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154화
파벨 루트가르트가 죽은 건 옛일이다.
올리비아에게는 그랬다. 단순히 물리적 시간만으로도 30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고, 그사이에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 슬픔은 희석되고, 그 위로 돌덩이 같은 자신의 고통이 덮였으며, 솔직히 말해서 이제는 자신의 추억이 정말로 있었던 일인지 동아줄처럼 붙잡고 있는 환상인지조차도 불분명했다.
하지만 실은 떠나보내지 못했던 모양이다. 아버지처럼 여기던 이의 죽음을 애도하고 슬퍼하고 울고 나서, 마음을 정돈하고 현실로 되돌아올 기회가 올리비아에게는 없었다.
지난번 생까지도 유품을 정리할 기회는 주어진 적이 없었다.
첫 번째 생에서 올리비아는 자신이 파벨의 유품을 정리하고 싶다고 말했었다. 유언장에 의한 약혼은 거절당했지만, 그래도 그 정도 일은 자신이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었다. 새로운 방 주인을 위해 병자를 돌보는 데 썼던 것들을 말끔히 정리하고, 오랫동안 집을 비웠던 테오도르에게 파벨이 아끼던 물건이 어떤 것인지 알려 주고 싶었다.
아득한 기억 속에서 그녀는 파벨의 서재에 있던 페이퍼 나이프와 밀랍용 스푼을 떠올렸다. 그녀는 그걸 유품으로 갖고 싶었다.
그 페이퍼 나이프는 파벨이 병들어 손이 떨리게 된 뒤로 그녀가 늘 그를 위해 편지 봉투를 자르는 데 썼던 것으로, 손잡이 부분은 닳아서 무늬가 흐려질 정도로 오래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밀랍용 스푼도 그녀가 그의 편지를 대신 봉인해 줄 때 쓰던 것이다.
그녀는 어릴 때 파벨에게 자신이 인장을 찍어보고 싶다고 졸라댔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파벨은 위험하다고 난처한 얼굴을 했지만 결국 져서, 그녀에게 스푼을 꼭 쥐게 하고 자기 손으로 그녀의 손을 단단히 쥔 채 촛불에 그것을 가져갔었다.
받고 싶었던 유산은 루트가르트 소유의 저택이나 과분한 액수의 잔여 재산이 아니라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테오도르에게 알려 주고도 싶었다.
여기 전시된 단검은 파벨이 아들의 열여섯 번째 생일에 선물해 주고 싶어서 사 두었던 것이라든가, 저 사슴뿔 장식은 파벨이 직접 사냥해서 얻은 기념품이고, 그가 늘 테오도르와 함께 그 사냥터에 가고 싶어 했었다든가.
하지만 그럴 기회는 없었다. 테오도르는 약혼만이 아니라 유품 정리를 돕고 싶다는 그녀의 말도 매몰차게 거절했다.
“고맙지만 사양하지. 가족도 아닌 숙녀가 고인의 유품을 정리하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 아니니까.”
그는 냉담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차라리 염치도 없다는 비난을 들었다면 그토록 가슴이 무너지는 기분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테오도르는 그녀에게 정확히 선을 그어 밖으로 내쳤다. 남이니 이 이상 관여할 필요 없다고. 미움 때문조차 아니라는 듯이.
그녀는 파벨의 페이퍼 나이프와 밀랍용 스푼을 갖고 싶다고 말할 기회조차 없었다. 수도로 떠나겠다고 그리 쉽게 결정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마음의 상처 때문이었으리라. 어디든 테오도르가 없는 곳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었으니.
장례식에조차 참석하지 않고 달아났던 두 번째 생에서는 당연히 애도할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모든 일을 밝혔던 세 번째 생에도 마찬가지였다.
“마음은 감사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그건 가족의 일입니다.”
그는 정중한 태도로 그렇게 선을 그었다. 올리비아가 넘을 수 없는 선이었다.
파벨의 손에서 자랐다, 테오도르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다, 그런 게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백작 부인의 죽음을 생각하면, 그녀는 도무지 저를 가족으로 받아 달라고 말할 수 없었다.
테오도르가 그녀에게 애도할 권리를 인정해 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올리비아는 푹 젖어 버린 손수건을 움켜쥔 채 휘청거렸다. 눈물이 너무 나서 머리부터 목까지 온통 아팠다.
“흐, 흡…!”
이게 오랫동안 미뤄 두었던 슬픔 때문인지,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 때문인지 스스로도 잘 알 수 없었다. 막힌 숨을 억지로 터뜨렸을 때였다.
휙.
테오도르가 그녀를 돌려세웠다. 가냘픈 어깨를 붙잡은 손에 거센 힘이 가해져 올리비아는 약간의 통증을 느꼈다.
다음 순간 그녀는 테오도르의 품에 안겨 있었다. 깜짝 놀란 그녀의 눈이 커다래졌다. 테오도르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난 정말로 너를 모르겠어. 정말로, 모르겠어.”
“…흑….”
“내가 알았던 네가 진짜 너인지, 지금의 네가 너인지…. 네가 진짜로 슬퍼하는 건지, 거짓으로 그런 얼굴을 보이는 건지, 대체 무얼 그렇게 참고 있는 건지, 아니면 그것도 착각인지.”
천진난만한 어린 시절이 지나가 버렸다 하더라도 사람의 천성은 그리 쉬이 바뀌지 않을 텐데, 자신이 알던 눈물 많고 소심한 올리비아 페릴이 실제로 있긴 했던 건지 의문이 들 때가 있었다. 올리비아의 상처받은 얼굴을 잘 알고 있었을 터인데, 과연 자신이 그렇게 그녀에게 상처를 줄 수 있었던 건지 하는 의문이 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것은 진짜 눈물처럼 보였다. 테오도르는 정말로 그녀를 알 수가 없었다.
“비아.”
올리비아는 그에게 안기는 대신 몸에 힘을 주고 버텨 섰다. 그래도 가슴팍은 눈물로 젖어 들었다. 테오도르는 그녀의 뺨을 가볍게 감싸고 엄지로 눈가를 쓸었다. 눈물이 주르륵 그의 손가락이 그린 자리를 따라 흘러내렸다.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떠나 버린 건 넌데, 아직 애도할 마음은 남아 있었던 건가? 왜 네가 울고 있는 거야? 모든 일이 네 뜻대로 이루어졌을 텐데.”
“흡.”
어조는 다정했으나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 올리비아는 눈물을 몇 번이나 삼키려 애썼지만 좀처럼 잘되지 않았다. 테오도르의 속삭임이 그녀의 입가를 간질였다.
“아니, 비난하려는 게 아니야, 비아. 아버지는 이해하실 거야. 슈바벤에서 사람이 올 걸 짐작했기 때문에 서둘러 떠났던 거잖아? 오히려 지금 네가 이렇게 훌륭하게 제 자리를 되찾은 걸 기뻐하실 테지. 살아 계셨다면 누구보다도 널 위해 충성을 다하셨을 테고. 너도 알잖아. 그런데 왜 울어?”
테오도르는 그녀의 얼굴을 쥔 채 숨결이 닿는 거리에서, 다정하게까지 들릴 정도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면, 이것도 의도가 있는 눈물인가?”
“테, 오….”
“네가 이럴 때마다 혼란스러워. 목적이 대체 뭐야?”
그 질문에 심장을 칼로 후려치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고 올리비아가 숨을 급히 들이마셨다. 예전과 양상은 달라졌으나 그와 자신의 사이에 있는 불신은 여전히 조금도 녹아내리지 않았다.
“날 잡아 두기 위해 그러는 거라면 이제 그럴 필요 없어.”
“나, 는….”
“나는 이미 기사이자 루트가르트 백작으로서 충성을 맹세했으니 변함없이 너의 검일 테고, …육체 또한 이미 네게 주었으니 그것도 위안용으로든 놀이용으로든 좋을 대로 사용해.”
“그런 단어 쓰지 마!”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비명처럼 소리를 지르며 테오도르의 손을 뿌리치고 눈을 꽉 감았다.
테오도르는 선선히 손을 놓고 그녀에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올리비아는 새빨개진 얼굴로 숨을 새액새액 몰아쉬며 겨우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눈물로 흐려졌던 시야 너머로 테오도르의 모습이 반짝임에 섞여 뭉그러진다.
다리에 힘이 풀려 서 있을 수가 없어서 올리비아는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흐느끼면서 호소했다.
“괴로워. 괴로워서 숨이 안 쉬어져.”
“전하.”
“왜 키스했었어?”
그녀는 웅크린 채로 예전에 했던 질문을 한 번 더 했다. 테오도르가 의아해하는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전에도 비슷한 질문을 들었던 것 같은 기억이 난다. 테오도르는 그리 멀지 않은 기억을 더듬었다.
“당신은… 나에게 키스할 수 있잖아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그는 그녀가 자신을 농락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의 밑바닥까지 전부 알고서 던진 질문이리라고. “날 욕망하면서 왜 결혼을 거부하느냐?”라는 의도로 묻는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어린애처럼 중얼거리는 올리비아는 그런 의도로 물은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가리키는 것이 언제 했던 키스를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올리비아는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눈물이 번진 회랑의 석조 바닥이 짙은 색으로 물들었다.
“날 증오했잖아.”
“…비아.”
“나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었잖아. 나와 같이 지냈던 시간이 싫었고, 나에게 다정했던 스스로를 견딜 수 없이 혐오했잖아.”
그녀가 쏟아 내듯이 말했다.
“루트가르트의 잔여 재산을 모조리 포기할 정도였잖아. 나와 맺어지는 걸 생각만 해도 치가 떨렸던 거잖아. 그런데 왜 그랬어? 대체, 왜?”
첫 번째 생에서 로엘라는 그가 그녀를 위해서 목숨을 걸었다고 말했다.
두 번째 생에서 그는 반역자로 처형당했다.
세 번째 생에서 그는 전장에서 처참하게 죽었다.
“널 살리기 위해 죽은 이가 아깝다면, 그 목숨을 다 더한 것만큼 오래 살아.”
그는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그가 그랬기에 그녀는 평화로운 죽음을 택하여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네 번째 생으로 돌아온 첫날, 그냥 죽어 버릴 수도 있었다. 한 번도 수도에 오지 않고, 에제키엘과도 마주치지 않은 채 파벨의 마지막 편지를 불태우고 죽어 버리면 되었다.
그러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으리라. 아무도, 아무것도 모르는 채 시간의 흐름대로 살아갔을 것이다. 테오도르도.
그래도 그녀는 그러지 못했다. 죽은 이의 목숨을 다 더한 만큼 오래 살라는 말을 들었으니까.
그리고 그가 왜 제게 키스했는지를 알고 싶었다. 이번 생의 그가 해 줄 수 없는 대답임을 알면서도. 그 대답을 알면, 살아서 숨 쉬는 게 좀 더 편해질 것 같았다.
테오도르가 천천히 몸을 구부려 바닥에 웅크리고 있는 올리비아를 일으켰다.
“그 질문은 이상하군.”
“흐윽….”
“남자가 여자에게 키스하는 것에…, 사랑 이외의 이유가 있는 건가?”
그가 그녀의 어깨를 쥔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