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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새로운 방향


Chapter 6. 새로운 방향 란은 멍하니 낯선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러고서 저를 끌어안은 팔을 느끼고 깊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유스, 아침이야.” “알고 있습니다.” “뭐야? 깨어 있으면 깨우지.” 란이 눈을 찌푸리며 그를 돌아보자 유스타프가 피식 웃고 말했다. “자고 계신 얼굴이 귀여워서.” “말은 잘하지.” 유스타프가 이렇게나 달달한 말을 늘어놓는 인간이었던가, 하고 란은 새롭다고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이 자고 있는 곳은 새로 단장한 중급 여관이었다. ‘침대가 튼튼해서 다행이지.’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약간 얼굴을 붉혔다. ‘옆방이랑 소음 방지도 잘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침대에서 내려와 로브를 걸치고 세면대로 다가갔다. 도자기로 된 세면대 아래에는 물이 들어 있는 주전자가 있었다. 언제 왔는지 유스타프가 다가와 대신 세면대에 물을 부어주며 란의 머리카락을 붙잡아 주었다. 능숙한 시중이다. 란이 세수를 끝내자, 유스타프가 퇴수대에 물을 비우고, 제가 씻었다. 그 사이 란이 머리카락을 빗으려고 하자 유스타프가 외쳤다. “제가 빗을 겁니다.” “네, 네.” 란이 피식 웃고 스툴에 앉으며 빗을 들어 올리자 얼른 유스타프가 다가와서 그녀의 머리카락을 빗기 시작했다. 반달 모양 나무빗으로 꼼꼼하게 아래서부터 빗어 준 다음, 그럴듯하게 나눠서 땋은 후 묶었다. “됐습니다.” 유스타프의 허락이 떨어져서야 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부는 간편한 여행자 복장을 하고 여관을 나섰다. 아침은 근처 식당에서 해결할 작정이었다. 란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진짜 빠르게 발전하고 있네.” “도는 돈의 액수가 단숨에 커졌으니까요.” 유스타프가 그렇게 말하고 달리는 수레를 피해 란을 살짝 옆으로 밀었다. 란은 웃으며 그의 팔짱을 끼었고 유스타프는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 맞춰 주었다. 누가 봐도 깨가 쏟아지는 모습이었다. 유스타프가 데이트라고 말한 순간, 란은 이렇게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평범한 커플처럼 거리를 걷고, 뭔가 사 먹기도 하고. 무엇보다 전에 유스타프를 대신해서 영지를 돌아볼 때 농민들이 너무 벌벌 떨었던 게 마음에 걸렸다. 그때 암행을 하는 게 낫겠다, 하고 생각했던 것까지 합쳐서 의견을 냈더니 유스타프는 묘한 얼굴로 “전 좀 더 호사스러운 걸 생각했습니다만.”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나서 이렇게 단둘이 여행을 나온 거다. ‘여행이라고 해도 영지를 둘러보는 거지만, 그동안은 이렇게 둘러볼 시간이 없었으니까 새롭고 신기해.’ 란은 그렇게 생각하다 작은 가판대들이 놓여 있는 걸 보고 눈을 크게 뜨며 유스타프의 팔을 잡아당겼다. “유스, 저거, 저거.” “네, 네.” 유스타프가 웃으며 란에게 끌려 걸음을 빨리했다. 가판대에는 제법 그럴 듯한 장신구들이 놓여 있었다. 란은 은색으로 반짝이는 장신구를 가리키며 물었다. “은도금한 건가요?” 장사꾼은 재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은으로 도금한 거라도, 튼튼하다고. 사실은 귀족 나으리들에게 파는 건데 말이야, 쫄딱 망해서 어쩔 수 없이 싸게 싸게 팔고 있는 거야.” 란은 그 말에 웃음을 삼켰다. 아무리 봐도 귀족에게 팔 만한 물건은 아니다. 하지만 모티브는 꽤 사랑스러웠다. “그럼 아저씨가 직접 만든 거예요?” “에이, 설마. 내가 어떻게 이런 걸 만들겠어.” 장사꾼이 손사래를 쳤다. 란은 잠시 꽃과 새 같은 자연물을 모티브로 한 디자인을 바라보다가 웃었다. “그럼 내가 여기 있는 거 다 살 테니까 누가 만들었는지 알려주면 안 돼요?” 그러자 란의 예상과는 달리, 대번에 장사꾼의 눈에 의심이 서렸다. “글쎄, 나도 어디서 가져오는 거라서 모르겠는데…….” 그가 말을 얼버무리며 가판의 물건을 주워 담기 시작하자 유스타프가 빠르게 말했다. “사실은 저희도 장사를 해 보려고 합니다.” “뭐요?” “라치아 영지가 살기 좋다는 말을 들어서요. 저와 제 아내가 여행을 꽤 오래 했는데, 이제 자리를 잡을까 하거든요. 그래서 이런 좌판을 열까 하고요. 죄송합니다. 속일 작정은 아니었습니다. 어떤가요? 라치아는.” 그제야 장사꾼의 얼굴이 풀렸다. “뭐야? 그런 거였소? 처음부터 그렇게 이야기를 하지, 참.” 유스타프가 빙긋 웃고 말했다. “장사 한다고 하면 기분 나빠 하실까 봐.” “아니, 아니. 하기 전에 물어보는 게 당연하지. 하지만 확실히 기분 나빠 하는 사람도 있을 거요. 참, 나. 아내분은 요령이 없구만. 난 무슨 단속이라도 나온 줄 알았네.” 그러며 그는 물건 떼는 법을 소상히 알려주고 말했다. “예전의 라치아라면 이런 건 팔리지도 않았을 거야. 다들 밀이나 사려고 안달복달했겠지. 하지만 요즘 라치아는 살기 좋아졌지. 이게 다 새 공작님 덕분이라오.” 장사꾼이 이야기를 마치자 유스타프가 금화를 꺼냈다. 장사꾼은 “큰 금화!” 하고 눈을 크게 떴다. 유스타프가 말했다. “제 아내가 말한 대로, 여기 있는 물건은 다 사지요. 감사했습니다.” 그렇게 물건을 한 아름 안고 나오며 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로 다 살 줄이야.” “그럴 작정 아니셨습니까?” “그랬지만…… 큰 금화라니…….” 귀족은 베라트가 기본 단위라면 평민은 금, 은, 동화가 기본 단위였다. 그중에서도 금화는 보통 금화와 큰 금화로 나눠지는데, 큰 금화는 타원형으로 만들어지고 금 함량도 높은 금화였다.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신 겁니까?” “아, 아니. 이것들 디자인이 좋아. 가능하면 인재를 발굴하고 싶어서.” 란이 머리핀 하나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싸구려 유리이기는 하지만 신경 써서 만든 푸른 물총새 모양의 머리 장식이었다. 유스타프는 “그렇군요.” 하고는 머리 장식을 란의 손에서 빼앗아 그녀의 머리에 달아 주었다. “예쁩니다.” “그지?” 란이 빙긋 웃어 보이자 유스타프가 속삭였다. “란이 말입니다.” 뭘 달아도 예쁘지요. 솔직히 말해서 란에게 옷이나 장신구를 입히는 쪽이 영광 아닙니까? 줄줄 늘어놓는 찬사에 란은 눈을 크게 뜨고 ‘이 팔불출!’ 하고 외치려다가 참았다. “유스도 멋있어.” 대신 란은 그렇게 대답해 주었다. 두 사람은 장사꾼이 알려준 골목 안쪽으로 들어갔다. 겉으로 보기에는 도무지 액세서리를 만드는 곳으로 보이지 않는, 평범한 가정집 같은 곳이었다. “왜 이런 곳에 있는 걸까?” 란이 갸웃하자 유스타프가 “전 알 것 같은데요.” 하고 대답하고는 문을 두드렸다. 곧 거칠게 문이 벌컥 열렸다. “뭐야?” 나온 남자는 마흔 초반으로 보이는 후줄근한 남자라, 란은 적이 실망했다. 이런 세공품을 만드는 사람이면 좀 더 섬세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유스타프가 머리 장신구 하나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거 만드신 분을 보러 왔습니다.” 그러자 아까 전의 장사꾼처럼 남자의 얼굴에도 의심이 서렸다. “우리 그런 거 안 해.” 그러며 문을 도로 닫으려는 걸 유스타프가 탁 붙잡았다. 남자는 놀라 양손으로 손잡이를 잡아당겨 닫으려고 애썼지만, 유스타프가 한 손으로 잡고 있음에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낡은 문이 비명을 지르듯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길드에서 온 사람이 아닙니다.” 유스타프의 말에 남자는 멈칫하더니 유스타프와 란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차피 그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남자는 감으로 그걸 알 수 있었다. 그는 “안으로 들어오슈.” 하고 짧게 말했고 유스타프는 란을 먼저 들여보내고 자신도 들어가며 문을 닫았다. “그걸 만들고 있는 건 내 동생이야. 그리고 말한 대로 길드 소속이 아니지.” 란은 그제야 ‘아.’ 하고 작게 소리를 냈다. 보석 세공사들이 전부 길드에 소속되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왜 못 들어가는 거죠?” 란이 갸웃하며 묻자 남자는 코웃음을 쳤다. “그야 혈통이 문제가 되니까. 트라반 왕국 출신이다, 이거지.” “아.” 란은 짧게 소리를 냈다. 그녀 역시 얼마 전에 그 왕국 생존자에게 당하지 않았는가? “왕국은 개뿔, 몇백 년 전에 망한 왕국 따위 알게 뭐야? 하지만 어쨌든 길드는 안 돼. 그러면 어쩌겠어? 이렇게라도 해야지.” 란의 얼굴에 짙은 미소가 걸리자 남자는 움찔했고, 유스타프는 웃음을 참았다. 그가 좋아하는 미소였다. 흥정 직전에, 게임을 시작하는 듯한 그런 미소. 란은 낡은 소파에 털썩 앉아 다리를 꼬며 손가락을 모아 세웠다. 갑자기 바뀐 그녀의 태도에 남자는 당황해 버벅거렸다. “뭐, 무슨―” “동생분이 나오라고 하세요. 그러고 나면 서로에게 이득이 될 이야기를 하도록 하지요.” 그녀에게는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드는, 그런 카리스마가 있었고 남자는 우물우물하다가 안쪽으로 소리쳐 동생을 불렀다. “콜린!” 그러자 남자와는 전혀 닮지 않은 20대 초반의 남자가 안쪽에서 조심스럽게 나왔다. 연한 갈색머리가 살짝 흐트러져 있고, 긴 속눈썹 아래에는 우수에 찬 듯한 연푸른 눈동자가 자리 잡고 있는 굉장한 미남이었다. 란은 속으로 감탄하고 결론 내렸다. ‘하지만 유스가 더 잘생겼군.’ “무슨 일이십니까?” 콜린의 물음에 란이 자리에 앉으라는 듯 손짓했다. 마치 제 집인 듯한 행동이라 기가 찼지만, 콜린은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장신구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요.” 란이 제 머리에서 물총새 모양 장식을 빼어 들어 올렸다. “싸구려 색유리로는 이런 색이 나올 수 없어요. 밑에 끼우는 받침에다가 조개껍질을 붙이고 얹은 거지요?” 콜린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란이 유혹하듯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비용과 재료에 아무런 제약 없이 장식품을 만들고 싶지 않나요?” 어떤 예술가든지 혹할, 악마의 속삭임 같은 말이었다. 콜린이 입술을 꾹 다무는데 남자가 마법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외쳤다. “당신이 뭔데? 골든로즈 상단이라도 되나? 아무리 골든로즈 상단주라고 해도 길드원이 아닌 자의 세공품을 팔 수는 없다고.” 란이 픽 웃으며 소파에 깊게 기댔다. “란 로미아 드 라치아.” 남자의 눈과 입이 떡 벌어졌다. 그녀가 빙긋 웃으며 콜린을 돌아보았다. “제 소개가 늦었군요. 그러면, 이제 조금 마음이 동하시나요?” “만들고 싶습니다.” “콜린!” 남자의 외침에 콜린이 고개를 저었다. “이제 이렇게 숨어서 만드는 것도 질렸어.” “하지만, 진짜인지도…….” 모르는데, 하고 웅얼거리며 남자는 란을 보았다가 유스타프를 보았다.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설마, 라치아 공작은 아니겠지.’ 아닐 거야. 아니어야 한다. 란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제가 나중에 사람을 보내지요.” “가능하면 일은 다 마무리를 하고 가고 싶습니다. 한 달 뒤로 괜찮을까요?” 콜린의 말에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인사를 받으며 란은 즐겁게 골목을 나왔다. 유스타프가 그녀의 표정을 보고 물었다. “만족스러우셨습니까?” “응, 솜씨가 있는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잖아? 이제 라치아 공국이 제국 유행의 중심지가―” 흐흐, 돈을 벌겠다. 하며 란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고, 유스타프가 그녀를 골목 안쪽 좁고 어두운 길로 끌고 들어갔다. 란은 숨을 죽였다. ‘누가 쫓아오는 걸까?’ 하는데, 유스타프가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고 키스했다. 란은 숨을 삼켰다. 유스타프의 다리가 그녀의 다리 사이로 밀고 들어왔고, 그의 팔이 그녀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감쌌다. 더, 더, 깊이깊이. 그녀의 전부를 맛봤어도 또 맛보고 싶다는 듯이, 갈증 난다는 듯 유스타프가 그녀를 안으로 파고들어와 란은 신음을 흘리며 그의 키스에 응했다. 유스타프가 그녀의 입술을 마지막으로 가볍게 핥고 속삭였다. “큰일이네요. 이성에는 자신 있다고 자부했었는데 말입니다.” 란이 뺨을 붉히고 말했다. “도무지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 “란 앞에서는 그렇지요.” 그가 그렇게 말하고 조심스럽게 골목을 빠져나온 후 손을 내밀었고 란은 웃으며 그 손을 마주 잡았다. 그런 키스를 하고도, 손을 잡으면 간지러웠다. 그리고 그게 너무 좋았다. 둘이 손을 꽉 잡고서 거리를 걷기만 해도 좋았고, 길거리에서 구경하는 것도, 뭘 사는 것도, 심지어 메뉴판에서 뭔가를 고르는 것조차 즐거웠다. ‘너무 즐거워서 주변이 다 배경으로 보이는 느낌이야.’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키득거렸다. 사람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볼지는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이래서 민폐 커플이라는 게 탄생하는 걸까?’ 란은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란은 잡화점에서 곰 인형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유스.” “네.” “난 유스랑 있으면 어디를 가도 즐거울 거야.” 유스타프는 그 말에 “동감입니다.” 하고 대답하고, 란이 한번 손을 댔다가 내려놓은 곰 인형을 기억해 두었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몰라, 밖으로 나오니 해가 지고 있었다. 란이 말했다. “잡화점에서 쓸모없는 예쁜 것들을 팔더라.” 유스타프가 그 말에 잠시 생각하다가 동의했다. “그건 경기가 좋아졌다는 말이겠지. 사람들이 의식주가 아닌 다른 거에 돈을 쓰기 시작한 거니까.” “그렇죠. 전체적으로 옷차림도 좀 달라졌습니다.” “응, 그리고.” 란은 가볍게 웃었다. “공작가 제복이 유행을 할지는 몰랐어.” “공작가 문장은 없지만요.” “그것까지 따라하면 큰일 나지.” 란은 그렇게 말하고, 공작가 제복과 흡사한 디자인의 드레스를 입고 지나가는 여성을 힐끗 보았다. 란이 다시 노을 지는 하늘을 보고 중얼거렸다. “낮이 짧아지고 있구나. 겨울이 오는 게 실감나네.” “전 짧아지니 좋지만요. 아주 긴 겨울밤도 고대하고 있습니다.” 유스타프의 속삭임에 란은 몸이 뜨거워지는 걸 느끼고 말했다. “그럼 경주할까.” “네?” “열 세고 쫓아오는 거야? 먼저 들어가는 사람 소원 하나 들어주기.” “좋습니다.” “열 세는 거 잊으면 안 돼?” 란은 그렇게 말하고는 달리기 시작했다. 여관과의 거리가 그렇게 멀지 않으니까, 숫자를 셀 동안 거리를 벌려두면 틀림없이― 여관 문이 보여서 란이 마지막 박차를 가하는 순간 휙, 하고 옆을 달려서 유스타프가 지나갔다. ‘이럴 수가!’ 란은 꺅, 하고 소리를 내며 가볍게 앞으로 쓰러졌다. 누가 들어도 의도적으로 넘어진 게 뻔한 꾸며낸 비명인데도, 유스타프는 놀라 달려왔다. “란, 괜찮습니까?” “넘어졌어.” 란이 칭얼거리며 팔을 벌렸고, 유스타프가 그녀 손에 묻은 먼지를 조심스럽게 털어내고 안아 든 후에 물었다. “다리는요? 괜찮습니까?” “응, 괜찮아.” 그의 걱정에 란은 멋쩍어져서 작게 대답했다. 그녀를 안고 여관 문을 들어서는데, 란이 손을 뻗어 먼저 현관 문틀을 만지려는 걸 유스타프가 붙잡았다. “이건 안 되지요.” 유스타프가 그렇게 말하고 감싼 그녀의 손에 가볍게 키스한 후에 제가 먼저 문틀을 가볍게 치고 웃어 보였다. 란이 그의 뺨을 양손으로 감싸며 물었다. “대체 뭘 시키려고요?” 유스타프가 란에게 작게 소곤거리자 란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아올랐다. “유스타프!”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가 란은 화급히 제 입을 막았다. 여관 1층은 식당이라, 저녁을 먹으러 내려온 손님이 꽤 있었다. “부부가 보기 좋구만!” 여관 주인이 소리치자, 안에 있던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어쩔 줄 모르는 란을 데리고 유스타프는 “제 아내가 수줍어해서.” 하고는 위층으로 당당히 올라갔다. 란은 부끄러움과 웃음이 동시에 터지는 걸 느끼며 유스타프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유스타프는 꼭꼭 남의 앞에서 자신을 ‘제 아냅니다.’ 하고 소개하는 걸 좋아했다. ‘정말이지.’ 지나치게 행복해서 현실마저 아닌 것 같았다. “아쉽다.” 란이 작게 속삭이자 유스타프가 방문을 발로 차서 열며 물었다. “뭐가 말입니까?” “데이트, 오늘로 끝인 게.” 란의 말에 유스타프가 의아하다는 듯 대답했다. “앞으로도 많이 할 텐데요. 이건 그저 시작이지요.” 그 말에 란은 눈을 크게 떴다가 웃으며 그의 목에 얼굴을 푹 묻었다. “응, 이제 시작이지.” ✥✥✥ 란이 굳이 녹색 아치에 머물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나서, 란과 유스타프는 의논 끝에 일정을 바꾸었다. 그녀는 라치아를 떠나지 않기로 했다.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 험할 것이 뻔한데 굳이 힘들게 올 필요가 없다는 게 유스타프의 의견이었다. 그리고 겨울 준비를 하는 시기에 영지를 비우지 않는 게 좋겠다는 게 란의 의견이었다. 명실상부한 공작가의 안주인이 되었으니, 이제 하늘 저택을 꼼꼼히 관리하는 것도 란의 일이었다. 그동안은 아무래도 총관으로서의 역할만 했지, 안주인 역할을 하지 않았다. 겹치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겹치지 않는 부분도 많다. ‘일단 공작 부인 침실부터 내 취향으로 바꾸고 싶고.’ 나무그늘이라고 불리는 공작 부인의 침실은 예전에 어머니가 쓰시던 그대로라서 그녀의 취향에는 지나치게 어지럽고 화려했다. “내가 겨울 사냥도 지휘할 수 있으면 좋은데.” 란의 말에 유스타프의 눈에서 불꽃이 튀는 듯했다. “말도 안 됩니다.” “알아. 하지만―” 좀 더 말도 잘 달리고 검술도 잘하고……. ‘시나처럼.’ 비교가 최악이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비교하게 될 때가 있었다. 만약 시나였다면, 갑옷을 챙겨 입고 유스타프가 없는 사이에 기사단도 지휘했겠지? 하는― “란, 이미 란은 지금으로도 충분합니다.” 제 마음을 꿰뚫어본 듯이 유스타프가 말해서 란은 흠칫했다. 그녀가 눈을 깜박이자, 유스타프가 란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주며 말했다. “이미 넘치도록 충분합니다. 여기에서 더 뭘 하다니. 절 공작에서 쫓아내고 싶으신 거지요.” 유스타프의 말에 란은 작게 웃었다. “알았어.” 맞다.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에 대해 생각해 봤자 어쩔 수가 없는 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잘해 내는 게 더 중요했다. 란은 유스타프에게 잘 다녀오라고 작별 인사를 건넸고, 유스타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오겠습니다.” 어차피 영지전 보고인지라, 유스타프는 인원을 많이 데려가지 않았다. 기사 서너 명을 데리고, 유스타프는 가볍게 떠났다. 유스타프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라치아에 첫눈이 내렸다. 항상 그렇듯이 어마어마한 적설량이었다. “조금 더 늦게 떠났으면 큰일 날 뻔했어.” 란의 말에 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라치아는 눈이 엄청 오네요. 제 평생에 볼 눈은 다 보는 것 같아요.” 시나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언뜻 그녀의 얼굴에 불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벌써 계절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녀가 이 세계에 온 지도 1년이 다 되어 간다는 말이다. 그런데 아직 돌아갈 단서를 찾을 수도 없으니……. ‘이대로 돌아가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덜컥 불안감이 밀려들었다. “시나?” 란이 그녀를 불러 시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눈이 지겹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럼 시나도 유스타프랑 같이 보낼 걸 그랬나. 녹색 아치는 따뜻할 텐데.” “에이, 언니랑 루미에가 하늘 저택에 있는걸요.” “후자가 더 중요한 거 아니고?” “언니도 참―” 시나가 뺨을 붉히고 웃었다. 요즘 란이 보기에도 시나와 루미에가 부쩍 가까워져 있었다. ‘루미에를 살짝 떠볼까.’ 란은 그런 생각을 하며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깃털처럼 크고 푹신한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 란은 고개를 들었다. 루미에였다. 루미에가 정중하게 란에게 인사를 하고 시나에게 물었다. “같이 검 연습 하지 않을래?” “좋아.” 시나는 대번에 대답했고 란은 눈을 크게 떴다. “밖에 눈 오는데?” “네, 그러니까예요.” 루미에의 말에 란은 “이해가 안 돼.” 하고 눈을 찌푸린 다음 시나에게 말했다. “단단히 입고 나가.” “네.” 키득키득 웃고 시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미에에게 기다리라고 하고 시나는 방으로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단단한 겨울 복장으로 말이다. 하늘 저택 안은 난로를 펑펑 돌려서 얇은 옷만 입고 있어도 괜찮을 정도지만 밖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시나는 제 검을 정비하고서 망토를 단단히 둘렀다. 망토에 달린 후드에 털이 붙어 있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라치아에 와서야 알았다. ‘좋아.’ 단단히 입었다, 하는데 시야 바깥에 뭔가 검은 그림자가 일렁이는 게 보였다. “……?” 시나가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잘못 봤나…….”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순간 그림자가 크게 솟구쳤다. 시나는 비명이 튀어나오는 대신에 검 손잡이를 잡아 검을 뽑았다. 그동안 몸에 수없이 익힌 훈련 때문이었다. “루―” 밖에 있는 루미에를 부르려 시나가 입을 여는데 그림자가 말했다. “돌아가고 싶지 않은가?” “뭐……?” 시나는 입술을 벌렸다. 그림자는 까득까득하는 기묘한 소리를 내며 몸을 뒤틀었다. 벽에 비친 커다랗고 선명한 그림자가 다시 말했다. “돌아가고 싶지 않은가?” 시나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걸 느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지만,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뭔가가 비친 게 아니다. 그림자는 단지 그림자로서 거기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너 누구야?” 시나가 하는 말에 그림자가 킥킥킥 웃었다. “그게 중요한가? 이방인이여.” 그러다가 갑자기 그림자가 흔들리듯 하며 흐려졌다. 그가 거친 목소리로,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욕설인 게 뻔한 소리를 내뱉고 비명처럼 외쳤다. “이브리아!” 그러고는 그림자는 그대로 흐려져서 사라졌다. 시나는 한참을 검을 들고 서 있다가 간신히 검끝을 내렸다. 손이 떨려왔다. 시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시나? 뭐해?” 밖에서 루미에의 목소리가 들려 그녀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검을 검집에 꽂아 넣었다. “아냐, 이제 나가.” 방문을 열기 전 마지막으로 시나는 그림자가 비쳤던 벽을 바라보았다가 문을 열고 나갔다. 루미에는 시나가 나온 걸 보고 “무슨 옷을 갈아입는 데―” 하고 타박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무슨 일이야?” “어?” “얼굴이 창백해.” 루미에가 손을 뻗어, 시나는 흠칫하고 그의 손을 피했다. “아.” 작은 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고 루미에는 태연하게 손을 내리며 말했다. “쥐라도 봤어?” 시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다가 한 걸음 그에게로 다가갔다. 루미에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아서 둘의 간격은 아주 가까워졌다. 시나가 작게 말했다. “그냥 안아 주면 안 돼?” 루미에는 말없이 그녀를 양팔로 끌어안았고 시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몸을 기댔다. 따뜻한 체온과 심장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왔다. 시나는 팔을 그의 허리에 둘렀다. 좀 더 강하게 루미에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무슨 일이야?” 다시금 루미에가 물었다. 시나는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말했다. “아무것도 아냐.” 루미에가 살짝 몸을 떼고 그녀의 턱을 부드럽게 잡아 올렸다. 연약한 표정에, 루미에는 시나를 달래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닿기 전 그는 잠시 기다렸다. 그러자 시나가 발꿈치를 들어 올려 먼저 입을 맞췄다.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깃털이 스치는 듯한, 불안감을 지우고 달래는 상냥한 입맞춤. 잠시 후 루미에가 입맞춤을 끝내고 그녀의 뺨에, 눈꺼풀에 부드럽게 이어 키스해 주었다. 시나는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가 뒤로 물러났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제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귀에서 들리는 것 같아 머뭇머뭇 그녀는 눈을 들어 루미에를 보았고, 그의 다정함이 담긴 주홍빛 눈동자를 보고 다시 시선을 내렸다. “루미에…….” “응.”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시나가 망설이는 걸 보고는 루미에가 빙긋 웃고 말했다. “훈련 갈까?” “……응.” 시나가 고개를 끄덕였고 둘은 손을 잡고서 훈련하러 아래로 내려갔다. 란은 꿈을 꾸고 있었다. 새하얀 설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는데 어쩐지 현실 같지가 않았다. 란은 하늘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새하얀 지평선이 보였고, 눈이 춤추듯 느리게 내리고 있었다. 란은 앞으로 걸어갔다. 아무것도 없다는 게 눈에 보이지만, 그녀는 앞에 뭔가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란은 걸었다. 추위도 더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얼마 걷지 않아서, 란은 곧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새카만 긴 머리카락을 눈바람에 휘날리며 여자가 서 있었다. 란은 그게 누군지 알고 있었다. “이브리아!” 란이 소리를 지르자 천천히 이브리아가 몸을 이쪽으로 돌렸다. 그녀의 손에 들린 지팡이가 반짝였다. “이브리아!” 란이 다시 한 번 소리쳤다. 눈발이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다. 란의 옷자락이 마구 날리기 시작했다. 눈을 뜨기가 힘들어졌다. 시야가 새하얗게 변했다. 어디선가, 멀리서 땅울림 같은 소리가 들려왔고 란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그때 뭔가가 란을 힘껏 밀었다. “―!” 란은 눈을 크게 떴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란은 제 심장께를 꽉 누르고 한숨을 내쉬었다. ‘또 이 꿈.’ 란은 눈을 찌푸렸다. 요즘 들어서 계속 이 꿈을 반복해서 꾸고 있었다. ‘아니, 꿈에 나와서 뭔가 말해 줄 거면 속 시원하게 말해 주든가.’ 불러도 돌아보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는다. ‘근처까지 가까이 가야 하는 건가?’ 답답하다 생각하며 란은 한숨을 내쉬고 눈을 감았다. ‘그래, 어둠이 해결되었을 리가 없지.’ 이브리아가 나오는 걸 보면 분명히 어둠과 관련해서 뭔가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다. ‘유스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란은 그렇게 느끼며 몸을 둥글게 웅크렸다. 그렇다면 꿈 이야기도 하고 의논도 할 수 있었을 거다. ‘하긴, 유스가 있었어도 소용없나? 어차피 꿈이고…… 뭔가가 실제로 진행된 것도 아니고.’ 란은 그렇게 생각하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길게 하품을 하고서 란은 엉금엉금 침대에서 내려와 침실에 있는 램프 불을 켰다. 화장대에 놓인 서류가 눈에 들어왔다. 겨울 사냥용 예산과 장비 지급표였다. 자세한 일정도 적혀 있었다. 란은 유스타프와 피난했었던 오두막을 떠올렸다. ‘겨울 사냥용으로 몇 개 더 짓는 게 좋을지도 몰라.’ 할 수 있는 건 실질적인 방비뿐이다. 란은 다시 하품했다. ‘일단은 좀 자고 생각을 하자.’ 그래도 조금은 읽어둘까?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서류를 한 손에 들고 침대로 돌아갔다. 따끈해진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가니 저절로 몸의 긴장이 풀렸다. 서류를 다시 읽어볼 생각이었지만, 그건 생각뿐으로 란은 다시 푹 잠이 들었다. <다음 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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