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8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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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이라는 말과 동시에 허리를 꽉 잡고 있던 손이 스르륵 풀려나갔고, 거짓말처럼 옥죄어 들던 숨도 다시 편하게 내쉬어졌다.
여원이 열띤 한숨을 뱉으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래. 지금 그는 겁을 준 것이었다.
네가 날 감당할 수 있겠냐는 물음을 던지며 말이다.
‘아니, 죽었다 깨어나도 감당 못 하겠지.’
빠른 인정과 동시에 뜻 모를 오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냥 편하게 알겠다고 하고 지나가면 될 텐데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쁜지 모르겠다.
잠시 고민하던 여원은 그냥 인정하기로 했다.
이 불편함은 그가 자신을 믿지 못한다는 느낌 때문이리란 걸.
궁금했다. 아직도 과거의 그 아이와 자신을 겹쳐 보는 건지, 그 아이한테도 본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는지.
머릿속을 빠르게 지나가는 비참한 질문들이 끝내 여원의 입을 열게 했다.
“그럼 반만.”
여원의 말에 그가 고개를 내렸다. 여원은 터져 나오려는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한 박자 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반이라도 풀면 좀 낫지 않을까요? 그 정도는 견딜 수 있겠죠.”
그가 사뭇 놀란 기색을 띠며 여원을 응시했다.
그녀의 이성이 지금이라도 그만두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신월의 표현을 조금 빌리자면 인간이란 원체 미련한 생물인지라 때때로 되돌리지 못할 선택을 하기도 한다.
여원은 그의 앞섶을 꽉 쥐며 말했다.
“꼬리, 만지게 해 준다면서요.”
그녀는 모른다. 지금 그녀가 하는 말이 아주 조금 남아 있던 신월의 일말의 망설임까지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는 것을.
잠시 무표정하게 여원을 쳐다보고 있던 신월의 눈에 일순 수많은 것이 떠올랐다가 다시 수면 아래로 잦아들었다.
반짝이던 눈이 순간 이채를 잃고 어둡게 가라앉자 여원이 흠칫거렸다.
[하하.]
그가 소리 내어 웃었다.
평소와는 다른 그 웃음에 잊고 있던 수치심이 단번에 몰려왔다.
그제야 깨달았다. 제가 얼마나 치기 어린 질투를 하고 있었는지.
부끄러움에 고개를 푹 숙였다.
“죄, 죄송……”
[네게는 당해 내질 못하겠구나.]
상쾌하리만큼 맑은 웃음소리에 여원이 슬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는 한참을 키득거리더니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며 뒤로 머리를 쓸어내렸다.
어딘지 모르게 후련한 얼굴이었다.
신월은 대뜸 여원을 번쩍 들어 올려 앞에 있는 침대에 앉혔다.
[그리 말한다면 보여 줘야지.]
신월이 한 발자국 떨어지며 강조했다.
[하나 피해서도, 눈을 돌려서도 아니 된다. 네가 선택한 일이니.]
“그렇게까지 엄포를 놔야 하는 일이에요? 산신님은 그냥 보여 주던데.”
[그건 무호가 멍청한 탓이야. 그 아이는 예부터 조심성이 없어 그런 식으로 인간들에게 존재를 들켜 왔지.]
침대에 다소곳이 앉아 얘기를 경청하고 있던 여원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데 주저하는 모습에 신월은 예의 있게 기다려 주었다.
지금이라도 그녀가 보지 않겠다고 말하면 여기서 끝낼 생각이었다.
본모습을 보여 주지 않겠다고 한 것은 신월의 배려라는 것을 그녀는 아직 알지 못한다.
그녀는 미래영겁 제 곁에 있어야 할 테니 남은 생을 전부 두려움에 떨며 살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무호의 모습을 보고 기대하는 것 같지만 신월의 본모습은 인간들이 알고 있는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지금의 영물들이야 기존에 있던 동물들의 외형을 그대로 따라가지만, 옛날에는 달랐다.
동물이 퇴화를 거치기 전의 모습.
그는 아주 옛날, 아득히 먼 태초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굳이 보여 여원에게 미움을 받기 싫은 것도 하나의 이유였지만 사소한 이유가 또 하나 존재했다.
본디 산신급 이상의 영물들은 본모습을 쉬이 드러내지 않는다.
의태를 하면 족쇄를 찬 것처럼 힘의 억압을 받기에 균형을 이루기에 편하다는 것은 대외적인 이유였다.
까마득하게 먼 옛날부터 영물들이 날것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은 그들 사이에서 반려를 신뢰한다는 증거였다.
신뢰는 나아가 약속으로, 약속은 혼례로 바뀌었다.
무호는 어려서 잘 모르는 모양이지만, 영물들은 혼례를 치를 때 자신의 겉과 속이 같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낮에는 인간의 모습으로, 밤에는 본모습으로 변한다.
도술을 전혀 쓰지 않은 본래의 모습을 반려에게 보여 주며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음을 나타낸 뒤 영원불멸한 약속을 맹세한다.
그렇기에 본래의 모습은 제 반려에게만 보여 주어야 한다.
이 말을 해 줄까 잠시 고민하다가 신월은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몇 번이고 경고를 남겼고 그럼에도 보겠다고 한 것은 여원의 선택이었다.
선택에는 언제나 꼬리표처럼 책임이 뒤따르는 법이다.
신월이 잠시 생각하고 있는 사이, 여원은 고민이 끝났는지 그의 눈치를 살피며 슬쩍 입을 열었다.
“……신월 씨는요?”
그 말에 신월은 이를 꽉 깨물었다. 명백히 누군가를 의식하고 한 물음이었다.
“누군가에게 보여 준 적 있어요?”
그녀가 이전부터 문아를 의식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굳이 해명하지 않은 것은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그녀가 더 다가와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일이니까.
[보여 준 적 없어.]
“아…….”
일순 여원의 얼굴에 미약한 안도와 기쁨이 스쳐 지나갔다.
몇 번이고.
[앞으로도 평생 없겠지.]
그의 단언에 여원이 움찔거리며 되물었다.
“보여 달라고 한 처지에 이런 말씀은 좀 그런데 신중하게 선택하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신중해.]
그의 눈이 차갑게 내려앉음과 동시에 뜨겁게 불타올랐다.
[모르겠느냐, 너는 내게 특별한 존재라고 말하고 있는 거란다.]
그 말에 이상하게 오한이 들었다.
[이곳은 나를 담기에는 너무 좁으니 장소를 옮기자꾸나.]
신월은 예의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한 발짝 떨어졌다. 그러자 발밑으로 스산한 안개가 차오르더니 주변이 서서히 흐려졌다.
“여기가 어딘데요?”
그는 옅은 미소를 띨 뿐, 대답해 주지 않았다. 신월이 뒤로 한 발자국씩 떨어질 때마다 돌풍이 휘몰아쳤다.
거센 바람에 여원은 기시감이 들었다.
신월을 처음 만났던 그날이 떠올랐다.
눈가를 스치는 매서운 바람에 여원이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그리고 바람이 멈췄을 때 천천히 팔을 내리자 눈앞이 온통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
“……신월 씨?”
오롯이 암흑으로 둘러싸인 공간 안에서 여원이 애처롭게 그를 불렀으나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뭐예요. 장난치지 말아요.”
고개를 두리번거려 봐도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어두웠다.
어두운 곳은 트라우마를 불러일으켰다.
여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새된 신음을 지르며 주저앉고 말았다.
“히익!”
발바닥에 닿는 느낌이 이상하리만큼 미끈거렸다. 여원은 자리에 앉은 채 고개를 빠르게 돌렸다.
“신, 신월 님, 아니 신월 씨, 신월, 신월!”
파리하게 질린 안색으로 여원은 허공에 대고 외쳤다. 공포에 질린 아이가 엄마를 찾듯 여원은 계속 신월을 부르짖었다.
그리고 몇 초 뒤, 바닥이 흔들리는 느낌이 나더니 어둠이라고 생각했던 곳에서 눈이 스르륵 뜨였다.
[이제야 이름으로 불러 주는구나.]
여원이 고개를 들어 올리자 정확히 네 개의 눈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위아래로 쭉 찢어진 눈매, 그 안의 홍채는 전부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기에 주위가 순식간에 밝아졌다.
여원이 넋이 나간 것처럼 중얼거렸다.
“신월?”
[그래.]
그의 대답에 여원이 다시금 주위를 둘러봤다. 미끈거린다고 생각했던 것은 전부 그의 털이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여원은 땅을 짚고 있던 손을 쥐었다 펴며 다시 한번 그의 털을 재차 확인했다.
“……대체 얼마나 큰 거예요?”
[글쎄. 크기를 재 본 적은 없는데.]
잴 수 있는 이가 없기도 하고. 라고 덧붙였으나 놀란 여원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역시 두렵니?]
그의 물음에 여원이 숙였던 고개를 느리게 들어 올렸다.
보이는 것은 네 개의 눈밖에 없었다. 그것도 너무 커서 어떤 눈에 초점을 맞춰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
다른 곳을 보고 싶어도 뭐가 뭔지 식별이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여원은 무호 때와는 역시 다르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보면 그때보다 더 기괴하고 무서운 광경이지만 들리는 목소리가 신월이라 그런가.
여원은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에 그만 웃음이 터졌다.
“얼마나 커야 사방이 까맣게 보일 수 있는 거야…….”
홀로 중얼거리며 몸을 숙여 웃던 여원이 숨을 몰아쉬더니 돌연 꼿꼿이 고개를 치켜세웠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네 개의 눈 중 어느 것 하나 낯선 것은 없었다.
그의 눈은 투명한 호수 밑바닥처럼 맑았고 보석처럼 반짝거렸으니까.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네 개의 홍채 모두 그의 눈임이 틀림없었다.
“제가 말했던가요?”
[무엇을?]
“당신 눈은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예쁘다고요.”
여원이 해사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안에 어떠한 공포도 두려움도 묻어 있지 않았기에 바닥과 벽을 가득 채운 것들이 일순 크게 요동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