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어둠과 문
Chapter 4. 어둠과 문
‘이럴 때는 마법사가 아쉽군.’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양피지를 넘겼다.
‘마법사 협회를 찾아가 볼까?’
마법사와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고, 대현자 이브리아와 빙벽에 대한 일이라면 그들 역시 관심이 많을 터였다.
마법사의 시작이 대현자니 말이다.
빙벽 때문에 마법사가 하늘 저택에 오지 못하는 건 전투에는 좋은 일이겠지만, 지혜가 필요할 때는 골치 아픈 일이다.
란은 한숨을 내쉬고 양피지를 닫았다.
유스타프 일행이 마수를 쫓은 지도 벌써 사흘째였다.
유스타프는 저녁마다 란에게 연락을 했는데, 마을을 공격한 마수는 이미 마을을 떠난 후였고, 그 마수를 추격한다고 말을 전했었다.
그리고 아직도 흔적을 추적 중이었다. 아무래도 마수는 이동속도가 인간보다, 아니 어지간한 동물보다 훨씬 더 빠르기 때문에 애를 먹는 모양이었다.
‘마수 추적기 같은 걸 만들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프란체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그는 ‘그런 게 가능할 리가요.’ 하고 딱 잘라 말했다.
마치 디자이너를 보는 공돌이 같은 눈길로…….
‘마법은 뭐든 가능할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란 말이지.’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또 현대 과학으로는 불가능한 것들을 차례로 만들어 낸다.
‘일단 얼음수정이라는 동력원 자체가 사기이긴 하지만.’
란은 양피지 뭉치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싹 비운 책장에 차례로 넣어 두고 나서 다시 빼놓은 양피지를 들었다.
이런 식으로 해서 벌써 책장의 반 정도를 채운 상태였다.
‘목록도 차례로 작성하고 있고―’
이번에는 좀 쓸모 있는 게 나왔으면 좋겠다, 하고 란은 두꺼운 가죽 장정을 넘겼다.
‘어?’
란이 눈을 크게 떴다.
‘하늘 저택에 관한 이야기다. 세상에나. 라치아 선조 본인이잖아?’
첫 번째 라치아의 자전적인 이야기였다.
‘하늘 저택을 이브리아 혼자서 짠하고 만든 게 아니었구나.’
라치아의 가주와 상의해서 이런저런 부분을 나중에 증축하기도 하고 한 모양이었다.
‘증축이라고 해도…….’
그녀가 지팡이를 휘두르면 땅 속에서 새하얀 건물이 솟구쳐 올라왔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라 오히려 덤덤해졌다.
이런 기록이라 란은 혀를 내둘렀다. 하늘 저택의 설계도와 왜 그 방을 만들었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몇몇 비밀 통로에 대해서도 적혀 있었다.
그리고 대현자 이브리아와의 대화와 개인적인 의견도 함께 적혀 있어서 란은 집중해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나도 그녀에 대해서 모르는 건 아니지만…….’
책의 설정이랍시고 따로 끄적거린 게 있으니까.
하지만 이런 기록은 또 새로웠다.
‘이미 아는 대로 ‘청염’도 ‘녹음의 관’도, 둘 다 이브리아가 만들어 준 거고…….’
청염에 정령이 깃들어 있듯이 녹음의 관에도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이브리아 님이 말씀하셨다.
란은 눈을 크게 떴다. 이건 자신도 처음 듣는 일이었다.
란은 화급히 이어지는 페이지를 넘겼다.
무엇인지 물어봤지만 웃기만 하고 알려 주지 않으셨다. 아내 역시 특별한 점은 모르겠다고 말했다.
‘쓸모없어!’
란은 머리카락을 쥐었다. 녹음의 관에 대한 언급은 이게 전부였다.
이브리아 님은 이런 곳에서, 이런 기약도 없는 일을 맡게 해서 미안하다고 나에게 몇 번이나 말씀하셨다. 나도 아내도 괜찮다고 답했다. 이브리아 님이 내게 “너도 델판토를 좋아했지.” 하고 말했고, 난 대답할 수 없었다.
란은 그 이름을 발견하자마자 뚜렷이 기억이 떠올랐다.
델판토.
빙벽에 봉인되어 있는 작자, 어둠의 이름이었다.
‘대현자 이브리아의 연인이었다가 뒤통수를 친 찌질한 놈.’
란은 그렇게 생각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이제는 다 식어서 차가워진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내용 자체는 상당히 흥미진진한 내용이 많았지만, 델판토 이야기는 더 나오지 않았다. 봉인이나 빙벽에 대해서도.
란은 책을 덮고 책장에 꽂아 넣었다.
‘녹음의 관을 한번 봐 볼까.’
어렸을 때는 한두 번 정도 본 적이 있다. 라치아 공작 부인이 한두 번 쓴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직접 만져 본 적은 없지.’
한없이 투명한, 기포 하나 없이 균일한 색으로 빛나는 커다란 에메랄드와 자잘한 다이아몬드가 함께 빛나는 티아라는 기억 속에서도 상당히 아름다웠다.
‘나중에 유스타프가 오면 한번 보여 달라고 해야겠다.’
이 책의 내용을 먼저 보여 주고 나서.
‘괜히 오해할지도 모르고.’
란은 기지개를 쭉 폈다. 자리에서 일어나 이리저리 스트레칭을 하고 그녀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겠다. 그리고 마법사들에게 편지를 보내서 질문을 던지고…….’
란은 서고를 나섰다.
유스타프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추격전이 길어질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다.
‘란이 걱정하는데.’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설원을 바라보았다.
나무들에 눈이 쌓여 기묘한 조각처럼 서 있고, 눈은 단단하지 않고 푹푹 빠져 들어갔다.
“코아케(타조처럼 생긴 마수, 머리는 닭처럼 생겼으며 독을 내뿜는다.) 무리 치고는 지나치게 머리가 좋은데.”
유스타프의 말에 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리가 나눠지기도 하고, 일부를 따로 보내서 현혹시키기도 하다니.”
로스는 눈앞의 숲을 바라보았다.
“어째 함정으로 달려가는 기분이네요.”
유스타프가 돌아보니 루미에가 싱긋 웃었다. 유스타프는 그 여유로운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는 좋은 리더였고 공과 사는 구별할 줄 알았다.
“함정?”
“네. 일정한 방향으로 유인되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나요. 저는 마수는 잘 모르지만요.”
인간만 죽여 봐서.
루미에의 말에 유스타프는 “유인이라.” 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한낱 마수라고 생각해 그런 생각은 해 보지도 않았는데, 루미에의 말을 들으니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마수에게 그런 머리가, 특히 닭대가리에게 그런 머리가 있을 리가 없잖아?”
로스가 기가 막혀 내뱉었고, 루미에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 닭대가리를 일주일째 쫓고 있는 우리는 뭔데?”
루미에가 흰 입김을 뱉어 내며 웃었다.
“붕어대가린가?”
“너!”
순간 로스는 발끈했지만, 다른 기사단원들이 웃음을 터트려서 씩씩거리기만 했다.
“확실히, 코아케 무리에게 이렇게까지 휘둘리는 건 자존심이 상하네요.”
“유인이라면 뭔가 상위권자가 있는 걸까?”
“글쎄. 코아케에게 명령이 가능한 마수가 뭐가 있겠냐?”
유스타프가 말했다.
“코카트리스.”
순간, 침묵이 돌았다가 로스가 내뱉었다.
“그거 전설에나 나오는 마수 아닙니까?”
수탉과 뱀의 모습을 합친 이 거대한 괴물은 눈을 마주치는 자는 석화시키며 입에서는 독을 내뿜는다.
유스타프가 어깨를 가볍게 돌리고 말했다.
“하지만, 오는데?”
그러며 그가 투구창을 툭 내려 쓰고 말했다.
“3번 포메이션.”
그러자 모두가 검을 뽑아 들며 유스타프를 중심으로 빠르게 진형을 만들었다.
―꾸엑, 꾸엑, 꾸엑.
여기저기서 코아케의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루미에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발이 불편하군.’
눈신을 신고 싸울 수는 없고, 부츠에 미끄럼 방지를 위한 스파이크가 박혀 있지만, 그렇다고 움직일 때 불편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끼에에엑!”
귀를 틀어막고 싶을 정도로 커다란 소리와 함께 나무의 눈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리고 동시에 코아케 수십 마리가 뛰쳐나왔다.
매복하고 있었다는 듯한 모양새였다. 여기저기서 단단한 부리와 방패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목은 어린 나무 굵기만 했는데, 단단해서 한 번에 잘라 내려면 상당한 기합이 필요했다.
하지만 청염 기사단에서 한 합에 코아케의 목을 잘라 내지 못하는 기사는 없었다.
착실하게 코아케의 숫자를 줄여 가는데 다시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끼에에에엑!!”
머리까지 높이가 3m는 되어 보이는, 겨울의 눈밭에서 너무나도 눈에 띄게 화려한 색을 가진 코카트리스가 날개를 퍼덕이며 반쯤 날아왔다.
“눈을 정면으로 보지 마!”
유스타프가 외쳤다.
“A팀은 나와 함께 간다, 2번 포메이션.”
유스타프가 달려 나가기 시작하자, 기사들 몇이 그의 뒤를 따라 달려 나갔다. 그들은 검은 도로 꽂고, 등에 매달린 단창을 빼 들었다.
루미에도 그중 한 명이었다.
쿵!
상당히 묵직한 소리와 함께 코카트리스가 눈 위에 안착했다. 이어 독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기사들은 방패를 들었다.
유스타프가 작게 속삭였다.
“청염.”
동시에 코카트리스의 머리에 불이 붙었다. 끔찍한 비명 소리를 들으며 유스타프는 눈을 찌푸렸다.
‘어마어마하게 빠져나가는군.’
눈만 못 쓰게 만드는 데에도, 군장 차림으로 한참을 달린 것처럼 힘이 쭉쭉 빨려 나갔다.
코카트리스는 마력에 대한 방어가 있어서 그러하리라.
제자리에서 뒹구는 코카트리스를 겨냥해 기사단은 단창을 던졌다. 크기도 컸으니 딱 좋은 표적이었다. 한두 개, 단창이 날개에 튕겨 나갔다. 하지만 나머지는 제대로 박혀 들어갔고, 그 다음에서야 기사들은 검을 빼 들고 코카트리스를 향해 달려갔다.
코카트리스는 마지막으로 독을 내뿜으며 발악했지만, 얼마 가지 못했다.
유스타프가 목을 자르는 것으로 전투는 끝났다.
로스가 코카트리스를 걷어차며 말했다.
“전설이라더니 별거 아니네요.”
“피가 치료제로 쓰인다는데.”
루미에는 잠시 코카트리스 시체를 바라보다가 유스타프를 보았다.
‘누가 싸워서 이기겠어.’
멀리서 불을 써서 상대를 태우는 적을.
이 코카트리스도 만약 처음부터 눈을 못 쓰게 하지 않았다면 전투는 어마어마하게 힘들었을 거다.
“이거 깃털이라도 뽑아다가 전시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기사단원들이 흥분해서 서로 이야기하는데 청염이 작게 울었다. 유스타프가 눈을 찌푸리는데 그 순간 코카트리스가 통나무 같은 꼬리를 휘둘렀다.
“!!”
그야말로 무방비 상태의 일격이었다.
“가주님!”
로스가 소리쳤다.
갑옷을 입은 채였는데도, 상당히 날아가 떨어졌다.
유스타프는 통증에 신음을 삼키고 몸을 일으켰다. 머리 없는 코카트리스 시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가 욕설을 내뱉으며 뒤로 물러섰다.
“어, 어디…….”
잘린 목이 코카트리스의 울음소리로 말했지만, 모두 그게 인간의 말이라는 걸 알아챘다.
“어, 어디, 라치…….”
그러더니 코카트리스 시체는 펑 하고 검은색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로스는 저도 모르게 거친 욕설을 내뱉고 유스타프에게 달려갔다.
“가주님,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하고 덧붙였다.
“빨리 돌아가지.”
라치아로. 하늘 저택으로.
그건 기사단 모두가 한 마음이었다. 다들 그 괴물이 한 말을 못 알아들을 수 없었기에, 그들은 말없이 빠른 속도로 하늘 저택으로 향했다.
란은 연락도 없이 돌아온 유스타프를 맞이하려 옷도 제대로 챙겨 입지 못하고 생활복 차림으로 현관으로 향했다.
“유스!”
웃으며 달려오는 란을 보자, 유스타프는 그제야 제가 지금까지 얼마나 긴장하고 불안했는지 깨달았다.
그녀가 몸을 던지듯 그를 꽉 끌어안고 웃었다.
“딱딱해. 차가워.”
유스타프 역시 저도 모르게 웃으며 그녀를 살짝 밀어냈다.
“옷 더러워지십니다.”
“다친 곳은 없는 거지? 괜찮은 거지? 다른 사람들은? 다 괜찮아?”
“네, 다 괜찮습니다.”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하고 속삭였다.
“씻고서 다시 안아 드려도 될까요?”
란이 얼굴을 붉히고 역시 마찬가지로 속삭였다.
“묻지 않아도 돼.”
유스타프는 웃었다.
✥✥✥
유스타프가 씻으러 간 사이에, 란은 루미에를 찾아내 안부를 물었다. 루미에는 사람들 사이에서 눈에 확 들어오는 제 주홍색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웃었다.
“멀쩡합니다.”
“다행이다. 걱정했어. 루미에 소식은 따로 들을 수도 없으니까.”
“그리고 좀 더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응?”
그만한 마수를 한방에 때려잡으려면 어지간한 능력으로는 안 될 것 같다.
루미에는 그렇게 생각하고 속삭였다.
“그런데 가주님은 괜찮다고 하시던가요?”
“어? 어. 무슨 일 있어?”
란의 목소리도 덩달아 낮아졌다. 루미에가 피식 웃고 말했다.
“갈비뼈 금 가신 것 같은데요. 거기다가 말 타고 오느라 더 심해졌을 것 같은데…….”
“진짜?!”
란이 펄쩍 뛰어 루미에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에 오르실 때 멈칫하는 걸 봤거든요.”
루미에는 그녀의 손등에 키스했다.
“제 주인님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니 열심히 보게 되더군요.”
“루미에…….”
그녀가 신음처럼 중얼거리자 루미에가 싱긋 웃고 그녀의 손등에 한 번 더 입 맞췄다.
“딱히 의식하라고 드린 말씀은 아니랍니다.”
란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한 박자 쉬었다가 인사했다.
“알려줘서 고마워.”
“별말씀을, 주인님이 바라는 게 제가 바라는 것이지요.”
그러며 루미에가 손을 놓아주었다.
“얼른 가 보세요.”
오른쪽 눈을 찡긋하며 하는 말에 란은 “고마워.” 하고 한 번 더 말하고 걸음을 빨리해서 저택 안으로 향했다.
유스타프의 방으로 가기 전에 란은 치료사에게 잠깐 들렀다.
그리고 그의 방으로 올라가니 시종이 공손히 아직 목욕 중이라고 알렸고, 란은 소파에 앉아서 기다렸다.
발을 까닥거리며 기다리고 있으려니, 유스타프가 머리를 채 말리지도 못한 채로 나왔다.
“누님?”
란이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손을 들어 밖으로 나가라는 신호를 했고, 그걸 본 시종들은 재빠르게 방에서 물러났다.
“네가 벗을까? 내가 벗길까?”
란의 말에 유스타프는 멍하니 란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지금 그거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입니까?”
란이 품에서 치료사에게 받아 온 연고와 습포를 꺼내자 유스타프가 “아.” 하고 짧게 말하고 물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다 아는 수가 있지. 갈비뼈 부러진 거야?”
“살짝 금이 간 것뿐입니다. 신경 쓰실 일은 아닙니다.”
유스타프의 말에 란이 얼굴을 찌푸렸다.
“나에게도 그럴 거야? 나에게는 숨기지 않아도 되잖아?”
난 너의 적이 아니고, 부하도 아니야.
란의 말에 유스타프는 눈을 깜박였다.
“그렇군요.”
그가 그렇게 말하고는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고, 란은 시선을 슬그머니 돌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수건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녀가 그의 머리 위에 수건을 풀썩 씌우고 문지르기 시작하자 유스타프가 당황했다.
“안 그러셔도 됩니다. 이런 건 시종에게―”
“내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건 무슨 뜻이라고 했지요?”
란의 말에 유스타프는 잠시 침묵하다가 피식 웃었다.
“애정이라고 그러셨죠.”
“그러고 보니 그때는 필요 없다고 그랬으면서.”
“누님으로서의 애정은 필요 없었습니다. 조금도.”
수건 밑으로 그의 새파란 눈이 똑바로 란을 바라봐서 그녀의 손이 느려졌다. 그녀의 뺨이 붉어지고, 란은 좀 더 힘을 주어 수건을 문질렀다.
앗, 하고 유스타프는 작게 소리를 내고 웃었다가 신음을 내뱉었다.
란이 놀라 수건을 치우며 물었다.
“아팠어? 세상에! 유스!”
란은 드러난 유스의 옆구리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피멍이 들어 있었다.
새파란 것에서 거무죽죽한 부분까지, 갈비뼈 부근이 다채로운 색으로 덮여 있었다.
란이 울상이 되었다.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말을 타고 왔어?”
“보기만큼 심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란은 큰소리로 외치고 허둥지둥 수건을 던지고 연고 뚜껑을 열었다. 청량하고 시원한 향이 퍼졌다.
세계수 연고는 반쯤 투명하고 금빛을 띠고 있었다. 란은 조심스럽게 연고를 떠서 한참 옆구리를 바라보다가 아주 신중하게 연고를 발랐다.
유스타프가 몸을 움찔해서 란도 움찔했다.
“아팠어? 괜찮아?”
“괜찮습니다.”
유스타프의 말에 란은 다시 조심조심 연고를 바르기 시작했다. 유스타프는 그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손길이 간지럽다고 지적하고 싶었다.
하지만 바싹 붙어서 집중하고 있는 란의 얼굴을 보니 그러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란은 그의 상처에 살살 연고를 바르는 데 집중하느라, 얼굴 근육이 완전히 느슨해져 있었다.
입술까지 약간 벌린 채로 란은 집중했고, 유스타프는 그녀의 길게 드리워진 짙은 금색 속눈썹과 그늘이 드리운 녹빛 눈동자를 마음껏 바라보았다.
계속 봐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난 아니잖아, 인가.’
유스타프는 란이 했던 말을 음미했다.
상처를 입어도 말하지 않는다.
물론 숨길 수 없다면 달라지지만, 어지간한 상처는 그냥 혼자서 처리했다.
란의 말대로, 적에게도 부하에게도 보여서는 안 되는 모습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란은 자신은 괜찮다고 말하고 있고, 그 역시도 거기에 수긍하고 있다.
‘큰일이다.’
유스타프는 몸을 숙여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유스, 움직이지 마.”
란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젖은 머리를 기댄 그를 타박하지 않았다. 대신 반대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며, 마저 상처에 연고를 발랐다.
유스타프는 정말로, 정말로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불안해.’
불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의 연인이었다.
지금은.
그 ‘지금은’이라는 부분이 참을 수가 없었다.
‘만약에 란이 떠나 버리면.’
나는 어떻게 될까?
상상하기가 어려운 일이었다. 아니, 너무 상상이 잘돼서 오히려 현실감이 없다고 해야 할까.
“다 발랐어. 이제 여기에 습포만 붙이면 되거든. 잠깐 좀 일어나 봐.”
란이 그를 밀어내 유스타프는 순순히 허리를 폈다. 란은 치료사에게서 받아온 습포까지 붙이고서야 뿌듯한 얼굴을 했다.
“다 됐다. 그래도 나아지는 것 같지 않으면 치료사를 불러. 알았지?”
“네.”
유스타프는 셔츠를 도로 입으며 말했고, 란은 그제야 그의 복근과 몸을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유스타프가 속삭였다.
“지금까지 실컷 보시고선?”
“그건 치료거든요?”
부루퉁하게 말하지 그가 미소 짓고 입 맞췄다.
‘아.’
란은 눈을 감고 그가 거듭 입술을 겹쳐오는 걸 받아들였다.
‘이거 큰일이다.’
점점 유스타프가 좋아진다.
달콤한 꿀 속으로 빠져드는 것처럼, 좋아지는 마음은 사귄 후에 점점 더 커져갔다.
행복하고, 행복해서 무섭다.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떴다.
‘예전에는 이 눈이 무섭다고 생각했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빙해 같은 눈동자.
하지만 이제는 무섭지 않다.
달콤하고, 다정하고―
‘아, 지금은 좀 무서운가?’
어두운 욕망이 담긴 눈.
란은 숨을 내쉬며 눈을 내리깔았다.
‘아니지, 무섭다기보다는 설렌다고 해야 할까.’
좀 더 키스하고 싶다, 붙어 있고 싶다, 만지고 싶다.
좀 더, 좀 더, 좀 더.
‘부족해.’
란은 눈을 들어 유스타프를 보고 이번에는 제 쪽에서 먼저 몸을 뻗어 입 맞췄다.
유스타프는 그녀의 허리를 당기고 더 깊게 입 맞췄다. 거칠고 난폭하면서, 다정하고 정중했다.
어떻게 그게 공존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랬다.
키스를 끝내고 란은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뺨은 완전히 달아올라 있었고, 입술은 반짝였다.
눈가가 붉어져 그녀가 유스타프를 힐끗 보았다가 어색하게 웃었다.
“시종이 없으면 안 되겠다.”
그녀의 말에 유스타프는 멈칫했다. 한참 뒤에 그가 말했다.
“그러네요.”
유스타프가 작게 속삭였다.
“란.”
“응?”
“조금만 더 내가 독점하면 안 됩니까?”
란이 웃었다.
“이미 하고 있잖아?”
“좀 더 말입니다.”
“좀 더?”
“다른 자식들이 란을 바라보면 눈을 뽑아 버릴 권리 정도 말입니다.”
“그런 권리는 어디에도 없는데.”
란이 중얼거렸다.
“약혼하면 안 될까요?”
유스타프의 말에 란은 짧게 숨을 삼켰다. 그 반응에 유스타프는 미소 지었다.
“안 된다고 하면 어쩔 수 없지만 말입니다.”
“유스, 나…….”
란은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네 운명의 상대가 오거든?!
‘아, 이건 아니야.’
란은 순간 정정했다.
“유스.”
“네.”
“내년에.”
그의 눈이 커졌다.
란이 미소 지었다.
“내년 봄에 할까? 그때까지 유스 마음이 변하지 않으면.”
“정말입니까?”
유스타프는 빠르게 되물었고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음이 변하지 않으면.’
그녀가 묘하게 쓴웃음을 머금어 유스타프가 말했다.
“억지로 하시는 거면, 그러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거 아냐.”
란이 고개를 저었다. 유스타프가 손을 뻗어 그녀의 둥근 뺨을 감쌌다.
그 괴물이 ‘라치아’라고 했을 때 떠오른 건 란뿐이었다.
내 전부, 내 소중한 것.
라치아가 자신의 전부.
줄곧 그렇게 생각해 왔지만 그때 떠오른 것은 란이었다.
“큰일입니다.”
“뭐가?”
“전부 먹어 치우고 싶어져서.”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그녀에게 키스했다.
정말로 먹어 치울 듯한 키스였다.
란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목을 잘랐는데 살아났단 말야?”
“네.”
유스타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 이야기를 란에게 해야 할지, 안 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녀가 더더욱 이곳을 떠나고 싶어지면 어쩌나 싶어서.
간신히 내년 봄 약혼 약속까지 받아 놨는데, 이걸로 놓쳐 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란에게 이야기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왜냐면 그녀의 말대로 그녀는 부하도 아니고 적도 아니며, 자신과 같은 곳을 보는 파트너였기 때문이었다.
란은 유스타프 앞으로 슬쩍 매시 포테이토 그릇을 밀어 주며 말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그래서?”
“그놈이 꼬리를 휘둘렀고, 제가 맞았죠.”
“그래서 옆구리가…….”
“갑옷이 좋아서 살았습니다. 아니었다면 그 순간 뼈가 다 부러지고 내장 파열이 됐을 테니까요.”
끔찍한 이야기를 너무나 태연하게 해서 란은 입을 떡 벌렸다.
“유스타프 라반 드 라치아!”
“풀네임은 오랜만이군요.”
란은 푹 한숨을 내쉬었다.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유스타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는 괴물이 남긴 말을 이야기했고, 란은 심각하게 그 이야기를 들은 다음 말했다.
“나도 서고에서 뭘 찾아냈어.”
유스타프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기록이 있었습니까?”
“그게― 녹음의 관에도 무슨 마법이 걸려 있대.”
“녹음에도 말입니까?”
“응. 그리고 ‘델판토’라는 사람 이야기 들은 적 있어?”
유스타프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들은 바 없습니다.”
“라치아의 선조가, 그러니까 천 년 전 이야기네. 대현자 이브리아와 함께 하늘 저택을 세울 때 이야기를 적어 놓은 게 있더라고.”
천 년이라니.
생각하면 어마어마하다.
“언어가 통하기는 합니까?”
유스타프가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응, 해석했어.”
란은 그렇게 대답했다. 사실은 빙의자 특권인지 뭔지로 그냥 모든 언어가 대충 뜻이 통하는 것 같지만 말이다.
“그러네. 번역해 둘까.”
란은 중얼거렸다.
자신이야 편하게 보지만, 언어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후대를 위해서는 지금 한 번 번역해 놓는 게 좋을지도.
어차피 할 일도 없다.
텔레비전도, 인터넷도 없는 세계에서 오락이라고는 카드나 보드 게임 정도였다.
“아, 맞다. 비밀 통로도 몇 개 있더라. 유스타프도 알아? 비밀 통로?”
“저도 몇 개는 압니다. 하지만 적혀 있는 통로와 같은지는 궁금하군요.”
“나도 하나 발견했지.”
란이 속삭이고 웃었다.
“사실 내가 아니라 루미에가 발견한 거지만.”
루미에의 이름이 나와 유스타프가 멈칫했다가 물었다.
“그와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응?”
“어쩐지 달라진 것 같아서 말입니다. 호위도 그만뒀고.”
“아― 그게.”
란은 ‘루미에가 내게 고백하고 내가 그를 찼어.’라는 말을 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그의 얼굴을 보자 해야겠다고 마음이 굳어져서 란이 속삭였다.
“이건 비밀인데.”
“네.”
“루미에가 나에게 좋아한다고 했어.”
유스타프의 얼굴이 뚱해졌다.
“그건 누구나 보면 압니다.”
“정말?!”
란이 놀라 눈을 크게 뜨자, 유스타프가 말했다.
“모르시는 건 누님 정도겠지요.”
그러니 자신이 그렇게 밀어붙여도 몰랐지.
란은 그 말에 당황해 버벅거리다가 말했다.
“그랬는데, 내가 유스를 좋아한다고, 그러고 거절했어.”
“그게 전부입니까?”
“응― 그리고 다른 이야기도 좀 했지만, 핵심은 저거야.”
란은 그렇게 말하고 식탁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괬다. 버르장머리 없다고 혼날 모습이지만, 그녀도 그도 신경 쓰지 않았다.
“얼른 많이 먹어. 그래야 빨리 낫지.”
그녀가 다시 접시를 하나 더 유스타프 앞으로 밀어주며 말해 그가 물었다.
“란은 더 안 먹습니까?”
“난 많이 먹었어.”
“요즘 훈련하고 있는 건 어떻고요?”
“진―짜 힘들어.”
란이 우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래도 하는 보람이 있는 것 같아. 이대로 계속 체력 단련을 하면 유스타프도 번쩍 들어 올릴 수 있지 않을까.”
“그 정도는 기대하지 않지만, 나중에 본격적으로 검술을 배우시게 되면 제가 상대해 드리죠.”
“정말?”
“정말입니다.”
유스타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란이 “참.” 하고 말했다.
“아까 이야기하다가 말았는데, 녹음의 관은 그래서 어디에 뒀지?”
“보물실에 있을 겁니다.”
“그렇군. 내가 한번 살펴봐도 될까?”
“미래의 소유주께서 얼마든지요.”
유스타프의 말에 란은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고 말했다.
“뭔가 ‘문’의 이상에 대한 단서가 있을지도 몰라…… 유스타프. 문 너머에 뭐가 있는지 알아?”
“‘어둠’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아니, 그런 추상적인 말 말고.”
란의 말에 유스타프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가주에게 내려오는 뭔가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무래도 중간에 소실된 게 아닐까 싶군요.”
“그렇군. 하긴 천 년이라고. 천 년이나 뭔가 기억이 남아 있을 리가 없잖아.”
단순히 구전으로 이야기를 전하려는 거였다면, 이건 너무 안일한 대책이다.
란은 눈을 찌푸렸다.
‘분명히 뭔가 있을 텐데.’
대현자다. 대현자.
결코 바보가 아니란 말이다.
‘아니면 이렇게 봉인이 길어질 거라고는 생각 못 했나.’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유스타프의 말에 란은 설핏 웃었다.
“응.”
나도 알아.
작게 덧붙인 말에 유스타프는 미소 지었다.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일찍 시작된 라치아의 겨울은 본격적이 되었고, 유스타프는 부상이 다 낫기도 전에 겨울 사냥을 떠나겠다고 해서 란의 눈을 부릅뜨게 만들었다.
‘그래도 소용없었지만.’
유스타프는 곤란한 얼굴을 하면서도, 달래는 키스를 하면서도 가야겠다는 말을 취소하지 않았다.
‘그 곤란한 표정이 왠지 좋아서, 좀 더 졸라 봤지.’
란은 미소를 꾹 눌러 참았다.
그녀 역시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냥 쬐끔, 억지를 부려 보고 싶었달까?
란은 조심하라는 말과 함께 그를 배웅했다.
대신 유스타프는 란에게 보물관에 얼마든지 들어가 보라고 말했다. 덕분에 란은 마음껏 녹음의 관을 살펴볼 수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모르겠단 말야.’
프란체에게도 말해 봤지만, 그도 어떤 마법적인 느낌도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대체 뭐지.’
여기에 무슨 마법이 걸려 있다는 거야?
‘사실은 마법이 아니라 그냥 사랑하는 마음이야, 이딴 거 아닌가.’
란은 눈을 가늘게 뜨며 에메랄드 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슥슥 손수건으로 깨끗하게 닦아서 도로 벨벳 방석 위에 올렸다.
라치아의 보물관은 많은 물건들이 있지 않았지만, 하나하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것이었다.
‘청염과 녹음만 해도 천 년짜리고.’
어지간한 것들도 백 년이 넘는다.
말 그대로 ‘보물’이기 때문에 어머니가 사들인 보석류는 여기에 없었다. 그건 에메랄드 방에 따로 보관되어 있었다.
‘여기서 또 단서가 끊어졌군.’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천 년 전 사람이 있으면 뭐라도 물어볼 텐데.”
입 밖으로 내서 중얼거리자마자 번개처럼 영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잠깐, 진짜 천 년 전에 있고 지금도 있는 사람이 있잖아?’
사람이 아니라 정령이기는 하지만, 하여간 청염은 처음 이브리아가 벽을 세울 때부터 존재했다.
‘그녀라면 알지 않을까?’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잠시 고민했다.
‘정령에 대해서는 자료가 더 있었던 것 같아.’
서고나 도서관에서 목록을 봤던 게 기억났다.
정령이 좋아하는 걸 좀 모은 다음에 이스타리프에게 부탁해 보자.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보물관을 나섰다.
도서관에서 정령이 좋아할 만한 것을 조사해봤지만, 제각각이었다. 게다가 그 변덕스러움이라니…….
‘도대체 이브리아는 이스타리프를 어떻게 청염에 깃들게 한 거야?’
란은 그러면서도 조사한 대로 몇 가지 정령이 좋아할 만한 것을 모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정령을 불렀다.
“이스타리프.”
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이스타리프?”
몇 번 더 허공에 대고 외쳐 봤지만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고, 멋쩍음을 느끼며 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안 오지?’
그리고 란은 그날 저녁, 예전과 비슷한 느낌의 꿈을 꾸었다.
새하얀 공간에 서 있는 꿈.
위아래 좌우 분간이 되지 않는, 하지만 기묘하게 현실 같은.
“이스타리프.”
란이 부르자 푸른색 불꽃이 화르륵 안개 사이에서 타올랐다.
“언제부터 인간이 내 이름을 마구 불렀을까.”
불꽃을 태우는 듯한 목소리는 여전했다. 사자의 하반신에 여성의 상반신, 머리카락은 타오르는 불꽃.
그녀는 손에 과일을 들고 냠냠 먹고 있었다. 보니 란이 준비했던 과일이었다.
“불렀는데도 대답이 없어서 안 오는 줄 알았어요.”
“인간이 부른다고 튀어 나가야 하나?”
“과일 맛있나요.”
란의 물음에 이스타리프는 과일을 삼키고 흥 하고 웃었다.
“이런 과일은 내 입맛에는 맞지 않아. 읽는 자야, 진귀한 이방인아, 내가 너를 싫어하지 않는 걸 다행으로 여기렴.”
어쩐지 기분이 나빠 보여 란은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무슨 일이지?”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어서요. 저 빙벽 너머예요.”
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스타리프의 머리카락이 화르륵 크게 불타올랐다. 란은 그걸 보고 침을 삼키고 말했다.
“델판토라고, 아시죠?”
이스타리프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스타사파이어처럼 갈라진 동자가 무섭게 보였다.
“그 이름은 정말로 오랜만에 듣는군. 그래, ‘문’에 대해서는 알아.”
“나오지 않게 막는 방법이 없나요?”
그 말에 이스타리프는 잠깐 침묵하다가 말했다.
“없어. 봉인은 언제나 봉인일 뿐. 해결 방법은 아니니까.”
“그럼 무찌를 방법은요?”
“몰라.”
란은 입을 떡 벌렸다.
이스타리프가 돌아섰다. 그녀가 사자 앞발로 몇 번 땅을 긁으며 중얼거렸다.
“이브리아가 그를 봉인한 것도 그의 힘을 줄이기 위해서였지. 하지만 천 년, 고작 천 년인가, 아니면 벌써 천 년인가.”
“당신은요?”
란의 물음에 이스타리프가 목을 180도 돌려서 뒤를 돌아보았고, 란은 비명이 터져 나오는 걸 눌러 참았다.
전부터 생각했지만 조금은 인간의 심장을 생각해 주면 좋겠다.
“내가 힘을 쓰려면 라치아 가주의 체력과 생명력이 필요해.”
이스타리프가 새빨간 혓바닥을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전부 먹어 치운다면, 글쎄?”
“그럼 그건 제외하겠습니다.”
란이 재빠르게 답했다.
유스타프의 목숨을 내놓는 해답은 필요 없다.
‘게다가 글쎄라니.’
확실하지도 않다는 거잖아?
란은 팔짱을 꼈다. 이스타리프가 가볍게 통통 튀듯이 뒷걸음질 쳤다. 그러니까 목이 180도 돌아간 채로.
란이 질겁하는 걸 보고 이스타리프가 웃었다.
“마음이 바뀌었나? 뭐지? 예전에는 혼란스러워만 하는 것 같더니.”
“유스타프가 좋아졌어요.”
란은 솔직하게 말했고 이스타리프는 눈을 깜박였다.
“너를 죽이려고 하는 상대를?”
“이제는 아니거든요.”
란의 말에 이스타리프는 몸을 돌렸고, 목도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해할 수 없군. 그런 감정은 잘 모르겠어. 이브리아도 그렇지. 델판토도 그렇고.”
이스타리프의 중얼거림을 슬쩍 넘기며 란이 이어 물었다.
“이브리아가 녹음의 관에 마법을 남겨뒀다는 이야기도 봤어요. 혹시 그 마법이 뭔지 아시나요?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녹음에?”
“네.”
이스타리프가 눈을 깜박였다.
그때 배경이 설원으로 바뀌었다. 란은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밤의 설원이었다. 근처에는 텐트가 있었고, 그녀의 등 뒤에 모닥불이 있었다.
“이게 무슨―”
란이 중얼거리는데 작은 텐트의 문이 열리고 사람이 나왔다.
“유스?!”
란이 놀라 소리쳤지만, 이쪽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란은 당황해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이스타리프는 보이지 않았다.
“이스타리프!”
외쳐도 답이 없었다.
삐이이익!
그때 귀를 찢는 호각 소리가 나서 란은 양 귀를 막으며 뒤로 물러섰다.
―구워어어어
멀리서 거대한 곰이 우는 듯한 기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텐트 안에서 후다닥 기사단원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시야가 새까맣게 변했다.
“―!!”
란은 꿈에서 깨어났다.
어깨로 숨을 몰아쉬며 란은 몸을 떨었다.
‘뭐야, 몸 아파…….’
그녀는 눈을 찌푸렸다. 몸살 기운이 있는 것처럼 몸이 아파 왔다.
―정령에게 뭘 얻어 내면 그렇게 되는 거야.
누가 귓가에 속삭였고 란은 고개를 돌렸다. 엄지손톱만 한 푸른 불꽃이 가볍게 나폴나폴거리다가 사라졌다.
“질문에 제대로 답도 해 주지 않았으면서―”
란은 짜증이 치미는 걸 느꼈다.
‘마지막 장면은 현재인가?’
란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실물의 마수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냥 괴물이구나, 하는 느낌일 뿐이었지.
‘진짜 소름 끼치는 소리였어.’
유스타프와 루미에는 그런 것들과 싸우는 건가.
란은 몸을 웅크렸다.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은 밤이었다.
✥✥✥
유스타프는 검을 뽑았다.
검고 끈적한 피가 팍 터져 나왔다. 기분 나쁜, 사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전에도 그렇고, 아무래도 죽은 것에 뭔가 붙나 본데요.”
루미에가 중얼거렸다. 말투는 가벼웠지만 그의 얼굴은 딱딱했다.
쓰러진 곰 모양의 마수는 적어도 죽은 지 한 달은 되어 보였다. 그나마 겨울이라 덜 부패한 것이지.
기묘한 소리로 울며 곰은 사람을 찾고 있었다.
―그, 녀…… 어디…….
그게 곰이 한 말이었다.
루미에도 유스타프도 기묘하게 그 말에 ‘란’을 떠올렸다.
란이 아닐지도 모른다. 다른 어떤 사람을 찾고 있는 걸 수도 있다.
실제로 다른 기사단원들 역시 ‘란’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눈치였다.
“대체 뭐하는 괴물일까요?”
블레인의 물음에 유스타프가 말했다.
“아무래도 마법사 협회에 얘기해 봐야겠군.”
블레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는 힐끗 유스타프의 검을 보았다. 새까만 검날에는 피 한 방울 남아 있지 않았다.
“잠은 다 잤군. 다음 장소로 이동해서 낮에 차라리 눈을 붙이지.”
유스타프의 말에 블레인이 “존의.” 하고 짧게 대답했다.
예상보다 겨울 사냥은 더 길어졌고, 그래서 하늘 저택에 돌아왔을 때 기쁨은 더 컸다.
연회가 준비되어 있다는 란의 말에 기사단은 환호작약했고 말이다.
씻자마자 모두가 실컷 연회장에서 질릴 때까지 먹고 마셨다.
제대로 된 음식이 도대체 얼마만인지 하며 포도주를 물처럼 마시고, 고기를 젤리처럼 삼켜 댔다.
란은 그들이 먹는 양에 질리면서도 뿌듯한 기분이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응?”
“저희가 돌아올 타이밍을요.”
유스타프의 말에 란이 웃었다.
“아슬아슬했어. 대부분 미리 만들어 두고 밖에서 꽝꽝 얼려 둔 거야. 그리고 슬쩍 데우기만 한 거지. 돌아온다는 시간보다 늦는다고 유스타프가 그랬었잖아. 그리고 꼭, 돌아올 시점쯤 되면 연락이 없고.”
란의 말에 유스타프가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둘러 잡아당기며 말했다.
“그것보다 한시라도 빨리 실물이 더 보고 싶으니까요.”
“그거야 나도 마찬가지지만.”
란은 그렇게 말하고 웃었다. 유스타프가 키스하자 달콤한 와인 맛이 났다.
란은 웃으며 그의 어깨를 슬쩍 밀어내고 말했다.
“다들 보잖아.”
“아무도 안 봅니다.”
“그럴 리가요.”
란은 그렇게 말하고 연회장을 바라보았다. 초반에 빠르게 음식이 줄어들던 것도 슬슬 느려지기 시작했다.
시종들도 한결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녹음의 관은 살펴보셨습니까?”
“응.”
“마음에 드시던가요?”
“유스타프.”
“아니면 새로운 티아라가 좋으십니까?”
“그런 의미가 아닌 거 알잖아.”
란이 재빠르게 이어 말했다.
“어떤 마법적인 흔적도 찾지 못했어. 결국 그냥 농담이었던 건가, 싶기도 한데…….”
란은 머뭇거렸다.
녹음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이스타리프는 분명히 상황을 돌려 말을 얼버무렸다. 게다가 그날 이후로 이틀 정도 몸살로 끙끙 앓았기 때문에, 란은 이스타리프를 또 부를 생각을 접었다.
하지만 녹음에 뭔가가 있는 건 확실하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하려면 이스타리프의 이름을 알고 있다고 말해야 하는데.’
그렇게 말하면 유스타프가 어떻게 생각할까?
캐묻지 않을까?
“사실 나 유스에게 고백할 게 있어.”
진지한 얼굴에 유스타프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잠깐 자리를 옮길까요.”
그의 말에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연회장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다.
연회장 밖으로 나와 란과 유스타프는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란이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말했다.
“그러니까, 나 사실. 청염의 이름을 알고 있어.”
유스타프는 말없이 가만히 란을 내려다보았다.
란은 그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빠르게 이어 말했다.
“그, 그래서 청염도 낄 수 있었던 거야. 이름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말할 수 없어. 그리고 그 이름을 말해 줄 수도 없어. 그게― 정령이 싫어하거든.”
란은 고개를 더 푹 숙였다.
“미안해.”
“뭐가 말입니까?”
“그, 중요한 사실인데 숨겨서. 청염과 관련된 일이고…….”
란이 조심조심 유스타프를 올려다보았다. 유스타프는 화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단지 그는 이렇게 물었다.
“그 이야기를 이제 와서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정말? 이걸로 넘어가는 거야?
란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행여나 타이밍을 놓칠세라 재빨리 말했다.
“내가 청염을 불러서 물어봤거든. 혹시 녹음에 대해서 아는 거 있냐고. 그러니까 말을 돌리더라고.”
유스타프의 미간이 좁혀졌다.
“청염을 불렀다고요?”
“아, 응.”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아십니까?”
“정령이 대가를 요구한다는 건 알아…….”
란의 말꼬리가 살짝 줄어들었다.
“‘안다’고요.”
유스타프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으며 미끄러워졌다.
“정령과 거래했다가 호되게 당한 사람들 이야기를 누님 앞에서 더 들려드려야 할까요, 아니면 다시는 정령을 부르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 낼까요?”
란은 잘 몰랐지만, 이곳에서 정령과 거래를 하는 건 ‘사채’를 쓰는 것과 비슷한 개념이었다.
정령과 거래하려면 반드시 먼저 뭘 원하는지 묻고 거래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정령이 터무니없는 걸 요구하게 된다.
하지만 대부분 정령의 힘을 빌릴 정도면 상당히 절박한 상황인 거고, 일단 정령의 힘을 빌렸다가 나중에 덤터기를 쓰는 이야기가 상당히 내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걸 잘 모르는 란은 ‘그렇게까지 화낼 일인가.’ 생각했지만 얌전히 대답했다.
“알았어.”
유스타프의 푸른 눈이 가늘어졌다.
“왜 그렇게 누님께서 위험한 곳으로 가면서도 자신만만했는지 알겠습니다. 여차하면 청염의 힘을 빌리면 된다는 안일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셨겠지요. 청염이라고 친근하게 부르지만, 결국 이것 역시 정령입니다.”
유스타프가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정말로 쓰지 않기로 약속하시는 겁니다.”
“응.”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스타리프에게 더 물어봐도 답이 나올 것 같지 않고…….
‘괜히 유스타프를 화나게 할 필요도 없지.’
란의 대답에 유스타프는 그제야 그녀의 손을 놔주고 그녀를 끌어안으며 깍지를 꼈다.
“정말이지. 어디서 뭘 더 어떻게 해야 란을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됩니다.”
그의 품에 폭 안겨서 란은 웃었다.
“이 이상 더 안전할 수는 없는 것 같은데. 물론― 좀 수상한 게 요즘 나오고 있기는 하지만.”
그녀의 뒷말에 유스타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가 낮게 말했다.
“다음 주에 문을 봉인하는 의식을 하러 갈 예정입니다.”
“벌써?”
“이른 건 아니지요. 겨울 사냥이 길었으니까요.”
유스타프의 말에 란은 ‘그런가…….’ 하고 짧게 숨을 내뱉었다.
‘그럼 그날이 시나가 오는 날이야.’
정말로 오늘이 왔어.
그 모든 오랜 시간을 거쳐서 드디어 ‘원작’이 시작하는 때가 왔다. 뭐, 원작이 아니라 자신이 읽은 것일 뿐이긴 하지만.
“같이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그가 뒷말을 흐려 란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당연히 같이 가야지!”
대답했다, 란은 아차 하고 덧붙였다.
“가는 거, 싫어―?”
드디어 흐름에 들어온 건가?
자신과는 멀어지게 하고 시나와 단둘이 있게 하려는, 그런 세계의 흐름인걸까?
편집증적이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도망치는 길을 파 놓는 두더지처럼 말이다.
‘하지만 무서운걸.’
읽은 것은 완전한 해피엔딩이다. 흠잡을 곳 없는 끝이다.
하지만 자신이 계속 이렇게 틀어 놓는다면, 혹시 배드엔딩이 되는 거 아닐까.
유스타프가 다치거나, 무슨 일이 생기는 게 아닐까.
란의 얼굴이 어두워져서 유스타프는 그녀를 힘주어 안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누님이 겨울에 말 타시는 게 힘드니까.”
사실은 그 문 근처에 데리고 가고 싶지 않았다. 그 안에 있는 위험 가까이 란을 데려가고 싶지 않다.
유스타프는 한숨을 삼키고 말했다.
“같이 가지요.”
“응.”
품속에서 란이 작게 대답했다.
어쨌든 자신은 봐야 했고, 만나야 했다.
시나가 이 세계로 오는 걸.
‘그리고 이번에는 괴물에게 쫓기면서 설산에서 고생하기 전에 도와줘야지.’
란은 그렇게 결심했다.
읽은 것에서는 시나가 이 세계로 넘어와서 어마어마하게 헤매고 쫓기다가 간신히 유스타프를 만난다.
적어도 이번에는 그런 일이 없게 해 주고 싶었다.
처음에 라치아 공작가 일원에게 거친 취급을 받는 것도 막아 주고 싶었고.
란의 단단히 결심한 얼굴에 유스타프가 그녀의 양 뺨을 감싸며 말했다.
“대신 안전한 곳에 있겠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할게.”
“좋습니다.”
유스타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 그녀도 함께 가는 것으로 결정된 것이었다.
일주일 동안, 란은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키리가 그녀의 어두워진 눈 밑을 보며 인상을 썼다.
“그렇게 열심히 훈련하시면서 왜 잠을 못 주무시는 거예요?”
“그러게.”
란은 하하 힘없이 웃었다. 낮에 분명히 훈련으로 몸을 혹사시키고 있는데도, 밤에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잠이 들어도, 얕은 잠으로 깜박깜박 깨어나고는 했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신가요?”
디모디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어 와서 란은 멋쩍게 웃었다.
“아니, 그냥 요즘 꿈자리가 좋지 않아서.”
“무슨 꿈을 꾸시는데요?”
디모디아의 말에 란은 “그냥, 이런저런.” 하고 말을 얼버무렸다.
아무리 그래도 시나가 와서 유스타프와 잘되는 꿈을 꾼다고는 할 수 없었다.
아니면 시나가 ‘내 자리를 내놔.’ 하고 말하는 꿈.
‘시나가 그럴 리가 없는데.’
란은 피곤한 눈을 비비고 말했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 금방 나아질 거야.”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더는 묻지 않고 란이 옷을 입는 걸 도와주었다.
말을 타고 장시간 눈 산을 올라가야 하니, 몇 겹이나 옷을 겹쳐 입었다. 그리고 양 주머니에는 휴대용 난로를 넣어 주었다.
‘그래도 난로가 있으니까 확실히 따뜻하네.’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밖으로 나왔다. 유스타프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언제나처럼 새하얀,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란은 이제 그 얼굴을 구별할 수 있었다.
“함께 가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유스타프의 물음에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날 때문에 이렇게 전전긍긍한 건데, 같이 가지 않는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
“응.”
“요즘 계속 그러시더니, 오늘은 더 심하신 것 같습니다.”
밤새 한숨도 못 잤거든.
란은 그 말을 삼키고 웃었다.
“괜찮아. 보기만 심한 거야.”
유스타프는 꿰뚫듯이 란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말에 올려드리겠습니다.”
“응. 부탁할게.”
이렇게 옷을 껴입었으니 그녀의 운동 신경으로 등자를 밟고 훌쩍 올라타는 건 불가능했다.
유스타프는 그녀를 안아 들어 말에 올려주었다.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이 세계 남자들이 비정상적으로 힘이 센 건지, 아니면 기사들이 힘이 센 건지 모르겠다고 란은 생각했다.
‘말이 그렇게 큰 편이 아니라고 해도 말이지.’
그래도 사람을 번쩍번쩍 들어서 말에 올리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아니, 일단 사람을 든다는 것부터가 대단하지.’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말 위에 자리를 잡았다. 어젯밤 자야 한다고 몇 번이나 되뇌었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정신은 말똥말똥해지기만 했다.
‘청심원이라도 먹었어야 했나.’
스스로에게 농담을 던지며 란은 깊게 숨을 마셨다. 폐부를 찌르는 듯이 차가운 공기에 정신이 들었다.
‘좋아.’
그녀는 고삐를 단단히 붙잡고 등자를 꽉 디뎠다.
유스타프는 란을 한 번 돌아보고 자신도 말에 올랐다. 그가 손을 들어 말을 출발시켜 란도 그의 뒤를 바싹 따라붙었다.
문까지 가는 길은 이제 익숙한지 그렇게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면 오늘이 그날이라서 그렇게 느껴지는 걸까?
유스타프는 평소라면 농담이라도 건넬 란이 한마디도 하지 않는 걸 느꼈다.
그건 다른 기사단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주인님?”
루미에의 말에 란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 아니, 그냥.”
란은 입김을 가볍게 불어 내고 웃었다.
“새해가 다가오니 이런저런 생각이 들어서.”
“걱정이라도 있으신가요?”
“걱정이야 항상 있지.”
란은 부드럽게 말을 돌렸고, 루미에 역시 그걸 알아챘지만 모른 척 파고들었다.
“어떤 걱정이요?”
“그냥 이런저런?”
란은 그렇게 말하며 콧잔등을 찌푸렸다.
“겨울 걱정이랑, 내년에 새로 만날 황제 폐하랑―”
그리고 오늘 만날 시나.
문득, 란이 물었다.
“루미에.”
“네.”
“루미에는 운명을 믿어?”
“어느 정도는요?”
“운명의 상대, 같은 건?”
루미에의 주홍색 눈이 장난스럽게 찡그려졌다.
“지금 저에게 그걸 물으시는 건가요?”
“아, 그런가? 아니, 미안.”
란이 사과해 그가 웃었다.
“글쎄요. 그건 자기가 결정하기 나름 아닐까요?”
“나름이라고?”
“이 사람이 운명이다, 그렇게 자신이 정하는 거지요.”
“그렇구나…….”
“이건 제 생각일 따름이지만요.”
란은 희미하게 웃었다.
“아냐, 도움이 됐어.”
“운명의 상대는 왜 찾으십니까?”
부드럽게 끼어든 것은 블레인이었다. 란은 그를 향해 빙긋 웃었다.
“그런 게 존재할까 하고.”
블레인이 피식 웃었다.
“이미 만나신 거 아닙니까?”
은근슬쩍 한 걸음 깊숙이 들어오는 말에 란은 웃었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누님.”
그때 유스타프가 말을 늦춰 그녀와 말머리를 나란히 했다.
“응?”
란이 그를 돌아보자 유스타프가 물었다.
“같이 타시겠습니까?”
“어?”
“말 말입니다.”
“말이 불쌍하잖아, 요.”
란은 한 박자 늦게 ‘요’를 가져다 붙였고, 유스타프가 “말은 괜찮습니다.” 하고 답했다.
란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냐, 일행 멈추고 해야 하잖아요.”
이 겨울에 움직이기 시작해 열이 난 말을 멈춰 세우는 것부터가 부담이었다.
유스타프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란이 웃었다.
“대신 내려올 때는 같이 타요.”
“……알겠습니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새하얀 입김이 부서져 내리는 것마저도 화보 같다고, 란은 그의 옆모습을 힐끗 바라보며 생각했다.
일행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은색 아치 밑을 지났다.
아치는 여전히 반짝반짝, 눈 하나 쌓이지 않은 채로 빛나고 있었다.
말을 멈춰 세우고 기사들이 말의 몸이 식지 않게 감싸는 와중에 유스타프가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저 혼자 가겠습니다.”
란은 약간 놀랐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너무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유스타프도 놀랐지만, 그는 “얌전히 계세요.” 하고 속삭이고는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란은 서서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루미에가 잽싸게 그녀의 옆에 바싹 붙으며 물었다.
“왜요? 가주님이 운명의 상대가 아닌 것 같나요?”
“루미에.”
란은 웃었다.
“저는 들을 권리가 있는 것 같은데요.”
“그런 게 아니라―”
란은 뭐라고 말해야 할까, 생각했다. 그때 멀리서 작은 소리가 들렸고, 란은 고개를 휙 돌렸다.
“주인님?”
“지금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어?”
그녀의 말에 기사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꺄악!”
작은 비명 소리였다.
“사람이야.”
란이 말하자 루미에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 계절에, 이 설산에요?”
블레인 역시 고개를 저었다.
“사람이 아닐 겁니다. 살쾡이나, 그런 거겠지요.”
란은 힘주어 말했다.
“아냐, 분명히 사람이야.”
비명은 점점 작아졌고, 그럴수록 란은 초조해졌다.
시나가 틀림없는데!
란은 제 말을 잡아끌었다.
“그럼 나 혼자라도 갈래.”
“주인님!”
“백작님!”
루미에와 블레인이 당황해 동시에 외쳤다. 란은 있는 힘껏, 필사적으로 말 등을 기어 올라가듯이 올라탔다. 루미에가 그녀의 말고삐를 붙잡았다.
“루미에, 놔.”
“안 놓습니다. 대체 여기가 어디라고―”
루미에는 기가 찼고, 그건 블레인도 마찬가지였다. 란은 이를 악물었다.
“비켜.”
“알겠습니다. 제가 갈게요.”
루미에가 눈을 찌푸렸다.
“정말?”
란의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란 말이지요?”
“응. 꼭 구해야 해.”
란이 너무 절박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여서 루미에는 재빠르게 제 말에 올라탔다.
“알았습니다. 주인님께서 그러시다면 그러신 거겠지요.”
“루미에 경―”
블레인에게 루미에가 가볍게 눈을 찡긋해 보였다. 란이 절박하게 덧붙였다.
“꼭이야, 응? 루미에. 꼭!”
몇 번이나 당부하는 말에 의아해하면서도 루미에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 옆구리를 걷어찼다. 순식간에 멀어지는 루미에를 보며 란은 작게 숨을 내쉬었다.
초조함 때문에 심장이 크게 뛰었다.
만약 루미에가 못 찾아내면 어떻게 하지?
그래서 시나가 엉뚱한 곳으로 또 가면 어떻게 하지?
“백작님, 이게 대체―”
“분명히 사람 소리였어.”
란이 단호하게 말해, 블레인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라는데 어쩐단 말인가?
란이 이렇게 억지를 쓰는 일은 본 적이 없던 터라, 블레인은 잠시 생각하다가 다른 기사 몇 명을 더 불러서 루미에를 도우라고 보냈다.
란의 얼굴에 안도가 새겨졌다.
“고마워, 블레인 경.”
“아닙니다. 정말로 사람이라면, 라치아 영지민이니 도와야죠.”
그리고 어째서 여기에 들어왔는지도 추궁해야지.
블레인이 그렇게 생각하는데 산 위쪽에서 낮은 울림이 들려왔다.
솜털이 곤두서는 소리였다. 란은 고개를 돌렸다.
“산사태?”
그녀의 중얼거림에 블레인이 말했다.
“아뇨, 그런 소리는 아닙니다―”
그때 뭔가가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란은 입을 떡 벌렸다.
“비행형 마수!”
블레인이 이를 악물고 란에게 말했다.
“말에서 내려오십시오!”
“어? 어어―”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란은 허겁지겁 말에서 내려와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검은색 물체는 상당히 거리가 있을 텐데도 크기가 있었다.
‘뭐야, 너무 크지 않아……?’
란은 등에 소름이 돋았다.
날개와 날개 끝의 길이가 적어도 10여 미터는 되어 보였다.
“드래곤?”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니 블레인이 말했다.
“아닙니다. 머리 부분이 다릅니다. 다들 나무 밑으로!”
위에서 공격해오는 적을 상대하려면 나무 밑으로 숨는 게 가장 확실했다. 란은 눈앞의 동굴로 가면 되지 않나, 했는데 그건 선택지가 아닌 모양이었다.
란은 다른 기사들과 함께 허둥지둥 달려서 나무 밑으로 향했다.
아니, 향하려고 했다.
갑자기 몸이 휙 위로 딸려 올라가기 전에는 말이다.
순식간에 땅이 멀어졌고, 블레인 경의 경악한 얼굴과 외침도 멀어졌다.
란은 그제야 제가 마수의 발톱에 걸렸다는 걸 깨달았다.
‘어떻게?’
소리도 없이 이렇게 빨리?
그러나 곧 엄청나게 빠르게 작아져가는 땅 풍경에 소름이 돋았다.
“이스타리프!!”
그녀는 소리 질렀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 마수가 말했다.
“……가…… 아니…… 야…….”
등에 쭉 소름이 돋는 순간, 마수가 란을 휙 던졌다.
“―!!”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란은 두 번째 이름을 불렀다.
“칸드랄!!”
이름이 기억난 게 다행이었다.
아니, 이런 상황이니까 기억이 난 걸까?
“살려 줘!”
퍽!
강한 충격이 온몸을 덮쳤고, 란은 눈에 처박혔다.
너무 아파서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아프다는 건 살아 있다는 뜻이다.
일그러지는 시야를 들어 올리니 뱀의 하반신이 보였다.
남성의 상반신, 뱀의 하반신.
우슬라 공작가의 참격.
칸드랄.
그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굳어 있었다. 란이 고맙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그가 천천히 씹듯이 내뱉었다.
“내게 명령할 수 있는 건 우슬라의 가주뿐인 것을, 감히―”
‘아.’
생각지도 못한 분노에 란이 당황하는데 그가 내뱉었다.
“대가는 받아 간다.”
그러며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란은 “어?” 하고 작게 소리를 냈다.
‘시야가…….’
새까만 색.
어지러워서 토할 것 같았다.
‘눈이 안 보여.’
온몸이 아프고, 눈도 안 보이고.
란은 헛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떴지만, 그래도 역시 마찬가지로 깜깜했다. 눈을 감았을 때나 떴을 때나 큰 차이가 없었다. 눈을 비벼 봐도 마찬가지였다.
“읏―”
눈물이 솟구쳐 나왔다.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금방 얼어붙는 게 느껴졌다.
란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썼다.
‘나쁜 새끼! 개자식!’
란은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하지만 감히 그를 다시 부를 배짱은 없었다.
깜깜한 어둠을 더듬어 란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모든 게 막막해지는 걸 느꼈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한단 말인가?
그리고 갈 수나 있을까?
‘나 여기서 죽는 건가?’
갑자기 이게 운명처럼 느껴졌다.
제대로 된 주인공인 시나가 돌아오니까, 자신은 이제 필요 없는 거다.
란이 없어진 자리를 시나가 완벽하게 이어받는다.
란은 이를 악물었다.
비명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몇 걸음 옮기지도 못하고, 란은 뭔가에 걸려 넘어졌다.
눈밭에 얼굴이 처박혀서 눈 알갱이가 얼굴에 따끔따끔하게 박혔다.
아픈데, 일어날 마음이 들지 않았다.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다.
‘이러다가는 눈알이 얼어붙을 거야. ……하긴 어차피 안 보이는 눈이니까 상관없지.’
란은 눈을 감았다.
눈밭에 누워 가만히 있으니 추위가 그녀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내가 죽으면.’
유스타프는 어떻게 생각할까?
루미에는?
라치아 공작가 사람들도 슬퍼하겠지.
란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양팔에 힘을 줘서 상체를 세웠다.
‘안 죽을 거야.’
여기서 이렇게?
싫어, 절대 싫다.
란은 몸을 일으켜 세우고 더듬더듬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이스타리프…….”
얼어붙은 입술 사이로 란은 그녀를 불렀다. 다른 방법은 생각나지 않았다.
새까만 시야 안쪽에 푸른색 불꽃이 일렁이는 것 같았고, 그게 란이 기억하는 마지막이었다.
“아가씨!!”
블레인은 손을 뻗었지만, 그의 손은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옷자락을 스쳤다.
순간 모두가 얼어붙어 움직이는 것도 멈추고 란을 붙잡은 마수가 허공으로 올라가는 걸 바라보았다.
분명히 아까는 멀리서 오는 중이었는데, 마치 마법이라도 쓴 것처럼 가까이―
‘마법인가?!’
고등 마수 중에서는 간단한 마법을 쓰는 마수가 있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란을 붙잡은 마수가 순식간에 멀어져 갔다. 모두가 현실감 없이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안 돼!”
그때 누가 소리를 내질렀고, 블레인도 똑같은 심정이었다.
마수가 들고 있던 란을 허공으로 내던졌다. 작은 점인 그녀가 떨어지는 게 블레인의 눈에 느리게 보였다.
마수는 허공을 한 바퀴 빙글 돌더니 갑자기 푸드득 몸을 뒤틀고 그대로 추락했다.
쿵―
거리가 떨어져 있는데도 무거운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블레인은 숨을 삼켰다. 그는 저도 모르게 동굴 쪽을 바라보았다.
동굴 안은 조용했고, 어쩌면 바깥의 소리가 들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블레인은 그렇게 쉽게 루미에를 다른 곳으로 보낸 걸 후회했다. 그때 로스가 제 말에 올라타며 말했다.
“제가 가 보겠습니다!”
그 말에 침묵이 깨어지고 몇몇이 재빠르게 말에 올라타며 자원했다. 블레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살아 계실지도 몰라.”
하지만 말을 하는 자신도 확신이 없었고, 그건 듣는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로스는 말의 옆구리를 걷어차 달리기 시작했고 일행은 그 뒤를 따랐다. 나머지는 그 자리에서 대기했다.
동굴 안에 자신의 주군이 있으니까.
블레인은 이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유스타프를 무방비 상태로 둘 순 없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
기묘한 소리에 루미에는 고개를 돌렸다. 갸웃하고 귀를 기울여 보자 다시 비명이 들려왔다.
“사람 살려!!”
확실히 사람 목소리다.
‘어떻게 이 소리를 들은 건지.’
루미에는 혀를 차며 말을 그 방향으로 몰다가, 중간에 말을 포기했다.
쌓인 눈이 깊어지고 산세가 가팔라져 말에게는 무리였다.
눈이 단단해서 루미에는 부츠의 스파이크를 몇 번 확인하고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여깁니다!!”
그가 외치자 상대방이 다시 소리 질렀다.
“아아악!! 도와줘요!!!”
여자 목소리인데 성량이 어마어마했다. 잘못하면 저 소리 때문에 눈사태가 날 수 있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루미에는 속도를 더 올렸다.
눈 쌓인 나무들 사이로 목소리가 울려 방향감각을 흐리게 했지만, 그는 몇 번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곧 시야를 확보했다.
상대를 확인하고 루미에는 눈을 찌푸렸다.
희한한 옷차림을 한 여자였다. 그리고 그 뒤를―
루미에는 검을 뽑아 들고 여자를 지나쳐 달리며 말했다.
“나무 뒤로!”
그리고 그녀가 제대로 제 명령을 이행했는지 확인하지 않고 그대로 마수를 베어 넘겼다.
“캥!”
커다란 들개 같은 마수는 일격에 목이 베여 넘어갔다. 하지만 한 마리가 아니었다.
루미에는 차례로 들개를 쓰러트렸다. 네 마리째에서 다리를 물렸지만, 각반 때문에 이가 들어가지 않았고, 그는 제 다리를 문 상대의 목을 쳐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루미에는 검날로 개의 턱을 비틀어 제 옷에서 떼어 냈다.
그는 검을 털어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무 뒤에 아까의 여자가 보였다. 부들부들 떨고 있으면서도 멀리 도망가지 않은 게 용했다.
루미에가 물었다.
“넌 누구냐? 왜 이곳에 있는 거지?”
“그건 내가 묻고 싶은 거야! 넌 누구야! 여긴 어디고!”
울부짖듯이 외치는 여자를 보고 루미에는 멈칫했다가 그녀에게 걸어갔고, 그녀는 뒤로 물러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기라도 찾는 건가.
하지만 주변은 흰 눈뿐이었고, 그녀는 악을 썼다.
“가까이 오지 마! 이 코스프레 변태 새끼야!”
루미에는 순간 울컥했다.
코스프레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변태라니.
“내가 네 목숨을 구해 준 거 아닌가? 그런데 왜 내가 그런 말을 들어야 하지?”
그의 말은 정당했고, 여자는 혼란에 가득 찬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그건 미안해요. 그러니까, 나는, 여기가 도대체 어디죠?”
“라치아령. 빙벽.”
“그게 어디예요? 미국? 영국? 아니면 프랑스? 아니 겨울이니까 북유럽 쪽인가? 핀란드?”
중얼중얼 헛소리를 늘어놓는 걸 보자 제정신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그러니 이 계절에 빙벽에 들어왔겠지.’
루미에가 검을 꽂아 넣으며 말했다.
“일단 같이 가지. 내 주인님이 널 구해 오라고 하셨으니까.”
“주인…….”
여자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잠시 생각하더니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미에가 물었다.
“이름이 뭐지?”
“시나. 이시나요. 그쪽은요?”
“루미에.”
루미에는 짧게 대답하고 그녀의 팔을 잡아끌기 시작했다. 중간에 광증이라도 발작해서 도망치면 곤란하다.
시나는 그가 팔을 잡아당기는 게 짜증 났지만, 얌전히 따라가기로 했다. 그는 진짜 검을 가지고 있었고, 그 검을 다룰 줄 알았다.
개 비슷한 괴물 네 마리를 단숨에 베어 넘겼으니까.
그때 멀리서 목소리가 들렸다.
“루미에!”
“찾았어?”
“뭐야? 진짜 인간이야?”
저도 모르게 시나는 멈춰 섰고, 루미에가 힐끗 그녀를 보며 다독이듯이 말했다.
“괜찮아. 내 동료니까.”
“동료…….”
루미에의 동료들은 그와 마찬가지로 이상한 갑옷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시나를 보고 눈을 깜박였다.
“진짜 사람이잖아?”
“아니, 이 계절에 왜 빙벽에 들어온 겁니까?”
시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건 그녀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가을 산을 등산하는 중이었다. 등산이 취미인 젊은이는 드물고, 그녀는 혼자 산을 타는 걸 좋아해서 그냥 혼자 지리산을 타고 있었을 뿐이었다.
갑자기 어지럽다 하더니만 설원이었다. 당황해 헤매다가 저 괴물에게 쫓긴 거고.
시나야말로 이 상황에 대한 설명을 가장 듣고 싶었다.
루미에가 슬쩍 동료들을 보고 머리에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려 보였고, 모두의 표정이 묘해졌다.
“일단 돌아가지.”
“백작님은 귀도 좋아.”
다들 그렇게 말하고 다시 동굴 앞으로 돌아왔을 때,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았다.
루미에는 금방, 란이 없다는 걸 알아챘다.
“주인님은요?”
루미에의 물음에 블레인은 침음을 흘렸다.
“마수에게 낚아채졌어.”
그 간단한 말이 루미에는 순간 이해되지 않았다.
“네?”
그가 저도 모르게 되물었고, 평소보다 훨씬 더 오래 걸려 피곤한 얼굴로 유스타프가 동굴에서 나왔다.
그 역시도 상황이 이상한 걸 눈치챘다. 쭈뼛쭈뼛 서 있는 시나를 힐끗 보았다가 유스타프가 물었다.
“란은?”
“그게―”
블레인은 상황을 짧게 말했다.
루미에는 무릎에 힘이 쫙 빠졌다. 휘청하며 그가 뒤에 있던 말을 붙잡았다.
유스타프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서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눈만은 무섭도록 새파랗게 불타올랐다.
“어느 쪽이야?”
유스타프가 그렇게 묻고 제 말을 끌고 왔다.
“안내하겠습니다.”
블레인이 말에 올라타며 말했다. 그 말에 다른 기사들도 빠르게 말에 올라탔다.
시나는 당황해서 루미에의 팔을 붙잡았다.
“뭐예요? 어떻게 된 거예요?”
루미에는 그녀를 여기에 두고 가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란의 부탁을 떠올렸다.
꼭 구해야 한다고, 란이 그렇게 말했다.
루미에는 그녀를 제 말에 타게 하고, 그도 말에 올라탔다.
“꽉 잡아.”
그는 그렇게 말하고 유스타프의 뒤를 쫓아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흔들림이 심한데도 시나는 입을 꽉 다물었다. 그 침묵이 루미에는 고마웠다.
거친 길을 빠르게 달려 블레인은 중간쯤에서 멈춰 섰다.
이 이상은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멀리서 본 것이라 거리를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로스 경이 먼저 와서 찾고 있을 겁니다.”
유스타프는 휘파람을 불려고 했지만, 잘 불어지지 않았다. 그는 이를 악물고 호루라기를 거칠게 찾아서 물었다.
삐익―
차가운 공기를 가르고 날카로운 소리가 퍼졌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서 말을 탄 기사들이 나타났다.
“란은?”
유스타프의 물음에 모두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때 저쪽에서 소리치는 소리가 희미하게 났다.
유스타프는 말도 없이 박차를 찼다. 중간쯤에는 덤불이 빽빽해서 말을 두고 가야 했다.
유스타프는 말을 돌보지 않고 무조건 앞으로 내달렸다.
“여깁니다!!!”
유스타프는 로스의 품에 안긴 란을 보았다.
축 늘어진 몸. 새하얀 얼굴.
얼룩진 피.
발이 땅속으로 꺼져 드는 감각이었다. 심장을 칼로 후비는 것 같아, 유스타프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 앞에 도착했는지도 모르겠다.
“아직 숨 쉬고 계십니다!”
로스가 그렇게 외쳐서야, 유스타프는 숨을 토해 냈다. 그가 와락 로스의 팔에서 란을 빼앗듯이 안아 들었다. 힘없는 인형처럼 란이 축 처졌다. 로스가 놀라 말했다.
“머리를 다치신 것 같으니, 그렇게 다루면―”
“란? 란?”
로스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유스타프가 란에게 속삭였다.
“주군!”
로스가 이를 악물고 유스타프의 어깨를 꽉 잡았다.
“정신 차리십시오! 당장 백작님을 치료사에게 보여야 합니다!”
유스타프는 멈칫했다.
란의 가느다란 숨소리가 그의 귓가를 스쳤다.
유스타프가 말했다.
“들것을 만들어.”
“주인님!!”
달려온 루미에의 얼굴 역시 창백했다. 로스가 “아직 살아 계셔.” 하고는 힘주어 “들것을 만들자.” 하며 루미에를 잡아끌었다.
망토를 벗어서 순식간에 들것이 만들어졌다.
란의 머리를 고정하고 기사단원들은 일사불란하게 란을 옮겼다.
유스타프는 그 옆을 걸으며 몇 번이나 란의 숨을 확인했다.
겨울이라 그녀가 숨을 쉴 때마다 흰 김이 뿜어져 나왔고, 그게 자신의 생명줄처럼 느껴졌다.
하늘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커다란 소동이 일어났다.
란을 침대에 눕힌 뒤 시녀들이 그녀의 옷을 벗기며 남자들을 밖으로 내몰았고, 치료사만이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에 서서 유스타프와 루미에는 초조하게 방 안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아아악!!!”
안쪽에서 느닷없이 터져 나온 비명에 유스타프는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란!!”
흰 네글리제 차림의 란이 몸을 웅크리고 흐느끼고 있었다. 디모디아가 화급히 그녀를 몸으로 가리고 외쳤다.
“나가세요!”
키리가 달려와 유스타프를 밀어냈다.
“탈골된 팔을 맞춘 것뿐이에요.”
그러며 그녀가 문을 닫고 문밖에 섰다.
그녀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말했다.
“가주님.”
“란은? 괜찮은 건가?”
“진정하시죠. 그렇게 허둥지둥해 봐야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키리는 약간 흥미롭다는 얼굴을 하며 말했다.
“가주님이 이렇게까지 동요하실 줄은 몰랐는데요.”
유스타프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키리가 그런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며 말했다.
“그 높은 곳에서 떨어졌는데도 살아 계시니 운이 좋으십니다. 전신에 타박상을 입고, 동상에도 걸리셨지만 심한 건 아니에요. 팔이 빠진 건 맞췄고, 딱히 부러진 곳도 없으신 것 같네요.”
유스타프는 떨리는 숨을 토해 냈다.
도무지 똑바로, 제대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이마를 짚으며 낮게 말했다.
“그럼 이제 괜찮은 건가?”
“아뇨.”
키리의 말에 그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럼?”
“눈이 안 보인다고 하십니다.”
“―!!”
유스타프는 숨을 삼켰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듯한 침묵이 거실을 내리눌렀다.
오랜 침묵 후에 그가 물었다.
“회복할 가능성은?”
“글쎄요. 머리에 충격을 받은 것 때문이 아닌지, 치료사는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군요. 상황은 더 두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유스타프는 짤막하게 답했다.
키리는 지나치게 가라앉은 모습의 그를 보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는 다시 안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상황이 나아지면 알려 드리지요.”
그녀가 침실로 다시 들어가자 유스타프는 주먹을 들어 벽을 치려다가 멈칫하고 내렸다.
큰 소리가 나면 란이 놀라겠지.
그는 눈을 감았다.
‘안전할 거라고 약속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밖에 두고 가는 게 아니었다.
그녀를 안으로 데리고 갔어야 했다. 눈이 닿는 곳에 두었어야 했다.
저번에 들린 소리에 란이 무서워해서, 이번에 그런 일이 또 생길까 봐 밖에 두고 갔었던 건데.
‘마수라니.’
새까만 뭔가가 저 자신을 좀먹는 것 같았다. 누군가가 칼로 가슴을 후비는 것 같다.
란이 뭐라고 할까?
당장 라치아를 떠나겠다고 해도 그는 할 말이 없었다.
저주할까? 원망할까?
숨을 쉴 때마다 얼음조각을 삼키는 것 같이 고통스러웠다.
마음의 고통이 육체적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유스타프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떴다.
봉인이 오래 걸렸다.
푸른 불꽃이 예전보다 더 느린 속도로 타올랐고, 의식은 느리게 진행되었다.
뭔가가 벌어지고 있다.
위험한 일이 생기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런데도 널 놓아줄 수가 없어.’
자조하며 유스타프는 루미에에게 말했다.
“란이 구해 달라고 부탁한 사람이라고?”
“네. 손님 대접을 해 달라고 했습니다.”
루미에는 조용히 대답했다. 그의 어조 밑에 분노가 스며 있다는 걸 유스타프는 쉽게 알 수 있었다.
그건 유스타프, 자신을 향한 분노였다.
“그럼 부탁하지.”
유스타프의 말에 루미에는 주홍색 눈에 붉은 기를 띠며 그를 보았다가 말없이 거실을 나섰다.
어차피 그가 거기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더 있다가는 유스타프에게 원망을 퍼부을 것 같았다.
당신이 란을 붙잡았기 때문이라고, 그녀는 여기를 떠나 그녀의 삶을 살 계획이 있었다고.
다 너 때문이라고.
그건 유스타프의 탓이 아니다. 그건 자신도 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이 터져 나올 것 같아서 루미에는 그곳을 떠났다.
그가 찾아간 것은 시나의 방이었다. 손님이라는 말에 손님방으로 안내되었지만, 그 후로는 방치나 다름없었다.
시나는 들어온 루미에를 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기…….”
시나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아까 그분 괜찮아요?”
“아니.”
루미에는 짤막하게 답했고, 시나가 어깨를 늘어트렸다.
“그거 안됐네요.”
시나는 금발의 대단한 미인을 떠올렸다. 상황이 급박해서 얼핏밖에 보지 못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상당히 미인이라는 걸 알 수 있는 사람이었다.
시나가 이어 물었다.
“당신은 괜찮아요?”
루미에는 그 말에 시나를 뚫어져라 보았다. 새까만 눈동자에는 약간의 동정이 비쳐 보였다.
그녀는 완벽한 이방인이었고, 그와 란의 사연 따위는 모르며 유리된 존재였다.
그리고 사람은, 오히려 모르는 사람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기가 쉬웠다.
“아니.”
루미에는 그렇게 말하고 피식 웃었다.
“조금도 괜찮지 않아.”
그는 이를 악물었다.
“조금도, 조금―”
시나는 어쩔 줄 모르다가 어색하게 그의 허리를 두들겨 주었다.
“괜찮아질 거예요.”
그게 란이 괜찮아진다는 건지, 아니면 그가 괜찮아진다는 건지, 아니며 둘 다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루미에는 위로가 되는 걸 느꼈다.
예전이라면 그런 위로 따위 헛소리라고 쏘아붙였을 터였다.
‘하지만 나도 그러길 바라니까.’
란이 괜찮아지길.
그걸 간절히 바라니까.
루미에는 길게 숨을 내쉬고 말했다.
“주인님이 널 구해 달라고 부탁했으니, 그녀가 제대로 돌아올 때까지는 내가 널 돌볼 거야.”
그 말에 시나는 등을 토닥이던 손을 얼른 내리고 물었다.
“당신이요?”
“그래. 그래서 넌 왜 거기 있었던 거지?”
시나는 콧등을 찌푸렸다.
“나도 모르겠는데요.”
“뭐든 얘기해 봐.”
루미에는 그렇게 말했고 시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믿을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상당히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
란은 새까만 어둠을 노려보았다.
‘개새끼, 나쁜 새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목숨 구해줬다고 눈을 가져가냐.
어깨의 통증은 이제 거의 사라져 있었다. 세계수 연고가 대단하기는 대단한 모양이었다.
아직 붕대로 고정해 두고 있었지만, 아프지는 않았다.
여기저기 타박상을 입었을 뿐 부러진 곳은 없다고 해서 란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안 보이는 건 안 보이는 거지만.’
란은 신음을 내뱉으며 눈을 비볐다.
머리에 문제가 있는 걸지도 모르니 치료사가 ‘눈이 보일 수도 있다.’ 하고 말했지만, 란은 이게 보이지 않을 거라는 걸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치료사의 말에 매달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아냐, 헛된 희망을 품는 게 가장 큰 고문이라고 하잖아.’
포기하고 적응하려 하는 게 더 나을 거다.
‘눈 안 보인다고 죽는 거 아니잖아.’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평생 이제 이렇게…….’
란은 베개에 얼굴을 꽉 묻었다.
‘이렇게는 못 살아!’
너무 억울했다.
이렇게 빙의되는 걸 바란 적도 없었다. 죽도록 고생해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와 넌 필요 없으니 이 세계에서 사라져 줘. 이거냐?
‘아니면 우연인데 내가 너무 비약하는 건가.’
란은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거리다가 한숨을 다시 푹푹 내쉬었다.
‘그 마수…….’
그녀를 내던지기 전에 ‘아니야.’ 라고 했었다.
“……가…… 아니야.”
기억을 더듬어 입 밖으로 내어 보고, 전에 유스타프가 했던 말을 생각해 보면 누굴 찾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누군지는 뻔했다.
‘대현자 이브리아.’
자기를 봉인한 사람을 찾고 있는 거다.
‘이미 천 년 전인데.’
란은 작게 신음을 내뱉었다. 그녀는 침대에서 상체를 세우고 팔을 뻗어 더듬었다.
침대 끝을 확인하고 란은 기듯이 침대에서 내려와서 자리에 섰다.
“일어나셨어요?”
부드러운 목소리에 란은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응. 나 며칠이나 침대에 누워 있었어?”
“나흘이요.”
카라의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란은 그게 좀 위로가 되었다. 누군가가 다가와 제 손을 붙드는 걸 란이 손을 저어 제지했다.
“아니, 내가 혼자 좀 다녀 볼래.”
“하지만―”
“침실에서 나가지는 않을 테니까. 대신 다들 나가 줘.”
그 말에 침묵이 맴돌더니 “알겠습니다.” 하는 무거운 말이 들려오고 침실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났다.
란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허공을 더듬으며 걷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데 걷는다는 건 생각보다도 훨씬 무서운 일이었다.
‘왜 지팡이가 필요한지 알겠어.’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팔과 다리로 슬슬 주변을 탐색했다.
한두 걸음 옮기지도 못하고 멈추기도 여러 번 했다.
손에 가구가 걸리면 차라리 반가웠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더듬는 게 더 무서우니까.
란은 벽으로 이동했다.
벽에 손끝이 닿자 안심이 되어, 그녀는 벽에 손끝을 대고 크게 방을 돌아 걷기 시작했다.
맨발 아래 푹신한 러그의 감촉이 느껴졌고, 가구와 태피스트리가 걸리기는 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하지.’
란은 그런 생각을 하며 멈춰 섰다.
시나가 왔고. 자신은 장님이 되어버렸다.
봄에 약혼하자고 이야기했지만, 역시 그렇게 미뤄 놓기를 잘했어.
눈이 먼 사람과 약혼하는 건 아무래도 어려울 테니까.
다시금 눈물이 솟구쳐 올랐다.
나흘이나 침대에서 울고 또 울었는데도, 아직도 눈물이 나오는구나.
란은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그대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어차피 안 보이니까, 눈물이 흐르든 말든 시야가 좁아지는 일은 없다.
방을 한 바퀴 도는 데에 얼마가 걸린 건지도 모르겠다. 중간에 창문이 있어서 창문을 열었다가 닫아 보기도 했다.
간신히 침대에 돌아왔을 때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 버려서 란은 그대로 쓰러지듯 잠들었다.
꿈은 선명하다.
란은 새하얀 공간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고, 곧 그 공간을 가르며 등장한 표범을 보고 입을 벌렸다.
처음, 그녀가 정령을 만났을 때 보았던 표범 정령이었다.
아마도 최상급 정령이 아닐까 했었던.
“프하니아스.”
그가 부드럽게 란을 불렀다.
표범 머리에, 인간의 상체, 여섯 장의 날개, 표범의 하체.
그리고 여전히 표범 머리지만 다정한 얼굴이었다.
란은 또 눈물이 나서 입술을 꽉 깨물고 양 눈을 비볐다.
“안녕하세요.”
간신히 인사하자 표범이 살며시 미소 지었다.
“이스타리프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란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이스타리프에게요?”
“그래. 그리고 칸드랄에게도.”
그 이름에 란이 움찔했다. 그녀의 얼굴에 분노가 서리는 걸 보고 정령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인간에게 사역하는 정령들은 자존심이 강하지.”
표범은 그렇게 말하며 손을 저어, 예전처럼 구름으로 된 푹신한 의자와 탁자를 만들어 냈다.
란은 얌전히 그 의자에 앉았다. 몸을 폭 감싸는 느낌이 기분 좋았다.
표범은 탁자 앞에 네 다리를 꿇고 앉았지만 그래도 란보다 시선이 훨씬 더 위에 있었다.
“인간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인간의 명령을 듣는 걸 가장 싫어하거든.”
그렇게 말하고 표범이 후― 하고 길게 숨을 불자 금빛 반짝거리는 안개가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정령의 숨에서는 봄 향기가 났다.
“눈은 칸드랄과 이야기했다. 일주일 정도 후면 뜨일 게야.”
“정말요?!”
란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펄쩍 뛰었고 표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처럼의 진귀한 자가 정령에게 원한을 품게 하는 건 싫으니까. 게다가 샬이 널 마음에 들어 하더구나.”
그제야 란은 ‘샬’을 떠올렸다. 차라리 그녀를 부르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고맙습니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란은 여러 번 인사를 했고, 표범은 눈을 깜박이고 재미있다는 얼굴을 하더니 말했다.
“그럼 그대는 내 이름도 알까?”
란은 그 말에 살짝 입을 벌렸다. 눈치를 살피는 그녀의 모습에 표범은 흥미진진한 표정이 되었다.
“알고 있는 건가?”
“아뇨, 저도 모르겠어요. 몇 개 더 이름을 알지만 맞는지는…….”
표범은 얼룩덜룩한 제 꼬리를 휙 휘두르더니 말했다.
“그대는 이번 일로 경각심을 얻는 게 좋아. 정령의 이름을 부르고 힘을 쓸 때의 대가에 대해서 말이야.”
란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이미 충분히 경각심을 얻었어요.”
피곤한 얼굴로 란이 힘주어 말했다. 이제 다시는 정령에게 먼저 부탁하지 않으리라.
‘아니, 그럴 수 없는 상황이기는 했지만.’
아니었으면 죽었을 테니까.
이제 와 눈이 뜨인다고 생각해 보니, 죽는 것보다는 눈이 보이지 않는 게 더 나은 듯하다.
인간이 어쩜 이리 얄팍할까.
란은 스스로에게도 질리는 기분을 느끼며 그에게 말했다.
“이제 정령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을 거예요. 절대. 하지만 이스타, 아니, 청염이 이야기를 했다고요?”
“그래. 이스타리프는 인간을 좋아하거든. 장난치는 게 즐겁다나.”
표범이 고개를 갸웃했고, 그제야 란은 청염이 항상 고개를 휙휙 꺾어서 자기를 놀라게 하던 게 기억났다.
“그, 그렇군요.”
하지만 악의보다는 호의가 낫다.
“게다가 네가 불렀는데 가지 못한 것 때문에 미안해하고도 있고. 하지만 정령이라고 해도 두 군데에 동시에 나타날 수는 없으니까.”
“아―!”
란은 작게 소리를 냈다.
청염을 유스타프가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러도 오지 않았던 거구나.
그 ‘문’을 봉인하는 의식 중이라 그러했던 거다.
란의 어깨가 축 처졌다.
“그랬군요. 그럼 그녀가 그, 당신에게 부탁한 건가요?”
“그래. 칸드랄과 중재를 좀 해 달라고 말이지.”
“그거 진짜 감사한 일이네요.”
덕분에 눈을 다시 뜨게 되었으니, 란은 청염에게 만세 삼창이라도 해 줄 용의가 있었다.
“그리고 어둠이 깨어나고 있다면서?”
표범의 물음에 란은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래서 지금, 이브리아를 찾아다니는 것 같아요. 천 년 전에 사라진 사람을 말이에요.”
그녀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시나가 이곳으로 오게 된 것도 다 그 어둠, 델판토 때문이었다.
이브리아를 찾으러 다니다가 우연히 다른 공간의 시나를 발견하고, 검고 긴 머리카락의 그녀를 이브리아라고 착각해서 끌고 온 거였다.
‘아, 그래서 마수를 보냈던 건가.’
시나를 붙잡기 위해서.
‘엉뚱하게 내가 잡혀 버렸지만.’
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령님은 뭔가 들은 게 없으신가요? 다시 봉인하는 방법이라든가……?”
표범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 란은 적당한 호칭으로 그를 불렀다. 표범은 금색 눈을 깜박였다.
“그건 내가 말해 줄 수 있는 게 아니구나.”
란이 테이블을 짚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역시 아시는 건 있는 거죠?!”
“네가 원하는 게 있고, 그걸 내가 너에게 주려면 너는 대가를 지불해야 해.”
란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어떤 대가를요?”
“너는 그걸 치를 수 없을 거고, 나는 말하지 않을 거다.”
그렇게 말하고 표범이 다리를 펴 자리에서 일어났다.
란이 손을 들었다.
“저기, 저는 이 이야기가 잘 끝난다고 읽었거든요? 그러니까 잘 끝나지 않을까요?”
저도 모르게 확인이라도 받는 것처럼 그녀에게서 말이 흘러나왔다. 표범이 잠시 란을 바라보다가 부드럽게 말했다.
“이미 너무 많은 게 바뀌었지. 네가 들은 이야기와 지금 일은 하나도 맞지 않아. 그렇지?”
표범의 되물음에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제 불확실성의 세계에 온 것 같구나.”
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말은, 우리가 질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유스타프가 죽을지도…….’
“지, 지금이라도 어떻게든 흐름을 원래대로 하면-”
표범은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이미 틀어진 것을 원래대로 돌릴 수는 없다. 돌아가라.”
“잠깐만요. 깨우실 거면 그냥 부드럽게 깨워 주시면 안 될까요?”
표범이 씩 웃었고, 란은 발밑이 툭 꺼지는 걸 느꼈다.
“흑!!”
란은 버둥거리다가 팟 눈을 떴다.
‘아, 진짜 좀.’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표범과 나눈 이야기가 아직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아냐, 아직 모르는 거야.’
유스타프가 시나가 좋아질 수도 있잖아? 그러면, 그러면—
원래의 흐름대로 될 수도 있는 거 아냐?
하지만 그렇게 되면 괴롭겠지.
모순되는 감정에 란은 끙끙거리다가 눈을 문질렀다.
아직 눈앞은 깜깜했다.
‘하지만 일주일 후에 눈을 뜨게 된다니까.’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더듬어서 침대에서 내려오는데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귀를 기울이니 조용하다.
‘밤인가?’
모두가 자고 있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물 마시고 싶어.’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더듬더듬 물 컵을 찾았다.
한참 후에 그녀는 침대 협탁 위에 놓인 물병과 물컵을 찾을 수 있었다. 이미 컵 안이 채워져 있어서 그녀는 살며시 맛을 확인하고, 안에 든 게 물이라는 걸 확인하자 정신없이 물을 마셨다.
잔을 내려놓는데 묘하게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란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기 누구 있어?”
하지만 만약 시녀가 있다면, 자신이 물 마시는 걸 보고 당장 도와주러 왔을 텐데?
‘뭐지?’
갸웃하고 란은 입을 열었다.
“유스타프?”
소파에 앉아 있던 유스타프는 그녀가 제 이름을 부르는 순간 쿵 하고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침묵하며 앉아 있으려니 란은 고개를 갸웃갸웃하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천천히 란은 허공으로 손을 뻗어 더듬더듬 앞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유스타프는 지금이라도 말을 걸어야 하는지, 그럼 그녀가 놀라지 않을지, 이 한밤에 그녀의 방에 있는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란을 바라보았다.
시녀들이 번갈아 밤새워 란을 보살피고 있었고, 오늘은 그녀들을 쉬라고 하고 유스타프가 란을 지켜보려 온 것이었다.
소다와 카라는 붉어진 눈으로 ‘침대에서 나오지 않고 계세요.’ ‘울기만 하십니다.’ 하고 번갈아 말했고, 디모디아와 키리 역시 고개를 살짝 저었다.
치료사 역시 눈이 고쳐질 가능성을 묻는 말에 “죄송합니다, 각하.”라는 말만 할 뿐이었다.
아니, 사실은 낮에 그녀를 보러 올 용기가 없었던 것뿐인지도 모른다.
란이 지독하게 보고 싶었지만, 그녀가 자신을 향해 저주를 퍼붓는 건 듣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이렇게 밤에 살짝 찾아와서…….
‘비겁자.’
스스로를 향해 유스타프는 자조하고 란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레이스가 달린 잠옷을 입고 있었다. 금빛 머리카락은 오래 내버려 둬서 멋대로 등허리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무릎을 살짝 덮는 길이의 잠옷 때문에 그녀의 가느다란 종아리와 흰 맨발이 고스란히 보였다.
초점 없는 에메랄드 색 눈동자가 희미한 불빛 아래서 빛났다.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걷던 란이 뭐에 걸렸는지 엇 하며 휘청했고, 유스타프는 저도 모르게 달려 나가 그녀를 붙잡았다.
란은 눈을 크게 떴다.
붙잡히고 붙잡은 채로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란은 자신의 허리를 붙잡은 팔을 손끝으로 더듬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흰 손끝이 그의 어깨에 닿았다가 목에, 그리고 얼굴에 닿았다.
부드럽게 섬세하게 란이 그의 얼굴을 쓰다듬어 보고 웃었다.
“뭐야, 유스였잖아?”
그 웃음이 유스타프의 가슴에 들어와 박혔다.
숨 쉴 때마다 삼켜지는 얼음조각이 다 녹아 사라지는 것 같았다. 심장을 후비던 고통도 사라지고, 그냥 모든 게 다 녹아내렸다.
그녀의 미소 하나에, 아무렇지도 않은 그 말 한마디에.
란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그의 눈가와 뺨을 훑고 입술을 눌렀다.
“유스, 맞지?”
불안한 표정이 설핏 그녀의 얼굴을 스쳐 유스타프는 “네.” 하고 간신히 대답했다.
짧은 대답인데도 목소리가 떨려 나오는 게 느껴졌다.
“그런데 왜 모른 척 답하지 않았어?”
“놀라실까 봐.”
아까보다 좀 더 매끄럽게 말이 나왔다. 유스타프가 조심스럽게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소파로 가도 될까요?”
“응.”
란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며 팔을 벌렸다.
“걸어서는 못 가.”
유스타프는 저도 모르게 웃고 그녀를 안아 들었다. 순간 그는 그녀의 얇은 실크 옷감 너머로 느껴지는 맨살의 온기와 부드러움에 잠시 움찔했다가 한숨을 내쉬고 그녀를 소파로 옮겼다.
란은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찰싹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보이지 않으니 떨어져 있는 건 싫었다.
유스타프가 그녀의 등을 느리게 쓸어내리며 물었다.
“악몽이라도 꾸신 겁니까?”
“응? 으응, 떨어지는 꿈.”
그녀의 말에 유스타프는 움찔했다. 그가 그녀를 힘주어 안으며 말했다.
“제가 있습니다.”
란은 가볍게 웃었다가 말했다.
“유스.”
“네.”
“혹시 말야…….”
“말씀하십시오.”
“시나, 만났어?”
유스타프는 순간 그게 누구냐고 되물을 뻔했다가 간신히 그게 란이 구하라고 한 여자 이름이라는 걸 알았다.
그는 보고를 듣고 얼핏 보기만 했지,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란이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알았으니 그렇게 말할 수는 없어서 유스타프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만났습니다.”
“……어때……?”
“좋은 사람 같더군요.”
잘은 모르지만, 하여튼.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상황에서 란이 이름까지 알고 있는 걸 보면 그 여자에게 상당히 신경 쓴다는 말이고 그렇다면 악담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란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유스.”
“네.”
“잘까.”
“주무시겠습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란이 고개를 들고 그의 얼굴을 손끝으로 훑은 후에 키스했다.
“잘까?”
그녀가 다시 물은 말은 의미가 너무 뚜렷해서, 유스타프는 순간 침묵했다.
란은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둠 속에서 사람은 생각보다 훨씬 더 뻔뻔해질 수 있었다.
얼굴 하나 붉히지 않고 그런 말을 하고 란은 침묵 속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유스타프가 그녀의 허리를 강하게 붙잡았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뺨에 부드럽게 와 닿았고 그가 속삭였다.
“그건 지금 청혼하시는 겁니까?”
“……어?”
생각지도 못한 말에 란은 당황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란은 그가 농담을 하는 건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유스타프의 입술이 그녀의 뺨을 스쳐 광대를 지나 눈가를 지그시 눌렀다.
“아니면 제가 모르는 다른 뭔가가 있나요?”
란은 순간 할 말이 없어졌다.
“아니면 제가 부인 말고 다른 사람과 잠자리를 할 파렴치한으로 보이셨습니까?”
그런 짓은 아버지가 하는 걸 실컷 보았고, 어머니가 어떻게 망가지는지도 보았다. 그건 싫다 못해 역겨웠다.
란이 더듬더듬 물었다.
“결혼?”
“네.”
대답하고 유스타프는 잠시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물었다.
“올봄에 약혼하기로 하지 않았었나요?”
“그게…… 그러기는 했지만…….”
“싫어지셨습니까?”
유스타프의 목소리는 담담해서, 란은 입을 꾹 다물었다. 유스타프는 말없이 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길게 숨을 내쉬고 란은 제 마음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기로 했다.
“유스.”
“네.”
“나 아직도 좋아해?”
이게 확인하고 싶었던 거다. 란의 말에 유스타프는 그녀의 턱을 붙잡고는 거칠게 키스해 왔다. 란은 눈을 크게 떴다.
거칠고 집요한 입맞춤이었다. 그의 커다란 손바닥이 그녀의 등을 쓸어 올라와 뒷목을 붙잡고 더 깊게 들어왔다.
지나친 자극에 눈물이 고였다.
란은 그의 어깨를 붙잡으며 몸을 비틀었고 그러자 유스타프가 그녀를 소파에 눕히며 꽉 눌렀다.
“아, 유―”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다시 입맞춤이 이어졌다.
눈이 안 보이니 모든 게 더 민감해져서 란은 숨을 허덕였다.
그가 그녀를 소파에 내리누르는 무게와 열기에 란은 신음을 내뱉으며 그를 꽉 끌어안았다.
무섭다기보다는 기묘한 안도감이 그녀를 감쌌다.
그의 아래에서 그녀는 완벽하게 안전했다.
그가 입맞춤을 끝내고 거친 숨을 삼키며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귓가에 속삭였다.
“아뇨, 좋아하는 것 그 이상입니다.”
란은 고양감에 저도 모르게 웃었다. 그의 무게가, 열기가 기분 좋았다.
마음속이 꽉 차오르는 것 같아.
“하지만, 난 눈도 멀었는데―”
조심스럽게 말하자 “눈은 제가 있습니다.” 하고 유스타프가 대답했다.
“유스.”
“네.”
란의 손이 그의 등에서 어깨로, 목에서 뺨으로 올라와 그의 양 뺨을 감쌌다.
보이지 않는 그에게로 초점을 맞추려고 애쓰며, 란은 보이지 않는 것에 감사하고 말했다.
“만약에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되면, 그때는 솔직하게 말해 줘.”
“그런 일은 없습니다.”
유스타프가 눈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건 모르는 거잖아.”
란의 말에 유스타프는 단호하게 말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럴지도 모르지만, 저는 아닙니다.”
그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아 고개를 돌려 손바닥에 부드럽게 입술을 가져다 댔다.
“만약 라치아를 떠나시고 싶으시면―”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솔직하게 말해 주십시오.”
“떠나고 싶지 않아.”
“그럼 제발 있어 주세요.”
애원하듯 말하며 유스타프가 살며시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
“응.”
란은 작게 대답하고 희미하게 웃었다. 몸에서 힘이 쫙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유스타프는 시나를 만났어.
그녀가 좋은 사람이라고도 했어.
하지만 그는 여전히 날 좋아해.
‘그리고 이제 눈도 나을 거야.’
아, 이 말을 그에게 해야 하는데.
하지만 그보다 한번에 긴장이 풀린 탓인지 참을 수 없을 만큼 졸음이 밀려왔다.
란은 그대로 기절하듯이 잠들었다. 갑자기 란이 축 늘어져 유스타프는 놀라 그녀를 붙잡았지만, 곧 잠든 것뿐이라는 걸 알았다.
“대체…….”
그는 한숨을 내쉬고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침대로 옮겨 내려놓는데 그녀의 손이 그의 옷자락을 꼭 쥐고 있었다. 슬쩍 빼면 빠질 것 같지만, 빼고 싶지 않아서 유스타프는 그녀의 침대 옆에 앉았다.
그리고 그녀가 옷자락을 놓을 때까지, 아니 놓고 나서도 한참을 잠든 란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동틀 때가 되어서야 그녀의 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