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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79화


#79 팔코메르에서 ‘사생아’의 위치는 생각보다 가혹한 것이었다. 그는 자라는 내내 ‘불순물’ 취급받았다. 원하여 혼외자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원하여 가문의 이물질이 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제릭스는 언제나 ‘혼외자’라는 껍데기를 벗어던질 수 없었다. 살아가는 내내 그리 원치 않은 이름으로 살아야 했다. 제릭스를 이렇게 세상에 존재하게끔 한 남자. 아버지는 가문을 겉도는 제릭스를 안타깝게 여기지 않았다. 여느 귀족들처럼 무책임하게, 그를 고아원에 버리거나 친부인 자신의 존재를 숨기는 비열한 짓은 하지 않았으나 제릭스는 가끔 그가 자신을 사생아가 아닌 ‘고아’로 살게 했다면 어땠을지 생각했다. 차라리 그편이 더 낫지 않았을까. 그랬더라면 이복형과의 차별도, 그로 인한 괴로움도 없었을 것이다. ‘원해서 가진 게 아니에요.’ 눈물로 온통 젖은 여자는 평소보다 더 가냘팠다. 곧 부러질 것처럼, 분으로 가려도 해쓱함이 가려지지 않아 오늘따라 더 창백해 보였다. 제릭스는 ‘원하지 않았다.’ 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사람을 얼마나 비참하게 하는지는 그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너를 원한 적 없다.’ 그의 모친도 언젠가 그런 말을 했다. 그의 아버지 역시 대놓고 말한 적은 없었지만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제릭스의 존재는 ‘실수’가 불러일으킨 오물이었다. 그는 비참함을 삼키며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눈물로 흠뻑 젖은 여자에게 입술을 맞추고 싶었다. 빈틈없이 품에 안아 다독이고 싶었다. 난나를 여기서 구해 내, 먼 곳으로 달아나고 싶었다. 더는 원하지 않는 아이를 갖게 두고 싶지 않았다. 난나가 황제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멀리서 보아도 알았다. 궁정의 귀부인들은 그녀를 두고 ‘욕심 많은 계집’이라 수군거리지만 난나가 궁정에서 얼마나 외로워하는지, 황제로부터 얼마나 심한 괴롭힘을 받고 있는지 그는 알 수 있었다. 그러니……. “폐하.” 서리가 내린 눈으로 저를 내려다보는 황제는 마치 악귀 같았다. 호박색 눈은 정물 같아서, 살아있는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가 자아내는 분위기는 맹수의 것처럼 흉악하게 느껴졌다. 꼭 사지를 찢을 것처럼……. “소신은……. 윽!” 멱이 움켜잡혔다. 황제는 그대로 그를 난간으로 밀어붙였다. 목이 졸린다는 두려움보다 그가 두 손으로 제 목을 비틀어 꺾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득적인 공포였고 하여 자제할 수가 없었다. 정제하지 않은 분노가 그에게로 쏟아졌다. 흉곽을 부풀린 사내가 말 그대로 죽음으로 그를 내몰았다.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그는 근위였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그는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이였다. 황제가 그를 죽이고자 한다면 그대로 죽음을 받아들여야 했다. 하나 그런 위치가 아니라 하더라도 작금의 그를 이길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황제는 그만큼 압도적인 무력을 자랑하는 이였다. 전장에서 그가 얼마나 흉포했는지. 그 살벌한 악명이 어떻게 만들었는지 가장 지척에서 지켜보았다. 그 끔찍한 악명은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크, 흐윽…….” “돌아버리지 않고서야 짐의 아이를 가진 여인에게 손을 댈 리가 없잖아.” 그리 말하는 황제의 눈이야말로 ‘돌아버린 눈’이었다. 이성을 잃고 분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하여 제릭스는 의문이 들었다. 저를 배반한 여자에 대한 노여움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겨우 그 정도의 감정이 아니었다. 보통은 제 면을 상하게 만든 여자에 대한 분노가 대부분이었다. 일개 평민조차 그런 감정으로 제 아내를 잡도리하는데 비해 황제는 그보다 원초적인 감정에 휩싸인 것 같았다. 그러니까 마치…… ‘질투’하는 것으로 보였다. 제릭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오랫동안 전장에서 못 볼 꼴을 보아 온 자신조차 살이 떨릴 만큼 흉흉한 기운이었다. 말 그대로 살벌하고 흉악했다. 이대로 멱이 따여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지금 이 순간만큼 황제는 군주라기보단 일개 사내로 보였다. 그때, 황제가 곁을 지키는 기사의 허리춤에서 단도를 뽑아 들었다. 제릭스는 동요하지 않고 그를 응시했다. 날카로운 빛을 머금은 검 끝이 지체 없이 그의 목울대에 닿았다. 제릭스는 눈을 감지 않고 남자를 보았다. “그만!” 젖은 비명이 발코니를 울렸다. 별빛처럼 풍성하게 빛나는 머리칼이 그의 가슴팍으로 뛰어들었다. 제릭스는 작은 고양이처럼 제 가슴으로 뛰어든 여자를 보았다. 눈물에 젖은 얼굴이 희고 가여웠다. 그는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비켜.” “으, 흑, 흐으……. 안 돼요. 제발, 제발…….” 난나가 간절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엉망으로 젖은 얼굴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겁을 먹은 여자의 얼굴은 익숙했으나, 그 두려움을 딛고 서 고집을 부리는 여자는 처음이었다. 오레스터는 그 순간 깨달았다. 난나가 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 말이다. 이 여자는 정말로 저에게 마음이 없었다. 이 여자는…… 다른 남자에게 마음이 있다. 왜 몰랐지? 왜 여태까지 모르고 있었을까. 기가 막혔다. 헛웃음이 나서. 눈 밑의 근육이 기괴하게 꿈틀거렸다. 피가 역류하는 것 같았다. 그는 덜덜 떨면서도 사내의 품에서 벗어나지 않는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난나는 그를 사랑했다. 오랫동안 흠모하여, 내심 그의 아내가 되고 싶어 했다. 마음을 고백할 수 없었던 것은 그가 지나치게 높은 자리에 있는 까닭이다. 군주를, 주인의 약혼자에게 마음을 품은 시녀 같은 것은 용납할 수 없으니까. 그런데……. “언제부터야?” “폐하.” 난나가 젖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귀가 먹먹했다. 물이 고막까지 그득 찬 것 같았다. 그는 현기증을 느꼈다. 순간 시야가 기울어지더니 다시 바로 섰다. 그는 한 줌도 안 되는 몸으로 사내의 몸을 끌어안고 있는 여자를 응시했다. 가느다란 두 팔로 남자를 끌어안은 여자는 죽음을 각오한 얼굴이었다. 심장이 갈퀴로 긁히는 것 같았다. 내장이 뒤틀리고, 당혹감과 모멸감에 미친 듯 노여웠다. 이런 정제되지 않은 감정을 느끼는 것도 처음이었다. 그는 일그러진 채 웃음을 터트렸다. 입술 밖으로 흩어지는 기괴한 웃음이 정말로 미친 작자의 것 같았다. “하하하!” “폐, 폐하.” “너……. 이 탕녀 같은 게!” 그는 허리를 숙인 채 광인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달리, 이 솟구치는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분노? 모욕? 상처? 당혹감? 불쾌함? 대체 뭐라고 해야 할까. 후두부를 가격당한 느낌이었다. 난나가 저를 사랑하지 않을 리 없었다. 이 멍청하고 아둔한 계집의 세상에 가득 찬 것은 그여야 했다. 이 여자를 상처 입힐 수 있는 것은 오직 그였다. 왜냐하면 난나는 그를 사랑하니까. 그러니 공작이 그녀를 탐하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마음은 그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난나가 왜 이 병신 같은 자식을 감싸안고 있는 거지? 왜 이 자를 연인처럼 끌어안고 있는 걸까. 손이 잘게 떨렸다. 그는 단도를 내던진 채 사내의 가슴팍에 안긴 난나의 머리채를 움켜잡았다. 그러고는 사정없이 떼어냈다. “악!” 난나가 비명을 질렀다. 숨을 참는 것처럼 입 밖으로 터져 나오는 신음을 난나는 참아 냈다. 분노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에게 머리채가 붙잡혀 우악스럽게 뜯어내지는 동안에도 그녀의 시선은 오롯이 남자에게 닿아 있었다. 죽이고 싶었다. 그런데 죽이고 싶은 자가 누구인가. 눈앞의 사내? 아니면 난나? 아니면 그 자신의 목에 칼을 박아 넣고 싶나. “폐하!” 사내가 그를 제지했다. 감히 주군의 몸에 손을 대는 일조차 허락된 일이 아닐진대 머리칼을 움켜잡은 그의 손을 뜯어내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조금 웃었다. 광기에 물든 눈을 마주한 남자는 흠칫 굳었으나 물러나지 않았다. 오레스터는 남자의 굳은 눈을 응시했다. 이 자를 알았다. 애초에 근위는 몇 없으니까. 이름이 정확히 무엇이더라. ‘로투시’. 그래 로투시였다. 유년 시절에는 ‘제릭스 피츠로이’라고 불렸다고 했나. 사생아였다. 또 어느 등신 같은 귀족 사내가 창부나 하녀를 품었다가 원치 않게 잉태되었겠지. 구정물에서 태어나 감히 황제의 첩에게 손을 댔다. 그는 약하게 웃었다. “사지가 찢겨 본 일이 없어 두려워하지 않는 건가?” “놓아 주십시오.” “이 계집은 짐의 것이란다. 짐의 자식을 품었지.” “하면 더욱 놓아 주십시오.” 오레스터는 물끄러미 남자를 보았다. 난나는 울고 있었다. 하늘색 눈이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잘게 떨다가 손을 놓았다. 풀썩 옆으로 쓰러진 난나가 비틀거리며 남자의 옆으로 가려 했다. 남자는 그의 눈을 두려워하지 않고 여자를 안았다. 난나가 그의 품에 안긴 채 하염없이 울었다. 오레스터는 망연히 그 모습을 보았다. 이상했다. 눈가가 습해지는 것 같았다. 못 박힌 채 떠나지 못하는 시선에 염증이 났다. 그만 보고 싶은데, 난나가 다른 남자의 품에서 울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자해와 같아서. 스스로 상처 입히는 것과 같은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턱에 힘을 준 채…… 바닥으로. 아니 심연으로 곤두박질치는 감각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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