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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16화


#16 스타테이라는 발코니로 나갔다. 정말로 황제가 에버하르트 성에 행차한 것인지 스타테이라의 얼굴이 밝아졌다. 이윽고 황제가 그녀의 침실로 짓쳐들어왔다. 키가 큰 만큼 보폭도 넓은 황제는 성큼성큼 들어와 자그마한 여자의 허리를 번쩍 안아 빙글 돌렸다. ‘카를!’ 복숭아빛 뺨에 키스를 하는 황제를 향해 날카롭게 소리친 스타테이라가 난나를 슬쩍 살피며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더블릿이 아닌 서코트를 입은 황제는 누가 보아도 정무를 보다 온 행색은 아니었다. ‘울었어?’ ‘그럴 리가.’ 스타테이라의 붉어진 눈가를 보던 남자가 다정히 물었다. 그들을 멍하니 보던 난나는 자신에게 돌아오는 날카로운 시선에 시선을 푹 고꾸라트렸다. ‘난나를 그렇게 보지 마. 난나는 당신을 두려워해.’ 죽은 쥐를 본 얼굴이 되어 벌벌 떨고 있는 난나를 본 스타테이라가 그의 어깨를 찰싹 때리며 웃었다. 난나는 남자가 스타테이라에게 집중하고 있는 사이 서둘러 벽에 몸을 붙이며 쿵쾅거리는 심장을 다스렸다. 황제가 제 심장을 우악스럽게 쥐어뜯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발밑이 무너지는 것처럼……. 그러니까 무얼 기대하고 말고도 없는데 괜히 그런 기분이 들었다. 스타테이라의 얼굴이 어두워졌을 때부터였을까. 아니면 그녀가 황후가 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부터? 모르겠다. 난나는 스타테이라가 황후가 되길 원했다. 다른 사람이 아닌 그녀가 되어야 한다고 당연히 생각했다. 한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왜 실망스러운 것일까. 왜 그녀의 약혼자가 그녀를 향해 키스하는 모습이 이렇게 가슴 아픈 거지? 눈물을 흘릴 이유 같은 것은 조금도 없었다. 그녀는 스타테이라를 정말로 좋아했으니까. 어렵고 두려운 것과 별개로. 그렇지만……. 난나는 도톰한 입술을 말아 물었다. 심장을 저미는 것 같은 둔통이 아릿하게 그녀를 내리눌렀다. * * * 눈을 떴을 때는 정오가 지나 있었다. 아래를 무자비하게 헤집었던 남자가 다시 빼곡하게 머릿속을 채웠다. 그 무심하던 얼굴이 노엽게 굳어졌던가. 난나는 말라붙은 입술을 뻐끔거렸다. 다시 돌아간다면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니, 그리하지는 못할 것이다. 난나는 아직도 그를 좋아하고 있으니까. 아직도 조금은 그를 바라고 있었다. 그 자상함이 저에게는 내리 닿지 못하더라도 제 자식들에게는 닿기를……. 간절한 마음은 여전했다. 아니, 시간이 갈수록 짙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결코 그리되지는 못하겠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닦지 못한 아래를 손끝으로 더듬었다. 내부는 여전히 축축한 것 같았다. 그녀는 현기증을 참으며 종을 울렸다. 하녀들이 민첩하게 들어와 나무 욕조를 준비했다. 대욕장이 따로 있었으나 난나는 사용할 수 없었다. 황제가 그것을 금지했다. 이유는 말하지 않았고, 난나는 따로 묻지 않았다. 그가 무언가를 금지하거나 혹은 허락한다면 모두 스타테이라와 연관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곳에서 스타테이라와 보내던 시간 때문일지도 모른다. 스타테이라를 품에 안고 서로에게 물을 얹어 주던 시간을 훼손하고 싶지 않겠지. 난나는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에 미련이 없다. 가슴이 아픈 것은 아주 생리적인 현상이고, 그가 도리어 자신을 좋아한다면 그 마음이 더 이상한 것이라고……. 그리 생각했다. “아프지는 않으세요?” 문득 그녀의 두피를 살피던 어린 하녀 하나가 물었다. 난나는 잊고 있던 욱신거림을 느꼈으나 괜찮다 말했다. 하녀는 더 입술을 떼지 않았으나 염려스러운 눈빛이었다. 재앙이 휩쓸고 간 자리마다 폐허가 남는 것처럼, 황제와 함께했던 밤이 지나고 나면 난나는 꼭 아팠다. 초기에는 열몸살을 심하게 앓았었고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늘 현기증과 근육통을 앓았다. 황제는 그리 난나가 아프다고 해도 개의치 않았다. 태후가 그녀를 염려하긴 했으나 부부의 밤 사정에 입을 대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난나는 따끈한 물 깊숙이 몸을 집어넣고 음울함을 꾸역꾸역 삼켰다. 문득 난나의 시녀가 급한 얼굴로 들어왔다. 난나는 자그마한 여자를 보았다. “폐하.” “……접견실에서 기다려도 되었을 텐데요.” 난나는 불편함을 참지 못하고 불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헐떡이며 들어온 금발의 여자가 손사래를 쳤다. 그러다 바쁘게 뛰는 심장을 붙잡고 눈을 질끈 감았다. 난나는 호들갑을 떠는 여자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본래도 그런 성미였다. 밝고 활달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 편견이 없고 선량한 성격인데 비해 부산스럽고 남 말을 하는 것을 좋아했다. 난나는 그런 여자가 밉지 않았고 사실은 미워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황후라고 해도 허수아비밖에 되지 않는 난나를 위해 자원하여 시녀가 된 것은 눈앞의 여자, 그러니까 외스타르 백작 부인이 유일했다. 자그마한 키에 통통한 체구. 양털처럼 구불거리는 금발은 몹시도 환했고 긴 속눈썹 아래 새파랗게 빛나는 벽안은 그녀를 제법 그럴싸한 미인으로 만들었다. 동글동글한 얼굴에 통통한 체형이 성격으로 보이게 했지만 난나가 보기에 그녀는 여느 귀부인들 못지않게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여자였다. 그런 여자가 기실 황후의 시녀 출신으로 계후가 된 그녀의 시녀를 자처했다는 게 신기했다. “차마 밖에서 기다릴 수 없는 문제였어요.” “대체 어떤 문제가 백작 부인의 호흡까지 곤란하게 만들었을까요?” “그야 황후 폐하께서 깨어나셨으니까!” 가슴을 가리며 욕조에서 일어나던 난나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긴 타월로 그녀의 가냘픈 몸을가리던 하녀들 역시 외스타르 백작 부인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무표정한 얼굴을 가면처럼 뒤집어쓰는 게 익숙한 하녀들 역시 몹시도 놀란 것 같았다. 외스타르 백작 부인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감당하지 못하고 어깨를 웅크렸다. 그러나 말을 정정할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그녀가 빨간 입술을 더듬다가 잠깐 깨무는 듯하더니 이내 다시 말문을 열었다. “폐하. 그러니까 이게…….” “백작 부인.” “물론 폐하는 황후이시지요. 하지만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시겠죠? 황후궁의 황후께서…….” “그분은…….” “예. 그분은 의식이 없으시죠. 시의들 또한 깨어나실 가능성이 없다고 했지요. 연금술사들도 그랬고요!” 하지만 깨어났다. 스타테이라가……. 영영 깨어날 수 없으니 그리 재워 둔 것이 무의미하다고 했던 여자였다. 딸을 극진히 아끼는 에버하르트 공작 또한 지난달 그만 장례를 치르자고 했다. 그리해야만 한다고 말하던 그였다. 그러나 황제는 그러지 않았다. 그런데……. “폐하, 폐하께서는…….”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심장이 바닥으로 철렁 떨어지는 것 같았다. 낯이 뜨거워지며 한기가 밀려드는 것 같기도 했다. 아직 하반신이 물속에 잠겨 있는데도 그랬다. 난나는 스타테이라를 생각했다. 정확히는 떠올리는 것이다. 그 여자의 얼굴을……. ‘마지막이 언제였더라.’ 피를 흘리는 얼굴이 무척이나 창백했다. 의식이 있는 스타테이라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다름 아닌 그녀였다. 그 작고 가느다란 여체를 품에 안고 하염없이 소리를 질렀었다. 그들은 인적이 드문 숲길에 고립된 채였다. 날카로운 단도가 그녀의 명치를 깊숙이 찔렀다. 그것도 여러 번…….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고, 난나는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지 못했다. 두건을 깊이 둘러쓴 남자는 체구가 상당했는데, 그럼에도 재규어처럼 민첩했다. 그들은 비가 쏟아지는 숲길에서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었다. 칼에 찔린 스타테이라를 끌어안은 난나는 극도의 두려움에 미친 듯이 떨며 울음을 터트렸다. ‘아가씨!’ 스타테이라는 황후였다. 그럼에도 이리 급할 데는 입에 붙은 호칭이 먼저 터졌다. 난나는 이제 그녀를 그리 부르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를 꽉 끌어안은 채 그렇게 불렀다. 의식이 깊은 바닥으로 잠기기 시작한 스타테이라가 아름다운 녹색 눈을 움직여 그녀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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