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134화
올리비아와 블루멘펠트 후작은 일찌감치 퇴장했다. 어차피 로엘라를 자극하여 분노를 폭발시키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게 목적이었으므로 오래 있을 필요도 없었다. 블루멘펠트 후작은 간곡한 부탁을 받고 와준 입장이므로 굳이 좋아하지도 않는 파티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고 말이다.
하지만 발트라이히 후작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발트라이히 가문에서는 앞으로 계속 내분이 일어날 것이다. 후작이 중요한 이권과 아르노를 던지는 충격적인 수로 한 번에 가문 내부를 숙청할 명분을 얻었지만, 모든 구성원이 그에 동의하지는 않을 것이다. 해당 이권에 관여하지 않은 친 슈바벤 파 원로도 있고, 친 슈바벤 파가 아니라도 후작의 뜻에 반대하는 자는 더욱 많을 터였다.
대신 내세운 것이 숨겨 기른 딸이라면 더욱 그랬다. 이졸데가 사생아라는 것을 짐작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아마도 발트라이히 후작은 미리 신분을 위조해 뒀을 테지만, 법적인 문제와 별개로 귀족 사회가 진짜로 그녀를 받아들여 줄지는 아직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후작은 이 자리에서 아르노가 사라진 자리에 이졸데가 서 있다는 인상을 확실히 주고자 했다. 그녀가 자신의 신뢰와 총애를 받고 있다는 것도.
이졸데는 나름대로 잘해 냈다. 본래도 운동을 많이 한 덕에 자세가 좋고 체력이 있는 편이었으며, 지난 2주간의 집중적인 훈련으로 말씨를 고치고 인사법과 시선 처리법을 배웠다.
어차피 아직은 깊은 대화를 나눌 상대가 없는 데다가 후작이 곁에 붙어 있었으므로 그녀에게 무례한 말을 하거나 대처할 수 없는 짓을 하는 자는 없었다. 이졸데는 기계적으로 인사와 자기소개를 반복하고 상대에게 적당한 미소와 칭찬을 돌려주는 것만으로도 파티장에 머물러 있을 수 있었다.
“…그럼 발트라이히 후작가의 부총관 자리는 당분간 카스파르 경이 맡게 되는 겁니까? 아니면 레이디 이졸데가…?”
“당분간은 내가 데리고 있을 생각이라네.”
“하긴, 오랜만에 만난 딸을 떼어놓기가 쉽지 않으시겠지요.”
슈바벤 공작가의 친척이라는 청년이 짐짓 웃는 얼굴로 말했다. 발트라이히 후작이 딱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게 내 개인적인 감정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착오라네, 베르겐 경.”
“후작님의 판단력이 흐려졌을 거라고 의심하고 드린 말씀은 아닙니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무엇이 큰 문제겠습니까? 제대로 배우지 못한 자녀이니, 지금부터라도 옆에 끼고 가르치겠다 하셔도 이상할 건 없지요.”
“경의 말이 이상하게 들리는데. 지금 내 딸을 배우지 못했다고 모욕하는 건가?”
“천만에요! 그럴 리 있겠습니까? 오해하시게 했다면 죄송합니다. 다만 저희 베르겐 가문이 너도밤나무 상단과 큰 거래를….”
스스로는 이 대화에 낄 수 없었으므로 지친 상태가 되어 이졸데는 발트라이히 후작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물을 마시고 오겠습니다.”
후작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보내는 것이 약간 염려되긴 했지만, 하던 대화를 끊고 따라갈 수는 없었다. 이졸데가 무능해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바람을 잠깐 쐬는 것도 좋겠구나. 저쪽 테라스에 나가 있거라. 나도 곧 뒤따라 갈 테니. 슬슬 퇴장하자꾸나.”
“예.”
“대화를 조심하고.”
“예.”
어머니라는 느낌은 없었지만, 이졸데는 종종 그녀가 자신을 걱정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것은 그녀를 불편하고, 다소는 불쾌한 기분으로 만들곤 했다.
그녀는 혼자서 파티장 한쪽 구석에 차려져 있는 음료 테이블로 다가갔다. 깨끗한 잔에 물을 따라 집어 들고 가까운 테라스로 나가며 커튼의 고정끈을 풀어 버렸다.
밤바람이 서늘하게 뺨에 닿아서, 자신이 꽤 긴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녀는 차가운 물을 천천히 한 모금 마셨다. 그러다가 물병에 독을 넣는 것만으로도 암살이 가능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그런 식의 생각을 하게 된 자신이 어이가 없어서 조금 헛웃음을 머금었다.
그때 뒤에서 말을 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실례해도 괜찮을까요? 쉬시는 것 같지만.”
이졸데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커튼을 젖히고 테라스로 나온 것은 이십 대 초반의 젊은 귀족 여자였다. 비교적 치장이 적어 수수해 보였으나 걸치고 있는 옷가지나 장신구나 모두 고급스러운 물건이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함부로 대화해서는 안 된다는 지침을 되새겼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이졸데 푼켄 씨. 저는 로엘라 황녀 전하의 시녀인 카롤리네라 합니다. 데른부르크 백작가의 딸입니다.”
“…….”
이졸데는 당황하여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이 파티장에서 그녀는 발트라이히 가문의 이졸데라고 소개되었다. 푼켄이라는 성을 알고 있다는 것은 상대가 자신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입을 열지 않으면 말실수도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녀가 입을 다물고 고개만 숙여 인사하자 카롤리네가 난처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
“저를 경계하시는군요. 당연하겠지만….”
“…….”
“사과드리고 싶어서요.”
“…….”
“아르노 경의 행동은 돌발적인 것이었어요. 그건 절대로 슈바벤의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막지 못한 것에 대해 도의적인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저희는 당신의 신분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이졸데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로 카롤리네를 경계심 가득한 시선으로 살폈다. 그녀의 말에는 불분명한 데가 있었다.
도의적인 책임감이라. 올리비아도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의 본래 뜻이 무엇이든, 이들은 그걸 자신의 잘못은 아니라는 의미를 정치적으로 말하는 데 쓰고 있다.
누군가는 이 일을 저질렀을 텐데 말이다. 아르노가 교사한 범행이라지만, 그가 모든 책임을 다 질 수 있을 리 없다. 그에게 최근에 이졸데의 출생에 관해 알려 준 사람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게 아니라면 범행은 훨씬 전에 이루어졌을 테니 말이다.
카롤리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올리비아 황녀를 조심하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어요. 그녀는 당신을 이용하려고 불러들였으니까요.”
“…압니다.”
이졸데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올리비아의 말은 무척 진실되게 들렸지만, 이졸데는 그걸 다 믿지 않았다. 그녀는 가면을 쓰고 사는 사람이다. 그녀의 가족이 죽은 것을 알면서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우아한 얼굴로 호의를 보인 것처럼, 가족을 모두 잃은 사람을 이해한다는 얼굴로 안아 준 일도 거짓이었으리라.
“그리고 당신도 날 이용하려고 이러는 거겠지요. 헤디에게 하녀와 정원사를 접근시켰었지요?”
“…누군가는 당신에게 경고해 줘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그 경고를 듣고 어떻게 하기를 바라는 겁니까?”
이졸데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1황녀궁을 나가 블룸스타인으로 돌아가기를 바라고 이러는 건 아니겠지요. 안 그래도 올리비아 황녀 전하께서 말씀하시더군요. 아마도 슈바벤에서 저를 첩자로 사용하려고 할 거라고.”
“그래요. 물론 당신 입장에서는 앞으로의 부귀영화를 위해서라면 발트라이히 후작의 사랑하는 딸로 살아가는 쪽이 훨씬 낫겠지요.”
이졸데의 손에 쥐어져 있던 물잔이 마구 흔들렸다. 그것을 흘끗 보고 카롤리네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복수하고 싶다면….”
“당신은 나를 바보로 알고 있는 것 같군요.”
그녀는 한층 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복수.
정신이 들고 나서부터 계속해서, 그녀는 발트라이히 후작이 심어준 그 단어를 처절하게 마음에 되새겼다.
복수하려면 일단 이곳에 남아 있어야 하고, 힘을 키워야 한다. 그러려면 발트라이히 후작가를 얻어야 한다. 그러려면 후작의 옆에 있는 게 유일한 방법이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다. 직접 원수를 확인할 수 있고, 죽여 버릴 수 있게 될 때까지는 참을 것이다.
“나는 당신들의 말은 듣지 않을 겁니다. 나에게는 당신들은 다 똑같습니다. 자기들의 권력 다툼 때문에 평범하게 살고 있던 애꿎은 사람을 이용하려다 죽여 버린 사람들이죠. 도의적 책임? 웃기는 소리.”
“…….”
“발트라이히 후작님이라고 뭐가 다를까.”
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카롤리네가 어두운 안색으로 다시 입을 열려는데, 커튼 밖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커튼이 활짝 젖혀졌다.
발트라이히 후작이 카롤리네에게 무감한 시선을 던졌다.
“데른부르크 백작 영애가 계신 줄 몰랐는데.”
“레이디 이졸데와 잠시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물러가겠습니다.”
카롤리네는 깔끔하게 인사하고 물러났다. 발트라이히 후작은 이졸데를 바라보았다.
이졸데는 그녀가 테라스에서 오간 이야기를 들었을지 어땠을지 궁금해졌다. 생모에게 팔짱이라도 끼고 다정하게 이야기를 꾸며 대는 쪽이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짓말을 잘 못 하는 천성 탓인지, 사랑스러운 딸 노릇은 하지 못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