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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두 갈래의 길


Chapter 1. 두 갈래의 길 바람 불지 않는, 라치아의 겨울치고는 좋은 날씨였다. 정원에는 눈 조각상과 눈 등불이 여기저기 서 있었다. 깨끗하게 다져진 눈길 위로 썰매들이 속속히 도착했다. 모두가 마법 장판인 ‘다사’로 몸을 칭칭 두르고 와서 그렇게 춥지 않다고 이야기했다. ‘이동형 전기장판이라니.’ 마법이 가능한 세계라 멋지다. ‘사실 현대 사회에서도 배터리의 소형화는 큰 문제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얼음수정은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축적하고 있고, 그걸 마법이라는 다양한 형태로 뽑아낼 수 있다. ‘앞으로 진짜 많은 게 바뀌겠지.’ 란은 그런 생각을 하며 가신들을 맞이했다. 일루미니티 백작은 장남만 성에 남겨 두고 두 아들과 딸을 데리고 왔다. 루루는 눈을 반짝이며 란에게 숙녀처럼 깊게 인사했고, 란 역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레이디를 대하듯 마주 인사했다. 시녀들은 백작의 두 아들을 보며 킥킥거리고 눈웃음을 보내고는 했다. 란스 남작 부부 역시 딸과 아들을 데리고 왔고, 와일드 남작 부부는 이미 아들들이 성에 있었기에 편하게 성으로 왔다. 모두가 입을 모아 성 안 장식의 아름다움을 칭찬했다. 손님방을 배정하고 손님들을 접대하는 동안 금방 시간이 흘러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청염 기사단 역시 겨울 사냥을 끝내고 돌아왔다. 부상자도 몇 있었지만, 심하지 않다고 유스타프가 말했다. 12월 31일에서 1월 1일로 넘어가는 연회는 밤새도록 열렸다. 웃고 있지만, 란은 긴장으로 뒷덜미가 빳빳해지는 것 같았다. 만이 아니라 한국처럼 연으로 나이를 세는 이곳은 신년이 되자마자 유스타프가 성인이 되며, 그러면 가주직 역시 그의 것이다. 모두를 초대한 자리이니 란은 그걸 확실하게 해 두고 싶었다. 12시, 신년을 알리는 시계 소리가 무도회장에 크게 울려 퍼지자 란은 모두를 조용히 시키고서 단 위에서 유스타프에게 깊게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청염을 떨치시길.” 모두가 고요한 가운데에 그걸 바라보았다. 공식적으로 란이 유스타프에게 가주직을 넘기는 모습을 모두가 보고 있었다. 유스타프는 잠시 란을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불꽃의 가호가 그대에게.” 란이 싱긋 웃으며 허리를 펴고 돌아서서 말했다. “즐거운 신년 보내시길.” 그러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입을 모아 외쳤다. “유스타프 가주님 만세!” 유스타프가 란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새해 첫 춤은 저에게 맡겨 주시겠습니까?” “기꺼이요.” 란은 웃으며 플로어로 나왔다.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시작하자 둘은 플로어 위를 미끄러지듯 춤췄다. 에메랄드 홀의 대리석은 거울처럼 반짝였고, 금색 빛무리들이 회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황금빛 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오는 샴페인과 달콤한 꿀 술, 도수가 있는 과일주. 생기 있게 장식된 생화와 길게 늘어진 매끄러운 비단 리본과 반짝거리는 장식들. 완벽한 신년회다. 란은 그렇게 생각했다. “유스타프.” “네.” “이제 유스타프에게 존댓말을 듣는 것도 마지막일까.” 그녀의 말에 그의 푸른 눈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란이 빙긋 웃었다. 은회색 드레스를 입고, 드워프에게 선물받은 푸른색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차고, 밀빛 머리카락을 보석 알처럼 땋아 올린 후 차가운 별빛처럼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장식을 달고 있는 란은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술과 더위 때문에 양 뺨은 장밋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입술은 촉촉한 분홍빛이었다. 무도회장은 온풍기를 펑펑 틀어 대서 춤을 추면 약간 더울 정도였다. “이제 유스타프가 가주니까.” “그렇지요.” “공식으로 허가를 받으려면 물론 황궁에 연락해야 하지만, 가신들 앞에서 이야기한 거니까―” “오늘 이야기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신년회 때 이야기하겠다고 했잖아?” “그게 지금일 줄은.” 따로 모일 자리를 가진 다음에 이야기할 줄 알았다, 하는 유스타프의 말에 란이 입을 비죽였다. “이런 건 공개적으로 모두가 보는 앞에서 땅땅 선언하는 게 좋아.” “그건 그렇지만.” 유스타프가 그녀의 허리를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유스?” “불안합니다.” “뭐가?” 란이 눈을 크게 떴다가 찡그리며 물었다. “누가 인정하지 않을까 봐? 인정하고 말고 할 게 뭐 있어? 게다가 란스 남작이나 와일드 남작이나 네 편이잖아. 일루미니티 백작도 라치아를 거스른 적은 없었어. 게다가 너만큼 훌륭한 후계자가 어디 있다고 그래?” 딴소리하는 사람이 있으면 말해. 내가 혼내 줄게. 란이 씩씩거리는데 유스타프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했다. “누님이 가 버리실까 봐요.” “어?” “제게 가주직을 넘겼고, 더는 라치아에 아무런 미련도 없으니 그냥 떠나실까 봐 불안합니다.” “그런…….” 란은 당황해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고 했었잖아.” 란이 작게 말했다. “그랬지요.” “들어 보기 전까지는 떠나지 않아.”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어쩐지 쓴웃음 같은 미소라 란은 불안해졌다. “왜? 더는 아니야?” “아뇨, 그게 아니라…….” 유스타프는 눈을 깜박이다가 말했다. “나중에 이야기하지요.” “응.”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악이 끝나고 둘은 맞절을 한 후에 플로어에서 물러났다. 이어 두 사람 모두에게 춤 신청이 쏟아져서 란은 정신없이 연달아 네다섯 곡을 췄다. 그러고서 란은 슬쩍 잔을 들고 기둥 사이로 빠져나와서 섰다. “발은 괜찮으십니까?” 돌아보니 루미에라 란은 웃었다. 청염 기사단 제복을 입은 그는 제법 멋있어서, 몇몇 시녀들이 한숨을 흘리게 만들었다. “춤 안 춰?” 질문에 루미에가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고 란은 “아.” 하고 작게 속삭였다. “춤 못 추는구나.” “배운 적이 없어서.” “나도 사실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계속 발만 밟고 있고…… 루미에를 가르칠 정도가 되면 좋을 텐데.” 중얼거리다가 란이 웃으며 잔을 홀짝이곤 말했다. “서툴러도 괜찮으면 출까?” 루미에의 주홍색 눈이 반짝했다. “정말이십니까?” “응. 하지만 여기서 춤을 추면 사람들이 우리를 비웃을 테니까―” 너무 못 추는 두 사람을 보면서 슬퍼하겠지, 하고 란이 빠르게 마저 잔을 비운 후에 말했다. “나가자.” 둘은 발코니로 나왔다. 반원형으로 생긴 발코니는 제법 넓이가 있어서, 그럭저럭 대여섯 명이 서 있을 수 있는 정도의 크기였다. “추워~” 란이 비명처럼 몸을 움츠리며 말하자 루미에가 얼른 망토를 벗어서 둘러 주었다. 그녀가 얼른 그의 손을 잡아당겨 하나는 제 허리에, 하나는 맞잡고 말했다. “얼른 추자. 봐 봐, 이렇게 손을 얹었으면 스텝은―” 란은 제 발을 내려다보며 설명하려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진지하게 들을 자세를 하고 있던 루미에가 의아해져서 제 발을 내려다보았다. 부츠에 구멍이라도 난 걸까? 하지만 부츠는 깨끗했고, 오늘을 위해 열심히 닦아서 반짝거렸다. “주인님?” “아니, 진짜 미안해, 루미에. 나 남자 스텝은 모르겠어.” 와, 나 취했나 봐. 그렇게 말하고 란이 그를 당겨 빙글 돌기 시작했다. 그녀가 상기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냥 우리 마음대로 추자. 춤은 다음에 선생님을 붙여 줄게.” 루미에는 곤란한 얼굴을 했다가 웃었다. 그가 빙글빙글 돌며 말했다. “잘은 모르지만, 확실히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지?” 돌다가 그녀는 결국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루미에가 그녀를 단단히 붙잡았다. “그렇게 도시니 어지러우시죠.” “루미에는 괜찮아?”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란이 ‘후우―’ 하고 길게 숨을 내쉬며 비틀비틀하다가 그에게 안기듯 기댔다. 루미에는 그녀의 등에 손을 가져갔지만 대지 못하고 내려놓으며 물었다. “언제 출발하실 겁니까?” “응?” “이제 유스타프 도련님이 가주가 되었으니까요.” “아―” 루미에가 살짝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설마 절 두고 가시거나 하는 거 아니시겠죠.” “그거 말인데. 어쩌면 머무르게 될지도 몰라.” 란의 말에 루미에의 턱이 살짝 굳었다. 그는 한참 아무 말 없이 란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뭐든 주인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될 겁니다.” 란이 후후 웃었다. 그리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더는 밖에 못 있겠다. 추워―” “들어가죠.” 실내로 들어오자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역시 온풍기 열기에 익숙해진 얇은 옷차림으로 이 겨울에 밖을 나가는 건 무리지.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목을 감싼 초커를 어루만졌다. 그사이에 차가워진 금속의 감촉이 느껴졌다. 추운 배 속을 달래려 란은 시종에게 손짓해서 술을 한 잔 더 가져오게 했다. 루미에가 말했다. “계속 술만 드시면 속이 상하십니다. 먹을 거라도 가져오지요.” “어? 응, 고마워.” 싱긋 웃으며 말하자 루미에는 음식들이 늘어선 코너를 향해 갔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그 자리를 유스타프가 채웠다. “추운데 왜 나갔다가 오십니까?” 란은 그 말에 히죽 웃었다. “루미에에게 춤 가르쳐 주려고 했는데, 남자 스텝은 하나도 모르겠더라.” “아.” 유스타프는 그렇게 짤막하게만 말했다. 란이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유스는? 춤 많이 췄어?” “충분히 췄습니다.” “아직 추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은데―” 란이 놀리듯이 말해서 유스타프는 그녀를 힐끗 바라보고 말했다. “제가 춤을 추고 싶은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요.” “오? 누구야?” 유스타프가 손을 내밀어 란은 눈을 크게 떴다가 웃었다. “또?” “싫으십니까?” “싫지는 않지만. 아직 잔을 덜 비웠는걸.” 란이 제 손에 들린 꿀 술을 들며 말하자 유스타프가 그 잔을 당겨서 제가 다 마셔 버렸다. 빈 잔을 옆의 시종에게 건네고 유스타프가 다시 손을 내밀어 란은 그 손을 잡았다. 킥킥 웃으며 플로어에 올라서서 란이 속삭였다. “유스타프랑 출 때가 제일 편하더라. 나도 더블릿을 잘 추는 것 같고. 음음.” “취하셨군요.” “응, 취했어.” 방긋 웃으며 란이 말해서 유스타프는 곤란한 얼굴을 했다. “이야기할 게 있었는데요.” “무슨 이야기인데?” “취한 상태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취해도 멀쩡해요.” “취했는데 어떻게 멀쩡합니까?” “멀쩡하니까.” 란이 진지한 얼굴로 말해서 유스타프는 한숨을 내쉬었다. 춤을 끝내고 란은 유스타프를 복도로 잡아끌었다. 자신을 잡아끄는 그녀의 손을 유스타프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었지만, 그는 그 대신에 순순히 그녀의 손을 따랐다. 연회장은 시끄러웠지만, 정문이 아니라 밖의 정원으로 나 있는 회랑에 이어지는 뒤편의 복도는 조용했다. 여기로 오가는 사람은 없었다. 어둡고 조용한 복도 너머에서 연회장의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말해 봐.” 란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유스타프가 “나중에요.” 하고 돌아서는 걸 그녀가 붙잡았다. “아니, 지금. 그 조건 말하는 거지? 이야기해 줘.” 정말로 난 멀쩡하다고. “게다가 그 이야기를 듣지 않으면 어째 잠도 안 올 것 같단 말이야.” 유스타프는 그 말에 그녀에게 돌아서서 말했다. “누님께서 듣겠다고 우기신 겁니다.” “응, 응.” 란이 제 가슴을 두들겼다. 유스타프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말했다. “누님을 라치아 호적에서 제할 겁니다.” 충격이 란을 휩쓸고 지나갔다. 살짝 벌어진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말이 아니라 가쁜 숨이 잇새로 흘러나왔다. 란은 바닥을 내려다보고 숨을 내쉬었다. ‘술 다 깼어.’ 지금 한 방으로 확실하게 술이 깼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고 말했다. “그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어.” 의기양양하게 말하려고 했지만 역시나 목소리가 떨려서 란은 부끄러워졌다. ‘아, 생각보다 더 충격이구나.’ 그럴지도 몰라. 그럴 수도 있지. 그랬는데, 막상 눈앞에 현실로 닥치니 너무나 충격을 받아서 당황스러웠다. 눈물마저 찔끔 고이기 시작해서 란은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그녀가 말했다. “알았어. 그럼.” 최대한 빠르게 이곳에서 나가 줄게. 그 말이 나오지 않아서 란은 그대로 몸을 휙 돌렸다. 유스타프에게 우는 걸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누님.” “나, 먼저, 들어갈게.” 란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해 유스타프가 뒤에서 그녀를 불렀다. “다 듣고 가지 않으실 겁니까?” 그 말에 란이 우뚝 멈춰 섰다. 등을 돌린 채로 그녀가 말했다. “더 할 이야기가 있어?” “네.” “해 봐.” “만약 라치아를 떠나기 원하신다면, 원하시는 건 뭐든지 가지고 가셔도 됩니다.” “뭐?” 란이 놀라 돌아섰다. 유스타프가 어둠 속에서 조용히 말했다. “얼음수정 채굴권이나, 골든로즈 상단과의 계약, 엘프나 드워프와 계약한 것이나, 전부. 누님께서 만드신 거니 다 가져가셔도 됩니다.” 란을 입을 벌렸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란은 이를 악물고 발끈해서 소리쳤다. “그런 거 필요 없어!” 그 외침에 유스타프는 저도 모르게 바람 빠지듯 웃었다. 그걸 ‘그런 거’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눈앞의 사람밖에 없겠지. “그걸 원하는 게 아니야! 네게서 가져가고 싶은 마음도 없어!” 란은 화가 났다. 뭐라고 해야 할까? 죽어라 일해서 뒷바라지했더니만 ‘그런 거 누가 해 달라고 했나? 필요 없다.’ 하는 말을 들은 기분? 동시에 눈물이 팡 솟구쳤다. “누님.” 곤란하다는 말투로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양 뺨을 감쌌다. 이제 익숙해진 온기에 란은 더더욱 눈물이 흘러나왔다. 동글동글 진주알처럼 떨어지는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내며 유스타프가 말했다. “울리려는 게 아니었는데요.” 충분히 좋은 조건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보다 더 유리한 조건은 없다. 란이 훌쩍이며 말했다. “나 정말로 아무것도 아냐?” 닦아주던 손가락이 딱 멈췄다. 란은 그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눈을 들어 유스타프를 보며 물었다. “진짜로 너에게 아무 의미도 되지 못했어?” 조금은, 조금은 마음을 열어 줘도 되지 않아? 우리 많이 친해지지 않았어? “누님.” 유스타프가 란을 낮게 불렀다. “저는 누님께 기회를 드리고 있는 겁니다.” “……?” 의문이 그녀의 눈에 들어차, 유스타프는 허탈하게 웃었다. “저와 라치아에서 도망칠 기회를 드리는 겁니다.” “어……?” 그가 웃었다. “지금 도망가시면 잡지 않습니다. 찾지도 않습니다. 원하시는 곳으로 가실 수 있습니다.” 란은 입을 헤벌렸다. 지금 유스타프가 뭐라고 하는 건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라치아에서 도망가? 유스타프에게서 도망쳐? “내가 왜?” 저절로 중얼거리는 말이 넘쳤다. 유스타프가 허리를 숙여 그녀의 눈 깊숙한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면 제가 누님을 잡아먹을 테니까요.” 그의 입가에 미소가 서렸다. “부디 녹음을 드리우시길.” 순간, 머리가 텅 비었다. 란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입력이 되지 않았다. 아니, 입력이 되기는 했는데 해석이 되지 않았다. 앞과 뒤의 단어를 연결하면― 멍하니 입을 헤벌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란을, 유스타프는 즐거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지금 저는 누님께 청혼을 하고 있는 겁니다.” “거짓말.” 란의 입에서 부지불식간에 낱말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유스타프는 정중하게 “아닙니다.” 하고 대답했을 뿐이었다. 란은 최대한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말했다. “하지만, 유스, 난 정말로 아무것도 필요 없어. 내가 없다고 해서 가신들이 충성하지 않거나 하는 일은 없을 거야. 물론 엘프와 드워프 쪽과 하는 무역은 좀 어려워지겠지만, 그건 그렇게 재정에 큰 타격을 주지는 않을 거고―” “아닙니다.” 유스타프가 중간에 그녀의 말을 끊었다. 란은 다시 입을 헤 벌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뭐가 아냐?” “제가 뭔가 잘못 이야기한 것 같군요. 제 말은 제가 누님을 좋아한다는 말입니다.” 란의 입이 떡 벌어졌다. “거짓말!” 그녀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유스타프가 느리게 한숨을 내쉬었다. “거절하셔도 좋고, 떠나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을 누님의 뜻으로 해석해서 부정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란의 녹색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도무지 유스타프의 고백을 믿을 수가 없었다. 왜? 유스타프가 나를? 왜? “하, 하지만 유스. 생각해 봐. 우리는 남매잖아.” “호적상 남매, 그것도 이제 호적에서 제적될 테니 아니게 되겠지요.” “하지만 그런 시간이 있었고, 그럼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욕하는 사람들은 어차피 저희가 뭘 해도 욕하겠지요. 그 사람들은 우습게도, 누님이 라치아의 피가 섞이지 않았으면서 가주 노릇을 한다고 비웃었던 사람들입니다.” 란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고 가신들은?” “별 상관하지 않을 겁니다.” 그녀는 자기 능력을 증명해 보였고, 붙잡으면 붙잡았지 반대할 자는 없을 터였다. “난, 나는― 난 모르겠어.” 도무지 믿기지 않아서 란은 중얼거렸다. 란이 입을 다물자 복도는 조용해졌다. 연회장의 소리가 그나마 침묵을 지우고 있는 게, 란의 마음을 달래 주었다. 란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 “만약 내가 네 고백을 거절하면?” “그럼 어쩔 수 없지요.” “거절하고도 라치아에 남고 싶다고 하면?” 유스타프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시면 작위를 드리겠습니다.” “어?” “그리고 제 구애에 시달리시겠지요.” “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하고 손을 내밀었다. 란은 멍한 얼굴로 그 손을 마주 잡았고, 유스타프는 허리를 숙여 그녀의 팔 안쪽에 키스했다. 따끔한 통증에 란은 흠칫하며 팔을 빼냈고 유스타프가 그녀의 팔을 놓아주며 말했다. “혹시 꿈이라고 생각하실까 봐.” 복도의 희미한 빛 아래 란은 제 팔뚝에 새겨진 키스 마크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유스타프!!” 그녀가 꽥 소리 지르자 유스타프가 드물게 소리 내 웃었다. 그리고 그가 길게 숨을 내쉬고 말했다. “이틀 안에는 결정해 주십시오.” 란은 잡혔던 팔을 다른 손으로 꽉 감싸 쥐었다. “알았어.” 란이 고개를 끄덕였고 유스타프가 물었다. “연회장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아니면―” 그녀가 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런 흔적을 가지고 어떻게 돌아가?” 유스타프가 빙긋 웃었다. “디모디아를 보내지요.” 그리고 연회장의 빛 사이로 돌아가 버렸다. 란은 멍하니 복도에 서 있다가 비틀비틀 걸어 벽에 기대섰다. 도무지 현실감이 없었다. 술을 너무 마셔서 꿈을 꾼 게 아닐까? 아니, 뭐 이런 리얼한 꿈이 있단 말인가? “괜찮으십니까?” 나지막한 목소리에 란은 펄쩍 뛰었다. 루미에가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놀라게 해 드릴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아, 루미에…….” 멍하니 그를 보다가 란이 고개를 저었다. “미안, 음식 가져오게 시켜 놓고…… 시간 얼마나 지났어?” “그렇게 오래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 “고백받기는 충분한 시간이었던 것 같지만요.” 루미에의 말에 란은 전신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봐, 봤어?” “우연히요.” 란은 작게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죄송합니다. 보이지 않으셔서, 찾으러 왔다가 그만.” 루미에의 사과에 란은 손을 저었다. “아냐, 뭐…… 숨길 일도 아니기는…….” 루미에는 가볍게 입술을 깨물었다가 물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응?” “유스타프 님의 고백 말입니다.” “……그러게.” 어떻게 해야 하나. 란은 손등으로 뜨거워진 뺨을 눌렀다. 역시 현실감이 없다. ‘유스타프가 날 좋아한다고.’ 생각하니 다시 열이 올랐다. ‘왜지?’ 뭐 하나 빠지는 거 없는 멋진 남자가 왜 날 좋아한단 말인가? 게다가 그런 낌새는 조금도 없었……. 그 순간, 유스타프의 스킨십들이 그녀의 기억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고 란은 몸을 비틀며 벽에 기댔다. ‘아, 진짜 장난 아니었잖아! 미쳤나? 돌았나?’ 눈치 못 챈 내가 좀 이상한 것 같아!! 란이 몸을 비비 꼬는 걸 보고 루미에가 당황해 말했다. “주인님, 괜찮으십니까?” “어? 어어어― 아니, 안 괜찮아.” “아가씨?” 그때 복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디모디아가 등장했다. 란은 어쩐지 몸의 긴장이 쑥 풀리는 걸 느끼며 말했다. “디모디아―” 어째 우는 소리가 섞여 나왔다. 디모디아가 놀라 후다닥 다가왔다. “괜찮으세요? 어디 몸이 안 좋기라도 하신가요? 도련님이 아가씨께 가 보라고―” 란은 한숨을 폭폭 내쉬었다. 그녀가 말했다. “일단 나 연회장으로는 못 가.” 그녀의 말에 디모디아가 란의 얼굴을 살폈다가 놀랐다. “우셨군요! 얼굴이― 일단 방으로 돌아가죠.” 디모디아는 뒤쪽 계단을 올라서 근처의 방으로 향했다. 방의 공기는 차가웠지만, 디모디아가 부지런히 움직여 불을 피우고 램프를 켜니 금방 훈훈해졌다. 디모디아가 설렁줄을 당겨 하녀에게 따뜻한 물과 수건을 가져오게 한 뒤에 물었다. “무슨 일이세요?” 란은 저도 모르게 말했다. “유스타프가 고백했어.” “아.” 디모디아의 짧은 ‘아’에 란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유스타프가 나에게 결혼하자고 했다니까?” “어머? 거기까지 말씀하셨어요?” “…….” 란이 아무런 대꾸도 못 하고 멍하니 자신을 보자 디모디아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도련님도 참 마음이 급하시네요. 설마 청혼까지 하실 줄은.” “알고 있었어?!” 놀라 비명처럼 란의 입에서 말이 튀어나왔다. 그때 하녀가 따뜻한 물과 수건을 가지고 돌아왔고, 둘은 입을 다물었다. 하녀가 물러나자 디모디아가 따뜻한 물을 적신 수건을 꼭 짜며 말했다. “자, 어디 봐요. 화장이 다 얼룩져 버렸네요.” 그녀가 조심스럽게 수건으로 얼굴을 닦기 시작하자 다시 픽 하고 눈물이 터져 나왔다. “아가씨…….” 놀라 디모디아가 중얼거리고 란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괜찮으세요? 그렇게 싫으신가요?” 그러다 그녀의 눈이 번쩍 빛났다. “혹시 도련님이 강제로 어떻게 했나요? 강요하거나, 협박을―” “아냐.” 란이 고개를 휙휙 저었다. “그게 아니라, 모르겠어, 나도.” 중얼거린 말에 디모디아가 진지하게 말했다.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가 고민이시면, 고민하실 필요 없어요. 제가 당장 떠날 수 있게 도와드릴게요.” “물론입니다.” 그림자처럼 서 있던 루미에가 찬동하고 나섰다. 란은 루미에를 보았다가 디모디아를 보았다. 어쩐지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 왜 울었는지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아냐. 그런 게 아니라, 그냥 감정이 너무 격해졌나 봐.”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디모디아가 란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가 다시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 주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있으려니 마음속이 부드러워지는 듯했다. “나, 유스가 싫은 거 아냐.” 어떻게 유스타프를 싫어할 수 있겠어? “하지만 잘 모르겠어. 유스타프랑 사귀는 거 말야.” 말하고 나니 더욱 그게 현실감을 가지고 뚜렷하게 다가왔다. 사귄다고. 연애한다고. 나랑 유스타프가! 유스타프가 날 좋아한다고! 입술을 꾹 다물고 있다가 란이 다시 생각을 정리하듯이 말했다. “하지만 유스타프의 마음이 바뀔 수도 있잖아.” 시나가 나타나면, 자신을 선택한 걸 후회할지도 모른다. “그럼 그것만 아니면 괜찮다는 말이에요?” 디모디아의 물음에 란이 움찔했다가 끙하고 말했다.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어.” 디모디아가 그 말에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는 남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란이 눈을 반짝 떴다. “정말로?” “그럼요!” “하지만, 유스와 나는 남매 사이였잖아― 그런데…….” 그 말에 디모디아가 흥 하고 콧방귀를 뀌고 말했다. “아가씨와 도련님이 남매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하지만 그렇잖아요. 만약에―” 디모디아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이건 가정인데요, 만약 아가씨가 지금 같지 않고 평범한 귀족 아가씨였다면, 유스타프 님이 가주가 된 순간 모두가 입을 모아서 아가씨를 호적에서 파내라고 할걸요. 절대로 라치아의 성을 줄 수 없다고.” 란은 고개를 갸웃하고 말했다. “그건 그래.” 아무도 나를 라치아라고 인정하지 않았겠지. “그러니까 눈 가리기를 하기는 했지만― 그건 사실 청염 덕분이죠.” “맞아.” 청염의 인정이 아니었다면, 란이 물구나무서기를 해도 절대로 가주가 되지 못했을 거다. 디모디아가 소파 등받이에 팔을 괴며 말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셨는지는 모르지만, 반대로 청염에게서 거부당하면.” “정말로 쫓겨나는 거네.” 디모디아가 싱긋 웃었다. “싫으세요?” “그런 건 아니지만.” 란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녀가 디모디아를 보며 말했다. “디모디아의 말이 사실이라면, 남아 볼까.” 사람들이 싫어하지 않는다면. “제가 아는 방법을 알려 드릴까요?” “어떻게?” 란이 고개를 갸웃했고 디모디아의 눈이 반짝 빛났다. 신년회가 끝나고, 이튿날 저녁에 회의가 열렸다. 란의 얼굴은 더 이상 운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소다와 카라, 디모디아는 제힘을 있는 힘껏 발휘해서 란을 꾸몄다. ―역시 어젯밤 고백은 꿈이 아닐까? 란은 그렇게 생각했다가 소다가 “어머? 팔에 벌레 물리셨나 봐요.” 하는 말을 듣고 전신이 타오르는 것 같은 기분을 맛봤다. ‘꿈이 아냐.’ 회의실까지 그녀를 에스코트하기 위해서 온 유스타프는 한참 란을 바라보다가 그녀의 비단 장갑 위에 키스하며 말했다. “여전히 아름다우시군요.” 란은 얼굴이 붉어지는 걸 느끼며 답했다. “고마워.” 유스타프가 가볍게 웃었다. “뭐야? 왜 웃어?” 더더욱 당황해 목소리가 뾰족하게 나왔다. 유스타프가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저를 남자로 인식해 주는 것 같아서, 그 점이 감사하군요.” 란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휙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손은 착실히 유스타프의 팔 위에 올라와서, 그는 걷기 시작했다. 당장에라도 대답을 듣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유스타프는 회의실로 향했다. 아직은 몰아붙이면 안 된다. 그러기로 약속했으니까. 결정을 내릴 때까지는.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란은 기시감을 느꼈다. 그녀가 가주직을 잇겠다고 선언한 때에도 이렇게 모두가 모여 있었다. 단지, 그때 있었던 린드버그 남작이 지금은 없지만. 숙부의 동향은 가끔 이야기가 들어오기는 하지만 거의 저택 안에서 두문불출하는 모양이었다. 란은 모두에게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자리에 앉았고, 유스타프는 선 채로 이야기했다. “정식으로 제가 가주직을 잇게 되었다고 알리려는 자리입니다. 이미 아시겠지만.” “청염을 떨치소서.” 한목소리로 모두가 인사했고, 유스타프가 고개를 까닥한 뒤 답했다. “불꽃의 가호가 있길.” 그가 가볍게 탁자를 두들기고 이어 말했다. “그리고 내가 첫 번째로 얘기할 건, 란 로미아 드 라치아를 라치아 공작가에서 제적한다는 말이오.” 그 말에 순간 가신들은 숨을 삼키고 란을 바라보았다가 유스타프를 보았다. 란은 저도 모르게 표정이 살짝 굳었다. 이미 알고 있었다고는 해도, 아무래도 모두의 앞에서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듣는 건 또 다른 느낌이었다. 그러자 엘리자벳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가, 가주님. 아무리 그래도―” 유스타프의 서늘한 눈동자가 그녀에게 닿자, 엘리자벳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 란 님은 노력해 왔고…….” 블레인 역시 안절부절못하는 얼굴이었다. 일루미니티 백작이 낮게 말했다. “이런 식으로 란 님을 이용만 하고 내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란스 남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란은 좀 놀랐다. ‘얼굴도 몇 번 못 본 사이인데.’ 설마 다들 한목소리를 내줄 줄은 몰랐다. ‘디아가 맞았네.’ 디모디아는 유스타프가 뭐라고 하든 입을 꾹 다물고 사태를 지켜보라고 했고, 그래서 란은 어쩐지 감동받았다. 와일드 남작이 조심스럽게 손을 든 후에 말했다. “란 님께는 죄송하지만, 라치아 가문에서 제적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봅니다.” 그 말에 모두가 침묵했다. 그중에 엘리자벳이 다시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 버리면―” 와일드 남작이 이어 말했다. “대신 다른 작위를 내리거나 하는 게 어떻습니까?” 엘리자벳은 생각해 보듯이 입을 다물었고,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란이 손을 들자 사방이 조용해졌다. 그녀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들 저를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 저는 돌 맞고 쫓겨나는 게 아닌가 걱정했거든요.” 그 말에 작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녀의 말을 완전히 농담으로 생각하는 반응이라, 란은 잠깐이라도 진짜로 그럴 거라고 생각했던 게 미안해졌다. “가주님에게는 이미 여러 가지 제안을 들었습니다. 떠나든 남든 제 선택에 맡겨 주겠다고 하셨고요. 그래서 저도 생각해 보겠다고 했답니다.” 그녀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말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란은 마음이 훈훈해지는 걸 느꼈다. 유스타프가 란을 슬쩍 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들며 말했다. “그럼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지.” 대부분의 이야기는 작년과 별다를 바가 없었다. 그가 가주가 되었다고 해서 새로운 사람을 뽑거나 하지 않는 데다가, 어차피 란과 유스타프가 함께 일했기 때문에 인수인계에 어려움은 없었다. 짧은 회의가 끝나고서 란이 자리를 뜨는데 블레인이 그녀를 붙잡았다. “란 님.” “블레인 경.” 생글생글 웃고 있는 그녀를 보고 블레인이 어렵게 운을 뗐다. “저는…… 란 님이 남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녀가 눈을 크게 뜨자 블레인이 화급히 덧붙였다. “물론 남아 주시는 게 어려운 일이라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그래도…….” “저도 동감입니다.” 엘리자벳이 고개를 끄덕여서 란은 얼굴이 붉어졌다. “다들 그렇게 말해 줄 줄은 몰랐어요.” 그녀가 솔직하게 말하자 엘리자벳이 눈을 크게 떴다가 웃었다. 중년의 여성은 다정하게 말했다. “남으신다면 아마 지금처럼 일하시게 될지도 모르지만요. 란 님이 일하시는 걸 싫어하신다는 건 잘 압니다.” 란은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렇게 싫어하지는 않아요.” 성취감이 있는 일이니까. 힘들다고 징징거리기는 해도 일이 힘든 건 당연한 거고, 대신 거기에는 즐거움이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열심히 일하지는 않았겠지요.” 란의 말에 엘리자벳은 “그런가요?” 하고 웃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블레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라치아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으시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잉? 란이 이번에도 놀라 눈을 깜박였다. 엘리자벳이 옆에서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기적인 부탁일지도 모르지만요.” 그러며 그녀가 눈을 찡긋하고 덧붙였다. “어차피 작위를 달랠 거 크게 백작 위 정도로 달라고 하세요.” “물론 떠나신다고 해도 붙잡지는 않겠습니다.” 블레인이 정중하게 말했고, 그는 엘리자벳과 함께 깊게 고개를 숙인 후에 자리를 떴다. 그러고 나서 란은 복도를 걷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헐레벌떡 달려온 란스 남작에게 붙잡혔다. “란 님.” “란스 남작.” “남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단도직입적인 말에 란은 빵 터져서 웃어 버렸다. 그리고 재빠르게 입가를 가리며 덧붙였다. “실례. 아까부터 그런 말을 들을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거든요.” “물론 떠나시고 싶은 마음이야 잘 압니다. 배신감도 느껴지시고 그러셨겠지요. 이렇게 말하는 것도 뻔뻔할 테지만, 그래도 남아주셨으면 한다고 꼭 말씀 올리려고 왔습니다.” “고마워요.” 남작이 정중한 인사를 남기고 떠나자 란은 잠시 복도에 멈춰 섰다. 정말로, 이런 말들을 들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선객이 많군요.” “팔튼 경.” 그녀가 가볍게 웃었다. 일루미니티 백작이 싱긋 웃고 다가왔다.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그녀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속삭였다. 그에게는 말해도 되겠지, 싶었다. “사실은 유스에게 청혼을 받았어요.” 일루미니티 백작은 놀란 얼굴을 했다가 씩 웃었다. “그래서 받아들이실 겁니까?” “반대하지 않아요?” “어째서요?” “음― 나랑 유스랑 남매였던 기간 때문에?” “지금은 아니시잖습니까. 게다가 란 님이 공작 부인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할 것 같군요.” “이렇게 쉽게 찬성할 줄은 몰랐는데 말이죠.” “다들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놓쳐서는 안 된다고.” “그거 좀 무서운걸요.” 란이 중얼거리자 일루미니티 백작이 이어 말했다. “물론 원하시는 대로 하시는 게 제일이지요. 마지막 손님이 오는군요. 전 이만.” 일루미니티 백작이 떠나자마자 저쪽에서 서성이던 와일드 남작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딱딱해 보이는 얼굴은 블레인 경을 조금 닮았나? 란이 그렇게 생각하는데 와일드 남작이 빠르게 말했다. “아까는 실례했습니다. 하지만 부디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네? 아니에요.” 란이 손을 저었다. “저도 문제가 되는 점은 잘 알고 있습니다.” 만약 란이 라치아 공녀로 남아 있으면, 그리고 그녀가 결혼해서 아이를 가지게 된다면, 그 아이 역시 라치아의 피가 흐르는 아이가 되어버린다. 그러면 언젠가 라치아의 피가 섞이지 않은 자가 라치아의 자산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일이 나올지도 모르고. 와일드 남작이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말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런 발언 후에 이런 말은 파렴치하게 들리시겠지만―” “남아 주길 바란다고요.” “그렇습니다.” 깊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말했다. “부디 부탁드립니다.” 그는 그렇게 몇 번이나 말하고는 복도를 떠났다. 란은 한숨을 내쉬고 복도를 마저 걸었다. 복도 끝에 도착하자 유스타프가 기다리고 있었다. “세상에.” 란이 투덜거렸다. “회의실에 있던 사람 모두가 날 기다리고 있을 작정인가.” “조금이라도 마음이 달라지셨을까 봐.” 유스타프가 그렇게 말하며 빙긋 웃었다. 란은 잠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휙 고개를 돌렸다. 그가 나에게 고백했어. 그렇게 새삼 생각하니 제대로 이야기하는 게 불가능했다. 얼굴이 빨개진 채로 입을 꾹 다물고 그의 앞을 지나쳐 가는 란을 바라보다가 유스타프가 그 뒤를 쫓아가며 말했다. “아까까지는 괜찮으셨잖습니까?” “아까는 아까고 지금은 지금이지.” “계속 얼굴을 보지 못하는 채로 있는 건 슬픈데요.” “유스, 뻔뻔해졌어.” “그렇습니까?” “그래.” 말을 주고받으니 점점 긴장이 풀렸고, 얼굴이 도로 돌아온 게 느껴져서 란은 고개를 들었다. “유스.” “네.” “나는 유스타프를 좋아해.” 유스타프의 얼굴이 흐려졌다. 그가 느리게 말했다. “‘하지만’이 나올 차례 같군요.” 란이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내뱉고 나서 그녀는 미소를 보내고 덧붙였다. “그게 유스타프를 남자로서 좋아하는 건지는 모르겠어. 아니, 아니라고 생각해.” 유스타프는 침묵했다. “미안해.” 그녀가 양손을 꼭 모아 쥐었다. 잠시 침묵이 복도를 떠돌았다. 유스타프가 길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에 그녀의 어깨가 떨렸다. “그럼 떠나실 겁니까?” 그의 말에 란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손가락을 꼬며 머뭇머뭇하는 그녀를 보자 유스타프의 푸른 눈이 빛났다. “남으실 겁니까?” “할 수 있다면.” “제가 제안한 조건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란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씩 떠올렸다. 그녀가 눈을 뜨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남을래.” “네, 기꺼이.” 유스타프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환호작약도 아니고, ‘이제부터 당신을 공략하겠어!’ 하는 것도 아니어서 란은 안심했다. “그럼 작위 말인데―” “제가 드릴 수 있는 작위의 한계는 백작 위입니다.” “그 정도면 충분해.” 란이 씩 웃었다. 그러다가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런데 우리 남는 영지가 있던가?” “공작 영지에서 좀 떼어서 드리면 되지요.” “그렇게까지?” “딱히 상관없지 않습니까.” 유스타프가 그렇게 말하고 걷기 시작해서 란은 그 옆을 재빠르게 따라잡았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떼어 주려고? 음…… 아냐, 나 역시 영지는 필요 없어. 그냥 작위만 주면 충분해.” 봉토는 부담된다. 하지만 그렇기에 유스타프는 그녀에게 어떻게든 봉토를 주고 싶었다. “영지도 없는 백작 위라니,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원하시는 곳을 가져가십시오.” “유스타프. 그러다가 내가 노른자위만 쏙 빼 가면 어쩌려고 그래?” 그러자 그는 그저 미소만 지었을 뿐이었다. 란이 눈을 찌푸렸다가 말했다. “나중에 결정해서 이야기해도 되지?” “네.” “아, 그리고 이제 이 말버릇도 안 되겠네. 그럼 이제 가주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거겠지요.” 유스타프는 힐끗 란을 보았다가 말했다. “그럼 난 란이라고 불러도 되는 겁니까?” 엇, 하고 란은 눈을 크게 떴다. “싫으신가요?” “싫은 건 아니지만…….” 란은 말꼬리를 흐렸다가 얼른 되물었다. “그런데 저에게 계속 존대하실 건가요, 가주님?” “구애하고 있는 상대에게는 예의를 갖추는 게 맞는 거겠지요.” 유스타프의 말에 란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그가 란을 그녀의 방까지 데려가 주며 덧붙였다. “새로 성을 얻고 영지를 처음부터 꾸리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그리고 사교계에서도요.” 그의 덧붙임에 란은 “아.” 하고 피곤한 얼굴을 했다. 자신이 라치아 공작일 때 이를 박박 갈고 있던 사람들이 자신이 백작으로 다시 등장하면 어떻게 나올까. “물론 공작 부인으로 등장하신다면 그런 염려는 없겠지만.” 유스타프가 속삭여서 란은 얼굴을 붉히며 등을 문에 대고 물러섰다. “그런 이유로 결혼하지는 않을 거야― 거예요.” 재빠르게 어미를 바꾸자 유스타프는 피식 웃었다. “원하시는 대로 하시길.”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문 앞을 떠났고, 란은 잽싸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디모디아와 카라, 소다는 모르는 척하면서 태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디모디아가 그제야 눈치챘다는 듯이 “어머? 오셨어요?” 하고 말해서 란은 피식 웃었다. 루미에가 느리게 눈을 들고 물었다. “결정하셨습니까? 아니면.” “결정했어.” 란의 말에 모두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란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남을 거야.” “꺅!” 디모디아가 소리를 지으며 란의 손을 꼭 잡았고, 카라와 소다의 얼굴도 확 밝아졌다. 루미에만이 살짝 눈을 찡그렸다가 곧 얼굴을 폈다. 어쨌든 주인님의 결정이고, 자신보다는 그녀의 선택이 먼저였다. 디모디아가 란의 손을 잡은 채 흔들며 말했다. “그러면 어떻게 되시는 거예요?” “일단 백작 위를 받겠지? 그다음에는 하늘 저택을 떠나게 되려나?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 봉토를 받을지 말지, 받는다면 어디를 백작령으로 달라고 할지도 고민이다. 디모디아가 웃으며 말했다. “하여간 남으시겠다고 하셔서 기뻐요.” “디아가 말해 준 덕분이야. 게다가 다들 날 붙잡더라고.” 그렇게 나오면 마음이 약해지는 게 인지상정. 디모디아의 말이 맞았다. 게다가 일루미니티 백작의 반응이라니……. 그가 특이한 건지, 아닌 건지. 어쨌든, 그녀는 라치아에 남게 되었다. ✥✥✥ 이제 승마에 익숙해진 란이 등자를 밟고 말에 올라탔다. 여전히 옷은 두툼하게 입고 있었지만, 그래도 전처럼 말 위에서 불안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란이 의기양양하게 “어때?” 하는 얼굴을 하자 유스타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좋아지셨군요.” “열심히 탔으니까요.” “물론 그러시겠지요.” 유스타프가 그렇게 말하며 혀를 찼고, 말이 출발했다. 란 역시 허둥지둥 말을 출발시켰고, 그 뒤를 청염 기사단이 따랐다. 빙벽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원래라면 신년회 전에 의식을 끝내야 하지만, 올해는 유스타프가 가주가 되고 나서 치르기로 해서 신년회가 끝난 후에 길을 오르는 거였다. 눈길은 여전히 험했지만, 그래도 란은 자신감이 붙어 있었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져서 이야기도 나눌 정도였다.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역시 봉토는 받지 않는 게 좋겠어.” 란의 말에 유스타프는 눈을 찌푸렸고, 란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대신에 궁내 작위를 받을 테니까, 적당한 직위를 내려 준다든가……?” 그 말에 유스타프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좋습니다. 그러면 거처 말입니다.” “아, 응.” “하늘 저택에 그대로 머무르시지 그러십니까?” “어?” “어차피 궁내 작위를 받으실 거면, 하늘 저택에서 일하는 편이 더 효율적 아닙니까?” “그렇지.” 이곳이 행정의 핵심이니까. 게다가 하늘 저택은 마을과 떨어진 곳에 있어서, 여기서 일하는 자들은 숙식을 저택 내에서 해결했다. “그러니 이대로 하늘 저택에서 머무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 그런가……?” 사실 마을 근처에 저택을 하나 구하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유스타프의 말을 들으니 그것 역시 그럴 듯했다. “네, 더불어서 제 일도 도와주시면 좋고요. 총관직을 드리지요. 집으로 돌아가실 시간도 없을 겁니다.” 엄포를 놓듯 덧붙인 말에 란이 웃었다. 새하얀 입김이 햇빛에 반짝였다. “그게 본론이시군요?” “물론 그것만은 아니지만. 궁내 작위란 그런 거지요.” 유스타프가 그렇게 말하며 힐끗 란을 보았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일단은 그럼 그렇게 하는 거로 하지요.” 란의 말에 유스타프는 먹잇감을 문 듯한 미소를 재빨리 감췄다. 그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란은 마음이 가벼워졌다. 아무래도 영지로 내려간다는 게 부담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새로운 사람들과의 적응 문제도 그렇고, 디모디아나 루미에와 헤어지는 것도 그랬다. ‘게다가 봉토는 여차할 때 버리고 갈 수도 없잖아?’ 하지만 궁내 작위뿐이라면, 어떻게든 될지 모른다. 그런 일은 없어야겠지만 말이다. 더해서 하늘 저택에 머무르는 것으로 확정되자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러면 짐도 안 싸도 되고, 계속 여기에 있어도 되는 거네? 좋다.’ 저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다. 빙벽은 말 그대로 빙벽이 되어 있었다. 여름이면 그래도 꼭대기만 흰색이고 그다음은 갈색, 그 아래에는 초록빛이 무성해지지만, 겨울에는 위부터 아래까지 전부 다 새하얀 색이다. “저 위까지 가본 사람이 있을까?” 란이 저도 모르게 물었다. 유스타프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고개를 들어 빙벽 위쪽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어느 정도까지 올라가고 나면 험한 얼음산이라고 합니다. 굳이 그곳을 올라간 사람은 없는 것 같군요.” “하긴.”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후, 하고 숨을 내쉬는데 몸이 저절로 부르르 떨렸다. 정말로 추운 건 딱 질색인데. 삼십여 분간 말을 타고 올라가, 다시 은빛 아치 앞에 도착했다. 어쩐지 감회가 새로웠다. 말에서 내린 란은 반짝이는 돌길을 걸어, 유스타프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언제나처럼 새하얀 방이었다. 이제 유스타프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청염이 희미하게 떠는 소리를 냈다. 란이 속닥였다. “나도 모르게 따라왔는데, 따라오면 안 되는 게 아니었을까요.” “상관없습니다.”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른 손으로 란의 손목을 붙잡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란은 얼굴이 붉어졌지만, 뿌리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새하얀 벽 앞에 서서 유스타프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에, 벽에 손을 가져다 댔다. 문장이 차례로 푸르게 빛났다. 똑똑. 그때 적막을 깨고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란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똑똑. 그때 다시 한 번 정확하게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벽 너머에서. 란의 등을 타고 소름이 쫙 돋았다. 그녀의 손목을 잡은 유스타프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변함없었다. 푸른색의 빛이 하나씩 채워져 가기 시작했다. 똑똑똑똑똑똑똑똑똑똑. 건너편에서 두들기는 소리가 빨라졌고, 란은 비명을 지르고 싶어졌다. 마지막 문장이 푸른빛을 발하자 더는 두들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어깨에서 힘이 빠지는데― 쾅―!! 요란한 소리에 란은 힉 하고 어깨를 움츠렸다. 유스타프는 천천히 손을 뗐다. 문장은 빛나다가 사라졌고, 더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란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유스타프가 천천히 붙잡아 주었다. 그는 한참 동안 새하얀 벽을 바라보았다. “돌아가죠.”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이 떨려 와서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벽 너머에. 벽 너머에서 어둠이 깨어나고 있다. ‘하지만 벌써?’ 아직 그럴 때가 아니지 않나? 내가 읽은 바로는 이런 내용은― ‘아.’ 아차, 싶은 마음이 그녀를 스쳤다. 원래라면 작년부터 린드버그 남작이 섭정이 되고, 이 의식도 멈추게 된다. 그에게는 ‘청염’의 존재를 의식시키는 이 의식이 하기 싫었겠지. ‘그래서 내가 몰랐던 거였어. 일어나지 않은 일이니까.’ 하지만 작년도, 올해도, 읽은 것과는 다르게 의식을 치렀다. ‘그것과 상관이 있는 걸까.’ 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상대는 ‘여기가 입구’라는 걸 인식했다. “유스.” “네.” “아니, 가주님.” 얼른 호칭을 고치자 유스타프가 슬쩍 돌아보며 말했다. “둘만 있을 때는 상관없습니다.” 란이 씩 웃으며 “그럼 유스.” 하고 이어 말했다. “이런 사태에 대해서 혹시 알고 있었어?” “아뇨.” “그런데 침착해 보여.” “허둥거려 봐야 해결되는 일은 없으니까요.” “그건 그렇지만…….” 란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옛 기록이나 한번 뒤져 볼까? 뭔가가 나올지도 모르잖아.” “그것도 괜찮겠지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란이 그의 손을 꽉 마주 잡으며 말했다. “하여간 내가 있으니까.” 그러자 그의 사파이어색 눈이 빤히 그녀를 보아 란은 황급히 부인했다. “아니, 그런 의미 말고!” “저런.” 유스타프는 그렇게 중얼거렸고 란은 입 안으로 작게 ‘그런 의미는 아니고…….’ 하고 다시금 중얼거렸다. 밖으로 나오자 소음이 들려와 란은 안심했다. 아무래도 저 안의 적막과 고요는 약간 무섭다. 아니, 유스와 있으면 괜찮기는 한데, 아까 노크 소리는 진짜 무서웠다. ‘호러 영화인 줄.’ 그런데 블레인이 어두운 얼굴로 재빠르게 다가와 말했다. “얼른 내려가는 게 좋겠습니다. 날씨가 심상치 않습니다.” 그 말에 란이 고개를 드니 태양이 보이지 않았다. 어둡고 음산한 기운이 산맥을 따라 감돌고 있었다. “눈 폭풍이라도 오려나?” 그녀의 중얼거림에 유스타프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얼른 내려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고립되면―” 그가 눈을 찌푸리고 휘파람을 불었다. 기사단 전원이 이쪽을 주목했다. 유스타프가 말했다. “전원 둘씩 짝지어. 만약 중간에 눈 폭풍 때문에 흩어지게 되면, 둘이 한 팀이다. 그 외에는 신경 쓰지 말고 알아서 내려가도록.” “존의!” 한목소리로 기사단이 외치고는 알아서 둘씩 짝을 짓기 시작했다. 유스타프가 란에게 말했다. “저와 한 팀을 하시죠.” “아, 응.” 따로 가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했다가 란은 자신이 더는 라치아의 가주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이럴 때는 좋군.’ 란은 잽싸게 유스타프의 옆에 붙었다. 블레인이 말했다. “얼른 출발하죠.” 유스타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란은 걱정되기 시작했다. ‘여기서 말을 달릴 수 있을까?’ 눈 덮인 산을 전력으로 달려 내려가는 게 자신의 실력으로 가능할까? 그런 란의 마음을 읽은 듯이 유스타프가 말했다. “등자를 꽉 디디고, 허벅지에 힘을 주십시오. 그리고― 갈기를 잡으세요.” “어? 하지만―” “고삐를 잘못 잡아당기는 게 더 안 좋습니다. 갈기를 잡는 것 정돈 봐줄 겁니다.” 란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정 힘들면 그렇게 할게.” 블레인이 말했다. “제가 먼저 가겠습니다. 다음은 란 님이 따라오시고, 뒤에 가주님이 오시죠.”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이 점점 거세지기 시작해서, 마른 나뭇가지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뒷덜미를 바싹 곤두서게 하였다. “이랴!” 블레인이 말을 출발시키고 란 역시 그 뒤를 쫓았다. ‘으아아아―!’ 혀를 깨물 것 같아, 란은 이를 악물었다. 그래도 온몸이 흔들리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말들 역시 뭔가가 오는 걸 감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말보다, 눈이 더 빨랐다. 순식간에 사방이 어두워지고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깃털같이 푹신하고 큰 눈송이가 아니라 작은 싸라기눈이었다. ‘눈을 뜰 수가 없어!’ 란은 눈앞을 보려고 애썼지만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말은 제 주인이 저를 통제하지 못한다는 것과 눈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더 당황해 마구잡이로 뛰기 시작했다. ‘엄청 추, 추, 추워―’ 갑자기 온도가 무서울 정도로 쑥 내려갔다. 란은 덜덜 떨기 시작했다. 한기가 뼛속까지 파고들어서 통증이 되기 시작했다. 그때 뭐에 놀랐는지 말이 펄쩍 뛰었다. “―!!” 장갑 사이로 갈기가 미끄러지고 몸은 균형을 잃고 미끄러졌다. 입이 벌어졌지만, 비명은 나오지 않았다. 너무 놀라니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몸이 가벼워진 말은 속도를 올렸다. 란은 등자에 발이 걸린 채로 눈밭을 끌려가다가 간신히 풀려났다. “…….” 멍하니 눈밭에 누워 있다가 란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몸이 눈투성이인 데다가 눈앞이 새하얀 빛으로 잘 보이지 않았다. 눈알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블레인 경!! 유스타프!!” 그녀가 목청껏 외쳤지만, 눈보라 소리가 더 컸다. 거기다가 숨을 쉴 때마다 목구멍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내쉰 숨은 바로 머플러에 얼어붙어 서리가 되었다. 란은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몸이 아팠다. 떨어져서 아픈 게 아니라 추워서 아팠다. 바람 때문에 똑바로 일어나기도 힘들 정도였다. “블레인! 유스!” 소리치고 그녀는 걷기 시작했다. 어느 쪽이 위이고 아래인지 구별도 되지 않았다. ‘걸어야 해, 계속 움직여야 해.’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물건 중에서 쓸 만한 게 있을까 고민하다가 더듬더듬 허리춤에 걸어둔 램프의 고리를 돌렸다. 빛이 나왔지만, 눈 폭풍을 뚫고 보일지는 미지수였다. ‘눈 폭풍이 이렇게 지독했나?’ 아니, 그 전에 이런 눈 폭풍이 라치아에 일어난 적이 있던가? 똑똑. 그때 그 세찬, 귀가 먹어버릴 듯한 눈 폭풍 소리를 뚫고 정확하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란은 몸을 떨었다. “란!” 그때 누가 제 팔을 잡고 확 일으켜 세워서 란은 얼떨떨해졌다. “유, 유스?” 그녀가 그를 부르자 유스타프는 안도했다. 꼼짝도 하지 않기에 얼어 죽어 있는 줄 알았다. “나, 마, 말에서 떨어져서…….” 정신을 차리니 고통이 더더욱 밀려들었다. 란이 이를 다닥다닥 부딪치며 말했다. 유스타프가 물었다. “다친 곳은 없습니까!” 가까이 있는데도 거의 고함치듯 해야 소리가 들렸다. 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시에 말했다. “응.” 들렸는지 들리지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란의 대답에 유스타프는 그녀를 끌고 걷기 시작했다. 란은 바람에 비틀거리며 그를 따라갔다. 유스타프는 얼른 제 말에 그녀를 태우고 자신도 올라탔다. 그리고 말을 몰기 시작했다. 란은 고통이 희미해지는 걸 느꼈다. 대신 점점 졸음이……. “란.” 유스타프가 어깨를 붙잡아 흔들어 란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러자 다시 추위의 고통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자면 안 됩니다.” “안 자.” 란은 그렇게 말하고 눈을 부릅뜨려 애썼다. 유스타프는 숨을 길게 내쉬고 손을 들어 올렸다. “청염.” 푸른색 불기둥이 솟구쳐 올랐다. 말이 놀라 날뛰는 걸 유스타프가 진정시키며 계속 달리게 했다. 허공까지 솟구친 이 푸른색 불기둥은 어디에서나 뚜렷하게 보였고, 길을 잃었던 기사들은 그걸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물론 하늘 저택에서도 이 푸른 불기둥을 볼 수 있었다. 란은 약간 최면에 걸린 듯한 몽롱한 상태가 되었다. 불기둥에서 나오는 열은 조금도 그녀의 몸을 데워 주지 못했다. 불기둥을 보고 빙벽 깊은 곳에서, 숲에서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유스타프는 란의 어깨를 몇 번 더 흔들어서 그녀를 깨웠다. 불기둥이 앞서서 달리고 유스타프는 그 뒤를 따라가, 둘은 겨우 하늘 저택에 도착했다. “가주님! 란 님!” 시종들은 바람에 비틀거리며 마중 나와 란과 유스타프를 안으로 들이고 말을 마구간에 넣었다. 쾅! 문이 바람에 닫히는 소리가 요란했지만, 란은 여전히 멍한 상태였다. 루미에가 서둘러 그녀의 옷을 벗겨 냈다. 꽝꽝 언 목도리와 겉옷을 벗기는 중에도 란은 흐느적거리며 서 있었다. “주인님.” 루미에가 속삭였다. 디모디아가 외쳤다. “욕조에 물을 가득 받아요! 가주님은 괜찮으신가요?” “난 괜찮아.”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했지만, 집사는 그에게도 뜨거운 물로 목욕할 것을 강력하게 권했다. 유스타프는 그 제안을 미뤄 두고 할 일들을 지시하기 시작했다. 루미에가 란을 번쩍 안아 들고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욕실 앞에서 그는 소다와 카라에게 쫓겨났다. 란은 미지근한 물 속에 들어가자마자 신음을 내뱉었다. “뜨거워.” “뜨거운 물 아닙니다.” 카라가 그렇게 말하고 그녀의 손발을 살폈다. 다행히도 그렇게 동상이 심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저체온증으로 더 위험했던 것이리라. 조금씩 란이 물 온도에 익숙해질 때마다 뜨거운 물을 부어서 온도를 올렸다. 소다와 카라가 다람쥐처럼 부지런히 움직여 란은 이제 완전히 체온이 돌아왔다. 그녀는 욕조에 흐늘흐늘 늘어져서 눈을 감았다. “저런 눈 폭풍은 처음 봤어…….” 그녀가 중얼거리자 카라가 말했다. “저는 어렸을 때 본 적이 있어요.” “그래?” “네. 가끔 저런 눈 폭풍이 온다고 하더군요. 그게 하필 오늘이 될지는 몰랐지만요.” 란은 ‘그렇구나…….’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추우면 정말로 그렇게 아픈 거구나. 상상도 못 했어.’ 눈가도 따끔거렸다. 그녀가 눈가를 누르자 소다가 말했다. “만지지 마세요, 란 님. 눈가에 상처가 났어요.” “상처?” 손가락을 보니 정말로 피가 묻어 나왔다. 싸라기눈에 긁힌 것이다. 그녀는 끙 소리를 내고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기사들은? 유스타프는 괜찮아?” “다른 분들도 적절한 조치를 받고 있을 거예요. 가주님의 불기둥 덕분에 헤매던 사람들도 제대로 길을 찾은 것 같더군요.” “아.” 그 불기둥. 꼭 3D 영화 같은……. 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욕조에서 물이 촤악 하고 흘러넘쳤다. 놀라 카라가 말했다. “아직 좀 더 몸을 데우셔야 해요.” “아니, 괜찮아.” “아가씨!” “란 님!” 둘의 외침을 무시하고 란은 도톰한 샤워 가운을 챙겨 입고 욕실을 나왔다. 디모디아가 소리를 질렀다. “란 님! 머리를 다 말리지도 않고! 감기 걸리십니다!” “디모디아 님의 말이 맞습니다.” 루미에 역시 그녀의 모습에 당황하며 말했다. 둘은 그녀를 반쯤 억지로 벽난로 앞 가장 따뜻한 자리에 앉히고 근처에 온풍기를 틀었다. 젖은 손으로 달려 나온 소다와 카라는 기가 막힌다는 얼굴이었다. “아니 갑자기 그렇게 나가시면 어떻게 하나요.” “아이참, 머리도 말리시지 않고.” 그녀들이 수건을 가져와 머리카락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거기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란이 말했다. “유스타프가 어떤지 좀 보고 와 줘.” “가주님은 괜찮으십니다.” “맞아요.” 란은 다시 신음을 삼켰다. 청염은 가주에게 내려오는 것. 하지만 사용에 대가가 없는 것은 아니다. 먼저 체력, 그리고 생명력. 아무리 유스타프라고 해도 그렇게 큰 불기둥을 만들어 냈으니 상당히 체력이 빨렸을 터였다. 세 사람이 달라붙어서 머리를 말려주고 나서 란은 허둥지둥 옷을 갈아입었다. 모피 망토까지 단단히 걸치고서야 란은 나가는 걸 허락받을 수 있었다. “정말이지. 앞으로는 항상 절 데리고 다니셔야 합니다.” 루미에가 그녀의 곁을 바싹 따르며 투덜거렸다. “혼자서 마음 졸이는 일은 이제 지겹습니다.” 그의 말에 란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알았어.” 하지만 정말로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눈 폭풍이라니. ‘그리고 그게 이렇게 무서운 거라는 것도 처음 알았어.’ 은빛 폭풍, 이렇게 말하면 좀 낭만적이지 않은가? 그래서 이렇게 폭력적인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스노우볼 안에서 날리는 눈 같은 거라고 생각했지. 란이 사무실로 들어가자 유스타프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옷도 다 갈아입지 않은 채였다. “란.” 그가 서둘러 다가와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따뜻한 온기에 그는 안도하며 말했다. “괜찮아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난 괜찮지만, 유스― 아니, 가주님은요?” “전 괜찮습니다.” 그가 그렇게 말했지만, 란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말했다. 그녀가 휙 집사를 돌아보며 말했다. “여기 일은 제가 지휘해도 되겠지요? 가주님을 일단 욕조에 처넣으려면요.” 집사가 반색했고 사무관들은 당연한 일이라는 얼굴이었다. 유스타프만이 약간 당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녀가 그의 등을 떠밀며 말했다. “얼른, 욕조로 들어가서 쉬어요. 청염을 그렇게나 쓰고…….” 마지막 중얼거림에 유스타프는 그녀를 슬쩍 돌아보았다가 어깨를 늘어트렸다. “알겠습니다.” “당연히 알아야죠.” 란이 그렇게 말했고 유스타프는 픽 웃고 그녀의 뺨에 키스했다. 란이 입을 떡 벌리는데 그가 말했다. “그럼.” 그러고는 휙 방을 나갔고, 란은 뺨을 문질렀다. ‘입술이 차가웠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더욱 걱정되었지만, 지금은 일단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그래서, 기사는 몇 명이나 돌아왔죠? 돌아오지 않은 자는? 말은 어떻게 되었나요? 바로 마구간에 넣지 않으면 얼어 버릴 텐데요. 끓인 물이 부족하지는 않은가요?” 그녀의 말에 시종장이 빠르게 대답했고 란은 차례로 해야 할 일들을 지시했다. 다행히도 란처럼 말에서 떨어진 자는 없었다. 유스타프의 불기둥이 유효해서 낙오한 기사도 없었다. 란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런 눈 폭풍 때문에 기사를 잃었다면 큰 손실이었을 거다. 하지만 불행히도, 란을 버리고 달린 말은 찾지 못했다. 불기둥을 보고 놀라 반대로 도망갔을 가능성이 크다고 시종이 전했다. 란은 가슴이 시렸다. ‘나 때문이야.’ 내가 좀 더 말을 잘 다뤄서 낙마하지 않았다면, 그 말은 살았을 텐데. 죄책감이 그녀의 마음을 쿡 찔렀지만, 일단 그것은 나중의 문제였다. 마지막 기사의 귀환까지 알리고 나서야 일은 대충 마무리가 되었다. 유리창의 덧창은 모조리 닫혔고, 지하 창고의 얼음수정 재고는 충분했다. 란은 요리사에게 따뜻한 수프를 잔뜩 만들어 돌리게 지시하고, 유스타프의 방으로 향했다. 막 씻고 나온 유스타프가 수프 그릇과 함께 도착한 란을 보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누님은 꼭 제가 씻고 나서 오시더군요.” 란의 얼굴이 붉어졌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거든.” 그리고 그녀가 갸웃하며 물었다. “호칭이 누님으로 돌아간 거야?” “이쪽을 더 좋아하시나 하고요. 누님, 란, 어느 쪽이 더 설레십니까?” 란은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수프 그릇을 탕 내려놓았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얼른 먹기나 하시죠. 가주님.” “저에게는 중요한 문제인데요.”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하며 긴 다리를 쭉 뻗었다. 약간의 피로감이 얼굴에 비쳐서 란은 곧 걱정이 고개를 치켜드는 걸 느꼈다. “역시 피곤한 거 아냐? 괜찮아?” “이 정도는 견딜 만합니다.” 유스타프의 말에 란은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하고 소파에 웅크리고 앉았다. 머리를 풀고 달려와 그녀의 머리카락이 마구 흐트러져 있었다. 란이 머리를 대충 쓸어내리는 걸 루미에가 붙잡았다. “제가 묶어 드리지요.” “고마워.” 루미에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머리를 모아서 손으로 빗질했다. 엉켜 보였던 머리카락은 매끄러워 금방 걸림 없이 내려갔다. 빗은 머리를 세 갈래로 나눠서 땋은 후에, 루미에는 머리카락 끝에 키스했다. 살며시 머리카락을 내려놓으니 란이 돌아보고 웃었다. “엄청 깔끔하게 묶었잖아? 고마워.” “별말씀을.” 루미에의 눈동자에 부드러운 온기가 있어서 란은 저도 모르게 빤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곧 그 특유의 미소가 얼굴에 번졌다. “제 얼굴에 뭔가 묻었습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란은 소파에서 몸을 돌려 등받이에 한쪽 팔을 올린 채로 물었다. “머리는 어떻게 땋을 줄 알아?” “어렸을 때, 릴리의 머리를 땋아 주고는 했답니다.” “그랬구나.” “주인님의 머리카락은 석양에 물든 밀밭 같네요.” 란이 웃었다. “칭찬 고마워. 그리고 루미에.” “네.” “걱정 끼쳐서 미안해.” 루미에가 살짝 입을 벌렸다가 다시금 애교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앞으로는 저를 꼭 데리고 다니십시오.” “그래.” 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란.” 그때 유스타프가 그녀를 불러 란은 다시 몸을 정면으로 돌렸다. “응? 왜?” “절 보러 오셨으면 절 신경 써 주시지요.” 란이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다시금 힘주어 말했다. “가주님, 너무 뻔뻔해지신 거 아닌가요?” “아니었다면 지금도 누님은 제 마음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른 채로, 사방팔방에 빗방울을 흩뿌리고 다니셨겠지요.” “무슨 빗방울을 뿌려?” 당황해 란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유스타프가 이런 말을 한 적 있지 않던가? “적어도 지금은 제 마음을 아시니 다행이지요.”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하고 이어 물었다. “그런데 누님은 뭔가 드셨습니까?” “응? 아― 그러고 보니 아직.” 중얼거리자 유스타프는 별말 없이 시종에게 수프를 한 그릇 더 가져오게 했다. 란이 말했다. “하지만 배고프지 않은데…….” “지금은 배고프시겠지요.” 말하고 보니 그런가.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일단 그 소리도 너무 신경 쓰이는데…… 내일부터 찾아봐도 될까.” 그녀가 중얼거려서 유스타프는 저도 모르게 ‘질렸냐고’ 물어볼 뻔했다. 란이 라치아를 좋아하지 않는 건 잘 알고 있었다. 한 번도 ‘좋아한다.’고 대답해 준 적도 없고, 이 겨울에, 눈 폭풍에 얼어 죽을 뻔까지 하고, 빙벽 너머에서 이상한 소리까지 들리는데 누가 이 영지를 좋아하겠는가? 부와 권력이 있다고,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만 유스타프는 란이 그런 거에 좌지우지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도망치지 않았잖아.’ 정말로, 그녀가 그대로 떠났으면 잡지도 찾지도 않았을 거였다. 하지만 란은 남았다. 라치아에 머물기로 했고, 그는 제 이빨 아래 물린 짐승을 놔주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그게 유스타프가 루미에에게 관대한 이유이기도 했다. 란이 그를 아낀다는 건 그도 알았고, 그래서 처리해 버리려는 마음을 꾹 참고 있었다. 루미에가 청염 기사단에 있으니, 그것도 란이 여기 남을 이유 중의 하나가 되었겠지. ‘물론 저 자식은 란이 떠난다고 하면 당장 다 버리고 따라가겠지만.’ 란은 그걸 모르니까. 유스타프가 말했다. “그건 누님께서 신경 쓰실 일이 아닙니다.” 라치아 때문에 그녀가 부담가지는 일은 이 이상 피하고 싶었다. 란이 움찔하고 고개를 들었다. 녹색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물론, 그건 나도 알지만…….” 란은 입술을 팽팽하게 당기며 고개를 휙 돌렸다. 그렇다고 그렇게 퉁명하게 말할 건 없잖아? 나 좋아한다고 그랬으면서. 그렇다면, 좀 더 다정하고 상냥하게― 생각했다가 란은 저도 모르게 무릎 사이에 고개를 푹 박았다. ‘아악! 이거 내가 유스타프에게 했던 말이잖아!’ 란은 마음속으로 눈밭을 마구 구른 후에 헛기침하며 고개를 들었다. “물론 난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아니지 않습니다. 제 가장 소중한 사람이지요.” 아무렇지도 않게 유스타프가 대꾸해서 란은 다시 얼굴이 화르르 타올랐다. 때마침 시종이 수프를 가지고 들어와서 란은 허겁지겁 수프 그릇으로 시선을 내렸다. 뜨거운 토마토 수프를 마시며 란은 마음속을 가다듬었다. 따뜻한 것이 들어가자, 위장이 요동쳤다. 꾸르륵 소리가 나서 란은 빠르게 수프를 삼키듯이 넘겼다. “하여간 공작 일도 하면서 조사까지 하기는 어렵잖아. 나도 같이 조사할게. 손은 하나라도 더 많은 게 좋지.” 란의 말에 유스타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알겠습니다.” 빠르게 수프 그릇을 비우고 란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못 박듯 말했다. “오늘은 푹 쉬어. 더 일하지 말고.” 란의 잔소리에 유스타프는 픽 웃었다. “그렇게 하지요.” “좋아.” 란은 고개를 끄덕이고 유스타프의 방을 나섰다. 덧창을 모조리 닫아 어두운 복도에는 마법 등이 어른어른 빛나고 있었다. 덜컹덜컹. 덧창이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그 노크 소리가 생각나 란은 부르르 한 차례 몸을 떨었다. 다시 생각해도 소름 돋는다. “추우십니까?” 루미에의 물음에 란은 고개를 저었다. “아냐, 얼른 들어가자.” 제 방으로 들어가니 디모디아가 맞아주었다. “잘 다녀오셨어요?” “응. 그리고 배고파―”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가 나왔다. 뒤에서 소다와 카라가 웃으며 말했다. “안 그래도 식사를 주문했습니다.” “일단 차부터 마시세요.” 란은 설탕과 우유를 듬뿍 넣은 밀크티를 마시며 벽난로를 바라보았다. ‘하긴 장벽 너머의 그게 요동치는 건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야.’ 슬슬 이브리아의 봉인이 뚫릴 때가 오고 있었다. ‘그러니까 시나가 오는 게…….’ 이제 정말 별로 안 남았다. ‘내년이면 오는구나.’ 그녀를 이곳으로 내동댕이친 것이 바로 저 빙벽에 봉인된 것이니, 힘이 강해지고 있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 역시 들었다. ‘시나가 오면.’ 란은 느리게 팔걸이에 몸을 기대며 춤추는 벽난로 불빛을 바라보았다. 여자 주인공인 그녀가 오면. 모든 것은 그녀를 중심으로 돌아갈 테지. 유스타프도, 루미에도. 란은 시나를 생각하며 작게 웃었다. 하루빨리 만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아, 하지만.’ 유스타프가 나에게 냉랭해질 거라고 생각하니 그건 좀 슬픈데. 멍하니 그렇게 생각했다가 란은 맛있는 냄새에 정신을 차렸다. “뭐야, 맛있는 냄새 나.” 그녀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들뜬 목소리로 묻자 소다가 웃으며 접시를 내려놓았다. 갓 구운 따끈따끈한 빵과 뼈에서 발라내 먹기 편하게 손질된 닭구이, 새콤달콤한 피클과 버터, 잼이 함께 나왔다. “맛있겠다.” 란은 껍질을 바삭바삭하게 구운 닭구이를 황홀하게 보았다. “얼른 드세요.” 소다가 그렇게 말하며 란의 무릎 위에 냅킨을 펼쳐 주었다. 란은 순식간에 이른 저녁 식사를 해치웠다. 겨울에 체온을 유지하려면 많이 먹어야 한다더니, 그게 사실인가 보다. 순식간에 음식을 전부 먹어 치우고서, 마지막 디저트로 나온 사과 절임까지 먹으니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너무 많이 먹었나 봐…….” 그녀가 중얼거리자 루미에가 말했다. “주인님은 좀 찌시는 게 좋아요.” 란이 그 말에 녹색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아, 루미에. 그 말 여자에게 진짜 인기 좋을 것 같은 말이야.” “다른 여자에게는 안 합니다.” 루미에가 그렇게 말해서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오해할 법한 언사는 하지 않는 게 좋아. 루미에가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배부르시면 잠깐 걸을까요?” “아, 그럴까?” 좋은 생각이야, 하고 란이 몸을 일으켰다. 소다가 “아니, 그 고생을 하시고도 또 움직이시려고요?” 하면서도 단단히 옷을 입혀 주었다. 방 안은 온풍기를 돌려도 복도는 추웠다. 입김이 나올 정도였지만 외부와 비교하면 엄청나게 따뜻한 것이었다. 부른 배를 안고 란은 루미에와 함께 복도를 걸으며 방을 구경했다. 란은 어쩐지 도슨트(docent)가 된 기분으로 루미에에게 방이나 태피스트리나 그림을 하나씩 설명했다. 쓰지 않는 몇몇 방들은 가구를 천으로 덮어놔서 좀 을씨년스러운 느낌도 들었다. 루미에가 돌벽을 어루만지다가 물었다. “혹시 비밀 통로 같은 것도 알고 계십니까?” 그의 물음에 란은 고개를 휙휙 저었다. 그녀는 모피가 달린 망토를 두르고 있어서 꼭 인형처럼 보였다. “왜 남기로 하신 겁니까?” 저도 모르게 루미에가 물었다. 란이 그를 보고 웃었다. “그럼 갔으면 좋았겠어? 루미에랑도 못 보게 될 텐데.” “어째서요?” 그가 눈을 찌푸렸다. “설마 주인님, 저까지 버리고 가실 생각이셨던 거예요? 같이 가기로 하시고서는.” “어? 아니 그게 아니라, 루미에는 이제 청염 기사단원이잖아. 그런데 데리고 갈 수는 없지. 릴리도 있고.” 루미에는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그깟 자리 없어도 된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말하면 기사단에 넣어준 란이 어떻게 생각할까 싶어 참았다. “릴리는 주인님을 따라가도 만날 수 있지요. 어차피 엘프와 인연이 있는 건 주인님 아닙니까.” 대신 그는 그렇게 말하며 부루퉁한 얼굴을 했다. “결국, 이 추워 빠진 곳에 남게 되어버렸네요.” “하하하, 그러네.” “주인님은 좀 더 따뜻한 나라가 어울리는데요.” “그런가?” 란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을 보다가 루미에는 깨달았다. 그가 말했다. “정말로 절 두고 가실 생각이셨군요.” “응? 음…… 그랬겠지?” 그녀의 말에 루미에는 기가 찼다. 기가 차고 분노가 치밀었다. 이런 일방적인 관계는 너무하지 않은가? 멋대로 주워 놓고, 멋대로 혼자 서라고 하고, 멋대로― 순간 루미에는 유스타프가 했던 말을 깨달았다. 착각하지 말라고. 하, 하는 탄식 같은 한숨과 웃음이 그의 폐 깊숙이서 솟구쳤다. “주인님.” “응?” “사탕 장수 이야기를 아세요?” 루미에가 물어 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모르는데. 무슨 이야기야?” “거기 나오는 사탕 장수가 꼭 주인님 같아서요.” 그 말에 란이 허리에 손을 얹으며 그에게로 돌아섰다. “뭐야? 뭔가 안 좋은 거 아냐?” 루미에는 히죽 웃었다. “그렇게 생각하신다는 건 주인님께 켕기는 게 있다는 걸까요.” “아니, 없는데.” 당당하게 말하는 그녀를 보고 루미에는 다시 웃었다. “그럼 된 거 아닙니까?” 그가 그렇게 속삭이고 더듬던 벽에 달린 촛대를 잡아당겼다. 그르릉— 낮은 소리와 함께 문이 돌아가며 반쯤 열렸다. 란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검은 입구에서 차가운 공기가 마구 밀려들어 왔다. “가 볼까요?” 루미에의 물음에 란은 망토 앞섶을 단단히 여미고 후드를 뒤집어쓴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가보자.” 이런 모험을 마다할쏘냐. 비밀 통로라니 흥미진진하지 않은가?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루미에의 뒤를 따라 종종걸음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깜깜해서 란이 허리춤을 더듬어 램프를 켜려고 하자 루미에가 손을 덮어 왔다. “켜지 마세요. 혹시 밖에서 빛이 보일 수도 있거든요.” “아, 응.”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안으로 걸어 들어가면 갈수록 깜깜해져서 그녀는 숨을 삼켰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루미에의 옷자락을 붙잡자 루미에는 그녀의 손을 잡아 왔다. 뜨거운 손이었다. 루미에는 여기가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지금 웃고 있는 걸 다 들켰을 테니까. 기뻤다. 너무 기뻐서 가슴속이 콱 조여지는 기분이었다. 별거 아닌, 그냥 손을 잡은 것뿐인. 그냥 이곳이 어두워서 그녀가 자신에게 기댄다는. 그 하나만으로도 이렇게나 기쁘다니. ‘약을 먹었을 때도 이런 느낌은 아니었는데.’ 루미에는 그렇게 생각하며 걸었다. 이곳이 더 어둡다면, 이 길이 아주 길면 좋을 텐데. 자신이 앞서고, 그녀가 그의 손을 잡고 따라오는 이 길이. “루미에.” 속삭이듯 란이 말했다. “네, 주인님.” 그의 목소리가 경쾌해서 란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언제까지 갈 거야? 나 진짜로 하나도 안 보이는데.” “이왕 들어온 거 끝까지 가보지요.” “이러다가 한 30분 걸어서 밖이고, 그러면 어쩌지?” “그러면 밖으로 나가는 길을 하나 찾은 거지요.” “그런가.” 란은 그렇게 말하며 갸웃했다. 만약에 유스타프에게 물어본다면……. ‘왠지 알려줄 것 같아!’ 란은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다시 얼굴이 따끈따끈해지는 걸 느꼈다. 자의식 과잉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어쩐지 유스타프는 알려줄 것 같았다. ‘소, 소중한 사람이라고 했고…….’ 그때 발에 뭔가 차이고, “찍.” 하는 소리가 났다. 란은 기겁하며 비명을 질렀다. “쥐! 쥐!” 그녀가 발을 구르며 루미에에게 달라붙어서 그가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란이 부들부들 떨었다. “그야 밖이 추우니 안에 쥐가 있겠죠.” 루미에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해서, 란은 그 소리가 나는 쪽을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하, 하지만 내 발에 치이는 거랑 내 눈에 안 보이는 건 다르다고.” “그러고 보니 라치아는 쥐가 적은 편이기는 하지요.” “아, 제발. 쥐 진짜 싫어.” “어디 가서 새끼 고양이라도 얻어 올까요?” 루미에가 그녀를 어르며 하는 말에 란의 눈이 반짝 빛났다. “새끼 고양이?” “네. 쥐잡이가 있다면, 쥐도 덜하겠지요.” “그런가…… 그거 좋네…… 고양이…….”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루미에의 목에 팔을 둘렀다. “루미에, 춥지 않아? 생각해 보니까 제복에 망토 하나만 둘렀잖아?” “춥지 않습니다.” “에이.” 란은 그렇게 말했고, 루미에는 계속 걷고 있었다. 그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 닿아 있으면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리겠다. 고막까지 쿵쿵 울리는 소리에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냥 자신에게만 들리는 것인지 란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에게 안겨서 말했다. “이상하네, 점점 위로 올라가고 있는 건가?” “네, 그런 것 같습니다. 아.” “왜?” 루미에가 아주 작게 속삭였다. “빛이 보이네요.” “빛?” 란 역시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정말로 깜깜한 가운데 저쪽에서 빛이 비쳐 들어오고 있었다. “내려 줘.” 그녀의 말에 루미에가 조심스럽게 란을 내려놓았다. 다가가 보니 바닥에 구멍이 나 있었고, 그 아래는― “연회장이네?” “그러네요. 다이아몬드 홀인 것 같군요.” “맞아. 허, 참. 완전히 한눈에 다 보이잖아? 대체 이 통로는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는 거람?” “그러게요. 제 생각에는 이야기 소리도 상당히 뚜렷하게 들릴 것 같군요.” “그럴지도.” 란은 한참 홀을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그러니까 연회장을 관찰하는 용도란 말야? 하늘 저택을 지은 이브리아는 무슨 생각이었던 걸까.”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루미에가 이어 말했다. “저쪽으로 더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 볼까.” 란은 그렇게 말하다가 갑자기 경사로가 시작되어 발이 쭉 미끄러져 굴러떨어지기 시작했다. “꺄악!” “주인님!” 놀란 루미에가 뒤를 따라왔지만, 어떻게 잡을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 마치 미끄럼틀을 타고 하염없이 내려가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앞으로 엎어져서 미끄럼틀을 탄 모양새가 된 란은 어떻게든 멈춰 보려고 애썼지만 두툼하고 매끄러운 옷에 장갑까지 끼고 있으니 속절없이 미끄러질 수밖에 없었다. 다음 순간 저쪽에 빛이 보였다. ‘잠깐, 이 속도로 저 밖으로 튕겨져 나가는 거야?’ 그때 루미에의 손이 란의 손목을 붙잡았고 동시에 몸이 허공에 붕 뜨면서 시야가 밝아졌다. ‘떨어진다!’ 눈을 꽉 감았지만, 곧 푹 하고 두 사람은 눈밭에 파묻혔다. 아직 바람에 눈발이 날리고 있었지만, 아까 낮만큼 심하지는 않았다. 란은 눈을 떴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가 란이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이 어디서 튕겨져 나왔는지 보였다. 빗물을 배출할 때 쓰는 우수관 중의 하나였다. 그냥 커다란 우수관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루미에, 괜찮아?” 란이 휙 돌아보며 말하자 루미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눈을 털었다. “네, 괜찮습니다. 눈 폭풍이 좀 잦아들어서 다행이군요.” “어, 얼른 들어가자.” 란이 이를 닥닥 부딪치며 말해서 루미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가 저도 모르게 말했다. “이대로 떠나 버리면 어떨까요?” “얼어 죽는 건 싫어.” 란의 대답은 간결했고 그래서 루미에는 웃었다. “그렇지요. 저도 싫네요. 그건.” 둘이 다시 돌아서 현관으로 들어가자 시녀들은 난리가 났다. 대체 왜 이 날씨에 또! 밖으로 나간 거냐며 디모디아는 잔소리를 해댔고, 루미에 역시 “어떻게 그렇게 분별이 없어요?” 하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다시 따끈한 욕조를 거쳐서 란은 완전히 기진맥진해져 그대로 쓰러지듯 잠자리에 들었다. ✥✥✥ 그렇게 심했던 눈 폭풍은 하루 만에 잦아들었고, 아랫마을 영지민의 피해 상황을 살피며 며칠을 보냈다. 그 후로는 다행히도 청명한 겨울 날씨가 이어져서 란은 한시름 놓았다. 그 후로 그녀는 대부분의 시간을 도서관에서 보내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유스타프와 함께 서류를 보고, 점심을 먹고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라치아의 도서관은 두 곳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일반적인 커다란 도서관이었다. 란은 라치아의 도서관을 좋아했다. 도서관의 이데아 같은 곳이라고, 란은 생각했다. 유리온실 같은 둥근 돔 천장에서 겨울의 날카로운 햇빛이 쏟아지고, 돔을 중심으로 책장에는 책들이 나란히 꽂혀 있고― ‘물론 책이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이곳의 인쇄 기술로는 많은 책을 양산할 수는 없고, 현대인처럼 책을 몇천 권, 몇만 권씩 가지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대신 모든 책은 표지를 앞으로 해서 진열하듯이 놓여 있었다. 아름답게 채색된 가죽 장정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훌쩍 지나갈 정도였다. 그리고 특별 관리가 필요한 고서들과 라치아 가문의 역사를 기록한 책은 도서관 안쪽 서고에 보관되어 있었다. ‘이렇게 멋진 도서관을 만들다니. 이브리아는 뭘 아는 사람이야.’ 물론 그녀가 100% 인간이냐고 묻는다면 좀 미묘하기는 하지만. 인간은 인간이니까.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안쪽 서고로 들어갔다. 서고 출입권을 가지고 있는 건 유스타프와 란뿐이라서, 루미에는 도서관에서 기다렸다. “심심할 텐데 다른 데 가도 괜찮아.” 란의 말을 루미에는 “책이나 보죠.” 하고 일축했다. 란은 어깨를 으쓱하고 서고 안으로 들어가서 책들을 살폈다. ‘이건 책이라고 할 수도 없어.’ 양피지 묶음들이 한 아름씩 쌓여 있는 걸 보면 란은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말했다시피 라치아는 천 년 가문. 기록물의 양도 어마어마했다. ‘빙벽에 대해서 기록한 것만 추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런 생각은 하지도 않고 그냥 쌓아 두기만 했군.’ 검색 시스템이 절실하다. 란은 괜히 허공에 타자 치는 시늉을 해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날을 잡아서 이걸 정리하는 게 좋겠다. ‘하려면 지금이다!’ 결심한 그녀는 도저히 손댈 엄두가 나지 않는 기록물의 산을 바라보다가 팔을 걷어붙였다. 정리하다가 읽고, 읽다가 정리하고. 정신없이 내용을 읽는데 맛있는 냄새가 확 풍겨 와서 란은 고개를 들었다. 돌아보니 유스타프가 서고 한쪽에 있는 작은 테이블에 쟁반을 올려놓고, 그 앞에 앉아 있었다. “유스? 언제 왔어?” 놀란 란이 다가오며 물었고 유스타프가 픽 웃었다. “제가 온 것도 모르시고 뭘 그렇게 열심히 보십니까?” “아― 300년 전 글인데, 정복 황제와 나눴던 이야기나 인상 같은 게 적혀 있어서 흥미롭네.” “그건 정말로 흥미롭네요.” “유스도 볼래?” 란은 그렇게 말하며 얼른 자리에 와 앉아서 스푼을 들었다. 그녀가 히죽 웃었다. “배고픈 건 어떻게 알았어?” “그 정도는 알지요.” 란은 설탕을 뿌려 구운 따끈한 토스트를 한입 깨물었다. 그을린 황금색 표면이 바삭하는 소리를 냈다. 유스타프는 란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란의 얼굴이 붉어졌다. “왜 그렇게 봐?” “예뻐서요.” 란의 얼굴이 더더욱 달아올라서 유스타프가 물었다.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으셨습니까?” “익숙해질 리가 없잖아?” “하지만 그렇게 일일이 얼굴이 붉어지시면.” 유스타프가 손을 뻗어 그녀의 입가에 묻은 설탕 부스러기를 닦아 주고 웃었다. “제가 그다음을 못 나가지 않습니까?” 으악, 으악, 으악. 란은 말문이 막혀 손등으로 제 입가를 문질러 닦고 왁왁 토스트를 집어삼키듯 먹었다. 유스타프가 따뜻한 우유를 그녀 쪽으로 밀어 줘서 그것까지 꿀떡꿀떡 마셨다. “안 나가도 괜찮습니다!” 란이 항변해서 유스타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괜찮지요.” 그러고서 그가 고개를 기울였다. 매끄러운 검은색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흘러내리고 지나치게 잘생긴 얼굴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빙하 같은 푸른색 눈이 빛을 발한다. 란은 순간 이곳이 어딘지를 잊고 유스타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니, 이렇게까지 잘생길 필요가 있나?’ 란이 그렇게 생각하는데 유스타프가 물었다. “싫으십니까?” 순간 란은 질문을 알아듣지 못하고 “으응?” 하고 되물었고, 유스타프는 다시 물었다. “제가 이러는 게 싫으십니까?”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란은 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손톱만을 지그시 노려보다가 작게 말했다. “싫……진 않아.” 그게 문제였다. 유스타프가 자신을 좋아하는 게 조금도 싫지 않은 게.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거부감은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다. 끙끙거리며 제 손만 내려다보는 란을 보며 유스타프는 웃음이 터지려는 걸 참았다. 그렇구나, 싫지 않구나. 깊은 안도감이 파도처럼 그를 덮쳤다. 그뿐 아니라, 그녀를 밀어붙이고 ‘어디까지가 싫지 않냐고.’ 물어보며 하나하나 시험해 보고 싶은 마음이 솟구치는 걸 참는 게 힘들었다. ‘서두르지 마.’ 서두르면 안 돼, 유스타프 라반 드 라치아. 억지로 밀어붙이는 건 란에게는 조금도 통하지 않는다. 조금씩조금씩, 저 스스로 걸어 들어오게 해야 한다. “그건 기쁘네요.” 유스타프는 그래서 순순히 말했고, 란의 귀 끝이 빨개지는 걸 바라보았다. “그럼, 쓸 만한 내용은 찾으셨습니까?” 유스타프가 주제를 바꿔서 란은 숨통이 트이는 기분으로 얼른 답했다. “아니, 아직 못 찾았어. 보다시피 기록들이 엉망으로 섞여 있어서…… 조금씩 정리를 하고 있기는 한데. 라치아의 겨울은 기니까, 겨우내 정리하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혼자서 다 하시려면 힘들 텐데요.” 그가 눈을 찌푸려 란이 고개를 저었다. “아냐, 어차피 딱히 할 일도 없는데, 뭐.” “아침마다 서류도 보시면서요. 그리고 좀 편하게 지내셔도 괜찮습니다.” 유스타프의 말에 란은 따끈따끈한 벽난로 앞에서 즐기는 게임과 눈썰매와 오락거리들을 떠올렸다. “음, 그럼 적당히 열심히 할게.” 란의 말에 유스타프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서고 안이 썰렁한 것 같은데 난로도 켜시고요.” “응, 하지만 건조하면 양피지에 안 좋을까 봐…… 적당히 춥지 않게 할게. 지금도 양말 세 겹이나 신어서 괜찮아.” 란의 말에 유스타프는 “그래도…….” 하고 말꼬리를 흐렸다가 쟁반을 챙겨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대신 너무 오래는 일하지 마십시오.” “응, 고마워.” 걱정해 주는 것도, 존중해 주는 것도 양쪽 다 좋다. 란이 웃으며 말하자 유스타프는 한숨을 내쉬고 서고를 나섰다. 배가 든든해지니 훨씬 기운이 나서 란은 아까 읽던 서류 쪽으로 씩씩하게 다가갔다. ‘올겨울은 서류를 보면서 지내려나?’ 하지만 그런 그녀의 예상은 완전히 깨져 버렸다. ✥✥✥ 3월의 라치아는 아직도 추운 겨울이었다. 수도에야 봄바람이 불고 있겠지만, 라치아의 바람은 아직도 칼바람. 그래서 황실의 사자는 전신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유스타프가 자동 난로를 내주자 사자는 그 앞에 바싹 붙어 서서 젖은 부츠에 뜨거운 온기를 쬐었다. 그가 입고 있는 옷은 새까만 색이었다. 가신으로 그 자리에 같이 서 있던 란은 심장이 크게 뛰었다. ‘황태자가 죽었나?’ 시나가 왔을 때는 이미 황태자가 죽은 후라서, 정확하게 언제 황태자가 죽었는지는 란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쯤 죽었다고 해도 문제없는 시기였다. 하지만 사신이 가져온 소식은 완전히 다른 소식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붕어하셨습니다.” 란은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유스타프는 사신의 손에서 검은색 조기를 받아 들며 말했다. “라치아는 깊은 슬픔을 표하는 바요. 정확히 언제쯤 승하하신 겁니까?” “올해 신년쯤입니다. 라치아에는 도무지 들어올 수가 없어, 연락이 늦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럼…….” 유스타프가 조기를 더듬으며 말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즉위하셨겠군요.” “네, 그렇습니다. 새로운 황제 폐하 만만세!” 사신은 큰소리로 외쳤다. 란은 뒤통수를 누군가가 한 대 친 기분이었다. ‘루스가 죽은 게 아니고? 황제 폐하가? 아니― 어째서?’ 분명히 현 황제는 시나가 올 때까지 살아 있었다. ‘올리비아가 계획을 바꾼 건가? 아니면 다른 변수가 생긴 거야?’ “즉위식이 4월에 열립니다. 부디 꼭 라치아 공작께서도 참석해 주시길 바랍니다.” 사신이 이어 초대장을 건넸고 유스타프는 그걸 받아 들며 말했다. “고맙네. 들어가서 쉬도록.” 사신은 고개를 깊게 숙이고 물러났다. 그가 물러나자마자 란과 유스타프의 시선이 마주쳤다. 유스타프가 말했다. “제가 생각하고 있는 걸 란도 생각하고 있습니까?” “생각하고 있어요.” 란은 그렇게 말하고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되었든, 새 황제는 라치아를 적대하고 있었고 그게 라치아에게 득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즉위식에서 무슨 짓을 할지.’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4월의 즉위식까지 갈 수 있을까?” “길이 좋지 않을 겁니다.”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하고 생각에 잠겼다. “참석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요.” “그건 안 되죠. 사태를 파악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인데요.” 란의 중얼거림에 유스타프가 그녀를 보며 말했다. “제가 가주가 되어서 다행입니다.” 그 말에 그녀의 녹색 눈이 가늘어졌다. “뭐예요? 제가 못 감당할 것 같아서요?” “아뇨. 란이 불쾌한 일을 당하지 않아도 되어서요.” 그의 말에 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런 일을 가주님이 당하는 것도 싫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하겠지.” 유스타프는 잘라 말하고 고개를 들었다. “블레인.” 서 있던 블레인이 고개를 숙였다. “청염 기사단을 점검해라. 아무래도 곧 출발해야 할 것 같으니까.” “존의.” “다른 가신들에게도 미리 알리는 게 좋겠군. 로미아 백작.” 그녀를 부르는 말에 란은 얼른 자세를 바로 했다. “그대에게 라치아를 맡겨도 될까?” 란은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항의하려고 했다. 아니, 지금 날 두고 가겠다고? 하지만 모두의 앞이고, 그녀는 가신이고, 그는 가주다. 모두가 “네.”를 외치는 상황에서 혼자 “싫어요.”를 외쳐도 되는가. “알, 겠습니다.” 간신히 대답하고 나니 유스타프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나중에 이야기 나누지요. 가주님.” 란이 덧붙인 말에 그의 미소가 짙어졌다. “기꺼이 그리하지.” 란은 머릿속을 빙글빙글 돌리며 유스타프의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원래 그녀가 아는 대로라면 황태자가 죽고, 황제는 살아 있어야 한다. 그런데 황태자는 살고 황제가 죽었다. 그럼 황제가 자연사한 건 아닐 테니, 누군가가 황제를 죽였다는 이야기고― ‘올리비아가 황제를 죽였단 말인가?’ 대체 왜? ‘어디서 마음을 바꾼 거지? 황태자를 더 참아 주기로 한 건가? 하지만 그러면 황제는 왜…….’ 잠깐. 란은 머릿속을 고쳤다. ‘예전 이야기는 떼어 놓고 지금 상황만 보고 생각해 보자.’ 루스가 황제가 되었으니 올리비아는 이제 황후다. 명실상부, 제국 여성의 일인자가 된 것이다. 야심만만한 올리비아에게는 어울리는 자리임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 황태자를 참아 주면서?’ 아니면 황태자가 정신을 차리고 올리비아와 화해를 하기라도 한 것일까. 그렇다면 골치 아파질지도 모르겠다. “란.” 유스타프가 속삭여 란은 펄쩍 뛰었다. 그가 눈을 깜박였다. “그렇게 놀랄 줄은 몰랐습니다.” “아뇨, 죄송합니다. 제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것 같았습니다.” 유스타프가 빙긋 웃었다. 돌아보니 알현실에 남은 것은 란과 유스타프뿐이었다. 저절로 란의 말투가 풀어졌다. “지금 아무도 없는 거지요?” “네.” “그럼 왜 나를 데려가지 않는 거야? 사교계에서 움직일 사람이 필요하지 않아?” “필요하지만, 그 개새―, 실례. 그 쓰레기가 황제가 되었으니 분명히 그가 가지지 못했던 걸 노릴 겁니다. 게다가 누님은 이제는 라치아 사람도 아니고, 백작입니다. 좀 더 만만한 상대가 되었다는 거지요.” 란이 공작이었을 때에도 어떻게든 손에 넣으려 안달했던 인간이다. 그녀가 백작이 되었으니 더더욱 쉽게 생각할 게 틀림없었다. 게다가. “더해서 란은 내 약점이고, 약점을 외부에 노출시키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란은 불만 서린 눈으로 유스타프를 바라보았다. “어쨌든 백작 위를 정식으로 인정받으려면 루스를 만나야 해. 유스가 작위를 주기는 했지만, 어쨌든 모든 작위는 황제의 승인이 필요한 거니까.” “그 작자가 누님께 무슨 짓을 했는지 벌써 잊었습니까?” “잊지 않았어.” 란은 그렇게 말하고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에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벌벌 떨면서 그의 얼굴을 보지도 못하고 살고 싶지는 않아.” 그녀가 머뭇머뭇 손을 뻗어서 그의 손을 잡았다. 유스타프가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건 그런 의미가 아닌 걸 미리 말해 둘게. 어, 그러니까. 어쨌든 나에게는 유스가 있잖아?” 유스타프는 제 손을 감싸 쥔 그녀의 손을 반대로 감싸 쥐며 말했다. “그럼 어떤 의미입니까?” “내가 유스를 믿는다는 의미.” 유스타프의 상체가 기울어졌다. 가까워진 그의 눈동자를 보고 란은 눈을 크게 떴다가 살짝 내리깔았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유스타프는 미소 짓고 그녀의 눈가에 키스해 준 후에 말했다. “그렇게 말해 주시니 감사하군요. 하지만 그래도 동행은 안 됩니다. 라치아를 비우기에도 리스크는 너무 크니까요. 이전 같은 일이 있을 수도 있고.” 유스타프의 말에 란은 눈가를 비비며 말했다. “아, 알았어.” 순순한 그녀의 대답에 유스타프는 웃고 손을 놓아 주었다. “그럼 자세한 건 후에 이야기하지요.” 그의 말에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가 떠나자 란은 제 입술을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키스하는 줄 알았는데.’ 안 해서 아쉽다, 하는 생각이 들자마자 란은 “으악.” 하고 소리를 내며 양손으로 제 얼굴을 감쌌다. “안 돼, 정신 차려, 란 로미아. 지금 그럴 때가 아니에요.” 그럴 때가 아니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거랑 이거랑은 다르잖아? 머릿속에서 다른 목소리가 속삭였다. 유스타프가 시나를 좋아하면 분명히 울 거야. 그냥 선수를 쳐 버려. ‘으으, 아냐. 아냐. 휙휙, 정신 차려라, 란.’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제 머리를 꽉꽉 눌렀다. 알현실을 나오자 루미에가 기다리고 있었다. 란이 “아.” 하고 고개를 들었다. “오래 기다렸지, 미안.” “아닙니다. 이야기는 어떻게 되셨나요?” “으―음. 일단 나는 수도에 가지 않고 남는 게 됐어. 하지만 어차피 백작 위를 받으려면 한 번은 얼굴을 봐야 하는데.” “누굴 말입니까?” “새 황제 폐하.” 란의 말투에서 냉기가 뚝뚝 떨어져서 루미에의 얼굴 역시 좋지 않아졌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 “아, 그게―” 란은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까, 하다가 그냥 솔직하게 루미에에게 털어놓았다. 어차피 알게 될 텐데, 그래도 당사자 입으로 듣는 게 가장 깔끔하지. 이야기를 들으며 루미에는 감정 조절을 하기 위해 애썼다. “그래서 유스타프는 걱정이 되나 봐.” “저도 걱정되는데요.” 루미에의 대답이 빠르게 나왔다. 그에게 황제는 구름 위의 사람이고, 얼마큼의 권력을 가졌는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자들이 사람을 깔아뭉개려고 하면 얼마나 잔혹해지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라치아가 아무리 공작가라고 해도, 상대는 황제 아닌가? 밑바닥에서 흙먼지를 먹고 살아온 인생이다. 그런 자신 위에 군림했던 자들도, 귀족이라면 맥을 못 췄다. 그들은 까마득히 높은 곳에 있는 존재들이었으니까. 그건 란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녀 역시 반짝이는 별 같은 높은 존재이니, 자신과는 닿을 수 없는 높은 사람. 하지만 란은 그의 손을 잡고, 손등에 키스를 해주었다. 인간으로서 고개를 들고 설 수 있게 해 줬다. ‘할 수 있다면…….’ 가능하다면 그녀를 데리고 아주 멀리, 제국을 벗어나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란은 도망치지 않으리라. 루미에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란이 그의 한숨에 가볍게 웃었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잘될 거야.” “그러길 바랍니다.” 그리고 루미에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숙여 말했다. “만약 그러지 않아도 주인님께는 제가 있답니다.” 눈을 찡긋하는 루미에를 보고 란은 웃었다. “알았어. 기억해 둘게.” 유스타프는 일주일 후에 출발했다. “차라리 아직 얼음이 얼어 있을 때 출발하는 게 나으니까요.” 그는 그렇게 말했고, 거기에는 란도 동의했다. 질척한 진흙밭을 달리는 건 어려운 일이니까. 유스타프가 떠나고 나자 어째 저택이 텅 빈 기분이었다. 유스타프는 청염 기사단의 절반을 끌고 갔다. 블레인을 두고 가겠다는 걸 란이 괜찮다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유스타프는 얄짤없이 블레인을 두고 대신 로스를 데리고 떠났다. 블레인이 란을 달래듯 말했다. “또 영지전을 걸어올 멍청이가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하긴, 그건 그러네요.” 란은 그렇게 대답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영지전이 열린다면 란의 지식과 경험으로는 한계가 뚜렷했다. ‘하지만 수도에 올라간 유스타프가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라…….’ 더 이상 자신이 도울 수도 없고, 읽은 것과는 완전히 달라진 상황은 란을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런 기색을 보이면 안 되리라. 유스타프는 총관이라는 직분을 새로 만들어서 란에게 수여했다. 가주 대리와 마찬가지인 자리였다. 그녀는 가주 대리로 일하게 된 만큼 힘을 내야 한다고 결심했다. 실제로도 곧 일이 바빠져서 란은 정신없이 일했다. 날씨가 풀리니 약속했던 드워프 기술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머물 곳은 스스로 만들면 되지.” “맞아, 맞아.” 드워프들은 그렇게 말하며 광산 주변에 자기들이 묵을 집을 ‘파기’ 시작했다. 임시 거처를 만들 때까지는 하늘 저택에 손님방을 내주기로 했고, 매일 음식을 준비하게 했다. 그러고 나자 마법 세공사인 리디아가 말을 전해 왔다. “따로 나가서 살고 싶다고요?” 란이 갸웃하자 리디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택에서 사는 것 역시 가주님의 큰 배려이니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마법 세공사 길드원들이 이쪽으로 이주하고 있는 것은 아시지요?” 그녀의 물음에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캐머론 후작과의 싸움 이후로 그는 마법 세공사 길드에 대한 압력을 강하게 가했다. 그래서 세공사들은 길드를 뛰쳐나와 라치아 공작령으로 들어와서 작은 마을을 이루었다. 란은 기꺼이 얼음수정을 판매하고 그들이 만든 마법 세공품을 판매할 수 있도록 골든로즈 상단과 연결해 주었다. “새 길드를 세우려는데, 제가 길드장으로 추천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리디아의 뺨은 붉었지만,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어머? 리디아, 정말 잘됐어요!” 란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길드장이라니. 중년 여성이라 라치아로 쫓겨나듯 온 것이 얼마 전인데, 이제 새로운 길드장이라. “하지만 한 품목에 한 길드밖에 세워지지 않잖아요?” 란의 물음에 리디아가 미소 지었다. “저희는 얼음수정 마법 세공 길드입니다.” 란은 입을 살짝 벌렸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눈 가리고 아웅이기는 하지만, 그래, 그럴 듯하다. 기존의 마력석과 얼음수정은 차원이 다르니까. “그렇군요. 그렇다면 마음 아프지만 허락해 줘야지요. 물론 라치아 공작가에서도 새 길드장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겠어요.” 이 각박한 세상에 여자끼리 돕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란이 그렇게 말하며 눈을 찡긋하자 리디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감사합니다. 가, 아니, 백작님.” 리디아가 이어 말했다. “프란체는 이 저택에 남겨 두고 싶습니다. 공작가의 수석 마법 세공사는 좋은 자리니까요.” 그 말에 란은 힐끔 옆에 서 있는 프란체를 보았다. 남자아이는 하루하루가 다른 걸까. 그 역시도 처음 왔을 때에 비하면 훌쩍 자라 있었다. 게다가 그가 만드는 마법 세공진은 섬세하고 정교하다고 정평이 났다. 란이 말한 현대의 도구를 프란체가 하룻밤 만에 뚝딱 설계한 적도 있었다. ‘천재는 천재라는 거지.’ “남아 주면 나야 고맙지요.” 란이 그렇게 말하고 빙긋 웃었다. 리디아가 “감사합니다.” 하고 고개를 숙인 후에 말했다. “전에 말씀하셨던 마법 세공품도 완성되었답니다.” “정말?” “네, 휴대용 난로 말이에요. 프란체, 보여 드리렴.” 프란체가 그 말에 얼른 제 책상으로 가더니 네모난 물건을 들고 왔다. 문고본 정도의 사이즈로 우윳빛 유리 같은 빛깔을 띠고 있었다. 프란체가 말했다. “이 옆에다가 얼음수정을 끼우면 되고요.” 그가 가공된 육각형의 얼음수정을 한쪽 구멍에다 끼워 넣었다. “그리고 활성화를 위해서 여기 버튼을 눌러 주면 돼요.” 그러자 휴대용 난로는 따뜻한 노란색으로 은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란은 그걸 손으로 어루만졌다. 약간 뜨겁기는 했지만 못 만질 정도는 아니었다. “버튼을 한 번 더 누르면 더 뜨거워지는데, 그러면 손으로 잡지 못할 정도로 열이 뿜어져 나와요. 그럴 때는 이렇게―” 그가 밑을 당겨 짤막한 네 개의 받침대가 나오게 했다. “받쳐 두고 두르면 됩니다.” “굉장하다! 이거 양산해서 보급할 수 있을까…….” 기사단원들에게 동계 훈련용으로 하나씩 보급하고 싶다. 란이 그렇게 말하자 프란체가 당혹한 얼굴로 말했다. “아마, 그건 안 될 거예요, 백작님.” “아, 그래?” “네, 그게…… 손으로 일일이 그려야 하는데― 그렇게 복잡하게 그리려면 시간이 많이 들어가거든요.” “아아.”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 세공이 얄팍한 철판 같은 곳에 은으로 가느다랗게 마법진을 새기는 작업이라는 건 란도 알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란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리디아가 말했다. “세공사 길드가 생기면 좀 더 빠르게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아, 그러네요.” 란이 미소 지었다. “그럼 필요한 것이 있다면 행정보조관인 율리아에게 말하도록 해요. 내가 이야기해 두지요.” “알겠습니다.” 리디아의 인사를 받으며 란은 방을 나왔다. ‘라치아 영지에 새 길드라…… 좋지. 문제가 착착 해결되어 가네.’ 하지만 아직 유스타프에게서 연락은 없다. 란은 그걸 생각하면 저절로 마음이 어두워져서 얼른 다른 걸로 생각을 돌렸다. “그래도 날씨가 많이 좋아졌어.” 란의 말에 루미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4월 초는 확실히 라치아도 봄이라서, 바람은 더 이상 따갑지 않았고 고드름과 눈들이 녹아서 질척한 진흙땅을 만들고 있었다. 아직 남아 있는 눈 사이로도 뾰족뾰족 푸른 싹들이 올라와서 봄이 왔음을 알리고 있었다. 이미 스노우드롭은 예전에 꽃을 피워서 란의 집무실 화병에 장식되어 있었다. ‘분명히 수도에 도착했을 텐데.’ 하지만 란의 생각은 다시 유스타프에게로 돌아갔다. 마법 통신구가 존재하는 세계이기는 하지만, 이게 거리의 한계가 명확했다. ‘중간에 송신탑을 세우면 해결될 문제인데…….’ 아무도 송신탑을 세울 생각은 없어 보인다. ‘물론 비용도 들고…… 나도 사실 어떤 원리인지는 모르니까.’ 그러다 보니 수도와 라치아처럼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마법 통신구를 사용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리고 또 이 세계는 순간이동이라는 마법이 없단 말야.’ 마법이 없다기보다는 일종의 금기였다. 시간을 되돌리는 것. 죽은 자를 되살리는 것.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 이 세 가지는 대현자 이브리아가 쓰면 안 되는 마법이라고 땅땅 해 놨고, 몰래 연구하는 자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불가능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는 듯했다. ‘마법이라는 건 물리법칙을 뛰어넘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작게 투덜거렸다. 하여간 문제는 그래서 수도와 라치아 사이의 편지에는 기나긴 시간이 필요하단 것이었다. “전령새 같은 걸 만들까.” 중얼거리고 란은 ‘앗, 정말 그런 걸 만들면 되지 않나?’ 하고 눈을 빛냈다. 우체부 드론 같은 것을 만들면 될 것 같은데. ‘나중에 프란체에게 부탁해 보자.’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나니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다. “……설 보러 가신다면서요?” 그래서 란은 한 박자 늦게 루미에의 말을 알아들었다. “응?” 란이 그를 돌아보자 루미에는 별 기색 없이 다시 물었다. “수로 시설을 보러 가신다고 들었습니다.” “아, 응. 봄이 돼서 둑이나 수로가 어떤지 직접 눈으로 보려고. 일단 내가 직접 신경을 쓴다는 걸 아랫사람들에게 알려 줄 필요도 있고.” 란의 말에 루미에가 말했다. “당연히 저도 데리고 가시는 거겠지요?” 란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당연하지.” 루미에가 우아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다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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