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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화 80화


79 당황하기도 잠시, 여원은 빠르게 말의 의미를 파악했다. 그동안 제 말을 끊어 낸 전적이 워낙 화려해서 그런지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조금 귀찮을 뿐이지. 신월이 구시렁거리듯 덧붙였다. [아까는 이름으로 부르더니.] “아까요?” 그의 말에 여원이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신월이 자신을 데리러 왔을 때 이름만 불렀던 것이 기억났다. 하지만 그건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그를 달래기 위한 임시방편이었을 뿐, 지금과는 상황이 달랐다. “아, 그건.” [이름으로 불러 보거라.] 여원이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입을 열었으나 신월이 한발 더 빨랐다. 그는 의자에 느른하게 몸을 기댄 채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조용한 움직임에도 묘한 위압감이 묻어나는 탓에 저도 모르게 몸에 힘을 주었다. [어서.] 그가 은근한 목소리로 재촉했다. 버스 안이 어두워서 그런지 갈색 눈에 노란빛이 스며드는 것이 분명하게 보였다. 그깟 이름, 부르면 그만인데 이상하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목조목한 입술을 우물거리던 여원이 끝내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역시 좀…….” [왜?] “그냥,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요.” [허.] 그가 대놓고 실소를 흘렸다. 그러고는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여원을 노려봤다. 여원은 부담스러운 시선을 피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냥 기분이 그랬다. 가늠이 안 될 정도로 까마득한 세월을 살아온 신월이었고, 온몸에서 흘러넘치는 타고난 기품과 위용은 사람을 위축되게 만들었다. 시험 삼아 한두 번 불러 보는 것은 괜찮을지 몰라도 앞으로 계속 이름으로 부르기에는 조금 위화감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여원의 마음을 알 턱이 없는 신월은 그녀가 선을 긋는 것이 그저 못마땅할 따름이었다. 청실도 단이도 전부 이름으로 부르면서 자신만 못 부를 것은 뭐란 말인가. 그는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날카롭게 중얼거렸다. [아까도 그러더니 아주 대놓고 늙은이 취급이군.] 놀란 여원이 다시 그를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리고 제가 언제 늙은이라고 했어요?” [어르신이나 늙은이나. 조금 더 있으면 노옹이라 부르겠구나.] 묘하게 집요한 태도에 여원이 당황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대체 뭐에 꽂혀서 이러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사실 따지고 들면 ‘님’ 자만 붙였을 뿐, 지금도 이름으로 부르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그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상한 고집을 부리네.’ 어울리지 않게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를 보고 있자니 여원은 별안간 웃음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아주 조금, 진짜 조금 그가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원이 결국 나지막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달래듯 그의 손등을 토닥였다. “별것도 아닌 것 갖다가 뭘 삐지고 그래요? 이름만 부르는 건 반말 같아서 좀 그렇고 신월 씨라고 부를게요. 이 정도면 됐죠?” […….]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도 대충 알 것 같았다.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합격점의 대답인 듯했다. “근데 좀 억울하네요. 저는 신월 님, 아니 씨한테 이름으로 불려 본 기억이 없는데. 제 이름은 알고 계세요?” 여원은 서운하다는 듯이 말했으나 목소리에는 숨기지 못한 장난스러움이 묻어 나왔다. 아까 신월이 장난친 것에 대한 보복으로 꺼낸 말이었는데 일순 진지해진 그의 얼굴을 보자 곧장 후회가 몰려왔다. 설마설마하다 물어본 건데 정말 모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러고 보니 항상 아이, 너. 이렇게만 불렸지, 이름으로 불려 본 적은 없던 것 같다. 그의 입이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굳게 다물린 예쁜 입술을 보고 있자니 여원은 괜스레 가슴이 쓰라렸다. 정적이 마치 대답을 대신해 주는 것 같았다. 여원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손사래 쳤다. “아, 됐어요. 장난……” [한여원.] 허공을 가르던 여원의 손이 뚝 멈췄다. 그리고 조금 아연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눈이 마주친 순간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이 들었다. 완벽하게 호선을 그리는 입매, 초승달처럼 아름답게 접힌 눈가. 그 안으로 갈색과 노란색이 섞인 눈동자는 달처럼 휘황찬란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몇 번을 다시 태어난대도 절대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아득한 얼굴로, 밤바다처럼 청명하면서도 고요한 목소리로 그가 속삭였다. [여원아.] 고작 이름이 불린 것뿐인데 여원은 아주 오랫동안 그것을 갈망해 온 사람처럼 목이 메었다. 복잡하게 엉킨 선이 전부 끊어졌다가 다시 한데 모여드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실감했다. 그는 여우가 맞았다. 사람을 홀리는 교활한 여우. 예로부터 구미호가 많은 설화에 등장하여 악의 근원이라 표현된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그렇게라도 표현하지 않으면 닿지도 못할 존재들이었다. 낯설지만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황홀함은 인간이라면 빠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여원은 힘이 빠지려는 손을 꽉 움켜쥐며 정신을 붙들어 맸다. 그럼에도 그를 계속 보고 있으면 헛소리가 나갈 것 같았기에 자연스레 고개를 돌렸다. “장난이었어요. 그냥 평소대로 부르세요.” 태연함을 연기하고 싶었으나 아주 조금 목소리가 떨리고 말았다. 홧홧하게 달아오른 얼굴에 느껴지는 열감이 선명했다. 버스가 어두워서 다행이다. 아니었다면 귀까지 빨개진 제 모습을 그에게 들켰을 것이다. 여원이 가슴에 손을 얹었다. 미친 듯이 뛰어 대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창밖을 바라보며 몇 번이고 숨을 삼켰다. 커튼 사이로 비친 제 얼굴은 표정만으로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보이는 것 같았다. 행여 뒤에 있는 신월이 볼세라 여원은 커튼을 쳐 창문을 가려 버렸다. 인월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모쪼록 도착하기 전까지 뜨거운 얼굴도, 뇌까지 울리는 심장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가라앉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 우여곡절 끝에 버스가 인월 터미널에 도착했다. 시계를 확인해 보니 벌써 11시가 훌쩍 넘어가고 있었고, 사람들도 지친 기색이 완연했다. 여원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여러모로 피곤했던 여행길이 아닐 수 없었다. 뒤를 돌아보니 신월이 몸을 숙여 버스에서 내렸다. 때마침 바람이 불어 반쯤 이마를 가리고 있던 그의 앞머리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그게 거슬렸는지 앞머리를 뒤로 넘기는 단순한 행동에 몇 없는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아무리 버스를 같이 타고 몇 시간 동안 저 얼굴을 봤다고 해도 익숙해질 외모가 아니기는 했다. 여원은 간신히 표정을 가다듬으며 출구 쪽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버스 다시 타셨네요?” [이동은 이렇게 하기로 약속했으니까.] “버스 싫어하시는 거 아니었어요?” [싫어한다기보다는 불편하더구나. 이렇게 좁은 곳에 앉아 있던 적이 거의 없어서.] “아, 그렇죠. 인월이 하도 멀다 보니 오래 앉아 있으면 엉덩이가 좀 배기긴 해요.” [멀다라. 그래, 이게 먼 것이구나.] 신월은 무언가를 배운 사람처럼 조용히 되짚었다. 그 모습에 여원은 내심 안심했다. 생각보다 더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찰나 머리 위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여원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자 저를 보고 있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래도 썩 나쁘지만은 않구나, 네가 곁에 있어서 지루하지도 않았고.] 그 순간 바람이 세게 몰아쳤다. 여원의 머리가 힘없이 사방에 휘날리다가 거품이 빠지듯 스르륵 가라앉았다. 엉망이 된 머리를 향해 신월이 손을 뻗었다. 신월은 여원의 이마에 붙은 잔머리를 하나하나 정성스레 떼어 주며 중얼거렸다. [제법 즐거운 경험이었어.] 제게만 들리는 목소리가 가슴을 후벼 파는 것처럼 무거웠다. 동시에 문아를 떠올리며 서글픈 표정을 짓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내가 죽으면 그는 그 궁에 앉아 나를 기억해 줄까. 오늘을 떠올려 줄까. 또 그렇게 상대 없는 장기를 두며 그렇게 몇십, 몇백 년을……. 순간 숨을 들이켠 여원이 고개를 돌려 그의 손을 피했다. 아차 싶은 여원은 제 머리를 손끝으로 대충 빗으며 어물쩍 웃어넘겼다.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근처에 호텔이 하나 있는데 그쪽으로 갈까요?” […….] 신월의 손이 잠시 멈췄다가 느릿하게 아래로 떨어졌다. 그는 워낙 눈치가 빠르니 자신이 피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여원은 그냥 모른 척해 달라는 염원을 담아서 그를 쳐다봤다. 그 뜻이 전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신월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원이 안도감에 웃으며 그의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그 순간 툭, 차가운 물방울이 여원의 콧잔등에 닿았다. “어?”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보니 달도 보이지 않을 만큼 먹구름이 가득한 밤이 시야에 들어왔다. 투둑, 툭. 물방울이 하나둘, 바닥을 적시더니 피할 새도 없이 거세게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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