리를 곧게 펴고는 여원을 마주 보며 환하게 웃었다. [모자란 놈이지만 신월을 잘 부탁한다.] 무지개를 닮은 천신의 미소에 여원이 잠시 멈칫했다. 어쩐지 엄마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여원 또한 생긋 웃어 보였다. “네, 노력할게요.” 표정을 가다듬은 여원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다시 배시시 웃었다. “아, 그리고 말인데요.” 음? 명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 바람이 불었다. 산들바람이 뺨을 간질이는 느낌에 신월이 감겨 있던 두 눈을 번뜩 떠 올렸다. 곧장 상체를 일으키니 익숙한 풍경이 그를 맞이했다. 명안과 싸움으로 허물어진 묘일궁이 다시 처음처럼 복원되었다. 고요하고 어둑한 정원, 살랑살랑한 바람, 아스라이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까지 전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돌아와 있었다. 그가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뭔…….] 해괴한 짓거리란 말인가. 이런 일을 저지를 사람은 명안밖에 없었다. 그가 이마를 짚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 도력 고갈로 인해 정신을 잃다니. 치기 어렸던 시절에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그 방증으로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악신과 동화된 탓에 몸에 부화가 온 모양이었다. 일단 몸을 일으키려는데 하반신에 묘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시선을 아래로 내린 순간 신월은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여원이 제 다리를 베고 잠이 들어 있었다. 제법 깊게 잠든 모양인지 색색거리는 숨소릴 내며 이따금 입술을 오물거리기도 했다. 혼란스러운 상황임에도 벗어나고 싶지 않아 신월은 숨소리마저 죽이며 여원을 내려 보였다. 얼마 안 가 여원의 몸이 부르르 떨리더니 감겼던 눈이 스르르 떠졌다. 그녀가 몽롱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작게 하품을 하니 사랑스러운 앞니가 보였다. “흐아암. 깜빡 졸았네.” 건조한 눈을 문지르던 여원이 묘한 위화감에 고개를 돌렸다. 반쯤 상체를 일으킨 채 불편하게 멈춰 있는 신월과 시선이 부딪친 그녀가 배시시 웃어 보였다. “아, 깼어요?” 너무나 평온한 인사였다. 순간, 자신이 기어이 환상을 보게 된 것이 아닐까 착각할 만큼. 그럴 리 없는데. 그가 멍한 눈으로 여원을 응시하자 그녀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표정이 왜 그래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여원아.] “네?” [여원아.] “네.” 두 번째 부름에 여원은 뭔가를 깨달은 눈으로 그에게 다가가 품에 안겼다. “저 맞아요.” 신월은 제 품으로 걸어 들어온 여원을 반사적으로 끌어안았다. 멈췄던 심장이 다시 뛰고 온몸에 피가 끓어오르는 듯했다. 신월의 입에서 뜨거운 숨이 터져 나왔다. 여원이 그의 가슴팍에 손을 짚고 고개를 젖혔다. 서로의 코끝이 닿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맞췄다. 밀폐된 공간 속, 혀가 끈적하게 맞물렸다. 두툼한 혀가 제 안쪽으로 넘어왔다. 그의 혀가 입 안 곳곳을 누비고 여린 살을 애틋하게 쓸어 올렸다. 여원 또한 지지 않겠다는 듯 입을 벌리고 그의 혀를 간질였다. 거칠지는 않지만 조급한 입맞춤이었다. 숨을 쉬기 위해 조금 떨어지면 신월이 다시 입술을 맞춰 깊게 혀를 넣었다. “으음.” 어두운 궁 안에 질척이는 소리가 퍼져 나갔다. 짙은 키스는 오랫동안 이어졌고 이윽고 여원이 숨을 헐떡이며 그의 어깨를 두어 번 내리쳤다. 그제야 신월의 입술이 미련을 잔뜩 남기며 떨어져 나갔다.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여원의 입술을 신월은 아쉽다는 듯 핥다가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천천히 숨을 들이쉬자 달큼한 살 내음이 비강을 가득 채웠다. [……왜 환생하지 않은 게냐.] “당신 곁에 있고 싶으니까요.” 그가 여원의 허리를 잡아당겨 더욱 제 몸에 밀착시켰다. [명안이 말해 주지 않던가?] “소멸한다는 거요?” 허리에 둘린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명안이 두 가지를 제안했을 때부터 무슨 말을 할지 전부 예상했다. 이후에 나올 소멸에 관한 얘기를 예상했기에 그렇게 분노에 휩싸인 거였다. 소멸이라니.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깨에서 억눌린 듯한 신음이 들렸다. 괴로움을 토해 내는 소리에 여원이 그의 어깨를 잡고 조금 떨어졌다. 그리고 신월을 본 여원의 눈이 더할 나위 없이 크게 뜨였다. “신월, 울어요?” 그의 뺨 위로 투명한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눈물을 흘리는 얼굴이라기엔 모든 감정을 배제한 듯 건조하기만 했다. 입까지 벌린 채 놀랐던 여원이 소리 내 웃기 시작했다. 신월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응시했다. 한참을 웃던 여원이 신월의 얼굴을 잡아당기며 입술을 부딪쳤다. 쪽 소리를 내며 가볍게 맞붙였다 떨어진 뒤 사랑스럽다는 듯 신월의 뺨을 쓰다듬었다. “슬퍼할 시간이 어딨어요? 이제야 우리 둘만 남게 되었는데.” [넌 남겨지는 입장을 모르니 그리 말할 수 있는 거겠지.] “내가 어떻게 당신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겠어요. 억겁을 사는 당신인데. 하지만 한 가지는 알아요. 다가올 미래가 무서워서 아무것도 못 하는 게 얼마나 아까운 짓인지요.” 그가 멈칫했다. 여원은 엄한 눈으로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난 행복해지기 위해 당신의 곁에 남았어요. 신월은요? 내가 곁에 있는 게 불행해요?” 그가 고개를 숙였다. 그럴 리가 없다. 지금도 그녀가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렇게 기쁜데. 하지만……. [고작 200년이지 않으냐.] “무려 200년인 거죠. 인간은 원래 100년도 못 살거든요? 긍정적으로 생각해요.” 여원이 눈을 가늘게 뜨고 핀잔을 주다가 고개를 돌렸다. 밤이지만 환한 달빛이 정원을 밝혀 주고 있기에 그리 어둡지만도 않았다. 이전과 외형은 같지만, 분위기가 달랐다. 전에 없던 생명력이 곳곳에 퍼져 있는, 따뜻한 느낌이었다. “있죠, 신월. 내가 명안 님께 부탁했어요. 궁을 다시 만들어 달라고. 이제 여기는 시간이 흘러요. 밤도 있고 낮도 있죠. 계절도 흘러갈 거예요.” 여원이 그의 가슴팍에 고개를 기대며 말했다. “봄에는 꽃놀이를 즐겨요. 여름에는 살구라도 먹으면서 물놀이를 하는 거죠. 가을에는 단풍에 물든 산을 구경해요. 겨울에는 어……, 눈사람을 만들까요? 트리를 꾸며도 좋고요.” 여원은 생각만으로 행복한지 주체를 못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다가올 미래를 두려워하면서 슬픔에 잠겨 있는 것보단 나랑 뭐 하면서 보낼지 생각하는 게 유익하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장난스럽게 웃으며 너무나 다정하게 건넨 말에 신월 또한 가슴 깊이 공감했다. 이 순간이 너무나 소중했다. 증오와 분노로 삶을 보내기에는 너무나 아깝고 무의미하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너는 참으로 강하구나.] “아무렴. 누구 여자인데, 강해야죠.” 그 말에 신월의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번져 나갔다. 내 여자, 나만의 사람. 나를 위해 존재하는 단 한 명의 여원. 따스한 바람이 불었다. 겨울의 끝을 알리는 포근한 봄바람이었다. “자, 그럼 구슬도, 업보도 없는 완벽한 타인인 내가 한 가지 제안할게요.” 여원이 눈가를 접으며 손끝으로 하늘에 떠 있는 달을 가리켰다. “오늘은 달빛이 예뻐요. 달구경 하기 좋은 날이죠? 여기에 술을 한잔 곁들이면 더할 나위 없겠는데.” 얼어붙었던 마음이 단숨에 녹아내리는 미소였다. 몇천 년이 지나더라도, 설령 세계가 멸망하고 또다시 뼈에 사무치는 고독이 찾아오더라도 이 미소가 자신을 지탱해 주리란 것을 신월은 이제야 깨달았다. 여원이 고민하는 듯 턱을 짚었다. “그리고 안주는…….” [브리치즈와 메이플시럽을 얹은 무염 크래커.] 여원이 놀란 듯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아이처럼 해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기억력도 좋으셔라.” [아무렴. 누구 남자인데. 똑똑해야지.] 신월의 얼굴에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달빛 아래 두 남녀가 서로를 끌어안고 더없이 행복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 순간 그의 정원 구석에 있던 살구나무에서 슬그머니 고개를 내민 꽃봉오리 하나가 잎을 펼쳤다. 두 사람의 앞날을 축복하는 듯 자그마한 생명의 몸짓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기억들이 있다. 이를테면 유독 더운 한여름 밤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 물기를 머금은 새벽 공기, 입 안이 아릴 정도로 시큼한 레몬 사탕 같은 것들. 그리고 달빛 아래 그 어느 때보다 밝게 웃고 있는 신월을 보며 여원은 오늘도 그런 날이 되리라고 확신했다. 살구나무에 핀 꽃은 지지 않는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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