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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화 186화


로엘라가 찾아온 것은 편지를 보내고 나서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미리 약속을 잡지 않고 방문해도 될 만큼 허물없는 사이가 아니었으나 올리비아는 그녀를 자기 거실까지 안내하게 했다. 급히 나온 탓에 로엘라는 시녀 하나 거느리지 않았고, 옷차림새도 신경 쓰지 않은 듯 편안한 실내용 드레스 위에 숄만 걸치고 있었다. 화장기도 없어 상당히 어려 보였다. 자매를 만나러 오는 거라면 이런 차림이 적절한 것이리라. 올리비아는 미묘한 기분이 된 채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녁을 함께하자고 했는데, 아직 해도 지지 않았어, 로엘라.” “이거, 무슨 말이야?” 로엘라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신경도 쓰지 않는 태도로 편지를 흔들어 보였다. 올리비아는 손짓으로 자네트를 불러 차를 가져오라고 부탁하고 로엘라에게 앉으라고 권했다. 로엘라는 그것도 참을 인내가 없는지 발을 구르며 뾰족하게 소리 질렀다. “이게 무슨 말이냐니까!” “앉도록 해, 로엘라. 손님으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않으면, 내가 주인으로서의 도리를 다하고 싶어지지 않을 수도 있잖아?” 올리비아가 냉정하게 말했다. “네 입장과 역할을 알고 있겠지? 여기서 내가 무리해서라도 널 죽여 버리면, 황위 계승권자는 나밖에 남지 않아.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하녀와 호위 두 명만 거느리고 여기까지 오다니.” 그 말에 로엘라가 흠칫 놀라 뒷걸음질 치며 몸을 떨었다. 갑작스럽게 제정신이 돌아온 것 같았다. 올리비아가 말을 이었다. “물론 나는 그런 짓을 하고 싶진 않아. 암살이라면 모를까, 공개적으로 혈육을 참살할 수는 없지. 에제키엘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대놓고 그런 짓을 하면 정치적 부담을 감당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거든. 하지만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순간이 와서 그런 일이 생겨난다면, 에제키엘보다는 내가 잃는 게 적어. 너는 에제키엘의 계승권이니까.” 정통성을 완전히 상실한 다음에도 슈바벤이 지금과 똑같이 시라흐를 장악할 수 있을 것인가. 그건 어렵다. 선대와 선선대 공작이 황좌를 찬탈하는 대신 어려운 길을 돌아가는 이유가 무엇이던가. 그렇다고 해서 올리비아에게 유리한 것도 아니긴 했다. 그녀에게는 아직 실질적인 무력이 모자라니까. 슈바벤이 반란자라고 규정된다고 해도 그녀가 살아남아 토벌해 낼 수 없다면 의미가 없지 않은가. 로엘라가 질린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다시 로엘라에게 앉으라고 손짓했다. 로엘라가 비척비척 올리비아의 건너편 자리에 앉았다. 올리비아가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너와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 “여차하면 날 죽일 작정이라면서 무슨 할 이야기가 있다는 거야? 그리고 이건 무슨 소리야?” 그녀가 다시 편지를 흔들다가 테이블에 내던졌다. “역시 거짓말을 한 거지? 날 불러내려고?” “널 불러내려고 하긴 했지만, 에제키엘이 나를 찾아온 것은 사실이란다.” “에제키엘을 그렇게 부르지 마. 누가 들으면 둘이 무슨 특별한 사이라도 되는 줄 알겠어.” “아무렴 어떠니?” 에제키엘을 존중하여 굳이 공이라는 경칭을 붙여 주고 싶진 않았고, 슈바벤 공작이라고 부를 때는 그 의미가 다르다. 올리비아에게 에제키엘은 에제키엘이었다. 집단의 수장으로서가 아니라 그 개인으로서 증오의 대상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자네트가 서둘러 다기가 놓인 쟁반을 가져왔다. 올리비아는 잔에 손수 차를 두 잔 따라 테이블 가운데에 나란히 놓았다. 로엘라가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네가 원하는 잔을 가져가렴. 내가 기미 해 주고 싶지만, 입을 댄 것을 주면 그것도 화낼 것 같아서.” 그제야 그녀는 이게 독이 없다는 뜻으로 하는 짓임을 깨달았다. “쓸데없는 일을 하네. 그냥 안 마시면 그만인데.” “그래도 주인의 도리는 해야지.” 로엘라는 잠깐 망설였다가 왼쪽 잔을 끌어당겼다. 하지만 마시지는 않고 그냥 앞에만 놓았다. 올리비아가 나머지 잔을 가져가 홀짝 한 모금 마시는 것을 지켜보다가, 그사이에 자신의 흥분이 가라앉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올리비아가 그것을 보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좋아. 일단 다른 일에 잠깐 관심을 기울이고 나면 흥분이 좀 줄어들지.” “날 가르치려고 불렀어?” “아무도 널 진짜로 진정시키려고 한 적이 없는 것 같아서.” “…….” 로엘라는 불쾌감과 더불어 이상한 감흥을 느꼈다. 올리비아는 꼭 진짜 언니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진짜 하려던 이야기가 뭐야?” “어젯밤에 에제키엘이 찾아온 건 사실이야. 용건은 나도 몰라. 중간에 갑자기 ‘이제 와 굳이 말할 필요 없다’라고 말하고 돌아가 버렸으니까. 하지만 짐작은 해. 오늘 9인 회의에서 네 지참금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어.” “지참금…?” “미루고 있던 너와 에제키엘의 결혼식을 치르라는 권유가 있었겠지. 어제 내게 중요한 정책을 맡기겠다는 아바마마의 황명이 내려졌잖니? 그걸 국혼 이야기로 묻어 버리려는 거야.” 로엘라는 다소 멍한 기분이 되었다. 올리비아로부터 정치적 상황에 대한 설명 따위를 듣고 싶진 않았다. 어차피 제게 유리한 쪽으로 말하고 있을 게 뻔하다. 하지만 그녀는 설명을 들은 적이 없었다. 에제키엘과의 결혼은 당연히 예정된 일이다. 조금씩 준비도 하고 있었다. 혼수품과 드레스, 결혼식 날에 예식 장소를 밝힐 고급 초와 음악 같은 것들. 어머니가 폐위된 이후로 한동안은 중단했지만, 여전히 그것들은 그녀의 창고에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신부가 되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언제 식을 올리게 될지 듣지 못했다. 이러다 연 단위로 밀리는 게 아니냐는 그녀의 투정에 에제키엘은 어차피 하게 될 결혼, 방해 없이 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달랬다. 방해꾼을 제거하고 하려면 꽤 시간이 오래 걸리겠다고 로엘라는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게 정치적인 이유로 확정되었다고? 그건 로엘라가 바라던 게 아니었다. 아니, 그 자체는 상관없다. 에제키엘이 필요하다면 언제 하든 상관없다. 하지만 제일 먼저 자신에게 알려야 하는 게 아닌가. 아직도 자신은 한마디도 그런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내가, 널 어떻게 믿어?” 로엘라는 코웃음을 치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떨려서 조소가 좀처럼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청혼을 받고 싶었다. 그들의 약혼은 아주 어릴 때 부모의 결정으로 이루어졌으니까. 에제키엘이 무릎 꿇고 낭만적인 고백과 함께 반지를 주기를 바라는 게 아니다. 꽃이 가득 꽂힌 테이블에 마주 앉아 “이제 결혼하자.”라고 말해 주기만 했어도 만족했으리라. 올리비아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고는 말했다. “어차피 곧 듣게 될 텐데, 거짓말해서 뭐 하겠어? 그리고 내 생각에 어젯밤에 에제키엘이 날 찾아온 건, 아마 결혼을 결정하기 전에 다른 길을 찾아보기 위해서였을 거야.” “다른 길…?” “황위 계승권을 가진 미혼의 황녀는 너만 있는 게 아니니까.” 그 순간 로엘라가 분개하며 벌떡 일어나서 찻잔의 찻물을 올리비아에게 거칠게 뿌렸다. “꺅!” “안 돼요!” 철컥! 메리가 비명을 지르고 마르타가 제지하고 자네트가 검을 뽑은 것은 거의 동시였다. 그리고 아차 하는 순간에 양측의 호위 기사가 모두 발검한 채 상대를 살기등등하게 노려보았다. “황녀님!” 메리가 황급히 달려가 올리비아의 얼굴을 살폈다. 차는 이미 미지근해져 있었으므로 그저 머리카락과 얼굴이 젖었을 뿐이지, 화상을 입거나 하지는 않았다. 올리비아는 잠시 화가 나서 눈을 깜박거렸다. 하지만 여기서 자신까지 폭발했다가는 일이 수습하지 못할 지경이 될 것이므로, 괜찮다는 뜻으로 손을 들어 보이며 호위들에게 검을 집어넣으라고 명했다. 메리가 얼른 손수건을 꺼내어 올리비아에게 건네주고, 수건을 가지러 달려갔다. 마르타가 무릎을 꿇고는 손수건을 두 장 꺼내어 올리비아에게 건네며 마치 자신이 죄지은 사람처럼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자네 잘못도 아닌데.” 그녀가 얼굴을 닦는 동안 로엘라는 찻잔을 쥔 채 바들바들 떨었다. 분기가 치솟아서가 아니라 마르타의 태도 때문에 어쩐지 자신이 실수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올리비아가 말했다. “자네트, 다섯 걸음 물러서.” “황녀님.” “물러서.” “2황녀가 황녀님께 절대 좌시할 수 없는 모욕을 가했습니다.” 자네트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말했다. 올리비아는 나직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다시 명령했다. “물러서라고 했어. 나는 오늘 로엘라와 대화를 하려고 한 거야.” “…….” 자네트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납검하고 다섯 걸음을 물러섰다. 그러자 다른 호위들도 일제히 검을 제 검집에 꽂아 넣었다. 그래도 살기 어린 긴장감만은 한순간에 풀어지지 않았다. 올리비아가 찻물에 젖은 속눈썹을 깜박거렸다. 그리고 싸늘한 얼굴로 로엘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에제키엘 슈바벤은 나를 원해. 너도 알고 있을 텐데. 그래서 나를 그토록 미워하는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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