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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54화


#54 사내와는 손끝도 닿아본 적 없는 척, 제 그림자만 보아도 질식할 것처럼 파르르 떨고 뒤로 물러나던 계집이었다. 그가 어떤 복장을 하고 있어도 그 계집은 저를 두려워했다. 처음에는 갑주를 입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불길에 검게 그을은 자국이며, 살점과 핏물이 튀어 눌어붙은 자국은 공작저에 처박혀 주인의 차나 따르는 어린 시녀에겐 흉하고 처참해 보였을지도 몰랐다. 하필이면 난나를 의식하며 시선을 마주쳤던 곳이 막사였다. 그때 그는 갓 스물을 넘긴 청년이었고, 난나와 테아는 아직 소녀였던 시절이었다. 테아는 어린 시절부터 괄괄하며, 여자아이답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공성전에서 화약 대신 쓰일 잘린 머리통을 수레에 담아 실어 나르는 모습을 보아도 눈 깜빡하지 않는 여자가 테아였다. 그러나 난나는 달랐다. 피가 묻은 갑주만 보아도 속이 울렁거리는 지, 도무지 전장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러니 투구를 쓴 거대한 남자가 두려웠겠지. 거침없이 때로는 무작스럽게 칼을 내두르는 그가 두려웠으리라. ‘놀랍군.’ ‘왜?’ 상념에 잠긴 그가 잔뜩 비틀린 속을 숨기며 짧게 입술을 떼자, 테아가 물었다.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바늘 같았다. 그는 약혼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또다시 꼬리를 감춘 계집을 되감았다. ‘그런 얼굴로 네 아버지의 침상을 데우고 있는 줄은 몰랐어.’ ‘그 애가 어떤 얼굴을 하는데?’ 우아하게 냉차를 한 모금 더 마신 테아가 퍽 날카로운 질문을 했다. 며칠째 면도를 하지 않아 까슬한 턱을 문지르며 테아를 쳐다보았다. 테아의 얼굴은 여전히 느슨했으나 그의 대답에 따라 언제든 표정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천천히 입술을 뗐다. ‘……사내를 두려워하는 얼굴이잖아.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얼굴이야.’ ‘난나가?’ ‘…….’ 대답하지 않고 건너편의 여자를 쳐다보았다. 테아는 그를 지그시 쳐다보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쾌활한 웃음이었다. 고개를 젖힌 채 한참 웃던 여자가 눈가를 닦으며 입술을 뗐다. ‘당신 의외로 순진하다.’ 흘러가듯 짧게 흘리는 말이었으나 썩 유쾌하지 않았다. 그를 ‘순진하다’ 평가하는 것과 별개로 그 여자가 사실은 그가 알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른 여자라는 게. 그러니까 그 겁이 많은 여자가 사실은 아주 탕녀였다는 사실이 불쾌했다. ‘난나는 당신만 무서워하는 거야.’ ‘…….’ ‘정확히는 아버지도 두려워하긴 하지만. 당신을 더 무서워해.’ 테아는 픽 웃으며 꿀을 발라 구운 아몬드를 한 알 집어 오물오물 씹었다. 오레스터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 약혼녀를 무심하게 쳐다보았다. 시선을 돌리고 미세하게 긁힌 것 같은 신경을 잠재우기 위해 노력했다. 테아는 그런 그를 훤히 꿰뚫어 본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황제는 난나의 섬약한 신경이 아이를 가지게 되어 더욱 예민하고 날카롭게 변했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쓸데없는 망상들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이라고. 난나는 정말로 자신이 그러한가 자문했다. 어린 알렉시스를 두고 황손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이며, 황적을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며 생모가 되어 그 애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말만을 늘어놓는 게 과연 전부 임신 탓인가. 정말로 머리가 어떻게 되어서……. 감히 해선 안 될 말을 입밖에 뱉어 놓은 건가. 설사 황제의 아이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 갓난애의 황적을 박탈하고, 궁 밖에서 키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옳은 일일까. 아이를 사랑한다면, 적어도 생모라면 그런 말을 먼저 꺼내서는 안 되겠지. 그래, 제정신이 아니었다. 정말로 임신을 하여 미쳤든지 아니면 수도원의 생활이 고달파 돌아버렸든지. 둘 중 하나인 게 틀림없었다. ‘아니야, 나는 미치지 않았어.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 그러나 난나는 임신을 해서 머리가 돌아버린 적은 없었다. 딸을 잃고 잠시간 미쳐버린 적은 있지만 아이를 가졌다고 해서 크게 행동이 달라진 적은 없었다. 게다가 황제는 그녀의 임신에 특별한 반응을 보인 적이 없었다. 난나의 신경이 날카로워진다고 하여, 조금 더 다정하게 대한다거나 그녀를 직접 보살펴 주러 오는 일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아무리 무심한 사이라 해도 황후는 황제의 유일한 처였다. 직급이 낮은 일개 후궁 같은 게 아니니 세간의 시선을 의식해 황제는 직접 황후의 식사를 챙겨 주거나 꽃을 보내주고 다달이 사치품을 선물로 주는 게 의례적이라 들었다. 그러나 오레스터는……. “엄마?” 그림을 그리던 스텔라가 넋이 나간 것처럼 허공을 더듬고 있던 난나를 돌아보았다. 난나는 고개를 돌려 딸을 보았다. 못 본 새 반 뼘 정도 자란 것 같은 스텔라가 난나를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난나는 습관적으로 인상을 쓰려다가 표정을 다듬었다. 오레스터는 그날 이후로 종종 남매를 보내왔다. 궁으로 돌아오고 싶다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인지 슬란의 편지며, 스텔라가 그리는 그림 같은 것을 시종의 손에 들려 보내더니 오늘은 남매를 직접 보내주며 시간을 보내라고 했다. 난나는 이해할 수 없는 처사에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난나는 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궁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무슨 생각해요?” 스텔라가 걱정이 가득한 눈초리로 물었다. 난나는 어린 딸을 보았다. 걱정과 다르게 스텔라는 아주 밝은 모습이었다. 오레스터의 말로는 생모가 보고 싶어 매일 떼를 쓰고 운다고 했는데……. 거짓말인 것 같았다. “……우리 아가들 저녁을 고민하고 있어. 뭐가 먹고 싶니?” 난나는 이따금 남매가 먹을 식사를 직접 만든 적이 있었다. 따로 유모가 있었고 오레스터가 그러라 명한 것도 아니었으나 난나는 젖도 직접 물렸다. 내 아기였으니까, 젖을 물리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유식을 할 무렵에는 직접 이유식을 만들어 보기도 했다. 다정한 엄마가 되고 싶었으니까. 문득 슬란이 그녀를 힐끔거리다가 입술을 뗐다. “오, 오리크식 어린 돼지 요리를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오빠 그거 안 좋아하잖아.” “폐, 폐하께서 좋아하시니까.” 스텔라가 슬란을 향해 빽 소리쳤다. 슬란은 슬그머니 시선을 내리깔았다. 난나는 아들을 물끄러미 보다가 입술을 뗐다. “폐하와 함께 식사하고 싶으면 저녁은 다음에…….” “아뇨. 폐하, 폐하께서도 같이 식사하시면…….” “나는 싫어!” 더듬으며 말하는 슬란에게 스텔라는 질색을 하며 또 소리를 질렀다. 정말로 싫은 모양인지 바르르 떠는 모양이 털을 세우는 어린 고양이 같았다. 난나는 아들의 얼굴에 어린 그늘을 읽었다. 슬란은 친부를 좋아하지 않았다. 슬란 뿐만 아니라 스텔라도 마찬가지였다. 황제 역시 제 친자들에게 특별한 애정을 두지 않았다. 테아의 배에서 나온 자식들이 아니라서 그랬을 것이다. 의무로라도 아이들을 가까이 한 적이 없으니 남매는 당연히 제 아버지라고 하면 두려워하고 싫어했다. 황제를 공경하고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교사나 시종으로부터 세뇌당하듯 강요받고 있었지만 불같은 성미의 스텔라는 그럴수록 오레스터를 기피했다. 반면 조금 더 성질이 순한 슬란은 얌전하게 굴었다. 그렇다고 하여 아이가 친부를 따른다는 것은 아니었다. 슬란 역시 아들로서 아버지를 그리워한다기보단 ‘부황’이라는 이유로 복종하는 것일 뿐일 테다. 난나는 아들이 오레스터로부터 무슨 말을 들은 것 같아 염려되었다. “슬란. 폐하께서 오늘 저녁 식사를 같이하고 싶다고 하셨니?” “…….” 난나가 조심스레 묻자 슬란은 순한 눈을 내리깔며 작게 주억거렸다. 그랬구나. 황제가 아이에게 말을 꺼내라고 일렀구나. 난나는 묘하게 가슴이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그가 바라는 대로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렇지 않다면 슬란을 들볶을지도 모르니까. 난나는 시선을 떨어트렸다. 어떤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그런 이유로 갈구냐고 하겠지만 오레스터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이미 그런 전적도 있었고. 그는 할 말이 있을 때면 가끔 어린 아들을 이용했다. 스텔라는 딸이고, 워낙 괄괄한 성미이니 시키는 대로 따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반면 슬란은 수시로 그에게 불려 갔다. 난나는 멀리 떨어져 있는 어린 아들이 보호자여야 할 아버지로부터 괴롭힘을 당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분노가 싹을 틔웠다. 난나는 멀리 대기하고 있는 시종을 빤히 쳐다보았다. 시종은 드디어 난나가 무슨 부탁을 할 거라 생각했는지 반색하며 다가왔다. 작은 분노에 야금야금 갉아 먹히던 난나는 천천히 입술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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