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11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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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한 인사는 이런 게 아니에요…….”
허공에서 신월의 손이 멈추었다. 그의 눈이 사늘하게 가라앉았으나 그런 것은 그녀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여원이 괴로운 듯 고개를 저었다. 달랐다. 제가 말한 인사는 이런 것이 아니었다.
비록 즐거웠던 추억 하나 없을지라도 할머니는 제게 하나뿐인 가족이었다. 이렇게 남처럼, 무미건조하게 인사를 하고 끝낼 수 없었다. 그렇게 정리해도 될 만큼 죽음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돌아갈래요. 인월 집으로. 내가, 내가 정리해야 해요.”
비록 마지막 가는 길에 함께 있지 못했으니 적어도 이별만이라도 제대로 하고 싶었다.
돌아올 사람 없이 우두커니 있을 그 넓은 집에서 여원은 남겨진 짐을 정리하고 유품을 태우고 추억을 회상하며 끝없이 곱씹어야 했다.
그 과정이 무척이나 고통스러울지라도 그것이 남겨진 자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떠나간 사람은 언젠간 잊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여원은 가족이기에 먼저 떠나간 이들을 누구보다도 오래 기억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그녀에게 삶이란 그런 것이다.
몹시도 사랑했던 가족들의 추억을 안고 사는 것.
이제는 만날 수 없는 가족들을 끝까지 기억하는 것.
그 책임에 짓눌려 이따금 죽고 싶어져도 여원은 눈을 돌리거나 회피한 적은 없었다.
이제는 흐릿해진 엄마, 아빠. 자상했던 할아버지. 그리고 끝내 닿을 수 없었던 할머니까지.
전부 자신이 기억해야지만 비로소 의미가 있다고 굳게 믿었다.
이런 모든 행위가 여원이 떠나간 가족을 기리는 방법이었다.
제 수명이 얼마나 남았든 상관없었다. 적어도 모든 것을 정리할 시간만 있다면. 그것조차 욕심이라면 적어도 그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었다.
“적어도 마지막만큼은 내가 선택하게 해 줘요…….”
간절한 애원에도 신월은 더더욱 차가워질 뿐이었다.
[이미 끝났어. 네 혈육은 죽었고 그렇게 실물이 보고 싶다면 유골을 가져오라 일러 주마. 조모뿐만 아니라 모든 이의……]
“그만 좀 해요!”
일순 여원의 눈에 불이 튀었다. 있는 힘을 다해 그의 가슴팍을 밀쳐 냈으나 도리어 밀리는 것은 제 몸이었다.
신월은 괜히 버둥거리다 다칠까 봐 그녀를 내려 주었다. 지면에 발이 닿자마자 여원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그의 가슴을 세게 내리치기 시작했다.
“그만, 그만 좀 하라고요!”
여원은 바락바락 악을 쓰며 주먹으로 신월의 가슴팍을 내리쳤다.
아프지도 간지럽지도 않은 힘이었지만 내려치면 내려칠수록 그녀의 주먹이 빨갛게 부어오르는 것이 보여 결국 신월이 그녀의 양 손목을 잡아 멈춰 세웠다.
[그만. 다친다.]
여원이 히끅거렸다.
“이만하면 됐잖아요, 이만큼 힘들게 했으면 보내 줄 수도 있는 거잖아요…….”
고개를 들어 올린 여원은 눈물로 뒤덮여 힘껏 괴로워하고 있었다.
“……나는 전혀 특별하지 않아요. 차라리 나한테서 구슬을 되찾은 다음에 다른 인간을 찾아요. 나보다 장기도 잘 두고 죽고 싶지 않아 하는 인간은 얼마든지 있어요.”
[시답지도 않은 소리.]
“이해되지 않으면 하지 말아요, 난 당신의 이해를 바라지 않아요. 그냥, 그냥 이게 나예요.”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아 보려 노력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녀는 방류하는 감정을 그대로 뒤집어쓴 채 구슬 같은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다.
신월은 그녀가 이곳으로 오고 나서 울지 않은 날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고민할 가치가 크게 없는 생각이었기에 금방 머릿속에서 들어냈으나 묘하게 가슴에 걸렸다.
여원이 입술을 달싹이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내 의사를 무시하고 자유를 억압하고……, 나를 대하는 것에 그 아이가 전제되어 있는데 이래도 겹쳐 보는 게 아니라고 할 수 있어요? 이따금 나를 보며 그 아이를 떠올리잖아요.”
그의 얼굴이 굳었다. 아이처럼 맑은 두 눈을 무구하게 깜빡이는 것조차 여원은 전부 지겨웠다.
“그렇다면 대체되는 인간을 찾아요, 그 아이와 얼굴도 닮고 성격도 닮은 아이가 있을 거예요. 당신이라면 찾을 수 있어요. 그러니까 난 내버려 둬요.”
신월의 눈이 아득해졌다. 분명 눈을 마주치고 있는데 전혀 다른 곳을 보는 것 같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여 주기를, 여원은 망연하게 기다릴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는 예상치 못한 질문이 나왔다.
[가족이 그리 중한가?]
“…….”
순간 말문이 막혔다. 분명 눈을 마주치고 그의 앞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맞는데 전혀 다른 사람에게 질문하는 것 같았다.
그 순간 귀에 이명이 들렸다. 이명의 건너편에서 목소리가 넘어왔다. 비명과도 같은 절규의 소리가.
하지만 이미 여원은 입을 움직이고 말았다.
“중요해요. 그 무엇보다.”
[이미 죽어 없어졌는데도.]
마치 물건이 없어졌다고 말하는 듯 건조한 목소리에도 여원은 이성을 잃지 않고 답했다.
“그렇다 해도 소중한 건 변함이 없어요…….”
[너를 그렇게 상처 입혔는데도?]
무슨 말이 듣고 싶은 걸까.
여원의 아랫입술이 처량하게 떨렸다.
그녀가 버림받은 아이처럼 괴로운 표정을 짓더니 이내 모든 것을 받아들인 사람처럼 덤덤하게 말했다.
“그래서 더 슬퍼요, 이제 나는 할머니를 용서할 수도 용서를 받을 수도 없으니까.”
할머니와 나눈 마지막 대화가 떠올랐다. 내게 가족은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마지막이었다는 그 말과 함께 상처받은 할머니의 얼굴이 뇌리에 박혀 잊히지 않았다.
그 말만큼은 하지 말아야 했는데.
참았어야 하는 건데.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후회와 자괴감은 언제나 남겨진 사람의 몫이다.
여원은 꺼져 가는 촛불처럼 중얼거렸다.
“당신과 함께한 시간은 즐거웠어요. 기쁘고 정말 설렜어요. 하지만 그게 내가 살 이유는 되지 않아요.”
울다가 웃다가 또 괴로워하다가. 신월은 그녀가 하는 말보다도 표정을 감상하고 있었다.
“겁이 나서 지금껏 못 물어봤어요. 만약 가족이 죽어 나간 게 정말, 그게 정말 내 잘못이라면 나는 할머니가 말한 악귀가 맞으니까.”
여원은 입술을 꾹 깨물고 거친 숨을 토해 내며 말했다.
“이제 와서 궁금하지도 않아요. 어차피 끝은 정해져 있으니까. 내가 죽어야지만 이 지독한 업보도 끝날 거예요.”
아주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살이 떨리는 이 침묵이 여원은 몹시도 불쾌했다.
그리고 불길함은 곧 현실로 바뀌었다.
[이해가 안 되는걸.]
“…….”
[이제 넌 업보가 없지 않으냐, 그 업보에 해당하는 ‘가족’은 전부 죽었으니.]
여원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동공이 수축하고 등줄기에 소름이 솜털이 바짝 서는 소름을 느꼈다.
아닐 거야. 설마.
여원은 막힌 목소리를 억지로 쥐어짜 내며 간신히 말했다.
“……아니죠?”
[무엇이?]
“할머니, 당신이 죽인 거 아니죠?”
[아, 그거.]
그는 무료한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음습하게 웃어 보였다.
[오해하지 말렴, 난 너를 속이지 않았어. 난 네 혈육에게 정기를 넣어 주었지만, 몸이 버티지 못한 것도 전부 사실이야.]
그의 손이 여원의 뺨을 쓰다듬는다. 바짝 선 솜털을 어루만지며 그가 산뜻하게 중얼거렸다.
[다만, 인과를 어긴 죄로 업화에 태워지겠지만.]
순간 여원이 귀를 의심했다. 인과, 업화. 살벌하고도 생소한 단어들의 나열에 잠시 뇌가 정지되었다.
그녀의 고개가 천천히 내려갔다. 좌우로 느리게 움직이는 고개가 그녀가 얼마나 이 상황을 힘겨워하는지 보여 주는 듯했다.
“그 말은 지옥, 에 떨어졌다는 거예요?”
[그래.]
그는 일말의 고민 없이 대답했다.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안 된다는 듯이.
“왜, 왜 말 안 했어요?”
[말해 주면 뭐가 달라졌을까?]
차원이 다른 자괴감이 몰려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제 몸이 썩어 문드러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며 여원이 느리게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 나는 할머니를 지옥에 떨어트리고 싶은 게 아니었어요…….”
[대신 수명보다 오래 살았잖느냐.]
신월은 여원을 일으키는 대신 그 또한 자리에 앉았다. 제가 덮어 준 겉옷 너머로 하얗다 못해 투명한 그녀의 살결이 보여 그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런 상황에도 욕정을 품다니, 저 자신에게 경멸이 일어 그가 비릿하게 웃었다.
“수명…….”
그녀가 중얼거렸다.
“……나도 인과를 어긴 사람이죠? 당신의 구슬을 가지고 있으니까.”
역시 감이 날카로워졌다. 구슬이 흡수가 잘되고 있다는 신호에 그가 흡족하게 웃으며 여원의 턱을 잡아 올렸다.
[여원아, 사소한 것에 연연하지 말렴. 봐, 너는 이렇게 숨을 쉬고 내 곁에 있잖니.]
사소한 것. 이 모든 일을 그는 사소한 것이라고 한다.
[너는 죽지 않을 테니 인과에 대한 벌도 받지 않을 테지, 내 구슬을 흡수하고 2000여 년간 수련하면 인간이었을 시절의 죄는 씻어 낼 수 있단다.]
말도 안 될 만큼 긴 시간에 여원은 넋이 나간 것처럼 멍하니 그를 쳐다봤다.
할머니를 지옥에 떨어트려 놓고는 자신은 죄를 씻어 낼 수 있다니.
그녀의 머릿속에 언젠가 꾸었던 꿈이 스쳐 지나갔다.
할머니 주변에 솟아오르던 검은 불길. 발목에 채워진 족쇄를 겸허한 얼굴로 쓰다듬던 할머니.
꿈에서 할머니가 뭐라 했더라.
그래 분명.
‘죽지 마.’
죽지 말라니, 설마 내가 인과를 어긴 것을 알고 지옥에 떨어질 걸 알아서 한 말일까?
그렇다면 할머니는 알고 있었던 걸까?
그건, 정말. 꿈이 맞는 걸까?
쿵쿵. 요란스러운 제 심장 소리에 생각이 가로막힌다.
‘죽지 마라.’
마지막 할머니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귀에 울렸다.
모든 사고 회로가 동시다발적으로 멈춘다.
정지된 머릿속에 오로지 한 가지 생각만이 뚜렷하게 떠올랐다.
할머니는 이미 오래전에 제게 사과했다는 지독한 깨달음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