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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화 172화


171 외형도, 목소리도, 촉감도 무엇 하나 신월과 같은 것이 없었지만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잔가지가 괴롭게 죽어 버린 것처럼 기괴한 모양새로 뻗어 있었다. 제 손을 타고 전해지는 온기를 느끼며 여원은 커다란 나무를 품에 안았다. 뾰족한 껍질이 뺨을 긁었으나 개의치 않았다. “찾았다.” 물기를 머금은 꽃이 활짝 피는 듯한 웃음을 지으며 나무를 감싸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신월.” 나직하게 그를 부르자 눈앞에 빛이 터졌다. 순식간에 어둠이 걷히고 붉은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고개를 젖히자 납빛의 하늘이 보였다. 동시에 하늘에 떠 있는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여인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이쪽을 내려 보고 있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저 여인이 신월과 연관이 있는 존재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원은 그제야 자신이 있던 곳이 ‘안’이었고 이제 ‘밖’으로 나왔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놀란 듯한 여인을 향해 슬그머니 웃어 준 순간 강한 힘이 여원의 몸을 감싸 안았다. 그와 동시에 입술이 부딪혔다. “읍……!” 움찔, 놀란 몸이 부르르 떨렸다. 여원이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치려 하자 긴 손가락이 머리카락 사이를 헤집고 들어와 뒤 목을 당겼다. 옴짝달싹 못 하게 옭아매는 탓에 여원이 그의 어깨를 잡아 밀려다가 그대로 멈췄다. 신월의 몸에서 옅은 떨림이 느껴졌다. 크지도 작지도 않지만 닿아 있는 자신만은 느낄 수 있는 정도의 떨림이었다. 잠시 움직임을 멈췄던 여원은 허공에 있던 손을 들어 그의 목에 둘렀다. 눈을 감고 다문 입술을 벌렸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기다렸다는 듯 두툼한 혀가 밀려 들어왔다. 혀는 입 안 곳곳을 거칠게 누볐다. 점막을 쓸어내리고 치아를 훑었다. 그 행동이 마치 살아 있음을 확인하려는 것만 같아서 가슴이 쓰라렸다. 숨이 막혀 왔지만, 여원은 피하지도 그를 밀어 내지도 않았다. 얼마든지 기다려 줄 수 있었다. 그의 불안이 사그라들 때까지. 얼마 안 있어 혀가 빠져나갔다. 그럼에도 신월은 입술을 붙인 채 연신 문질렀다. 미련을 떨쳐 내지 못했는지 그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청실이 도술을 사용했구나…….] 커다란 손이 여원의 얼굴을 더듬었다. 눈동자가 슬픔에 젖어 있었다. “……예상했어요?” [그럴 리가. 알았다면 네가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았겠지.] 그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를 따라 여원도 고개를 숙였다. 신월이 제 옷에 뚫린 구멍을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멋쩍게 웃었다. “괜찮아요.” 여원의 대답에도 신월의 표정은 여전히 일그러져 있었다. “별로 반갑지 않은가 봐요. 죽다 살아왔는데.” [그럼 잘했다고 칭찬이라도 해 줄 줄 알았느냐?] “다시 왔잖아요.” 여원이 덤덤하게 웃었다. “약속도 지켰고.” 그의 얼굴이 경직되더니 노란 두 눈이 거세게 떨렸다. 끝없는 어둠에 잠식돼 있던 신월은 여원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찾았다고 말한 그녀의 목소리를. 그가 이를 악문 듯 턱에 힘이 들어갔다. [죽을 수도 있었다. 아니 실제로 죽었지. 청실이 다른 마음을 먹었다면, 아니 그 전에 도술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다면 너는……!] 신월은 화를 억누르듯 거친 숨을 토해 냈다. 이렇게 감정적인 얼굴은 또 처음이라 이런 상황에도 여원은 웃음이 났다. “그 전에 할 말이 있잖아요.” [뭐?] “사랑해요.” 신월이 놀라다 못해 멍한 얼굴로 바뀌었다. 이것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의외로 정공법에 약한가? 여원이 쿡쿡 웃었다. 접힌 눈꼬리에 눈물이 고여도 기쁘게 웃었다. “사랑해요. 신월.” […….] “그리고 고마워요. 내게 대가 없는 사랑을 알려 줘서.” 여원이 손을 올려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사랑을 받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알려 줘서 고마워요.” 흠칫, 여원의 온기에 놀란 그의 얼굴이 망연해졌다가 눈에 띄게 흐려져 갔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하기 어려운 표정으로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 충격으로 굳어 있던 그의 얼굴이 낮게 가라앉았다. 화가 났다기보다는 조금 슬퍼 보이는 표정이었다. [이제 만족하느냐?] “네?” [좋겠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돼서.] 여원의 눈이 커졌다. 고백에 대한 답변이라고 보기에는 냉소적인 태도에 여원이 심각한 표정으로 뺨에 얹은 손을 내리려 할 때였다. 그가 떨어지려는 여원의 손을 잡아 다시 제 얼굴에 가져다 대었다. 그녀의 손에 신월이 제 얼굴을 느릿하게 문질렀다.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네 몸에는 구슬도, 업보도 없어 언제든 날 떠날 수 있을 테니.] “……무슨 말이에요?” [내가 붙잡으면 넌 또 그 목숨으로 나를 위협하겠지.] “안 그래요.” [아니, 그럴걸. 내가 널 잃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걸 알지 않았느냐.] 신월이 체념이 섞인 눈으로 키득거리며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넌 좋겠구나. 이제 거리낄 게 없으니 내가 가지 못할 곳으로 언제든 떠나 버리겠지. 난 그런 너를 잡을 수 없을 테고.] 사늘한 말과 달리 행동은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여원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 아쉽다는 듯 슬프게 내리깐 두 눈이 여원을 향했다. [그걸 아니 그런 무책임한 말을 지껄일 수 있는 거겠지.] 여원이 멈칫거렸다. 놀란 듯, 어이가 없는 듯 동그랗게 커졌던 눈이 매섭게 휘었다. 여원은 턱을 당겨 눈을 치켜떴다. “한 번 봐줄게요.” [뭐?] “힘든 경험이었잖아요. 뭐,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처럼 당장은 힘들겠죠. 그러니 사과를 대신해서 한 번 용서해 주겠다는 거예요.” 여원이 턱을 추어올리며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구슬과 업보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해요? 날 곁에 두고자 하는 이유가 고작 구슬과 업보 때문이었어요? 아닐 텐데.” 그녀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냥 솔직히 말해요.” […….] “내가 당신을 두고 떠날까 봐 불안하다고.” 신월의 얼굴이 그대로 굳었다. 조각처럼 완벽한 얼굴에 금이 쩍 그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무언가를 말할 듯 입을 달싹거리다 다시 다물었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감정을 억누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매개가 없는 관계는 쉽게 무너져.] “안 무너져요.” [단언하지 말거라.] 신월이 눈을 질끈 감았다 떠 올렸다. 금빛 두 눈 안에 복잡한 감정들이 얽혀 어둡게 빛났다. [모든 인간이 그랬고 너도……] “아, 정말!” 여원이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짜증을 내며 그의 말을 잘라먹었다. 여원이 신월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직도 그 소리예요? 말했죠? 이런 사람도 있어요. 모든 관계의 끝에 배신과 증오만 남는 게 아니에요.” 여원은 씩씩거리며 그의 얼굴을 잡아당겼다. 저항 없이 허리를 숙인 그와 똑바로 눈을 마주치며 여원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잘 봐요. 내가 당신을 배신하고 떠날 사람인가요?” […….] “그럴 거였으면 죽지도 않았어요.” 신월은 말이 없었다. 대신 아름다운 두 눈이 거세게 일렁였다. 그가 눈을 내리깔았다. 긴 속눈썹이 애처롭게 흔들리는 모습에 여원이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 이제 솔직해지자고요.” […….] 그가 더 듣기 싫다는 듯 눈을 감아 버렸다. 그럼에도 여원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이 멍청한 여우를 혼낼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자신뿐이니까. “날 좋아하잖아요.” 여원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날 사랑하잖아요.” 그 어느 때보다 달콤한 말로. “곁에 있어 달라고 해요.” 은근한 말로 신월을 유혹한다. 그 말이 세상 어떤 말보다 달콤해서 그의 이성이 서서히 마비되어 갔다. [너는 그 말이 얼마나 무책임한지 몰라.] 사랑한다고. 좋아한다고. 그가 이를 악물었다. 책임질 수도 없으면서. 인간들은 너무나 가볍게 그 말을 내뱉고는 했다. 하지만 영생을 사는 이들에게는 무게가 다른 말이었다. 자신들의 감정은 변하지 않는다. 한번 품은 연심이 흐려지는 일도 없다. 수없이 변하는 인간들과 달리 자신들은 영원히 그 마음을 품고 살아야 한다. 사랑하는 인간이 죽고 난 이후에도, 이 오갈 곳 없는 마음을 가지고 몇천 년을 살아야 할지 모른다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제 마음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내뱉으면 돌이킬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마음이란 건 숨긴다고 숨겨지는 것도 아니었고 억누른다고 억눌리는 것도 아니었다. 이미 걷잡을 수 없이 커진 그의 마음은 가벼운 충격만으로도 무너져 내릴 것처럼 연약해져 있었다. “신월.” 그래, 가령. “날 믿어요.” 이렇게 형체 없는 말뿐인 유혹에도 간단히 넘어갈 정도로 말이다. 그가 여원을 품에 안았다. [……불안해.] 그가 지독히도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여원은 그를 마주 안으며 그의 넓은 등을 토닥여 주었다. [불안해서 돌아 버릴 것만 같다. 네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괴롭고 다치기라도 하면 눈앞에 있는 걸 전부 죽이고 싶어.] 그의 호흡이 거칠었다. “그건 좀…….” 생각보다 폭력적인 사상에 여원이 정색했다. [네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 잠시 말을 멈춘 그가 숨을 들이마셨다. 생각만으로도 괴로운지 그가 낮게 탄식했다. [날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강인한 팔에 힘이 들어갔다. 조금도 떨어지기 싫다는 듯 애달픈 몸짓에 여원은 기꺼이 응해 보였다. [날 혼자 두고 떠나지 마…….] 신월은 무너지듯 여원을 더 깊숙이 품에 안았다. 아아. 이래서 내뱉고 싶지 않았던 건데. 2천 년. 자그마치 2천 년을 살며 이렇게까지 간절하게 바라고 바란 적이 있던가. 영원을 사는 자신에게 영원을 다 바쳐도 아깝지 않을 존재가 또 있을까. 억누르고 있던 마음이 해일처럼 그를 덮쳐 왔다. 이토록 오래 살았지만, 그 또한 제 마음을 설명할 재간이 없었다. 이 마음을 무어라 설명한단 말인가. 봐도 봐도 보고 싶었고 보이지 않으면 숨이 막히고 제게만 웃어 주었으면 좋겠고 자신만을 바라봐 주길 원했다. 구역질이 치밀 정도의 끔찍한 집착과 한평생 처음 가져 보는 순수한 마음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또?” 여원이 웃음을 터트리며 물었다. 말의 의미를 눈치챈 신월이 조금 시무룩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고압적으로 굴어 미안하다.] 여원이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필요한 말이긴 한데 지금은 그거 말고요.” 신월이 껴안고 있던 몸을 조금 떨어트려 여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옅은 심장 소리가 들려온다. 소리는 온기가 되고 온기는 마음이 되어 온몸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갔다. 이내 그가 툭 던지듯 말했다. [연모한다.] 놀라울 정도로 덤덤한 말이었으나 여원은 알 수 있었다. [나 같은 존재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억겁의 시간뿐이라, 그것을 걸고, 영원을 맹세할 만큼…….] 덤덤한 것이 아니라 감정이 주체가 안 되어 애써 누르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너를 연모하고 있어.] 신월의 단정한 입매가 조금 떨렸고 눈가는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숨이 막힐 만큼 아름다운 얼굴에 순결한 다짐이 떠올랐다. 정말 사랑스럽고, 완벽한 고백이 아닐 수 없었다. “네, 저도 사랑해요.” 오직 자신만을 위해 살아갈 준비가 된 듯한 신월을 향해 여원은 있는 힘껏 팔을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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