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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자기 일은 스스로


Chapter 1. 자기 일은 스스로 시나는 입술을 깨물고 그림자를 노려보았다. 처음과는 다르게, 이번에 나타난 그림자는 형체가 희미했고 크기도 작았다. “돌아가고 싶지 않나?” 그림자가 다시 속삭였다. 시나는 제 머리맡에 있는 등불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림자가 더 짙어질 뿐, 사라지지는 않았다. 만약 그림자가 저번처럼 컸다면, 시나는 그대로 방을 뛰쳐나갔을 터였다. 하지만 이번 그림자는 작았고 그게 만만해 보였다. “돌아가고 싶어.” 그래서 시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그림자가 일렁이며 말했다. “그럼 이브리아를 데리고 와!” 쉭쉭거리는, 거슬리는 쉰 목소리로 외쳐 시나는 눈을 찌푸렸다. “천 년 전 사람이야, 죽었다고.” “죽지 않았어!” 그림자가 다시 외쳤다. “난 느낄 수 있어! 죽지 않았어! 이브리아를 내놔! 그 뼈와 살을 씹어 삼키겠다!” 갑자기 그림자가 부피를 홱 늘려 시나는 놀라 침대에서 후다닥 내려갔다. 그걸 보고 그림자는 저열한 웃음을 흘렸다. “네 두려움의 냄새가 난다. 이방인이여, 돌아가고 싶다면 은색 아치를 넘어와라.” 그리고 그림자는 흐려지더니 사라졌다. 시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한참 등불을 들고 서 있었다. 도무지 다시 잠들 수가 없어서, 그녀는 방의 불을 전부 켰다. ‘이브리아라니.’ 소파에 앉아 시나는 무릎을 끌어안았다. ‘적어도 나에게 사과 정도는 해!’ 헷갈려서 데리고 왔으면, 용서 정도는 빌란 말이야! 하지만 사과를 할 정신이 있는 괴물이면, 자신을 데리고 오지도 않았겠지. 시나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누군가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미에……는 안 돼.’ 그에게 그녀가 돌아가는 방법을 찾는 걸 도와 달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를 생각하니 가슴이 지끈거렸다. 역시 시작하면 안 되는 관계였다. 후회가 들었다. 눈가에 열기가 몰려 시나는 무릎에 이마를 꾹 누르며 숨을 내쉬었다. ‘언니에게 말해 볼까.’ 란은 시나에게 유일한 아군이었다. 란이 없으면 자신은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하기도 두려웠다. ‘하지만 요즘 언니 너무 바빠 보여.’ 무서운 공작님이 떠난 이후로 란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보였다. ‘그리고…….’ 혹시 자신을 의심하면 어떻게 하지? 자신은 이해할 수 없는 종교와 마법과 사상이 있는 세계다. 어둠이 말을 걸었으니 위험한 존재라고 하면서 어디에 가두거나 마녀로 몰아서 불에 태우거나 할지도 모른다. 시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무서워.’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겨울밤은 지독하게 길었다. ✥✥✥ 수도의 겨울은 조용했다. 대부분이 영지로 내려가 있는 계절이라 더욱 그랬다. 그래서 마담 누와즈는 시즌 전에 찾아온 손님이 반가웠다. 게다가 상대가 라치아 공작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라치아 공작이 요즘 새로운 황제와 자주, 긴 시간 독대를 가진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유스타프는 진지하게 카탈로그를 들여다보다가 말했다. “아니, 이 근처에 장식은 빼고. 이, 뭐라고 하지?” “러플입니다.” 마담 누와즈가 재빠르게 답하자 그가 고개를 흔들었다. “목 근처에 러플은 다 빼. 단순한 게 좋아.” “네.” 마담 누와즈는 충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선물하는 신사들처럼 유스타프는 ‘최신 유행에 맞춰서 적당히’ 드레스를 지으라고 하지 않았다. 그가 자기 눈으로 디자인을 전부 체크하고서야 오케이 사인을 내주었기 때문에, 마담 누와즈는 슬슬 유스타프의 취향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스타일은 어떠신가요?” 그녀가 미리 스케치해 온 디자인화를 내보이자 유스타프는 힐끗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겠습니다. 총 스무 벌 맞나요?” “그것밖에 안 되나?” 유스타프의 말에 마담 누와즈가 입을 가리고 웃으며 말했다. “이만큼만 해도 엄청난 거랍니다. 게다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드레스를 만들어 달라고 하시니, 저희가 전부 달라붙어도 이게 한계고요.” “그렇군.” 유스타프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에게 나가라고 손짓했다. 곧이어 들어온 것은 보석상이었다. 라치아 공작이 어마어마한 양의 보석을 매입하고 있다는 소문은 익히 들은 터라, 보석상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할 마음에 부풀었다. “이건 어떠십니까?” 그가 내미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유스타프는 심드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것보다 더 큰 거 가지고 있는데.” “그, 그러십니까. 그렇다면―” 보석상은 침을 삼키며 비장의 무기를 내밀었다. 80캐럿짜리 에메랄드와 60캐럿짜리 에메랄드들이 사각의 에메랄드 컷으로 다듬어져 백금과 다이아몬드로 촘촘하게 둘린 에메랄드 목걸이였다. “남쪽 왕국의 왕비님을 위해서 특별히 주문했던 것입니다만, 대금을 치르지 못하셔서 제 손까지 들어왔지요. 이 목걸이로 말하자면―” 그가 이 에메랄드가 색상이 똑같아 보일 정도로 균일하면서도 어찌나 투명한지 자랑을 늘어놓으려는데 유스타프가 손을 들어 말을 가로막았다. “사지.” “네?” “산다고.” 당황한 보석상은 가격을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에 잠겼다. “그리고 주문도 맡길 수 있나?” 그때 유스타프가 물어와 보석상은 납죽 엎드렸다. “물론이지요! 어떤 걸 원하십니까?” “곰 인형이랑 물총새.” “……?” 의아한 얼굴을 했던 보석상은 유스타프의 얼굴에 흔들림이 없는 걸 보고 곧 주먹을 꼭 쥐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곰 인형과 물총새 말씀이시지요.” 두말할 필요 없는 게 마음에 들어 유스타프가 고개를 끄덕였고 보석상은 “알겠습니다.” 하고 다시 굳게 대답했다. 보석상이 물러나고 나서 유스타프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란이 올라오지 못했으니 대신 선물이라도 잔뜩 가져가고 싶었다. ‘이제 발표도 며칠 남지 않았고.’ 라치아 공국의 독립 선포와 제국과 우방의 맹세가 동시에 진행된다. 이게 끝나기만 하면 유스타프는 바로 라치아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란이 그리웠다. 그녀의 웃음이 그리웠고, 따뜻함이 그리웠고, 그 녹색 눈동자가, 밀빛 머리카락이, 그녀의 영혼이 그리웠다. 그 그리움을 란에게 줄 선물을 사는 걸로 달래는 와중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집사가 “손님이 오셨습니다.” 하고 일렀다. “들어오시라 해.” 장사꾼을 상대하느라 응접실에 있었어서 유스타프는 바로 손님을 들여보냈다. 레버리였다. “라치아 공작님을 뵙습니다. 청염을 떨치시길.” “불꽃의 정수가 그대에게. 앉게.” 유스타프가 소파를 가리켜 레버리는 빙긋 웃고 자리에 앉았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독대는 한 적이 없던가?” 갸웃하며 잊었다는 듯, 유스타프가 하는 말에 레버리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한 번 있지요.” 그녀가 자리에 앉자 유스타프가 차를 내오게 했다. 시녀가 차를 가지고 들어와 늘어놓고 조용히 물러났다. 레버리가 찻잔을 들며 말했다. “공작님과 이렇게 둘이니 긴장되는군요.” 유스타프는 레버리를 빤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란에게 신분을 마련해 준 게 그쪽이지.” 느닷없는 일격이었지만, 레버리 역시 백전노장인 장사꾼. 그녀는 속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답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신분이라뇨?” 정말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그녀가 눈을 살짝 뜨며 순진한 얼굴로 되물었다. 유스타프가 다리를 꼬고 무릎 위에 깍지 낀 손을 올리며 몸을 기댔다. “아니라면 상관없지만. 한 가지 이야기해 둘까 하고.” “일단 듣겠습니다.” “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짧게 끊고 유스타프가 미소 지었다. “상대는 죽어서 지옥에 가는 편이 더 나을 거야.” 레버리는 놀랐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가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러며 레버리가 웃었다. “하지만 누가 감히 라치아 공작 부인을 해치려 들겠습니까? 심지어 제가 들은 소문으로는―” 의미 있게 레버리가 속삭였다. “저희 골든로즈 상회가 더 높으신 분과 거래하게 될 거라고 하던걸요.” “소문이 빠르군.” “장사꾼에게는 정보가 생명이지요.” 레버리가 웃으며 말한 뒤 깊게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란의 마음에 든 것 같으니까.”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했고, 레버리는 철석같이 알아들었다. “앞으로도 란 님의 눈에서 벗어나면 안 되겠네요.” 알아서 잘하겠다, 하고 말하고 레버리는 침묵 속에서 차를 느긋하게 다 마신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는 그녀를 보며 유스타프는 란의 안목에 감탄이 나오기도 하고 약간 짜증이 나기도 했다. 정말로 란이 숨기로 결정하면 찾는 데 골치 아프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물론 그런 일이야 없겠지만.’ 하지만 그 스스로도 알듯이, 자신은 교활하다. 가능성이 있든 없든, 그 구멍은 전부 제 손안에 있어야 했다. 절대로 놓치지 않도록. ✥✥✥ ‘그래,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 반복되는 꿈에서 깨어난 란은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꾹 눌러 참았다. ‘이브리아 따위에게 의지하려고 했던 게 잘못이었던 거야.’ 란은 드물게도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처음에는 반복되는 꿈이 신기하기도 했고, 초조하기도 했다. 뭔가 신호를 보내는가 싶어서 일부러 깊이 자려고 애쓰기도 했다. 하지만 꽃노래도 삼세번. 계속 그 꿈만 꾸자 란은 이제 짜증이 치밀었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란은 덧창을 열었다. 눈부신 겨울 햇살이 빙벽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어둠? 드래곤? 그래, 나오라고 그래. 그깟 드래곤 때려잡으면 되는 거 아냐? 어? 내가 누군지 알아? 란 로미아 드 라치아야.’ 란은 시나를 생각했다. 시나와 유스타프가 이어져서 어둠을 물리쳤다면, 자신이라고 못 할 이유가 없다. ‘아냐, 내가 더 잘할지도 몰라.’ 란은 슬쩍 그렇게 생각했다가 시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 책상에 앉아 새 양피지를 꺼냈다. 그리고 맨 위쪽에 목표를 적어 넣었다. ‘드래곤 슬레이어 계획서.’ 쓰고 나니 시원했다. ‘진즉에 이렇게 할걸.’ 란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린드버그 숙부와도, 마법사와도, 그 사교계에서도, 그리고 드반 공작가와의 싸움에서도 이겼다. “나야 전술이나 전법은 잘 모르지만…….” 물량 공세라면 할 줄 알지. 얼음수정은 잔뜩 있었고, 얼음수정 세공사 길드도 있다. ‘물량 싸움으로 가면 지지 않는다, 이거야.’ 십만 양병도 할 수 있습니다. 돈이 있으니까요. ‘아, 인구수 때문에 어려우려나? 그건 뭐 용병이라도 사면 되지.’ 란은 우후후 낮은 웃음을 흘리며 ‘탄도 미사일’, ‘대전차 지뢰’ 같은 항목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항상 그녀 자신의 힘으로 위기를 넘겨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브리아가 뭘 남겼을지도 몰라.’ 하고 남의 힘에 의지하려고 했던 게 실수였다. ‘엘프와 드워프 쪽에도 원군을 요청해 두는 게 좋겠지?’ 일단은 어둠이 깨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양측에 알려야 했다. 이건 라치아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실 천 년 전부터 내려온 전 대륙의 문제 아닌가? ‘공국이라서 다행이다.’ 만약 공작령이었다면 독단적인 판단으로 엘프와 드워프의 군사를 빌리는 일이 큰 문제가 되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독립적인 나라이니 군사적 교류에도 문제가 없다. 아직 공국이 되었다고 선포된 것은 아니지만, 유스타프가 하겠다고 했다면 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어머? 마님, 벌써 일어나셨어요?” 깨우러 온 소다가 책상에 앉아 있는 란을 보고 눈을 찌푸렸다. “설마 밤새서 일하신 건 아니시겠죠?” “아냐. 그냥 일찍 눈이 떠졌어.” 란이 시원시원하게 말하며 손을 젓자 소다가 방긋 웃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응.” 그동안 답답했던 게 싹 내려간 기분이었다. 란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행정관과 회계관, 기사단장을 불러 줄래?” “아침 식사 후에 하시죠.” 소다의 말에 란은 창밖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이렇게 아침부터 상관 호출은 좀 아니지.’ 란은 헛기침을 했다. “그러면 차 마실 시간쯤 모이자고 해줘.” “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럼 좀 더 주무시겠어요? 아니면―” “일어날래.” “알겠습니다.” 소다가 물러가고 디모디아와 카라가 들어와서 덧창을 열고 세숫물을 준비했다. 키리가 세안 시중을 들며 말했다. “귀부인은 침대에서 아침을 먹는다고 하던데요.” “그건 다른 귀부인에게 맡길래.” 란의 말에 키리가 히죽 웃었다. “하긴 가주님이 돌아오셔야 침대에서 아침을 먹지요.” “키리!” 란이 짐짓 눈을 찌푸리고 손끝을 튕겨 키리에게 물방울을 던졌다. 키리는 “저는 그저, 가주님이 마님을 애지중지한다고 말한 것뿐인데요.” 하며 웃었다. “키리.” 디모디아가 눈을 찌푸렸다. 키리는 어머나, 하며 입을 꾹 다무는 시늉을 했다. 디모디아는 한숨을 삼켰다. 같은 녹영이지만 키리는 녹영의 두 번째. 자신과는 다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완벽하게 녹아드는 자신에 비해서 튀게 활동하는 키리가 디모디아는 조금 못마땅했다. ‘나중에 이야기해야겠어.’ 결심하고 디모디아는 빙긋 웃으며 란에게 말했다. “그럼 아침 식사를 가져올게요.” “응, 고마워.” 란이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대답했다. 구운 토스트와 밀크티로 가벼운 아침 식사를 끝낸 란은 옷을 갈아입고 서류를 마저 보기 시작했다. 올라온 서류를 살피는 걸 끝내고 란은 이어서 아침의 계획대로 회계관, 행정관, 기사단장을 불렀다. 엘리자벳과 카루소, 블레인은 셋 모두가 불려와 어쩐지 긴장한 얼굴이었다. 란이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유스타프에게 이미 들었겠지만, 라치아가 공국으로 독립한다는 건 알고 있겠지.” 엘리자벳과 카루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모두 눈 밑이 거뭇했다. 대량의 서류에 시달리고 있는 탓이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얹어 주기는 싫은데, 그래도 말은 해 두려고.” 엘리자벳이 떨리는 눈가를 누르며 ‘사표를 내야 할까.’ 고민하는데 란이 입을 열었다. “어둠이 깨어나고 있는 것 같아.” 그 말에 블레인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기사단장인 그는 겨울 사냥 내내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작년 신년회 때 란을 습격한 마수나, 인간의 말을 하는 마수 같은 걸 만나면 눈치를 채지 못할 수가 없다. 엘리자벳 역시 놀라긴 했지만, 그녀는 라치아 사람이었다. 그녀의 놀람은 ‘하필 이때에.’ 같은 놀람이었다. 하지만 이방인인 카루소의 놀람은 남달랐다. “어둠?! 진짜요?! 그 막, 옛날이야기 속에 나오는 그거요?” 카루소는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뛰며 말했고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카루소가 멍하니 있다가 말했다. “그, 그러면 큰일 나는 거 아닙니까? 어둠이 막 몰려나오고 봉인이 깨지고, 마왕이 나오고―” “그건 아닐걸.” 란은 그렇게 말하고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그리고 난 마왕보다 유스가 더 무서워.” 그 말에 카루소가 “아.” 하고는 침착함을 되찾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러네요.” 그러고도 그는 “어둠이라니. 허, 참. 그게 진짜라고요?” 하는 말을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블레인이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만약에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면 문과 하늘 저택 사이에 아무것도 없는 게 문제입니다.” “임시로 바리케이드라도 치는 게 좋을까?” 란의 말에 블레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겨울이잖아. 아무리 그래도 나무를 구하는 게 쉽지는…….” 중얼거리다가 란이 문득 말했다. “눈으로 벽을 쌓으면 안 될까?” “눈으로요?” 엘리자벳이 놀라 갸웃했고, 블레인의 갈색 눈이 이채를 띠었다. “나쁘지 않을 것 같군요.” “그지? 라치아의 겨울은 기니까.” 란이 말했다. “일단 드워프분들과 의논해 보는 게 좋겠어.” 모처럼 와 있는 인력이니, 써먹어야지. 란의 말에 블레인은 씩 웃었다. “알겠습니다.” “지금 가 보게.” “존의.” 인사하고 블레인이 물러가자, 란은 남은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행정 구역 재개편 말인데.” 엘리자벳은 그 말에 기절할 것 같은 기분이 되어 재빠르게 답했다. “그게, 저희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재개편 가안을 짜내 봤거든.” 란은 슬그머니 종이를 꺼내 들었다. “인구수랑 세금이랑 해서…….” 예전에 배웠던 조선 시대 행정 구역을 만드는 방법을 떠올려 아이디어를 짜내본 거였다. 팔도로 나누고 부, 목, 군, 현. 4가지 행정 구역을 뒀었지. 라치아 공작령은 상당히 넓었다. 왜냐면 대부분의 땅이 황량하고 수익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곧 변하게 될 거야. 아니, 이미 변하고 있지.’ 얼음수정을 등에 업은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해서 말이다. 유스타프와 데이트를 하며 란은 그걸 몸소 체험했다. 그러니 너무 부가 한쪽에 쏠리지 않도록 균형 잡힌 발전을 미리 계획해 둬야 했다. 란이 내민 종이를 받아 든 엘리자벳은 눈을 크게 떴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거야. 내가 낸 건 큰 틀이니까. 하지만 보통 큰 틀을 정하는 데에 가장 시간이 걸리더라고.” 이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긴 회의 시간’이 그런 곳에서 나오는 거죠.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엘리자벳에게 미소를 보냈다. “얼마든지 가감해서 의견을 줘.” “알겠습니다.” 카루소는 옆에서 힐끗힐끗 엘리자벳의 종이를 넘겨보다가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재빠르게 몸을 바로 했다. “녹음을 드리우시길.” 깊이 인사하고 엘리자벳은 자리를 떴다. 이제 회계관인 카루소만 남아서 불편한 얼굴로 차를 마셨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약간의 기대감 또한 서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단둘이 독대한 적은 없지?” 란의 물음에 카루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사실은 유스타프의 아카데미 시절 같은 것도 궁금하지만.” 그녀의 말에 카루소는 씩 웃었다. “얼마든지 말씀드릴 준비가 되어 있는 부분이네요.” “하지만 지금 말하고 싶은 건 그게 아니라.” 란이 빙긋 웃었다. “라치아 공국에서 직접 상단을 운영할까, 해서 말이지.” ✥✥✥ 며칠 후 생각보다도 빨리 하레쉬가 찾아왔다. 드워프들은 꽤 즐거워하며 눈으로 된 성벽을 쌓았고, 생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눈 성벽은 완성이 되어 갔다. 눈 위에 물을 뿌리면 날씨에 금방 얼어붙어 아주 단단해졌다. 게다가 제법 두꺼운 데다가 성벽으로서의 기능도 전부 갖추고 있는, 제대로 된 성벽이었다. 란은 기술자들에게 기술을 잘 배워두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렇게 성벽을 살펴보고 방으로 돌아와 옷을 벗는데 창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이제 다들 익숙해져서 창문가를 보았고 역시나, 하레쉬가 서 있었다. 키리가 문을 열어 주며 말했다. “겨울인데 그 차림으로 안 추워요?” “엘프는 인간보다 추위를 덜 타지.” “빠르게 왔네요? 겨울인데 연락이 잘 갔나 보지요?” 란의 말에 하레쉬가 “연락했었나?” 하고 되묻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연락할 말이 있어서 왔다.” 그러며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엘프의 한숨이라니. 란은 경고음을 들은 기분이 되어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둘이 이야기할 수 있을까?” “물론이죠.” 란은 공작 부인의 알현실인 에메랄드 방으로 그를 안내했다. 차를 내오게 했지만, 하레쉬는 손도 대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네가 맡겨 줬던 아이 말이다. 릴리.” “무슨 일 있나요? 다친 거예요? 아니면 병이 재발했어요?” 그러고 보니 올봄에 올 수 있을 거라고 해 놓고서, 벌써 겨울이다. 하레쉬는 단단히 각오한 얼굴로 란을 보며 말했다. “내 제자가 되고 싶어 한다.” 으응?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말이라 란은 살짝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치료사가 되고 싶어 한다고요?” ‘하긴, 그럴듯한 일이잖아?’ 소아병동에 있는 아이들이 흔히 의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릴리 역시 자신을 고쳐준 치료사가 되고 싶어 한다는 건 이상한 게 아니다. “그래.” “그런데 그거랑 못 오는 거랑 무슨 상관이죠?” “모르는 건가?” “몰라요.” 란이 당당히 말했고 하레쉬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그녀는 내 제자가 되고 싶어 해. 그 말은 엘프 치료사가 되겠다는 말이다. 내게 수련을 받으려면 우리 일원이 되어야 하고.” 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릴리는 인간인데, 그게 가능한 건가요?” 하레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장로들의 허락은 받았다.” “그랬군요.” 란은 기묘한 기분이 되었다. 하레쉬가 말했다. “하지만 릴리의 친족이 이곳에 있지. 그에게도 허락을 받아야 해.” “루미에에게도요?” “그래.” “하긴, 그게 당연한 일이겠죠.” “그리고 그러면 그녀는 우리 엘프와 같이 취급된다, 그러니까…….” 란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금방 눈치챘다. “성년이 될 때까지 마을 밖으로 나갈 수가 없겠군요.” “그래.” “잠깐, 엘프의 성년은 인간과는 다르지 않아요?” “그 아이는 인간이니까, 인간의 성년 때까지다.” “그건 다행이군요.” 마흔 살이 될 때까지 마을 밖으로 못 나온다, 이런 거라면 곤란했을 테니까. 하레쉬가 두툼한 편지를 꺼내어 내밀며 말했다. “이걸 릴리의 친족에게 전해줄 수 있나?” “물론이죠. 그리고 직접 이야기해 주면 더 좋겠어요.” “당연한 일이지.” 하레쉬는 고개를 끄덕였고, 란은 편지를 잘 갈무리한 뒤에 말했다. “만약 필요한 게 있다면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어요.” 재료나 도구를 사는 데 돈이 들어가지 않을까? “이미 보내고 있는 걸로 충분해.” 하레쉬가 손을 저었고 란은 그런가요,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란은 가볍게 숨을 내쉬고 그녀의 차에 설탕을 넣었다. “그럼 이제 제가 이야기할 차례네요.” 하레쉬가 고개를 끄덕였고 란이 입을 열었다. “어둠이 깨어나고 있습니다.” 하레쉬는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란이 다리를 꼬며 느긋한 자세로 소파에 기댔다. “제가 지금까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어둠은 드래곤이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주변 마수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아요.” “암흑룡 델판토.” 하레쉬의 말에 란은 “그렇게 불리나요.” 하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좀 더 자세하게, 진작에 가르쳐 주면 안 됩니까?” “엘프의 지식은 엘프의 것이니까.” 이 폐쇄적인 종족 같으니라고. “하여튼, 문지기는 맹약의 이행을 요구합니다.” “맹약?” “천 년 전 이브리아를 두고 인간, 엘프, 드워프가 했던 삼대동맹이요.” 하레쉬는 순간 굳었다가, 간신히 내뱉었다. “그 동맹은 깨진 것 아니었나?” “라치아는 천 년을 문지기로 있으며 하늘 저택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잊은 적 없어. 란은 그렇게 주장했다. “라치아가 아닌 그대가 라치아의 권리를 주장하다니.” 란이 그 말에 어라, 하고 제 손을 들어 보이며 웃었다. “아직 이야기 안 했나요? 저 이제 라치아 공작 부인입니다.” 마음껏 주장할 수 있지요. 하레쉬는 놀란 듯 그녀의 결혼반지를 보았다가 미소 지었다. “축하가 늦었군.” “감사합니다.” “드워프에게는?” “이야기할 겁니다. 그리고 전 드워프의 친구니까요.” 그들은 흔쾌히 수락할 거라고, 란은 생각했다. 문제는 눈앞의 엘프들이지. “세계수는 여전히 잘 자라고 있습니까?” 란의 물음에 하레쉬는 눈을 찌푸렸다. “정말, 자네는 우리에 대해서 지나치게 아는 것 같으면서도 또 무지하지.” 엘프의 세계수는 이브리아가 심어 준 것이다. 별빛과 달빛을 받으며 자라는 나무는 엘프에게는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었다. ―그 세계수 아직도 잘 가지고 있지? ‘그때 했던 맹약도 기억하고 있죠?’라는 의미이다. “장로들에게 말해 보지.” “그거면 됩니다.” 란이 빙긋 웃었다. “더불어서 하나 더 말씀드릴 게 있는데 말이죠.” “이제 무슨 말을 할지 걱정이 되는데?” 하레쉬의 농담에 란은 가볍게 웃었다.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하면, 정말로 하레쉬와도 가까워졌다. “라치아와 국교를 맺지 않으시겠습니까?” 자신만만한 미소를 띠고, 자신들을 선택하면 조금의 손해도 보지 않을 거라는 얼굴로 말하는 란을 보며 하레쉬는 저도 모르게 ‘그러지.’ 하는 대답이 나올 뻔했다. “국교?” “네, 라치아가 공국으로 독립하게 되었답니다.” “그것도 축하할 일이군.” “감사합니다.” “그 일 역시 장로에게 이야기하지.” “네.”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단지 엘프와 드워프와의 교역에서 한 가지 불편한 점이 있다면 거리 문제였다. 라치아가 북부의 촌구석―슬프게도―이었기 때문에 그들과 교류를 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렸다. ‘뭐 그래도 돈이 걸린 문제면 다들 열심이지. 옛날 실크로드를 생각해 봐도.’ 육로로 사막을 지나 중국과 아랍을 오가던 상인들을 생각하면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뱃길을 이용하면 좋은데.’ 빙벽 뒤에는 바다가 있지만, 그렇다고 빙벽을 넘을 얼간이는 없다. 란은 어쩔 수 없는 건 빠르게 단념했다. 안 되는 걸 되게 하려고 붙잡고 있는 시간만큼 아까운 건 없다. “그럼 루미에를 불러 드릴까요.” “먼저 릴리의 편지를 읽으라고 전해 줘. 그리고 마음이 결정되면 날 만나러 오면 된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엘프의 기다린다는 무섭거든요.” 란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엘프가 기다린다고 하면 정말로, 올 때까지, 계속 기다린다는 말이다. 란은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종에게 편지를 루미에에게 전해달라고 건네주며 하레쉬의 말을 전했다. “그럼 편히 있으세요.” 란의 말에 하레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했다. 시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이후로 그림자가 나타난 적은 없었지만, 그림자가 했던 말은 계속 귓가를 맴돌았다. ―돌아가고 싶지 않나? ‘물론 돌아가고 싶지!’ 시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뭔가 대화라도 했어야 했을까? ‘아냐,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대였잖아. 이브리아를 내놓으라니 하는 헛소리나 하고.’ 몇 번이나 그 상황을 생각해 보면서 그때 다른 대답을 해 볼걸, 좀 더 캐내 볼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마치 말싸움을 하고 와서 나중에 ‘아, 이 말도 할걸!’ 하고 깨닫는 것과 비슷했다. ‘그게 어둠일까?’ 아마 그렇지 않을까. 짐작이지만 어둠이 맞을 거다. 그렇지 않으면 이브리아를 찾을 이유도 없겠지. ‘그냥…… 루미에에게 이야기해 볼까.’ 시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루미에의 방 앞으로 찾아갔다. 하지만 문을 두들길 수가 없어서 한참 서성거리는데 방문이 열렸다. “왜 들어오지 않고?” 루미에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지만, 시나는 눈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야?” 시나는 루미에의 얼굴을 보고 저도 모르게 물었다. 웃고는 있는데 그의 얼굴이 어두웠다. “일단 들어와.” 루미에는 그렇게 말하고 문에서 비켜섰고 시나는 조심스럽게 루미에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술에 취해서 알몸으로 깨어난 후로 그의 방에 들어오는 건 처음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부끄럽다.’ 루미에는 근처 의자를 시나에게 권하고 자신은 책상에 걸터앉았다. 그가 책상에 있는 편지를 펴 보며 말했다. “여동생에게 편지가 왔어.” “무슨 일 있대?” 시나도 루미에의 여동생에 대해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가 그녀를 위해 상당한 희생을 했다는 것도. “엘프에게 배워서 치료사가 되고 싶대. 그러려고 인간으로서의 인연은 끊고 그쪽 공동체에 소속되고 싶다는 거야. 그러려면 내 허락이 필요하고.” 시나는 가볍게 숨을 삼켰다. “인간으로서의 인연을 끊는다고? 뭐야? 그럼 오빠랑 여동생이 아니게 된다는 거야?” “아니, 꼭 그건 아니라고 하는데…… 글 읽을 줄 알아?” 루미에의 물음에 시나는 고개를 저었다. 차원 이동자의 특권인지 말을 알아들을 수 있고 몸도 다른 사람보다 훨씬 튼튼한 것 같지만, 글자를 읽을 수 없었다. 문맹이 얼마나 불편한지, 시나는 이 세계에 와서야 알았다. 루미에는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오빠에게는 고맙고, 미안하대. 그리고 짐이 되고 싶지 않대.” 그가 눈을 찌푸렸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화가 나.” 루미에의 말에 시나가 물었다. “중요한 일을 멋대로 결정해서?” “그것도 그렇고.” “아니면, 안심해서?” 그 말에 순간 루미에의 눈에 불똥이 튀는 듯했다. “난 단 한 번도―!” 그가 목소리를 높이려다가, 시나의 눈을 보고 말을 멈췄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에는 동요도 없었고, 비난도 없었다. 그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듯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루미에는 입을 꾹 다물었다. 한참 후 그가 희미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난 그렇게 찌르는 사람이 싫더라.” “찔렸어?” 시나가 살짝 웃으며 묻자 루미에는 제 머리를 쓸어 올리며 편지를 보았다. “릴리가 자신을 짐이라고 생각하는 게 싫어. 하지만―” 안심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안심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죄책감이 느껴졌다. 부모님이 릴리를 그에게 부탁한 후로 그는 최선을 다해서, 그녀를 위해서 무엇이든 해 왔다. 하지만 란이― 주인님이 손을 내밀었을 때, 릴리가 엘프에게 가게 되었을 때 힘들면서도 어딘지 홀가분했다. 그런데 이제 그녀가 완전히 제 다리로 설 거라고, 오빠의 짐이 되고 싶지 않다고 말하자 그는 다른 의미로 괴로웠다. “릴리가 짐이었던 것만은 아니잖아.” 시나의 말에 루미에는 눈을 깜박였다가 웃었다. “맞아.” 그녀는 짐이었지만, 동시에 그가 살아갈 힘이 되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틀렸지.” 시나의 말에 루미에는 눈을 꿈벅였다. 그녀가 씩 웃었다. “틀리고 맞았지. 어차피 사람의 마음은 딱 재단할 수 없잖아. 그보다 난 루미에에게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점이 하나 있는데.” “하나만?” 그가 갸웃하며 장난스럽게 묻자 시나가 뺨을 붉히며 “물론 여러 개지만.” 하고 재빠르게 이어 말했다. “루미에는 릴리를 위해서 희생했잖아. 노력했으니까, 릴리에게 그 보상을 원할 법도 한데, 그런 게 없잖아? 그건 굉장하다고 생각해.” “보답을 바란 게 아닌걸.” 루미에가 눈을 찌푸렸다. “그녀가 행복한 게 내―” 말하다가 그는 말을 멈췄다. ―그녀가 행복해지기를 바라. ―루미에, 행복해져. 똑같은 말을 들은 적 있다. ‘이런 거였나.’ 어쩐지 웃음이 나와서 루미에는 낮게 웃었다. 시나가 의아해져서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가 팔을 벌려 이리 오라는 시늉을 했고, 그녀가 잽싸게 다가가 그를 꽉 끌어안았다. 루미에는 시나를 마주 안았다. 부드럽고 날렵한 몸은 그의 품 안에 쏙 들어온다. “이시나.” “응?” “네가 좋아.” 그의 말에 그녀가 움찔했다. 파르르, 잠자리 날개같이 떨리는 숨을 내뱉고 그녀가 속삭였다. “나도 좋아해.” “응.” 그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알아, 넌 돌아가겠지. 끝날 걸 알기에, 이 순간을 더 소중하게 여기자. 작고 낮게 루미에가 속삭여서 시나는 그러자, 하고 대답하며 그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릴리에게 답장을 보내야겠다.” 나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한 거라면, 그러지 말고 네가 원하는 대로 하라고. 힘들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네 덕분에 살아왔다고. 솔직하게 모든 걸 적어 보내야겠다. 루미에는 그렇게 결정했다. 시나가 그의 품에서 몸을 떼며 말했다. “그럼 당장 보내는 게 좋겠네.” 시나는 자신의 이야기는 잠시 미루기로 했다. 어둠에 대한 이야기는 어차피 미룰 만큼 미뤘으니까, 조금 더 미룬다고 해도 큰 문제는 없으리라. ‘게다가 여동생 일로 이미 마음속이 가득할 텐데.’ 지금 이야기할 타이밍은 아니지. 고민 끝에 결정한 일이었지만, 핑계가 생기니 저절로 발이 뒤로 물러났다. 루미에는 고개를 끄덕이고 가볍게 시나의 입술에 키스했다. “그럼 먼저 하레쉬에게 이야기하고 올게.” “그 엘프?” “응.” 대답하고 루미에가 웃으며 물었다. “만나 볼래?” “그래도 돼?” 시나가 눈을 크게 떴다. 궁금한 것도 사실이다. 엘프라니! 루미에가 그 얼굴을 보고 가볍게 그녀의 코끝을 툭 쳤다. “안 될 것도 없지.” 게다가 엘프라면, 차원 이동자에 대해서 뭔가를 알지도 모른다. 루미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레쉬는 응접실에서 그대로, 소파에 앉지도 않은 채로 기다리고 있었다. 루미에가 들어가자 하레쉬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가, 그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시나에게로 향했다. 루미에가 그와 적당히 거리를 유지한 채로 말했다. “이야기는 다 들었습니다.” 하레쉬의 눈이 그제야 시나에게서 떨어져 루미에를 향했다. “릴리를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루미에의 물음에 하레쉬가 진지하게 답했다. “세계수의 뿌리를 걸고 그 아이를 책임질 거라고 맹세하겠다.” “좋습니다. 그럼.” 루미에가 고개를 끄덕였고, 하레쉬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릴리는 네가 허락하지 않을 거라고 하더군.” 루미에는 놀라 눈을 깜박였다. “그랬습니까?” “그래.” 답하고 하레쉬가 보충 설명을 했다. “네가 자신을 과보호해서, 자신의 손안에서 놓지 않으려고 한다고.” 루미에는 순간 반박하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가, 곧 어깨를 늘어트렸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저도 변하니까요. 릴리에게 이제 괜찮다고 전해 주십시오.” 하레쉬가 신기하단 얼굴로 루미에를 보고 말했다. “인간은 너무 빠르게 변하는군.” “당신들에게는 그렇게 느껴지는 거겠지요.” 루미에의 말에 하레쉬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미에가 이어 말했다. “릴리에게 편지를 쓰려고 합니다만.” “편지 같은 교류는 상관없어. 지금까지처럼 언제든지 보내도 된다.” “그렇군요.” 마음이 한결 놓여서 루미에는 미소 지었다. 하레쉬는 자신을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빤히 보고 있는 시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쪽에 있는 인간은 어디서 온지는 모르지만, 아주 먼 곳에서 온 것 같군.” 이쪽의 바다나 산 냄새가 아니다. “저는 차원 이동자예요.” 시나가 작게 말하자 하레쉬가 “그런가?” 하고 지그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신기한 걸 보는 표정은 아니었다. ‘이건 그럭저럭 보던 샘플이군.’ 하는 정도의 얼굴이라 시나는 저도 모르게 물었다. “혹시 돌아가는 방법에 대해서 아시나요?” “차원을 뛰어넘는 법이라면 알지.” 하레쉬의 대답이 너무 순순해서 시나는 입을 떡 벌렸다. 루미에도 어깨를 움찔했다. 그는 자신이 내뱉은 말의 파장을 모르는 얼굴이었다. 멍하니 하레쉬를 바라보던 시나는 가슴속이 꽉 막히는 것 같았다. 말을 내뱉으려 했지만, 너무 절박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그, 그럼―” 그녀가 더듬더듬 말하는데 하레쉬가 덧붙였다. “하지만 아무도 차원을 넘을 만큼의 힘을 가진 자가 없다.” 태연한 그의 말에 시나는 전신에서 힘이 쫙 빠지는 걸 느꼈다. 그녀가 휘청하는 걸 루미에가 놀라 붙잡았다. 시나가 낮게 말했다. 허탈감이 지나가자 말이 빠르게 흘러나왔다. “그럼 전 어떻게 건너온 거죠? 어둠이 절 데리고 왔다고 했어요. 그럼 어둠에게 그만큼 강한 힘이 있다는 건가요?” “어둠과 드래곤, 그리고 문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겠지.” 하레쉬가 잠시 생각한 후에 말했다. “아니면 얼음수정을 잔뜩 이용하면 가능하다거나? 하지만 얼마나 들어갈지 모르겠군.” 시나는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루미에가 그녀의 관자놀이에 가볍게 입술을 대며 속삭였다. “분명히 방법이 있을 거야.” 그 말에 시나는 눈 안쪽이 시큰해지는 걸 느꼈다. 만약 자신과 루미에의 상황이 반대였더라도, 자신은 루미에처럼 그를 위해 애썼을까? 확답할 수 없었다. 어쩌면 돌아가려고 하는 그를 원망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루미에는 곧고 성실하게, 정면으로 자신을 봐 주고 있다. 그의 마음에 란이 있고 없고와는 상관없이, 시나는 그의 애정을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이야기해야 해.’ 그녀의 마음속에 확신이 들었다. 어둠에 대해서 지금 루미에에게 이야기해야 한다. 그에 대한 확신이 들 때, 이야기해야겠다고 결심했을 때. 그렇지 않으면 한없이 미룰 것 같았다. 시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말했다. “루미에, 나 할 이야기가 있어.” 시나가 하레쉬에게도 말했다. “엘프분도 들어보시겠어요?” 엘프에게 이야기한다면 새로운 시각이 나올지도 모른다. 시나는 어둠이 제게 와서 말을 걸었다는 이야기를 간략하게 했다. 루미에의 얼굴은 굳었고, 하레쉬는 생각에 잠겼다. 그가 느릿하게 말했다. “난 이만 가 봐야겠군.” 지체할 만큼 여유가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테라스 창을 열고 가 버렸다. “자, 잠깐만요―!” 당황한 시나가 그를 불렀지만 이미 하레쉬는 떠난 후였다. 루미에가 말했다. “괜찮아. 원래 저러니까.” “원래 저런다고?” 뭐 저런 인간―아니 엘프가 다 있담? 시나가 테라스 창으로 쪼르르 나갔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눈 위에 발자국도 남지 않았다. ‘엘프는 엘프구나.’ 신기해하는데 정원 저쪽 끝에서 말을 달려오는 사람이 보였다. 시나는 추위에 몸을 부르르 떨며 눈을 가늘게 떴다. “누구지?” 중얼거린 말에 루미에가 제 망토를 그녀에게 둘러 주며 말했다. “공작님이 오셨군.” ✥✥✥ 란은 고민에 잠겼다. ‘드래곤 슬레이어 계획서.’ 그 종이를 내려다보며 그녀는 아래에 적힌 계획들을 바라보았다. 그때 누군가가 제 눈을 가려 란은 당황했다. “누구게요?” 들려온 목소리에 란은 휙 몸을 돌렸다. 유스타프가 서 있었다. 그가 제 손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거 그냥 이렇게 대답 없이 돌아서도 되는 거였습니까?” “유스!” 란이 자리에서 펄쩍 뛰어 일어나며 그를 끌어안았다. “뭐야, 언제 왔어? 어떻게 왔어? 소리 소문도 없이?” “제가 먼저 들어왔습니다. 란을 놀라게 해 주고 싶어서요.” 유스타프가 웃으며 그녀를 안아 들었고, 이제 거기에 익숙해져 란은 그의 목을 팔로 감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보고 싶었어.” “저도 보고 싶었습니다.” 란이 몸을 숙여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췄다. 아직 입술이 차가웠고, 그의 옷에서는 한기가 느껴졌다. 정말로 방금 온 것이리라. 란이 조심스럽게 그의 머리카락을 넘기고 그의 뺨을 감쌌다. “차가워. 난로 앞으로 가야겠다.” “아뇨, 일단 옷부터 갈아입고 와야겠습니다.” 유스타프가 그러며 슬쩍 물었다. “같이 씻을까요?” “그럴까?” 란이 순순히 대답해 유스타프는 눈을 깜박이다가 정중하게 란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응.” 란이 손을 모으고 얌전히 서 있자, 유스타프가 말했다. “금방 부르겠습니다. 금방이요.” 그러며 나가려다가 물었다. “마음 바뀌시는 거 아니겠지요.” “지금 바뀌려고 해.” 란의 말에 유스타프가 가볍게 웃고 재빠르게 방을 나갔다. “머리 풀어 드릴까요? 씻을 준비 하실 거죠?” 소다의 말에 란은 웃고 고개를 끄덕였다. 창가로 다가가서 란은 김이 서린 창문을 가볍게 닦아내고 밖을 보았다. “진짜 이제 들어오네.” 썰매와 기사들이 저쪽에서 경쾌하게 달려오는 게 보였다. 보기만 해도 썰매에 달린 방울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란은 가볍게 미소 지었다. 란이 욕조에 앉자, 유스타프는 묘한 얼굴이었다. 란이 피식 웃으며 그의 얼굴에 물을 튕기고 말했다. “뭘 기대하셨나요?” “그 수건이 없는 걸 기대했습니다만.” “그럼 아쉽게 되셨네요.” 란은 그렇게 말하고 작게 신음을 흘리며 욕조에 몸을 완전히 담갔다. 뜨거운 물이 기분 좋았다. 둘이 누워도 충분한 넓이의 대리석 욕조여서 란은 다리를 쭉 뻗었다. “수도에서는? 어떻게 됐어?” “라치아 공국으로 독립을 선언하면, 그쪽에서 승인해 주는 형식으로 진행될 겁니다. 봄이 되면 사신을 보낼 예정이지요.” “그렇군. 하긴, 그게 가장 무난하겠네.” 란이 턱을 괴며 말하자 유스타프가 제 옆을 가리키며 말했다. “적어도 이쪽으로 와 주시죠.” “그쪽에서 오시지요?” 란이 옆으로 비켜 앉으며 말하자 유스타프는 기꺼이 자리를 옮겼다. 그의 팔이 란의 어깨에 둘러지고, 그가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런데 누님,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뭔데?” “저택 주변에 얼음으로 된 벽이 세워져 있던데요.” “아, 그거.” 란이 제 계획을 설명하자 유스타프의 입가에 재미있다는 미소가 지어졌다. “이상한가……?” 란이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블레인이 찬성해 주기는 했지만, 유스타프가 보기에는 아닐 수도 있다. 유스타프가 란의 양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의 손은 크고 뜨거웠고, 상냥했다. “아뇨, 제가 누님을 참 좋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며 그가 그녀의 입술에 살짝 키스하고 이어 말했다. “더불어 저는 누구에게도, 그게 어둠이든 뭐든 질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알아.” 란이 살짝 미소 지었다. “나도 그럴 생각이거든.” “그럼 역시 저희는 아주 잘 맞는군요.” 그러며 유스타프가 그녀의 수건 매듭에 손을 대어 잡아당겼다. “유스타프!” 당황한 란이 떨어지는 수건을 꽉 붙잡았지만 유스타프에게 쉽게 빼앗겨 버렸다. 그가 그녀의 허리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이쪽도 잘 맞는지 확인해 볼까 하고 말입니다.” “확인했어, 충분히 했어.” 물속에서 매끄러운 살갗이 닿는 감촉이 생생해서 란은 얼굴을 붉히며 빠르게 말했다. “누님.” 그가 푸른 눈에 미소를 담고 속삭였다. “전 제 손에 들어온 걸 절대로 놓치지 않습니다.” 그가 가볍게 란의 어깨에 키스하다가 입을 벌렸다. 유스타프의 이가 둥근 어깨를 긁듯이 스쳤다. 그의 손이 부드럽게 등을 타고 내려와 척추 끝까지 훑었다. 란은 가볍게 몸을 떨고 그를 꽉 안았고, 유스타프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란, 그렇게 붙으면 제가 마음껏 키스해 줄 수가 없잖습니까?” 유스타프가 그녀의 어깨를 핥으며 말했다. 란이 도리질을 치며 그를 안은 팔을 놓아주지 않자 그는 가볍게 웃고 어깨와 목덜미, 뺨에 입 맞추고 손을 더 아래로 내렸다. 그의 손끝이 슥 그녀의 허벅지를 긁으며 내려와 안쪽을 살며시 손바닥으로 누르며 다리를 벌리게 했다. 그의 다리를 사이에 두고 다리를 벌리는 모습이 되어 란은 당황해 허리를 내리다가 그의 손가락에 놀라 허리를 세웠다. 그녀가 무릎을 세우자 그가 핥기 좋은 곳에 가슴이 놓여서 유스타프는 눈앞에 서 있는 탐스러운 과실을 입술로 물었다. “앗-!” 란이 몸을 움츠리며 반사적으로 소리를 냈다. 유스타프는 한 손으로는 그녀의 허리를 쥐어 도망치지 못하게 했고, 다른 한 손의 중지로 그녀의 음순을 갈랐다. 란이 그의 머리를 움키며 숨을 할딱였다. 이미 쾌락에 익숙해진 그녀의 몸은 그가 줄 쾌감을 기대하며 젖어 있었다. 손가락이 마치 깃털처럼 가볍게 훑듯이 그녀의 은밀한 여린 살을 어루만졌다. 감질나는 움직임이었다. “흐아, 응, 으응-” 유스타프는 붉은 유두를 살살 빨아들였다가 혀로 간지럼 태우듯 했다. 간지러움인지 쾌감인지 모를 것에 란은 좀 더 그가 강하게 가슴을 빨아주었으면 했다. 그건 하반신도 마찬가지였다. 클리토리스를 조물거리며 손가락은 살짝살짝 입구만 훑었다. 란은 끙끙거리며 허리를 틀었다. “유스-” 조르는 목소리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네, 말씀하세요.” 그에 비해 태연한 목소리로 유스타프가 말해서 그녀는 붉어진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심술쟁이.”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는데요. 원하시는 걸 말씀해주시면 그대로 해 드리죠.” 그의 손가락이 얕게 안쪽을 문질렀다. 란의 허리가 반사적으로 아래로 내려앉자 그는 손을 더 뒤로 뺐다. “유스, 유스, 유스으-” 그녀가 매달리며 몸을 숙여 그의 입술에 입 맞췄다. 그러며 살며시 그의 입술을 물었다가 놓고, 그의 혀를 정성스럽게 제 혀로 문질렀다. 유스타프에게서 만족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살짝살짝 그의 혀를 빨아들이자 유스타프가 그녀의 뒷머리를 움켜쥐고 강하게 입을 맞춰왔다. 그의 혀는 자유자재로 움직여 란의 입안을 훑었다. 키스를 하는 동안은 황홀하다는 거 말고 다른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온 몸의 근육이 이완되고 그가 주는 황홀감에 몰두해 있는 그 순간, 유스타프가 강하게 란의 허리를 잡아 내리며 허리를 올렸다. “-!” 페니스가 단숨에 란의 가장 안쪽까지 닿았다. 그녀는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르며 입을 벌렸다. 유스타프가 거칠게 허리를 움직였다. 얕고 빠른 움직임이었다. 이제 그녀의 어디가 약한지, 어디가 좋은지 전부 파악하고 있었기에 그는 란의 안쪽을 빠르게 찔러댔다. “힉, 아흑, 아, 아읏!!” 말이 나오지 않았다. 란은 이리저리 튀며 물에 젖어 미끄러운 팔로 그의 어깨에 매달리느라 필사적으로 손톱을 세웠다. “아, 싫어, 앗, 응-!!” 단숨에 절정에 올라 란은 흐트러졌다. 유스타프가 그녀의 엉덩이를 움켜쥐며 자세를 바꿨다. 그리고 란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계속 올려쳤다. 란은 팔다리를 동원해서 그에게 딱 달라붙었다. 첨벙이는 물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두 번째 절정은 더 빠르게 와서, 안쪽이 다시금 수축하며 조여 들자 유스타프는 사정했다. 그의 엉덩이가 부들부들 떨렸다. 유스타프는 눈을 가볍게 찌푸렸다. 란의 안은 마지막 한 방울까지 삼키겠다는 기세로 그를 조여댔다. 그러며 란이 그의 허리에 다리를 감아 있는 힘껏 그를 안았다. 유스타프가 란의 귀를 가볍게 물었다가 핥았다. 절정에 올랐던 란이 곧 축 늘어지자 유스타프는 아직 떨리는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란은 더운 숨을 내쉬며 헐떡였다. 욕조의 뜨거운 물 때문에 어지러웠다. 순식간에 절정에 달해 아직도 정신이 없었다. 유스타프는 멍한 란의 얼굴 여기저기에 입 맞춰 주면서 그녀의 어깨와 등허리를 어루만졌다. “란의 안 정말로 기분 좋아요. 피부도 기분 좋고. 향기도 좋아요. 정말로 돌아왔다는 실감이 나네요. 느껴지십니까? 아직도 란의 안이 제 정액을 쥐어짜고 있어요.” 웃으며 속삭이는 그의 말에 란은 간신히 정신을 차려 눈을 흘겼다. 란이 칭얼거렸다. “더워. 어지러워.” “그럼 나갈까요?” “응.” 고개를 끄덕이자 유스타프가 그녀의 다리를 잡아 제 허리를 감싸게 했다. 란이 놀라 몸을 빼려고 했지만 그가 이미 그녀의 허리를 붙잡고 있었다. “유스, 잠깐, 아직 안에 넣고 있잖아!” “네.” 태연한 대답에 란은 버둥거렸지만 몸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이, 이 상태로 일어나면.” “아주 깊게 들어가겠죠.” 유스타프가 속삭이고 그녀를 제 허리에 감은 채로 몸을 일으켰다. 란은 전신에 힘을 주어 그의 성기가 제 안으로 더 파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 애썼다. ‘왜, 왜 안에서 커지는 거야?!’ “싫어, 유스, 내려줘-” “정말로요? 이대로 힘을 빼라고 하시면.” 그가 그녀의 엉덩이를 잡은 손에 힘을 빼자 그의 성기가 안으로 더 쑥 들어왔다. “힉!!” 란은 허리를 부들부들 떨었다. 방금 거기는 누른 것만으로도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유스타프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속삭였다. “거기, 기분 좋죠? 평범한 자세로는 그 안까지는 안 닿으니까요.” “아, 안 돼, 싫어.” “벌써 조이고 계시면서. 가만히 계시지 않으면 제가 욕조를 나가기 전에 미끄러져서 넘어질 겁니다.” 란은 울상이 되어 그에게 매달렸다. 이 자세로는 깊이도, 각도도, 박자도 전부 유스타프에게 달려있다. “오랜만에 뵙는 거니까요.” 당분간은 란의 안에서 나가고 싶지 않습니다, 하고 속삭이고 유스타프가 침실로 향했다. 눈치가 빠른 건지 어떤 건지 이미 시종들은 전부 물러나고 없었다. “이러면 좀 더 낫겠지요?” 유스타프가 부드러운 태피스트리에 란의 등을 살짝 기대게 했다. 그래도 유스타프에게 모든 게 달린 건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등에 벽이 닿아서 란은 옴짝달싹할 수 없이 그와 벽 사이에 갇혀 버렸다. 물러날 공간이 없었다. 그가 그녀의 엉덩이를 붙잡고 추삽질을 시작했다. 자궁 입구의 뒤쪽을 푹푹 찔리자 란은 비명과 교성 사이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자제할 수가 없었다. “으아, 앙, 앗, 아아아, 유스, 아아앗!!” 그의 귀두가 슥슥 안쪽을 훑을 때마다 그녀는 버둥거렸지만 소용없었다. 유스타프는 거칠게 숨을 내쉬며 벽과 그 사이에서 란을 압사시킬 것처럼 제 엉덩이를 밀어붙였다. 그가 뒤로 허리를 뺄 때마다 질 안을 꽉 채운 성기가, 귀두가 그녀의 안을 긁어내면서 거품이 인 애액과 정액이 툭툭 떨어졌다. “싫어, 너무, 깊, 히윽, 힉-” 그가 그녀의 몸을 성기가 빠질 만큼 들어 올렸다가 단숨에 내리며 쾅하고 찔러 올리자 란은 바들거리며 컥컥거렸다. 쾌감이 너무 강해서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유스타프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란의 목덜미와 턱에, 뺨에, 입술에 입 맞췄다. “좀 더 흐트러져 주십시오. 좀 더, 좀 더.” 몇 번이나 란을 절정으로 밀어붙이고서 그는 침대로 자리를 옮겼다. 아까같이 정신이 나갈 것 같은 폭력적인 쾌감이 아니라, 간지럼 태우는 것 같은 부드러운 애무와 키스가 이어졌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키스가 퍼부어졌고 그의 혀가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미 강한 쾌감에 달궈진 몸은 그의 혀가 손가락을 핥기만 해도 바들거렸다. 결국 란은 중간에 기절하듯이 잠들었다. ✥✥✥ 유스타프는 잠든 란의 뺨에 키스해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실로 자리를 옮겨서 밤새 괴롭혔으니, 낮까지는 계속 잘 터였다. 그는 책상으로 다가갔다가 란의 계획서를 발견했다. 내용을 눈으로 훑고 유스타프는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란다운 계획서다. ‘다행이군.’ 란이 자신과 시나에 대해서 고백한 후에 유스타프도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그에게는 한 가지 걱정되는 점이 있었는데, 란이 이 상황에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는 거였다. 유스타프는 얼마든지 그걸 이용할 수도 있었다. 죄책감은 상당히 어릴 때부터 인간이 느끼는 깊은 감정 중 하나다. 그걸 이용해서 라치아에 란을 옭아매는, 그런 방식도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그런 죄책감을 느끼고 있으면 엉뚱한 곳에서 무모한 짓을 할지도 모른다. ‘착해빠진 데다가 제 목숨에는 무모해서.’ 7월의 빗방울마냥 여기저기 비를 흩뿌리고 다니면서도 자각이 없고, 아무 곳에나 발을 쑥쑥 내민다. 그러면서도 유스타프 자신의 위험 앞에서는 한없이 약해지는 모습을 보인다. 그 점이 사랑스러웠지만, 그래서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점이 두려웠다. ‘하지만 이런 계획을 세우는 정도면 괜찮지.’ 그는 란을 전투에 내놓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래도 저 문 뒤에서 뭐가 튀어나오든 그걸 없애버리지 않으면 란의 죄책감이 계속될 거라는 것 정도는 그도 알 수 있었다. 유스타프는 창가로 다가가서 빙벽을 바라보았다. 은색 아치와 흰 조약돌길, 그 안의 새하얀 문을 그는 눈앞에서 보듯이 그릴 수 있었다. “슬슬 나오는 게 어때?” 그는 그렇게 중얼거렸고, 청염이 호응하듯 희미하게 울었다. 그걸 달래듯 가볍게 반지를 붙잡아 돌리고 유스타프는 책상으로 돌아가 란의 계획서를 수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그의 눈에 책상 아래쪽이 들어왔다. 서류 더미가 그 아래 쌓여 있었다. 맨 위의 서류를 들어 올려 내용을 훑고 그는 ‘설마?’ 하고 그 아래도 살폈다. 역시나였다. 겨울 내내 그가 붙어서 해야 할 일을 란이 끝내 놓은 거였다. ‘정말이지.’ 유스타프는 한숨을 삼키고 침대로 돌아갔다. 쌔근쌔근 자고 있는 란의 얼굴을 보고 그는 침대로 들어가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란이 뒤척이더니 그 쪽으로 돌아누우며 품으로 파고들었다. 유스타프는 피식 웃고 란의 이마에 입 맞춰 줬다. 란은 느지막이 일어나 침대에 누워 아침상을 받았다. 그녀가 중얼거렸다. “진정한 귀부인이 됐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미 일어나 아침 훈련을 끝내고 돌아온 유스타프가 물었다. “그런 게 있어.” 란은 그렇게 말하며 구워진 토스트를 유스타프에게 내밀었고, 그는 침대가에 앉으며 입으로 그것을 받은 후에 란의 손가락을 핥았다. 란이 얼굴을 확 붉힌 뒤 손을 빼며 말했다. “손가락은 먹는 게 아냐.” “달콤하기에.” 유스타프가 그렇게 말하고는 “서류 봤습니다.” 하고 덧붙였다. “아, 맞아. 유스랑 의논할 것도 있는데.” “따로 쌓아 둔 거 말씀이시지요. 제 방으로 옮겼습니다.” “벌써?” “란이 끝낸 서류 양에 비하면 적은 양이니까요.” 유스타프가 턱을 괴었다. “행정관과 회계관이 제발 란을 쉬게 해 달라고 애원하던데요.” “그게…….” 란이 뺨을 붉히며 말했다. “유스가 없잖아…… 할 일이 없는걸.” 한순간, 란은 그가 자신을 덮쳐 누르려는 줄 알았다. 하지만 베드 트레이 앞에서 그는 인내심을 지키며 말했다. “그럼 할 일을 드려야겠군요.” “뭔데?” 란이 갸웃하자 그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며 덧붙였다. “뜯어보시는 게 일일 겁니다.” 잠시 후 란은 유스타프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썰매 3대 분량의 선물은 말 그대로, 그녀의 방 한쪽에 산처럼 쌓였다. 시녀들은 연신 감탄하며 드레스며 장신구들을 란의 앞에 내밀었다. 그냥 선물을 뜯어 구경하는 것만 해도 하루가 훌쩍 지나 버렸다. 란은 마지막으로 나온 선물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새까만 곰 인형이었다. 매끄러운 광택의 몸체는 남쪽에서 수입한 값비싼 비단으로 만들어진 것이었고, 눈과 코는 보석으로 만들어져 달려 있었다. 크기는 어찌나 큰지 란의 키 절반만 한 크기였다. “귀여워!” 란의 외침에 유스타프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내가 곰 인형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았어?” “보면 알지요.” “고마워, 유스.” 란이 웃으며 말하자 유스타프가 그녀의 뺨에 키스해 주고 말했다. “내일 봉인 의식을 하러 갈 생각입니다.” 갑작스러운 말에 란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벌써? 아니, 벌써가 아니구나.” “네.” 새해가 며칠 남지 않았다. 이미 늦어질 만큼 늦어진 상황이다.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이번에는 란이 저택에 있어 줬으면 합니다.” 유스타프의 부탁에 순순히 그녀는 동의했다. “응.” 그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란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저번에 마수에게 붙잡혀 올라갔던 일은 정말이지……. ‘그대로 떨어졌다가는 깨진 달걀처럼 됐겠지.’ 다시 생각해도 소름이 돋았다. “저택은 내가 잘 지키고 있을게.” 란의 말에 유스타프가 “그러면 안심이지요.”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키리가 경쾌한 걸음걸이로 들어오며 말했다. “시나 님과 루미에 경이 뵙자고 하는데요.” “응? 들어오라고 그래.” 란의 말에 키리가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두 사람을 안으로 불러들였다. 루미에와 시나, 둘 다 얼굴 표정이 심상찮아서 란은 의아해졌다. “무슨 일이야?” “언니.” 시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해서 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왜 그래? 무슨 일인데?” “그림자가 저에게 자꾸 말을 걸어요.” 란은 눈을 크게 떴다. “그림자?” “네, 아무래도 그게 어둠 같은데, 저에게 돌아가고 싶지 않냐고…….” 말하고 시나는 울상이 되었다. “자세히 말해 봐.” 란이 자리를 권하며 말했고, 시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자신이 본 대로 최대한 자세하게 상황을 묘사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다 듣고 란이 물었다. “이브리아를 요구했다고?” 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란은 툭툭 제 뺨을 두들겼다. “천 년 전 없어진 사람이잖아?” “네, 그런데 느낄 수 있다고 하면서.” 시나의 말에 란은 고개를 갸웃했다. 천 년간 갇혀 있었던 자의 망상이라면 이해는 간다. 하지만 그런 망상에 빠진 사람치고는 또 시나가 이브리아가 아니라는 걸 분별해 냈다. ‘헷갈려서 데려왔으니, 시나를 이브리아라고 착각할 만도 한데 말이야.’ 대체 뭘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브리아의 흔적이 남아 있는 걸 느끼는 게 아닐까요.” 유스타프의 말에 란은 “그런가?” 하고 눈을 크게 떴다. “그럴 수도 있겠어. 어쨌든 하늘 저택도 이브리아가…….” 말을 하다 그녀는 멈칫했다. 하늘 저택은 대현자 이브리아가 자신의 마력으로 세운 저택이다. 저택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이브리아의 마력이고, 저택에 보호막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들어왔어.’ 그림자뿐이기는 해도, 그걸 보내어 시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때 유스타프의 손이 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듯 짚었다. 돌아보지 않아도, 란은 그의 표정을 알 수 있었다. 뭘 걱정하냐는 얼굴이겠지. 란이 시나의 손을 가볍게 두들기고 말했다. “고마워, 말해 줘서.” “아니에요. 진즉에 말했어야 했는데…….” 란은 시나의 두려움을 꿰뚫어 보듯이 알 수 있었다. 혹시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방법이 없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 말한다고 해도 이들이 이방인인 자신을 믿어 줄까 하는 두려움, 혹시 자신에 대해서 오해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 “아냐, 믿고 말해 줘서 고마워.” 란이 다시 말하자 시나는 울먹거리는 표정을 지었다가 웃었다. “정말로, 언니는 사람이 너무 좋아요.” “내 사람에게만 그래.”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말이죠.” 루미에가 작게 중얼거렸다. 란은 “진짠데.” 하고는 시나에게 말했다. “하여간 너는 걱정하지 마. 언니가 알아서 다 할게.” 란의 말에 시나는 웃었다. “네, 그럼 언니만 믿을게요.” “응, 응.” 란은 가슴을 두들겼고, 시나는 정말로 안도감이 드는 걸 느꼈다. 란이 하겠다면 한다는 걸, 시나는 알고 있었다. 시나가 이어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말했다. “그리고 언니, 하레쉬랑 이야기를 해 봤는데요.” “응.” “얼음수정을 모으면 차원 이동을 할 만한 에너지를 모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시나의 말에 란은 “그래?” 하고 눈을 깜박였다가 말했다. “봄이 되면 마법사들에게 물어볼게.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시도는 해 봐야지.” “저, 정말이요?” 시나가 입술을 떨며 물어서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산맥 가득 얼음수정이다. 천 년 정도 사용할 양은 될 테니까, 모을 수 있다면 모아서……. 그렇게 생각하다가 문득, 란의 시선이 루미에에게 닿았다. 그녀의 시선을 느낀 그가 방긋 웃었다. ‘으으―’ 란은 가슴속이 콱 죄여드는 기분을 느꼈다. 시나가 돌아가면 루미에는……. ‘시나가 못 돌아간다고 거짓말을 하면 안 될까……?’ 어차피 읽은 것에서 시나는 돌아가지 못한다. 그녀는 남아서 유스타프와 행복해진다. ‘그러니까…….’ 남아서 루미에와. “고마워요, 언니.” 시나가 떨리는 숨소리와 함께 감사의 말을 내뱉어서 란은 시나를 보았다. “정말로 고마워요.” 몇 번이나 말하는 시나를 보며 란은 양심이 찔려 왔다. ‘그래, 이렇게 돌아가고 싶어 하는데.’ 란은 제 가족을 생각했다. 그녀는 저쪽에서 죽었을 테니까, 어쨌든 매듭이 지어졌겠지만 시나의 경우는 실종이다. 가족들의 마음이 어떨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걱정 말고 봄이 될 때까지 안심하고 있어.” “네.” 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미에가 시나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검술 훈련이라도 할까?” 시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가 “응.” 하고 힘주어 대답했다. 시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루미에의 손을 잡았다. “그럼 언니, 전 연습하러 가 볼게요.” “그래.”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루미에와 시나, 두 사람의 시간이 필요한 거겠지. 둘이 나가고 나서 란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마음이 안 좋아.” “뭐가 말입니까?” 유스타프가 허리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가져다대며 물었다. 란은 간지러움에 몸을 움츠리며 말했다. “시나랑 루미에.” “어째서요?” “어째서냐니…… 두 사람이 서로 좋아하는데…… 상황이 꼭 좋지만은 않잖아.” “두 사람이요?” “응, 보면 몰, 유스타프!” “그만!” 하고 란이 지분거리는 그의 머리를 꾹 밀어내자 유스타프가 아쉬워하며 물러났다. 란이 투덜거리듯 말했다. “두 사람 사귀고 있잖아?” “그랬군요.” “몰랐어?” “다른 사람의 연애사를 알아서 뭐합니까?” “아무리 그래도…….” “전 란에게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벅찹니다.” 그렇게 말하며 유스타프가 덧붙였다. “게다가 남을지 남지 않을지를 결정하는 건 두 사람이지요.” “그야 그렇지만…….” “전에 해 주신 이야기에 따르면 시나가 남았었지요? 저와 함께.” 란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루미에가 잘한다면, 남을 수도 있겠죠.” 아니면 그건 그 녀석 능력 부족 아닌가? 냉정하게 잘라 말하고 유스타프가 빙긋 웃었다. ‘가차 없구나.’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지그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에 유스타프가 의아한 얼굴을 하며 그녀의 옆으로 와서 앉았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유스.” “네.” “아니, 신기해서. 왜 유스가 날 좋아할까?” 란의 말에 그는 기가 찬 얼굴을 하고 말했다. “‘이래도 날 사랑 안 할 거야?’ 하신 분이 누굽니까?” “뭐?” 란이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난 그런 적 없어!” 그녀가 당황해 항의하자 유스타프가 란의 양 뺨을 감싸며 말했다. “그게 더 나쁩니다.” 란이 눈을 찌푸렸다. “뭐야?”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날 사랑하지 않을 거야? 이렇게? 이렇게까지?’ 하는 행동은 하시면서, 사실은 조금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시는 게 나쁘지요.” “아니, 난 그런 적이―” 란이 ‘자신이 정말 그랬나?’ 하고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말하는 걸 보며 유스타프가 중얼거렸다. “가끔 화가 납니다.” “대체…….” 란이 진짜로 ‘난 억울해.’ 하는 표정을 짓자 유스타프는 픽 웃었다. 그렇게나 많은 걸 해 놓고서 본인은 전혀 모른다니. ‘빗방울은 제멋대로 떨어지고 흘러가는 법이니까.’ 그 자리에 남아 있어야 하는 건 바위다. 유스타프가 속삭였다. “만약에 제가 아니라 루미에를 처음부터 만나셨으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란의 녹색 눈이 커졌다. “분명히 그 자식을 위해서도 모든 걸 했겠죠. 그게 어떤 때는 참을 수가 없을 만큼 화가 납니다.” 루미에를 없애버리고 싶을 만큼. 그의 엄지손가락이 란의 붉은 입술을 눌렀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그가 손가락을 밀어 넣으며 속삭였다. “그래도 당신이 날 선택했을까? 란 로미아 드 라치아. 당신을 전부 열어 보고 싶어질 때가 있어.” 내가 모르는 구석이 조금도 없도록, 전부, 하나도 남김없이. 란의 모든 걸 알고 맛보고 느끼고 싶었다. 그의 손가락이 입 안에 들어오자 란은 몸을 뒤로 뺐다. 유스타프가 그녀의 몸을 붙잡아 고정했다. “도망치지 말아요, 누님.” 그가 속삭여 란은 얼굴을 붉혔다. 정말이지, 이런 때만 저런 식으로. 란이 그의 손가락을 살짝 깨물고 혀로 가볍게 핥아 올린 후 말했다. “저, 전부 봤잖아.” 이 세상에서 유스타프보다 자신을 구석구석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란은 장담할 수 있었다. 란 자신보다도 유스타프가 더 잘 알 터였다. “아뇨, 분명 아직 제가 모르는 부분이 있을 겁니다.” 푸른색 눈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 그건 유스타프도 마찬가지 아냐?” 란의 말에 유스타프가 웃었다. “뭐가 궁금하십니까? 물어보시면 뭐든 알려드리지요. 제가 란의 살결을 만질 때마다 어떤 느낌을 받는지―” 그가 손등으로 란의 뺨을 쓸었다. 고개를 숙여 그의 입술이 닿을 듯 가까워졌다. “누님의 안에 들어가 있을 때 얼마나 미칠 것 같은지. 때로는 망가트릴 만큼 흉폭하게 하고 싶고 동시에 애원할 만큼 다정하게 하고 싶은 충동을 어떻게 조절하는지.” 그, 그, 그런 걸 물어보겠다는 게 아니라― 란은 그 말을 내뱉지 못하고 숨을 할딱였다. 유스타프가 미소 지으며 란에게 속삭였다. “제가 얼마나 절제하고 있는지, 누님은 모르실 겁니다.” ‘절제? 이게 절제라고?’ 란이 눈을 크게 뜨자, 어쩐지 유스타프는 웃고 싶어졌다. 란이 꼼지락거리다가 제 손을 들어 유스타프의 뺨을 감쌌다. “만약은 소용없잖아. 그걸로 고민한 건 나로 족해.” 시나와 유스타프를 두고 고민했던 걸 생각하면, 루미에와 자신을 두고 고민하는 게 얼마나 유스타프를 갉아먹을지 란은 알 수 있었다. 심지어 그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건 그렇지요.” 유스타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란을 차지하고 있는 건 자신이었다. 놓아줄 생각 역시 조금도 없고. “그리고―” 란이 얼굴을 붉히며 속삭였다. “알아갈 시간은 아직 많이 있잖아? 우리는 계속 함께 있을 테니까.” 유스타프가 눈을 크게 떴다. 그가 탄식하듯 “정말이지.” 하고 중얼거리더니 란의 다리를 확 잡아당겼다. “자극하신 건 누님입니다.” “어? 잠깐? 나 아무것도 안 했어!” 당황하며 버둥거리는 란의 드레스 자락을 올리며 유스타프가 느긋하게 말했다. “물론 그러시겠지요. 일방적으로 제가 발정한 것뿐입니다.” “발……!” 란의 얼굴이 사과처럼 빨갛게 되었다. 그녀가 버둥거리며 말했다. “사, 상냥하고 다정하게 대해 준다면서.” “상냥하고 다정하게 대하지 않아도 된다고, 전에 그러셨지요.” 그가 씩 웃었고 란은 입을 뻐끔거렸다. ‘정말이지!’ 항복하며 란이 버둥거림을 멈추고 그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이렇게 오냐오냐하시니 제 버릇이 더 나빠지는 거지요.’ 유스타프는 그렇게 생각하며 란의 목덜미에 입 맞췄다. 란이 웅얼거리듯 말했다. “다정하게 대해 줘.” 유스타프는 그 중얼거림에 마음속이 꽉 조여드는 걸 느끼며 답했다. “물론입니다.” 그의 손이 부드럽게 란을 감싸며 말했다. “애원하실 만큼 달콤하고 다정하게 대해 드리겠습니다.” ‘그게 어디가?’ 란은 그런 생각을 잠깐 했지만, 곧 달콤한 키스에 모든 게 녹아서 흐물흐물해지기 시작했다. 디모디아가 문 앞에 서 있는 키리를 보고 물었다. “마님은?” 키리가 씩 웃었다. “당분간은 주인님의 괴롭힘에 시달리실 것 같은데요.” 디모디아가 눈을 찌푸렸다. “아니, 너무하시는 거 아냐? 마님 체력이 남지를 않겠어.” 게다가 요즘 행정 때문에 바쁘게 일하셨는데. 키리가 동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양식이라도 올려야겠네요.” 둘만 있을 때에도, 시녀의 가면을 쓰고 있는 이상은 부드러운 존대다. 디모디아는 잠시 문을 바라보다가 키리에게 물었다. “계속 서 있을 거야?” “혹시 누가 들어가면 안 되잖아요?” “하긴.” 만약 누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는……. 유스타프에게 깨끗하게 제거될지도 모른다. 우리 마님은, 란 님은, 가주님이 그렇게까지는 안 할 거라고 생각하시는 모양이지만. ‘마님 앞에서만 예의라는 걸 차리니.’ 디모디아는 그렇게 생각했다가, 문득 지금이 키리와 이야기할 적시라는 걸 깨달았다. “키리 님, 잠깐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디모디아의 말투가 변하자 키리의 자세도 바뀌었다. “말해.” 그녀가 싱긋 웃으며 말하자 디모디아가 제 불만을 말했다. “너무 눈에 띄게 행동하는 거 아닙니까? 아무리 그래도 대놓고 시녀가 아니라는 듯이요.” 키리의 검은색 눈이 재미있는, 동시에 어리석은 것을 보는 기색을 띠었다. “만약 위험이 닥치면, 다들 내가 말하는 대로 따를 거야. 마님의 시녀들은 말이지. 내가 뒤에 남아도 별말 없을 거고. 하지만 넌 아니지.” 키리의 말에 디모디아는 멈칫했다. “네가 남는다고 하면 시녀들이 앞다투어 말리겠지. 시간을 낭비하게 될 거고. 그리고 디모디아, 넌 한번 정체를 드러내면 두 번은 시녀들 사이에 끼지 못할 거야.” 키리가 빙긋 웃었다. “하지만 난 다르지. 대신 나는 들어갈 수 없는 곳까지 넌 따라갈 수 있는 거고. 우리 둘의 역할이 다른 거야.” 디모디아는 한숨과 함께 수긍했다. “그렇군요.” 키리가 덧붙였다. “‘어째서 저러는 거야?’가 아니라 ‘왜 저러는 거야?’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돼.” 디모디아는 “참고하겠습니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키리가 키득키득하며 입가를 가리고 말했다. “네가 마님을 좋아한다는 건 알겠어.” 그 말에 디모디아가 방어적이 되어 되묻듯 말했다. “좋아할 만한 분이잖아요?” “맞아.” 키리가 선뜻 대답해서 디모디아는 어쩐지 맥이 빠졌다. 키리가 깔깔 웃으며 사정없이 말했다. “라치아 공작 부인은 대대로 엉망이었으니까 말이지. 공작가의 위명이 아니면 누가 이런 촌구석의 가난한 영지에 결혼하러 오겠어? 그런데 모처럼 굉장한 게 굴러들어 왔다고.” “굉장한 게, 라니.” 디모디아가 눈을 찌푸렸고, 키리가 “굉장한 분.” 하고 정정했다. “이제 라치아는 번영할 거고, 어쩌면 우리는 라치아의 최전성기에 서 있게 된 걸지도 모르지. 역사에 기록될 만한 순간에.” 키리의 말에 디모디아가 “로맨티스트네요.” 하고 중얼거렸고 키리가 “좋잖아?” 하고 말해 디모디아도 동의했다. 그때 문 안에서 흘러나온 소리에 디모디아의 얼굴이 빨갛게 되었고 키리는 “어머나?” 하고 입가에 손을 가져갔다. 디모디아가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음, 진짜로 서 있어야겠네요.” 저 소리를 다른 사람에게는 못 들려주지. “그러네. 나중에 훈련할 때 마님은 허리 운동을 따로 시켜야겠어.” 아니면 작살날 것 같으니까. 키리는 그렇게 말하며 빙긋 웃었다. ✥✥✥ 시나는 우중충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풀썩, 루미에가 그녀의 몸 위에 두툼한 망토를 떨어트리며 말했다. “옷 입어. 한기 든다.” “응.” 시나는 연무장 바닥에서 일어나며 그의 망토로 몸을 휘감았다. ‘푹신푹신하고 기분 좋아.’ 이렇게 좋은 옷감이 있다니. ‘현대에도 있을지도 몰라. 진짜 질 좋은 캐시미어 같은 거…….’ 시나는 후― 하고 길게 숨을 내뿜었다. 루미에가 물었다. “들어갈까?” “아니, 조금만 더.” “몸 다 식으면 어쩌려고.” “괜찮아. 루미에야말로 감기 조심해.” 시나가 그렇게 말하며 미소 지었다가 말했다. “저 눈 성벽, 직접 가서 봐도 될까?” “당연하지.” 루미에가 그렇게 말해서 시나는 “와―” 하고 경쾌하게 탄성을 지르며 얼른 눈 성벽 쪽으로 달려갔다. 성벽은 이제 완성되어 있었다. 새하얀 눈으로 된 벽은, 돌처럼 단단했다. 시나는 연신 감탄하며 성벽을 돌았다. 성벽 위에는 걸을 수 있는 공간은 물론이고 초소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굉장하다. 어떻게 이런 걸 뚝딱 만들지?” 시나가 중얼거려 루미에가 “드워프니까?” 하고 갸웃하며 답했다. “그건 편견이야.” 시나는 그렇게 말하고 웃었다. 빙벽과 정면으로 마주 보는 성벽에는 제대로 된 성문도 달려 있었다. 시나는 빙벽을 바라보았다. ‘언제 봐도 굉장하다…….’ 깎아지른 에베레스트 산맥을 눈앞에서 직접 보면 이런 느낌일까? 새하얀 눈이 가득 쌓여 있어서 정말로 빙벽이라는 말이 딱 어울렸다. ‘저기서 헤매다가 죽을 수도 있었어.’ 루미에가 구하러 오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죽었겠지. 시나는 그 생각에 가볍게 몸을 떨었다. “은색 아치는 어디야?” 시나의 물음에 루미에는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가 산맥 위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위쪽에. 행여나 하는 말인데 혼자 갈 생각은 하지 마.” “안 가.” 시나가 눈을 감으며 웃었다. “언니가 도와준다고 했으니까.” “그래.” “루미에.” “응?” 시나가 휙 돌아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빙벽에서 거친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검은색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루미에는 거기에 순간 시선을 빼앗겼다가, 다시 시나의 얼굴을 보았다. “정말로 괜찮아? 아니, 괜찮지 않을 것 같아. 내가 돌아가겠다고 하는 거.” 루미에는 저도 모르게 웃었고, 시나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농담 아니라, 정말로.” “아니, 농담이라고 생각한 게 아니라. 직설적이라서. 그리고 난 네가 그렇게 말하는 걸 좋아하는구나, 싶어서.” 겨울바람에도 시나의 뺨은 달아올랐다. 루미에가 손을 뻗어 그녀의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정리해주며 말했다. “네가 돌아갈 수 있게 최선을 다할 거야. 그리고 네가 남아 있을 수 있게도 최선을 다할 거고.” 그가 이어 말했다. “어느 쪽이든 네게 후회가 조금도 없기를 바라.” 시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리고 나만 괴로운 것도 아니잖아.” 루미에의 말에 시나는 웃었다. 그가 “그렇지?” 하고 덧붙였다. “괴로워하지 마. 돌아가는 걸로, 돌아가지 못하는 걸로도. 어느 쪽이든.” “노력할게.” “그보다, 그쪽 이야기 해 줘.” 루미에가 성벽에 기대며 물었다. 시나가 갸웃했다. “그쪽?” “그래. 나라 이름이라든가?” “아, 내가 있던 세계? 들으면 놀랄걸. 우리는 말을 타고 다니지 않거든.” “그럼 소나 양?” “아냐! 차를 타고 다녀.” “차?” “응, 말없이 달리는 마차 같은 거.” “마법?” “그건 아니고.” 키득거리며 시나는 제가 사는 곳에 대해서, 제 가족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어 던져지는 루미에의 질문에 시나는 성심성의껏 답했지만, 날카로운 질문들에는 시나도 “나도 그건 모르겠는데.” 하고 대꾸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이용하고 있는 것의 원리를 모르는 건가?” 루미에의 말에 시나가 입을 내밀었다. “루미에도 마법 세공품의 원리는 모르잖아.” 거기에 그가 수긍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건 그렇지.” “그지?” 시나는 그렇게 말하고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녀는 자신을 보는 그의 시선과 마주쳐 살짝 뺨을 붉혔다가 눈을 찡그리고 입술을 열었다. 하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 “왜?” 물은 것은 루미에 쪽이었다. “아냐. 아무것도.” 시나가 고개를 흔들자 그가 말했다. “그렇게 말하니까 더 궁금하잖아.” “그게-” 시나가 우물거렸다. “내가 먼저 루미에를 만났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랑, 그건 너무 이기적이라는 생각.” “이시나, 너는.” 루미에가 픽 웃었다. 이렇게까지 직설적이지 않아도 되는 데까지 직설적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게 편했다. 그녀가 하는 말은 전부 진심이며, 그 뒷면을 헤아리려 하지 않아도 되니까. “다음에는 그렇게 하자.” 그의 말에 시나가 눈을 크게 떴다. 루미에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다음에 다시 태어나면 먼저 만나자.” 시나는 “에이-” 하다가, 얼른 생각을 고쳤다. 그래, 이런 이세계도 있는데 다음 생이 없다고 할 수는 없잖은가? 분명히 존재할 거다. “그래. 그러면 다음번에는 꼭이다?” “꼭.” 시나는 씩 웃었다. 란은 눈을 떴다가 자고 있는 유스타프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자는 얼굴.’ 본 적이 있던가? 잠시 생각해 보니 이렇게 침대에 누워서 진짜로 자는 얼굴은 본 적 없었다. 약혼식 때는 자는 척한 거였고. ‘처음 봐!’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잠든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검은색 긴 속눈썹이 드리워진 하얀 얼굴은, 이렇게 자고 있으니 좀 어려 보였다. ‘귀여워.’ 란은 그런 생각을 하며 슬쩍 미소 지었다. 살짝 만져 보고 싶었지만 그러면 깰 것 같아서, 란은 바라보기만 했다. 이런 얼굴을 보고 있으면 도무지……. 란은 제 뺨을 감쌌다. ‘꼭 눈을 뜨라고 한단 말이야.’ 흔들리는 시야에 얼핏 들어오는, 지나친 쾌락을 참는 듯한, 살짝 찌푸린 표정을 하고 있는 그 얼굴은― ‘으아아아.’ 란은 고개를 푹 베개에 박았다가 다시 슬쩍 유스타프를 바라보았다. 파란 눈이 지그시 자기를 보고 있다. 란은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떴고 그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뭘 하십니까?” “아니, 그냥―” 웅얼거리는 란을 끌어당겨, 유스타프는 제 위에 그녀를 얹었다. “좀 더 주무시죠.” “잠 다 깼어.” 란이 그의 넓은 가슴에 뺨을 기대며 말했다. 그녀의 손끝이 가볍게 그의 단단한 팔을 훑어서 내려오다가 희미한 흉터에서 멈췄다. 유스타프는 간지러움에 움츠렸다가, 란이 그의 팔에 남은 흉터를 매만지는 걸 보고 상체를 들어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추고 말했다. “다 지나간 일입니다.” “그래도.” 매질의 흔적이었다. 유스타프의 등에도 아직 흐릿하지만 날카로운 흉터가 남아 있어서 란은 가슴이 아팠다. 그녀가 유스타프의 팔을 당겨 흉터 위에 입술을 댔다가 뗐다. “다 사라졌으면 좋겠다.” “별로 상관없습니다.” “내가 있어.” 눈을 샐쭉하게 뜨며 말한 뒤 란은 몸을 굴려 그의 몸 위에서 내려갔다. 그러고는 넓은 침대를 기어 나와 로브를 걸쳤다. 유스타프가 “어딜 가시려고요?” 하고 물었고 란은 혀를 내밀었다. “안 가르쳐 주지.” 란은 나가서 씻을 물을 준비하게 했다. 씻는다고 하면 또 분명히 같이 씻자는 둥 하고 다시 침대로 끌려 들어갈 게 뻔해서였다. 가볍게 씻고 나오니 침실에 유스타프가 없었다. 란은 부부 침실에서 머뭇거리다가 유스타프의 침실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이 문을 열어 보는 건 처음이었다. “유스?” “다 씻으셨습니까?” 유스타프는 옷을 다 입고 있었는데, 그의 머리카락도 약간 젖어 있어서 씻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뭐야, 유스도 씻었어?” “란이 씻으러 가는 것 같기에. 식사를 준비시켜 뒀습니다.” 란이 창밖을 힐끔 바라보고 한숨처럼 말했다. “이건 뭐, 점심도 아니고 저녁도 아니고…….” “그럼 저녁때까지 기다릴까요?” “아니, 배고파.” 란의 말에 유스타프는 “방탕한 생활도 나쁘지 않지요.” 하고 대답했다. 밖에서 시종이 “식사 준비되었습니다.”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 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나 옷 입고 올게.” 란은 얼른 제 방으로 돌아가 옷을 갖춰 입고 돌아왔다. 식사를 하며 유스타프가 말했다. “적어 두신 걸 봤습니다.” “적어 둔 거? 뭐?” “드래곤 슬레이어 계획이요.” “아―” 란은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묘한 소리를 냈다. 어쩐지 부끄럽기도 하고, 어땠는지 의견을 듣고 싶기도 했다. “마법사가 없다는 게 가장 큰 고민이야. 하늘을 나는 건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 란이 턱을 괴며 말했다. 자신도 비행형 마수에게 당해 봐서 알지만, 날개가 있는 것의 상대는 상당히 성가셨다. “그건 청염으로 해결될 겁니다.” “청염으로?” 란이 눈을 찌푸렸다. “괜찮은 거야?” “날개에 구멍을 내는 정도는 되겠지요. 어차피 날개에 문제가 있으면 못 나는 거 아닙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그러려면 너무 많은 힘을 소모하게 되는 거 아니야? 유스타프의 생명력을 써 버리면 어떻게 해.” “그게 란과 무슨 상관입니까?” 유스타프의 말에 란이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입술이 떨렸다. 유스타프가 재빠르게 덧붙였다. “제 말은, 란이 간혹 이런 식으로 행동한다는 겁니다.” 그 말에 란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나, 난―” “그러셨지요? 처음부터 그러셨습니다. 마법사를 만나러 갈 때도 그랬고, 드워프 광산에 갇혔을 때도 그랬지요. 그리고 절 시나와, 그건 이야기하기도 싫군요.” 란이 쪼그라든 목소리로 답했다. “지금 무척 반성하고 있습니다.” “아셨다면 되었습니다.” 유스타프가 고개를 끄덕인 후에 말했다. “그러니 저도 그렇게 무리하지는 않을 겁니다. 게다가 죽으면 소용없으니까요.” 란은 맞아, 맞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에 저항 능력이 있다면 청염이 빠르게 힘을 소모하는 건 맞지만, 드래곤 날개에 구멍 낼 정도는 되겠지요.” “하긴, 작은 구멍만 내도 아마 받는 힘이 강해서 구멍이 금방 찢어지거나 할 거야.” 란이 비행기 날개를 생각하며 말했다. 드래곤이면 몸체가 크니까 그 무게를 버티려면 날개도― “음, 잠깐. 생각해 보니까 드래곤은 자기 마법으로 나는 거 아냐?” “그럴 가능성도 있지요.” “으음. 마법으로 날면 날개가 없어도 되는 건가. 그런데 그럼 뭐하러 날개가 있는 거지?” 멋?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갸웃거렸다. 유스타프 역시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역시 날개로 나는 게 아닐까요. 날개가 있으니 비행 마법을 쓸 필요가 없겠지요.” “하긴,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런데 거기 계획표에 적어 두셨던 탄도 미사일은 뭡니까?” “아― 자동으로 날아가서 목표물을 맞히는 창?” “신기한 생각이군요.” “그런데 프란체에게 얘기했다가 혼났어. 대신에 불덩이 같은 게 날아가는 건 가능하대. 맞추려면 실력이 필요하겠지만.” 파이어 볼 같은 걸 날릴 수는 있다는 거겠지. “그 정도면 충분하지요.” “마법사가 없으니 확실히 이런 점은 불편해.” 다시금 말하고 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붉은 수정이나 푸른 수정에 닿지만 않으면 되는 문제라 해도, 역시 전통적 금기 때문에 마법사들은 라치아에 오는 것을 꺼렸다. “그 외에 드워프와 엘프에게도 얘기를 하셨다고요.” “응, 수적 우세가 최고잖아.” 란의 말에 유스타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군사 교류 때문에 독립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겠지?” “그런 문제가 생길 단계는 지났습니다.” 유스타프가 그렇게 말하고 란을 지그시 바라보아, 그녀가 되물었다. “왜? 뭐 놓친 거 있어?” “내가 혼자 다른 종족과 군사적 동맹을 맺어서 유스타프가 날 의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전혀 안 하시는 것 같아서요.” 란은 허를 찔려 눈을 깜박이다가 물었다. “생각해?” “아뇨, 조금도요.” 란이 가슴을 쓸어내렸고 유스타프가 미소 지었다. “제가 누님을 믿는 걸, 누님이 믿어 주시는 게 기쁩니다.” “그, 그야.” 란의 얼굴에 홍조가 돌았다. “부부잖아…….” 목소리는 개미만 했지만, 그래도 유스타프는 알아들었다. 그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제 몫의 고기를 썰어 란의 접시에 올려줬다. 란이 눈을 크게 떴다. “이거 다 못 먹어.” “먹으셔야 힘을 쓰지요.” “히, 힘쓸 일 없거든요.” “그런가요?” 유스타프는 빙긋 웃었고, 란은 더더욱 얼굴을 붉히며 그가 준 고기를 썰기 시작했다. ✥✥✥ 바람이 불지 않는 겨울 날씨였다. 봉인 의식을 하러 가는 기사단원들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어둠이 깨어나고 있다는 이야기 때문이었다. 시나도, 란도 이번에는 따라가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두 사람을 눈 성벽 위에서 배웅했다. 시나가 멀어져가는 기사단원들을 보며 물었다. “돌아오는 데 얼마나 걸려요?” “글쎄, 오늘은 날씨가 좋으니까 빠르면 한 시간 반? 두 시간?” “생각보다 더 걸리네요.” “그리고 봉인이 얼마나 걸릴지 또 알 수가 없어서.” 란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저번 봉인 의식 때 불꽃이 느리게 타올랐다고 유스타프가 말했다. 이번에는 어떻게 되는 걸까? ‘만약 청염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거나 하면 어쩌지.’ 란은 그런 걱정을 하며 한숨을 삼켰다. 자신보다 시나가 더 불안할 터. 그녀 앞에서 불안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 가신들 앞에서도. “모두 무사히 돌아올 거야. 추우니까 내려가자.” 란의 말에 시나가 “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유스타프는 은색 아치 앞에서 멈춰 섰다. 은색 아치는 예전처럼 반짝거리며 빛났지만……. ‘변색됐어.’ 마치 독에 은이 변색되는 것처럼, 아치의 아래쪽 일부가 검게 변색되어 있었다. 유스타프는 아치 앞에서 멈춰 섰고, 블레인이 따라 멈췄다. 그 역시 아치의 색이 변한 것을 눈치챘다. “가주님.” 어떻게 할까요? 그런 물음에 유스타프는 말없이 계속 걷기 시작했고, 블레인과 루미에가 그의 양쪽에 바싹 붙어서 걸었다. 블레인은 이미 말에서 방패까지 내려 든 상태였다. 루미에는 워낙 방패 없이 싸워 와서, 뒤늦게 방패 사용법을 배우자니 번거로워 방패는 관뒀다. 그걸 보고 다른 기사가 “넌 목숨이 여러 개냐?” 하고 말했지만, 그를 대련에서 이겨 줌으로써 논란을 잠재웠다. 하얀 조약돌이 밟히는 소리조차 루미에는 거슬린다고 느껴졌다. 자신들의 위치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소리다. 하지만 유스타프는 거침없었고, 기사들도 재빠르게 뒤를 따라왔다. 동굴 앞에 다다르자 블레인이 물었다. “혼자 들어가실 겁니까?” “그래.”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하고 슥 동굴 안으로 들어갔고, 다들 말고삐를 붙잡고 서서 기다렸다. 예전이라면 말의 몸이 식지 않게 감싸고 움직이게 했겠지만, 지금 마갑에는 체온을 유지해 주는 장치도 있어서 괜찮았다. 유스타프는 동굴 안으로 들어서자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뭔가가 다르다. 그는 잠시 멈춰 섰다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청염은 잠잠했고, 그건 아직 문제는 없다는 뜻이니까. 새하얀 문 앞에 도착해 유스타프는 벽에 손을 댔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시간이 걸리는 건가? 하고 갸웃하다가 유스타프는 깨달았다. ‘비었어.’ 벽 건너편이 비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묻는다면 대답할 길은 없다. 없는데도 그는 알 수 있었다. 문지기의 감이라고 해도 좋았다. 유스타프는 손을 뗐다. ‘비어 있다면, 어디로 간 거―’ 밖인가?! 그가 몸을 돌리는데 청염이 소리를 내어 울었다. 유스타프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끼며 바닥에 몸을 던지듯 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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