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8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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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덥네요.”
여원은 코를 훌쩍이며 손으로 얼굴에 부채질했다. 그녀는 눈물이 찔끔 난 것을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숨겼다. 그런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던 신월이 문득 입을 열었다.
[술은 좋아하느냐.]
“술이요?”
[그래. 쓰러질 때까지 마셨다고 했으니.]
“그건 어려서 그런 거였어요.”
여원은 음, 소리를 내며 고민했다.
“잘 못 마시는데 싫어하지는 않아요. 신월 씨는요?”
물어보고도 아차 싶었다. 자연스럽게 물어보기는 했는데 그는 음식도 먹지 않으니 당연히 음주를 즐길 것 같지도 같았다.
그러나 예상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예전에는 제법 즐겼지. 취하지 않아도 술은 풍류를 돋보여 주니까.]
“아, 그래요?”
[우악산 쪽에 술을 잘 담그는 이가 있었지.]
담담하게 이어지는 말에 여원이 눈을 반짝거렸다. 그리고 잽싸게 대꾸했다.
“사람인가요?”
[그래. 인간이긴 했으나 술 빚는 솜씨가 썩 나쁘지 않았단다.]
“와.”
그녀의 감탄사에는 많은 감정이 함축되어 있었다.
신월이 자기 얘기를 해 주는 건 처음이었다.
본인 얘기라고 하기에는 조금 모호했으나 하여튼 그가 과거를 얘기하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기에 여원은 신기한 눈을 한 채 그의 말을 경청했다.
“옛날에 태어났으면 마셔 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쉽네요.”
[지금도 마실 수 있어.]
“어떻게요?”
[후손이 대를 물려받았더군. 마시고 싶으면 구해 주마.]
“그 후손은 장인이겠네요. 그것보다 사람이 하고 있다면 제가 가서 사 오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그렇다면 같이 가자꾸나.]
“아…….”
[오늘처럼 버스를 타도 좋고, 뭐든 괜찮겠지. 앞으로 시간은 많으니.]
뒷말을 강조하는 어조에 여원이 작게 움찔거렸다. 그러고는 무언가를 망설이는 듯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손끝을 매만지던 여원은 이내 배시시 웃어 보였다.
“기회가 되면요. 아, 밖에서 계속 걸었더니 출출하다. 신월 씨 음료수 마실래요?”
어물쩍 화제를 전환한 여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를 열었다. 문을 여니 작은 사이즈의 매실 음료와 오렌지 음료가 놓여 있었다.
신월이 뒤에서 보고 있는 건지 등 뒤가 따끔거렸다.
말 피한 거 티 났으려나. 티 났겠지.
여원은 아무것도 없는 냉장고 안을 살피는 척하며 몰래 입술을 꾹 깨물었다.
신월이 제게 잘해 주는 것은 제 몸에 구슬이 있기 때문이라고. 그가 다정한 것은 그저 옛 습관이 남아 그런 것뿐이라고.
여원은 그렇게 쉼 없이 자기 자신을 설득해야 했다.
그래야 기대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녀는 애꿎은 희망에 매달리고 싶지 않았다.
늦든 빠르든 이미 끝은 정해져 있으니 괜한 기대는 피차 힘들 뿐이라고 생각했다.
최근 여원은 몸 상태가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식욕이 왕성해지고 감각도 조금 예민해진 것 같았다.
그리고 문득 떠올렸다.
죽기 직전의 몸은 꺼지기 전 촛불 같다고.
그렇기에 제 몸에서 일어나는 이변들을 죽음의 징조라고 받아들였다.
살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말 진심으로 살고 싶은 게 맞는 거냐는 의문이 제게 던져졌다.
그 고독하고 슬픈 질문 속에서 여원은 어렴풋하게 웃으며 결론을 내렸다.
이 외로운 삶을 이어 갈 자신이 없다고 말이다.
모든 것을 포기하니 아이러니하게도 조금 후련한 마음마저 들었다.
그러니 아주 자그마한 미련이라도 남겨 두고 싶지 않았다.
혹여 살고 싶어지지 않도록.
미련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많지 않았지만, 그중의 하나가 바로 할머니였다.
그날, 할머니의 부름을 거절하지 못한 것은 제 마음 한쪽에 정리되지 못한 마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을 정리하기 위해 여원은 인월에 왔다.
그리고 최근 생긴 미련이 바로 신월이었다.
그는 날이 가면 갈수록 태도가 이상해졌다.
점점 더 다정해지고 틈만 나면 제 기호를 물었고 필요한 것이 있는지 확인했다.
그가 막연히 호의를 드러낼 때마다 이런 것에 익숙지 않은 여원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난감할 뿐이었다.
‘지금도 그래. 왜 저런 약속을…….’
왜 자꾸 사람을 기대하게 만드는지.
여원은 길어지려는 생각을 고개를 저어 끊어 낸 뒤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리고 음료수 두 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주제를 환기하기 위해 입을 열었던 찰나. 옆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앗, 흐으으응, 앗, 앙, 태석 씨. 간지러어.”
둘의 시선이 동시에 티브이가 붙어 있는 벽 쪽으로 향했다.
벽이 얇은 건지 아니면 그냥 방음에 문제가 있는 건지 건너편의 소리가 전부 들려왔다.
둘 사이에 짙은 침묵이 흘렀다.
여성의 간드러진 교성은 서서히 격정적으로 변하더니 이어 듣기 민망할 정도로 난잡한 소리가 되었다.
철썩! 살이 맞붙는 소리가 들렸다.
“아앙! 태석 씨! 나 주거어!”
“아잇, 자꾸 어딜 도망가려 그래. 응?”
퍽퍽퍽.
아무래도 벽에 기대어 하는 것인지 목소리뿐만 아니라 남자의 움직임에 맞춰 진동까지 그대로 전해졌다.
그로 인해 여원의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창백해졌다.
‘미친, 방음이 안 되는 정도가 아니라 그냥 한방에 있는 거잖아.’
저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욕을 할 정도로 당황스러움이 온몸에 배어 나왔다.
음료수 캔을 들고 있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당황하지 말자. 원래 이런 곳이잖아.’
여원은 머릿속으로 ‘나는 어른이다’를 수십 번 복창한 뒤 들려오는 소리를 무시하고 음료수의 풀 탭을 깠다.
들쩍지근한 매실 향이 가득한 음료수를 한 모금 마시며 마음을 진정시킨 뒤 여원은 테이블에 올려진 리모컨을 쳐다봤다.
그녀는 신월을 보고 생긋 웃으며 나름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리모컨을 들었으나 타인이 보기에는 너무나 인위적인 움직임이었다.
“티브이 좀 틀게요.”
저 소리가 묻힐 수 있다면 뭐든 좋았다. 여원은 어색해 보이지 않기 위해 매실 음료를 다시 입가에 가져다 대며 전원 버튼을 눌렀다.
곧장 켜진 티브이에서는 놀랍게도 살색의 향연이 펼쳐졌다.
홀딱 벗은 여자가 남자 위에 올라타 열정적으로 허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푸흡. 콜록!”
입에 머금었던 음료수가 옷에 묻고 바닥에도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원은 본능적으로 티브이를 껐다.
타이밍을 관장하는 이가 세상에 존재한다면 그이는 자신을 미워하는 게 아닐까.
아니다. 신월을 미워하는 걸 수도 있었다.
여원은 손등으로 대충 입가를 문질러 닦았다. 단 음료라 그런지 입이며 손이며 안 끈적거리는 곳이 없었다.
물로 닦아야 사라질 끈적거림이었기에 여원이 슬쩍 욕실로 고개를 돌렸다.
진짜 들어가기 싫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데 뒤에서 신월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거.]
“……!”
순간 어깨에 손이 닿자 지레 놀란 여원이 몸을 들썩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뒤에는 자리에서 일어난 신월과 제게 닿았다가 떨어진 손이 보였고 그의 반대편 손에는 갑 휴지가 들려 있었다.
“아, 고마워요. 근데 휴지로는 안 될 것 같아서 잠깐 닦고 올게요.”
여원은 속사포처럼 말한 뒤 투명한 욕실로 쏙 들어가 세면대 앞에 섰다.
밖의 붉은 조명과 달리 욕실 불은 밝고 환했기에 여원은 더 기가 찼다.
손을 닦고 입가를 닦기 위해 거울을 보는데, 잔뜩 붉어진 제 얼굴이 눈에 담겼다.
잠시 얼굴을 보고 있던 여원이 세면대 양 끝을 부여잡고 고개를 푹 숙였다.
“하아…….”
참을 수 없는 자괴감이 몰려왔다.
생각해 보니 별것도 아닌 일인데. 지레 놀란 제 모습을 본 신월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안 봐도 뻔했다.
정신 좀 차려. 라고 중얼거리며 여원이 얼굴에 물을 끼얹었다.
대충 걸려 있는 수건으로 물을 훔치고 나가자 그사이 방 안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다시 조용해졌다.
‘내 목소리가 들렸나?’
이렇게 바로 조용해질 줄 알았다면 그런 원맨쇼는 안 벌여도 되는 거였는데.
조금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신월을 쳐다보자 그가 바닥을 내려 보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바닥에 흘렸던 음료수와 캔이 빛에 사로잡히더니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자신이 신경 쓸까 봐 닦아 주기라도 한 건가 싶어 고맙다고 말하려던 순간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향이 불쾌해.]
아, 그래. 그럴 리 없지. 여원이 허탈하게 웃어 보였다.
“죄송해요.”
[괜찮다. 놀랐으니 그럴 수도 있지.]
“……티 났나요?”
[많이.]
“그냥 모른 척해 주시면 안 되는 거예요?”
[이전에도 말했지. 너는 그런 쪽에 재능이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는 신월의 모습에 여원은 괜히 입을 삐쭉였다.
그렇다고 대뜸 소리를 지를 수도 없고 아무것도 안 할 수도 없지 않은가. 여원이 툴툴거리며 그와 조금 떨어진 침대 끄트머리에 조심스레 앉았다.
아까 뿜은 음료가 옷에도 조금 묻어 있고, 신월이 이 향을 불쾌하다고 했으니 여원 나름대로 배려를 한 것이었다.
그러자 신월이 못마땅한 듯 표정을 구겼다.
[별로군.]
“……네?”
[네 옷에서 불쾌한 향이 난다.]
여원이 당황하며 셔츠를 잡아 올려 냄새를 맡았다. 자신이 맡았을 때는 잘 느껴지지 않는데 신월에게는 강하게 느껴지나 보다.
갯과라 그런가.
“많이 나요? 옷 갈아입을까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가져온 옷이 있다는 점이었다.
여원의 물음에 신월이 고개를 저었다.
[됐다.]
“왜요? 냄새 난다고…….”
[그 냄새 없애 줄 테니 이리 와 앉으렴.]
그가 무심하게 무릎을 두드리는 모습에 여원의 사고 회로가 잠시 멈추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