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225화
“경청하겠네.”
“첫째, 공정 조세청의 일을 성사시키십시오. 전하께서 국무를 보실 수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알려주십시오. 뭐, 제가 말하지 않아도 이미 하고 계시겠습니다만, 멀리서는 그런 것으로 전하를 파악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둘째, 황제 폐하께 군권을 이양받으십시오. 실질적인 권한이 아니라도 괜찮습니다.”
처음으로 끼어들어 입을 열려 하는 테오도르를 막으며 발덴펠스가 말했다.
“그래야만 지방군에 쫓겨나 있는 늙다리 기사들이 일어설 수 있을 겁니다. 그들에게 명분을 주십시오. 그들에게 아직 충성할 수 있는 대상이 남아 있음을 확실히 알려주십시오.”
“알겠네.”
“마지막으로는, 황태녀 책봉식을 치르십시오.”
예상치 못한 말에 올리비아는 눈을 크게 떴다.
“시기상조야.”
“지금 당장 하시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하지만 슈바벤 공작을 암살할 게 아니라면 아무리 기다려도 적절한 시기가 오지 않을 겁니다. 그건 의례입니다. 전하께서 이번 자선 바자회를 치르신 모습을 보니 충분히 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발덴펠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야만 만약의 경우에 전하께서 황제 폐하를 대신하여 모든 군령을 발할 수 있고, 전하에게 칼을 겨누는 자를 반역자로 처벌할 수 있습니다. 군권 위임과 황태녀 책봉은 반드시 함께 성사되어야만 의미가 있습니다.”
올리비아는 차가워지는 손끝을 구부렸다. 발덴펠스가 이런 말을 하는 뜻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저는 순전히 군사적인 조언만 드린 겁니다. 이걸 따르실지 아닐지는 전하의 뜻대로 하시면 됩니다. 다만 이게 성사되지 않는다면, 전하의 손에 있는 칼은 충성스러운 루트가르트 백작가뿐이겠지요.”
“이해했네. 장군에게도 명분이 필요하겠지.”
“예. 저는 해군의 왕이 아니니까요.”
올리비아가 애써 태연함을 유지한 채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래 시간을 빼앗았군. 장군의 조언, 금과옥조처럼 여기겠네. 술이라도 한잔 하자고 말하고 싶지만, 지금은 그대에게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전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조만간에 식사를 함께했으면 하는데…….”
“저는 본래 대단치 않은 신분이라, 황궁에 드나들기는 부담스럽습니다. 말씀만 감사히 받들겠습니다.”
올리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발덴펠스 장군과 만났다는 것을 슈바벤이 알아서 좋을 게 없기도 했다.
“그럼 조만간 아주 조용히 만날 자리를 마련해 보지. 난 남몰래 행동하는 데 일가견이 있거든.”
발덴펠스 장군은 난처한 얼굴을 했다. 올리비아가 그에게 빙긋 한 번 웃어주었다.
테오도르가 먼저 문을 열어 바깥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녀가 밖으로 나갔다. 그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볼프강이 뛰어들 듯 얼른 안으로 들어왔다.
“각하!”
“뭐 별일이라도 있을 거라고 그렇게 급한가?”
“무슨 말씀을 나누셨습니까?”
발덴펠스 장군은 잠깐 생각했다.
젊은 장교들은 그의 결정을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개인의 영달을 추구하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지만, 요즘 청년들은 명분을 겉치레로 여기고 손익을 따지는 경향이 심해졌다고 느끼는 일이 종종 있었다. 아마도 그가 늙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세상에는 젊은 사람만이 아니라 나이 든 사람도 많이 있다. 황녀에게는 마치 관심 없는 것처럼 말했지만, 황실에 대한 충성심은 그 같은 늙은이들에게는 버릴 수 없는 가치였다.
그리고.
‘전하께서 나아가는 길이 세상의 흐름에 걸맞은 것이라면, 이런 젊은 놈들의 마음은 자연히 따르겠지.’
그렇다면 그가 살아온 수십 년 세월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제국민의 마음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물살이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발덴펠스는 부디 그럴 수 있기를 바랐다.
밤바람이 서늘하게 뺨에 닿아와 올리비아는 자신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발덴펠스 장군과 이야기하는 동안에는 느끼지 못했는데, 몹시 긴장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뺨을 한 번 두 손으로 가볍게 찰싹 두드렸다. 그리고 테오도르를 돌아보며 물었다.
“조금 걸어도 될까?”
“그러시지요.”
테오도르는 잠깐 고민했지만, 자신이 붙어 있으니 괜찮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여기서부터 자신의 안가까지 멀지 않았으므로 거기 가서 옷을 갈아입고 마차로 돌아가면 된다.
마부에게 먼저 가라고 신호하고 둘은 천천히 밤길을 걷기 시작했다. 모처럼 단둘의 시간이 되었지만, 올리비아는 상념에 잠긴 듯 말이 없었고 테오도르도 그랬다. 각자 생각이 깊었기에 달빛이 환하고 공기가 맑은데도 그 산책은 낭만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한참이나 걷다가 올리비아가 불쑥 물었다.
“기분이 안 좋아?”
“제가 말입니까?”
“얼굴이 어두운 것 같은데.”
테오도르는 한 손으로 뺨을 쓸어내렸다. 올리비아가 돌아서서 그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늘씬하고 아름다운 소년 같은 모습에 테오도르는 공연히 당황하며 반걸음 물러섰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어? 일 생각은 아니지?”
“일 생각에 가깝습니다. 아마….”
거짓말을 못 하는 테오도르는 모호한 어조로 말했다. 올리비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 생각에 가까운데, 일 생각은 아니라는 건데. 왜?”
“…별로 중요한 문제도 아니니, 됐습니다. 그보다 전하, 황태녀 책봉식은 쉽게 결정하실 일이 아닙니다.”
“중요해.”
테오도르의 뒷말은 무시하고 올리비아가 말했다. 그리고 그의 심적 부담을 덜어주기라도 하려는 듯 한 걸음을 물러서서 시선을 돌렸다.
“황녀로서는 중요하지 않은 일일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중요해. 네 얼굴이 어두워질 만한 일이 내게 중요하지 않을 리 있겠어?”
“전하….”
“발덴펠스 장군에게 너무 많은 것을 공유했다고 생각해?”
“포부를 밝히신 겁니다. 공유하셨다고 할 만한 일도 아니고, 장군을 설득하기 위해서라면 기밀을 밝히셨어도 놀라지 않았을 겁니다. 경호 계획만 제외하고요.”
테오도르가 나름대로 농담이랍시고 덧붙인 말에 올리비아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건 내 호위대장으로서 하는 말이잖아. 내가 알고 싶은 건 네 얼굴이 왜 어두운지 하는 거야.”
“…….”
올리비아가 다시 그에게 다가서서 두 손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가슴에 이마를 기댔다.
테오도르가 손가락을 꿈지럭거렸다. 하지만 섣불리 손을 올려 올리비아를 끌어안지는 않았다.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한계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한계?”
“루트가르트만으로는 전하를 지킬 수 없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을 뿐입니다. 아버지가 전하의 정체를 숨긴 이유도.”
올리비아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테오도르가 말을 이었다.
“당연한 일인 걸 압니다. 제국의 중핵을 장악한 자와 싸우려면 그 외의 모든 것을 합쳐도 모자랄 테니까요. 게다가 저는 지휘관으로서의 경력이 짧고…….”
담담한 말투였지만, 그 순간 그의 가슴 속을 지나친 낙담을 깨닫고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말았다. 그리고 충동적으로 그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올려다보았다.
“내가 제일 믿고 의지하는 건 너야.”
“전하.”
갑작스러운 포옹에 테오도르가 당황하면서 얼굴을 붉히고 그녀를 떼어내려 했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루트가르트 군만으로는 병력이 모자란 게 맞지만, 그게 루트가르트 군이 약군이라고 생각한다는 뜻은 아니야. 네가 모자란 지휘관이라는 것도 아니고. 난 알아. 네가 얼마나 강하고, 유능하고, 루트가르트가 얼마나 충성스럽고, 또 정예한지.”
병력과 보급 차이는 몇 배였다고 비교할 필요조차 없다. 생산력과 인구를 생각하면 적은 거의 무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속에서 그는 일개 변경군만으로 황군과 싸우며 몇 년이나 버텼다.
테오도르가 당황했다.
“전하.”
“하지만 너한테만 모든 부담을 지우고 싶지 않아. 이기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힘이 필요해.”
올리비아가 간곡하게 하는 말뜻을 테오도르가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속에 서린 절절한 감정은 그에게도 충분히 전달되었다.
그는 다시 한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불만이 있었던 게 아닙니다. 그냥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았을 뿐입니다. 발덴펠스 장군을 질투하기에는 제가 너무 젊죠.”
“그러니까….”
“그리고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전하에게 가장 필요한 일이고,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도 압니다.”
근접 호위로서 그녀의 몸을 지키는 것 말이다. 테오도르는 요즘처럼 자신이 단련을 소홀히 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한 일이 없었다. 목적의식 없이 그저 의무감 반, 잘할 수 있는 일이라는 이유 반으로 수련해 온 세월이 운명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문득 웃음이 나왔다.
그는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숙여 올리비아의 몸을 가볍게 껴안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모자챙을 피해 고개를 기울여 부드럽게 입술을 맞물었다.
달콤한 기쁨이 온몸에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