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키넷 단편야설

한 편 완결 소설

성인소설 목록

최신 단편

야설 읽기
밍키넷 소설
토스트 메세지 나오는곳
텔레그램 공식채널

밍키넷 공식보증업체

15화 15화


14. 요한이 없는 사샤의 나날은 단조로웠다. 침대에서 일어나 사제관의 사람들과 식사를 하고, 성당의 주위를 산책했다. 정오에는 신부 수업을 하고 오후에는 디디에와 차를 마셨다. 사샤가 디디에와 함께할 때를 빼고는 언제나 호세가 사샤의 뒤를 따라다녔다. 요한이 요새를 비우고 3일째, 사샤는 한층 더 쌀쌀해진 날씨에 어깨에 숄을 걸치고 디디에와 함께 정원을 걸었다. “신수 마을에 못 가게 되어 상심이 크진 않을까 염려되는군요.” “어쩔 수 없는 일인걸요. 언젠가 갈 수 있겠죠.” 결혼이 코앞이었다. 요한이 언제 돌아올지, 결혼 전에는 돌아올지 그조차 미지수였고 요한의 허락 없이 사샤는 요새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결혼 후에는 가 볼 수 있을까. 허락될까. 보반에게 잠시 부탁하면 그가 함께 가 줄까. “디터 소령이 징계를 받고 갇혀 있다더군요.” 생각에 잠겨 있는 사샤는 디디에의 말에 깨어났다. “디터 소령이요?” 그러고는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저도 오늘 아침에나 아침 미사를 드리러 온 사병에게서 전해 들었답니다. 요한이 직접 채찍 형 열 대와 일주일간의 근신을 명령했다고요.” “……언제부터요?” “글쎄요. 나흘 전부터였을까.” 사샤는 요한이 디터가 빼앗아 간 단도를 가지고 방에 들어온 날을 기억했다. 그는 그때, 디터가 당분간 성당에 데려다줄 수 없다고만 말했다. 공교롭게도 디터가 처분을 받은 날은 사샤가 단도를 돌려받은 날과 겹쳐졌다. “디터는 왜…… 왜 징계를 받은 건가요?” “명령 불복에 따른 반역이라고 하더군요. 묘한 일이에요. 디터 소령에 대한 세간의 평판은 좋지 못하지만 요한 소장의 심복으로, 그에 대한 존경과 추종은 누구보다 강하거든요. 그런 디터가 명령 불복에 의한 반역이라니.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 “여하튼 앞으로 디터 소령의 입지는 여러모로 불안해지긴 할 겁니다. 사람들이 디터의 잔인하고 교활한 성품을 알면서도 그를 따랐던 건 그가 요한의 충실한 오른팔이었기 때문이거든요. 명령 불복과 반역에 의한 채찍 형과 구금이라. 대단히 충격적인 처벌임은 틀림없어요.” 디터가 얼마나 요한에게 충실한 심복인지는 사샤도 잘 안다. 요한을 보는 디터를 보고 있노라면 그가 제 일에 얼마나 자긍심을 느끼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런 그가 어쩌다가 요한에게 징벌을 받을 지경이 되었을까. 설마 단도와 관련이 있는 걸까. 설마 나를 두고 디터가 요한과 대립한 걸까. 설마……. 요한이 날 두둔한 걸까. 아니,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설사 요한이 나를 두둔했다 하더라도 감정적인 이유일 리는 없어. 철저히 이익에 따른 계산일 뿐이야. 그러니 동요할 필요 없다. 쓸데없는 기대나, 망상 같은 건 하지 않는 게 좋다. “채찍 형을 당한 병사들을 본 적이 있죠. 잔인한 형벌이에요. 한 대만 맞아도 피부가 찢어져 뼈가 보일 정도니까요. 아마 디터 소령은 당분간 거동도 못 할 겁니다. 설령 거동하게 된다 하더라도 위상이 예전과 같을지 모르겠군요.” 사샤는 군법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그러나 설명만으로도 그가 받은 형벌이 얼마나 무거운지는 알 수 있었다. 그의 말에서 유추해 보자면 디터 개인의 명예뿐 아니라 군인으로서의 미래에도 타격을 입은 것으로 여겨졌다. 등의 상처처럼 그에게는 영원히 반역이라는 낙인이 찍혀 버린다는 이야기 같았다. “사샤 양에겐 잘된 일이예요. 여기 계실 동안 디터 소령이 당신을 괴롭히지 못할 테니까요. 그리고…….” 디디에는 주변을 한 번 살피고 은밀히 목소리를 낮추었다. “사샤 양.” “네?” 그는 사샤의 어깨를 잡고 조금 더 조용하고 신중하게 말했다. “저에게 계획이 있습니다.” “…….” “사샤 양을 제삼국으로 탈출시킬 겁니다. 사샤 양이 정치적 망명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친구들이 있어요.” “탈출…….” 사샤는 디디에의 입에서 나온 단어가 믿기지 않아 저 혼자 그 말을 따라 중얼거렸다. “그래요. 사샤 양. 탈출이요. 이곳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더는 사샤 양이 도첸의 꼭두각시로 목숨을 위협받으며 사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어요.” 디디에는 그녀가 샤엔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그렇게 결심했다. 더는 신수 마을의 피를 보지 않으리라. 더는 그런 끔찍함을 겪지 않으리라. 더는 샤엔 같은 희생양을 만들지 않으리라. 평생을 후회했다. 신수 마을을 떠난 것을. 그들을 지켜 주지 못한 것을. 세쿼이아 나무가 썩어들어 갈 때, 디디에는 그것이 죄의 증거임을 알았다. 선한 자를 돌보지 않은 죄, 약한 자를 돌보지 않은 죄. 힘없는 자의 편에 서지 않은 죄. 그것은 신이 그의 사도에게 보여 주려는 죄의 무게였다. 멸망의 징조요, 저주의 상징이었다. 그것은 십자가처럼 디디에의 마음속에 깊숙이 자리 잡았다. 원죄였다. 평생 속죄하고 회계해야 하는.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을 자유롭게 할 겁니다.” 자유. 평생 자유로웠던 적이 있던가. 사샤는 기억을 곱씹어 보았다. 아니 자유로운 날들은 없었다. 그녀는 늘 무엇엔가 구속되어 있었다. 그리고 늘 사샤는 그것에 순응했다. 생각해 보니 지금도 그렇다. 지금도 주어진 상황을 수긍하며 살아가고 있다. 처음의 두려움은 사라진 지 오래, 어떻게든 탈출해 보겠다는 마음을 접은 지도 오래. 그것은 막연한 바람이 되고, 이루어지지 않는 꿈이 되어 버렸다. 마음속에 증오를 키우면서도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이, 더 강하게 귀속되고 싶어 했다. 그러면, 지금은? 그것을 깨달은 지금은? 지금은 자유로워지고 싶은가?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가? “결혼식을 치른 후에 빅토리아 시가지에 있는 신혼집으로 거처를 옮긴다고 들었습니다. 그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요새는 보안이 철통같아 이 안에서 탈출하기란 불가능합니다. 반면에 시가지는 사방이 개방되어 있어 아주 수월하지요.” “…….” “모든 준비가 끝나면 그때 사샤 양이 해야 할 일들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매우 신중하고 은밀히 진행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때까지 사샤 양. 무엇보다 당신의 안전을 지키세요.” 디디에가 그녀의 양손을 꽉 마주 잡았다. 다갈색 털이 수북이 나 있는 그의 손에서는 결연함이 느껴졌다. 매일 누군가에게 얻어맞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함도, 누가 언제 음식에 무언가를 탔을지 모른다는 의심도,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미래도, 원치 않는 결혼도, 원치 않는 마음도, 되돌려 받을 희망이 없는 이 뜨거움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이 고통을 멈출 수 있다. 요한 당신에게서 닿을 수 없도록 멀리, 멀리 달아날 수 있어. 그럼 난 당신을 잊을 수 있을까? 당신은 날 조금은 그리워할까? 조금은 뜨거워질까? 분노든, 절망이든, 배신이든 무엇이든 간에. 디디에와의 산책을 마치고 성당으로 돌아가 보니 타리프가 성당의 문 앞에서 호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가 호세가 먼저 사샤를 발견했고 뒤따라 타리프도 그녀와 디디에를 발견했다. “신부님. 타리프 양.” 타리프는 넓은 챙 모자를 겸손히 가슴에 안고 바삐 걸어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반가운 마음에 다정히 인사를 건넸으나 타리프의 상기된 얼굴은 근심에 쌓여 있었다. 사샤는 금방 그것을 눈치채고 긴장하며 물었다. “무슨 일 있으신가요?” “사샤 양. 저를 좀 도와 주셔야겠습니다.” 사샤는 영문을 몰라 디디에와 시선을 교환했다. 그도 영 무슨 일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자 호세가 나섰다. “사샤 양이 다녀간 후로 암말 하나가 도통 아무것도 먹지를 않는답니다. 요새로 뵈러 갔다가 이곳이라면 뵐 수 있단 말을 듣고 곧바로 오신 모양입니다.” 암말이라면……. “돌시를 이야기하는 건가요?” 사샤가 미심쩍은 얼굴로 묻자, 타리프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돌시가 사샤 양이 다녀간 후로 아무것도 먹질 않고 있어요. 아무래도 사샤 양이 와 주기를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돌시가 저를 기다리고 있다고요?” “예.” “어디가 아픈 건 아니고요?” “예. 시가지에서 수의사분이 다녀갔는데 아픈 것은 아니랍디다.” “…….” 정말 알다가도 모를 놈이다. 제 주인을 닮은 걸까. 제멋대로 놀려 먹고 괴롭힐 때는 언제고, 마음을 주려 해도 무시하고 달아날 때는 언제고. 타리프는 안달을 냈다. “같이 좀 가 주십시오. 사샤 양. 저러다 큰일 날까 걱정입니다.” 사샤는 디디에를 보았다. 그는 곤란한 빛이 역력했다. 성당의 오후 미사 일정이 있기 때문에 함께 갈 수가 없었다. 호세와 디디에가 미사를 마칠 동안 사샤도 함께 성당에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하지만 그만큼 지루하고 따분하기도 하지. “다녀올게요. 괜찮을 거예요.” “하지만…….” “혼자 가는 것이 아니니까요. 타리프도 같이 있고요.” “예. 제가 아가씨를 성당으로 다시 꼭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그래도…….” 디디에는 영 마음을 놓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사샤는 그의 팔뚝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 사샤는 마음을 놓으라는 듯 방긋 웃었다. 사샤는 내내 자신의 방을 뒤진 자는 디터일 것으로 생각했다. 만약 디터가 아니라면 그의 하수인일 거라 생각했다. 도로시일 수도 있었다. 사샤에겐 도로시도 디터의 패거리 중 하나였다. 요새 안에서 그녀에게 위협이 되는 것은 디터뿐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의 행방과 상황을 알았으니 더는 위협이 될 게 없었다. “금방 돌아올게요. 미사가 끝나기 전까진 꼭 돌아올게요.” 사샤는 디디에에게도 호세에게도 진중하게 다짐하고 몸을 돌렸다. 타리프가 디디에와 호세에게 넙죽 인사를 하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괜찮을까요?” 호세가 불안감에 휩싸인 디디에에게 걱정스레 물었다. 성당에서 마구간까지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다. 수풀이 우거진 곳도 아니었고, 널따랗고 시야가 탁 트인 초원만 존재하는 곳이니 누군가 해코지를 하기 위해 숨어 있기도 모호한 곳. 요새에 있는 자들이 훈련된 군인들만 아니라면야 마음을 놓겠지만, 이곳엔 모두 무장을 한 군인들뿐이다. 여차하면 서로 총을 겨누고 그중 단 한 발이라도 실수를 하면 연쇄적으로 총알이 날아다닐 수 있는 곳이다. 지금껏 요한이라는 거대한 존재가 엄격한 군법으로 그들을 통제했다. 그러므로 요새에 군인들이 온 이후, 한 번도 말썽이 일어난 적은 없었다. 물론 이런 변수도 없었지만. 디디에도 사샤와 마찬가지로 사샤에게 위협이 되는 인물은 디터라고 여겼다. 뒷배도 없고 충성스러운 심복도 없는 자이니, 그의 행방과 상태를 안 이상 그가 당장 사샤를 위협하지 못할 것이란 건 그도 알고 있다. 설령 그에게 매수된 자가 있다 해도 요한이 아끼는 말들이 즐비한 마구간에서 자중지란을 일으키진 못하리라. 요한은 사람보다 동물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을 모두가 아니 말이다. “괜찮겠지. 그렇게 믿어야지.” 디디에는 기도하듯 말하고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호세도 멀어지는 타리프와 사샤의 뒷모습을 눈으로 한 번 쫓고는 디디에의 뒤를 따라 예배당 안으로 들어갔다. 곧 있을 미사를 알리는 종이 쳤다.   타리프는 사샤에게 당근과 옥수수, 사과를 바구니에 한가득 담아 주었다. 사샤는 노인에게서 그것을 받아 들고 익숙하게 돌시가 있는 마방으로 향했다. 말들이 향긋한 과일의 냄새를 맡았는지 여기저기서 투레질을 하며 목을 빼고 그녀의 걸음을 쫓았다. 사샤는 곧장 앞으로만 갔다. 타리프가 정성스레 치운 깔끔한 바닥에는 말들이 좋아하는 건초 더미가 줄을 지어 쌓여 있었다. 개 중 유독 건초가 수북한 곳이 보였다. 돌시의 마방이었다. 사샤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언제는 심통만 부리더니.” 돌시는 그녀를 보았다. 사과 향을 맡았는지 그녀의 코가 넓어졌다 좁혀졌다 했다. “너도 주인을 닮아서 성격이 아주 괴팍해.” 돌시가 칸막이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사샤는 흠칫 뒤로 한 발 물러서며 바구니를 뒤로 뺐다. “누가 또 엎어 버리게 둘 줄 알고!” 그렇게 한참 사샤는 돌시와 신경전을 벌이다가 사과 하나를 집어 퉁명스레 손을 뻗었다. “자. 먹어. 사과 좋아한다며. 너 예뻐서 주는 거 아니야. 타리프가 걱정돼서 주는 거야. 자. 먹어.” 돌시는 머리를 내민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절대 코를 벌름대지도 않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지도 않고 박제해 놓은 것처럼 가만히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먹으라니까. 어서.” “…….” “먹어. 얼른!” “…….” 여전했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도 아닐 텐데. 지금껏 한 행동을 보자면 진작에 덥석 집어 가야 맞는데. 왜 이러지? 눈이 안 보이나? 아니면 냄새를 못 맡아? 아니면 정말……. “너, 정말 어디 아파?” 그럴 리가. 아프면 타리프가 못 알아봤을 리 없는데. 시내에서 수의사도 다녀갔다고 했다. 아픈 것도 아닌데……. 사샤는 미동도 하지 않는 돌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기다란 속눈썹과 새까만 눈동자를, 부드럽게 윤기가 흐르는 잘 빗긴 콧등을. 너는 먹이를 원하는 것이 아니구나. 너는…… 사샤는 사과를 다시 바구니에 넣고 손을 뻗어 그녀의 콧등을 매만졌다. “…….” 돌시의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푸르르, 부드럽게 그녀가 투레질했다. 마치 그제야 안심을 한 듯. 떠올려 보니 돌시와 헤어질 때 그녀가 보았을 마지막 모습은 디터에게 끌려가는 모습이었을 터였다. 타리프에게 막말을 하고 거칠게 잡아끌어 어디에서인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모습까지 보았을지도 모른다. “날 걱정했어?” 돌시가 그녀의 가슴을 코끝을 가져다대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꼭 괜찮은 것인지 확인하는 듯. 사샤는 돌시의 콧잔등을 매만지다 그녀의 길고 보드라운 머리를 껴안았다. 돌시의 콧등에 사샤는 이마를 마주 대고 눈을 감았다. 너는 요한을 사랑하지. 맹목적으로. 바보처럼. 넓은 초원 대신 이 좁은 마방에 갇혀서 이제나저제나 사랑하는 남자나 기다리는 처지지. 그러면서 꿈으로나마 멀고 긴 길을 달리겠지. 그때서야 비로소 자유로워졌다가 눈을 뜨면 발바닥에 굽을 박고 입에 재갈을 문 현실로 되돌아와 있는 거야. 너는 고통을 사랑이라 생각하지. 그 사랑에 길들어진 거야 돌시. 나처럼 말이야. “도망가자, 돌시.” 언젠가, 너도 나와 같이 도망가자. 요한에게서 달아나자. 이 사랑은 달콤하지 않아. 고통만이 존재할 뿐이야. 그러니 달아나자. 멀리 달아나자. 언젠가 더 사랑할 무언가가 나타날 거야. 언젠가, 언젠가 그를 잊을 수 있을 거야. 사랑을 명분으로 고통을 강요당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나와 같이 가자. 같이. 멀리.   디디에는 미사가 끝난 후, 예배당 앞에 서서 사람들과 인사하며 금목서의 너머를 계속 힐끗거렸다. 미사가 끝나기 전에 돌아오겠다더니 아직 사샤는 보이지 않았다. 성경책을 든 군인들이 거의 다 사라졌을 무렵, 디디에가 몇 번이고 목이 빠져라 금목서를 보았을 때쯤, 타리프와 천천히 걸어오는 사샤가 보였다. 디디에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사샤가 가까워지면 질수록 그녀의 한결 편안해진 얼굴을 보며 더더욱 마음을 놓았다. “돌시가 이제 건초를 먹던가요?” 디디에는 미소를 띤 채 다가오는 사샤에게 물었다. 사샤는 밝게 화답했다. “네. 건초는 아니고 사과와 옥수수만 흥청망청 먹어 댔어요.” “그 녀석 사샤 양을 여간 좋아하는 게 아니에요. 더 두었다가는 상사병으로 딱 굶어 죽었을 겁니다.” 타리프가 사샤의 말을 거들었다. 그는 사샤에게 동물은 사람의 성별이나 조건, 외형을 따지지 않고 사랑에 빠진다고 했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사람의 외형이나 조건을 따지는 것은 오로지 사람뿐이었다. 어째서 요한이 사람이 아닌 짐승을 사랑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가 바라는 사랑은 인간이 줄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어떤 조건이나 편견도 허락지 않는 완전무결한 것. 그가 바라는 것은 그토록 완벽할 거다. “그것참 다행이군요. 한 생명을 살렸다니 대단히 고귀한 일입니다. 사샤 양.” 디디에의 말에 모두가 웃었다. 분위기는 한결 유해졌다. 사샤는 돌시의 털이 얼마나 부드러운지, 그녀가 얼마나 새하얀지 자랑했다. 마치 자신의 말 같았다. 사샤는 타리프에게 매일같이 마방에 들러 돌시에게 빗질해 줄 수 있는지 물었고. 그는 그뿐 아니라 매일 돌시를 타고 마구간의 목초지를 돌아다녀 주기를 부탁했다. 사샤는 기뻤다. 마침내 마음이 통하고, 따듯한 온기가 있는 생명을 만난 것이 기뻤다. 애정을 주는 것이 괴롭지 않은 존재였다. 사랑을 주면 줄수록 행복해지는 존재였다. 위험하지도, 아프지도 않은 정이었다. 디디에도 호세도 뛸 듯이 기뻐하는 사샤의 얼굴을 보며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마침내 날아가고 꽃이 피듯 활짝 만개하니 보는 자체만으로도 황홀했다.   다음 날, 요새에서 사람이 왔다. 사샤의 방이 준비되었으니 즉시 요새로 돌아가라는 요한의 지시였다. 보반이 와 있다고 했다. 자신의 피앙세가 요새로 거처를 옮겼으니 사샤가 요새로 돌아가는 것은 당연했다. 정혼자가 바로 코앞에 있는데 내외하는 것이 이상했다. 디디에는 사샤가 돌아가는 것을 말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에게도 반대할 명분이 없었다. 속내야 어찌 되었든, 보이는 것을 믿는 자들에게 괜한 의심을 심어 줄 필요도 없었다. 그러므로, 사샤는 요새에서 온 사용인을 따라갔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성경책 한 권이 단출한 짐의 전부였다. 사샤는 요한이 머무는 요새의 가장 안전하고 화려하고 높은 둥지로 향했다. 오르는 계단의 끝에 보반이 마중 나와 있었다. “사샤.” 그는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정혼녀를 맞이했다. 퍽이나 자신의 위치나 숙소가 마음에 든 것이리라. 보반은 사샤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녀는 그것을 잡았다. 보반은 사용인을 물렸다. 그는 사샤의 손을 제 팔뚝에 얹은 채 미소 지었다. “당신은 이제 날 보반이 아니라 로버트라고 불러야 할 거야.” “로버트.” 사샤가 그의 이름을 따라 말했다. “요한에게서 요새로 들어오라는 전갈을 받고 처음에는 뭐가 잘못된 줄 알았지 뭐야. 설마 내실에 방을 줄 줄이야. 살아생전 이곳에 들어오게 될 줄은 몰랐어. 여기가 바로 왕의 처소란 말이야.” 보반은 흥분해서 떠들어 댔다. 왕의 내실은 요새의 다른 그 어떤 곳보다 화려하고 웅장하긴 했다. 그러나 결국 이곳도 커다란 감옥 아닌가. 사샤에게는 이곳이 지하 벙커나, 자신이 묵었던 장교의 병동이나 별다를 것이 없었다. 다만 더 화려하고 더 크고 더 웅장할 뿐. 사샤는 이곳에 요한이 서 있는 것을 상상했다. 이 많은 방 중 요한의 방은 어디쯤일까. 그는 복도의 맨 끝 가장 커다란 문을 주시했다. 황금색의 거대한 문. 그가 머무는 곳은 저곳일까. 왕이 정부에게로 향하는 내실의 은밀한 통로는 어디일까. 보반의 문은 잠가 놓고 사샤의 문은 열어 놓겠다는 그 말을 그는 지켰을까. 그렇다면 미로의 끝은 그의 방과 닿아 있을까? “자. 여기가 바로 사샤의 방이야.” 보반이 활짝 열린 방문 앞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왕의 침실로 보이는 맨 끝 방과는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다. 지금껏 묵었던 장교의 병동보다는 훨씬 더 화려하고 거대했다. 침대도, 침대의 휘장도, 창문의 크기도, 금색 실로 수놓인 보드라운 벨벳 커튼과 새하얀 린넨 커튼도. 심지어 테이블마다 놓여 있는 꽃병도 모두 말이다. “나는 바로 이 옆방이지. 왕의 내실에는 어디든 통하는 비밀의 문이 있다 들었는데 아마 폐쇄된 모양이지? 어느 벽을 밀고 당겨 보아도 열리지 않더라고. 자네의 방은 어떤지 한번…….” 방 안으로 들어오려는 보반을 사샤가 막아섰다. “사샤. 아무리 명목상이라지만 어차피 우린 부부잖아. 내게 약혼녀의 방에 들어갈 권리 정도는 있지 않겠나?” 며칠 전, 겁을 잔뜩 집어먹고 주변을 경계하던 그와는 사뭇 다른 얼굴이었다. 왜? 요한이 옆에 없어서? 디터도 옆에 없어서? 그의 실체를 아는 자가 없고, 아직도 의원 나부랭이라는 지위를 지키고 있어서? 눈앞의 상대는 자신보다 약한 여자라서? 그러나 보반이 모르는 것이 있다. 그가 목숨을 위협받고 그것을 구걸하고 연명하기 위해 애쓸 동안, 사샤도 똑같이 그런 과정을 거쳤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샤 로랑은 보반이 예전에 알던 사샤 로랑이 아니었다. 그녀가 줄곧 상대하던 자는 요한과 디터였다. 밟히면 밟히는 대로 쓰러져 바닥을 기어 다니는 대신 얼마든지 다시 일어나 걸었다. 디터와 요한을 상대로 말이다. 그녀는 기꺼이 증오를 양분으로 삼아 커 나가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보반은 잎이 누렇게 바랜 들풀과 다를 바 없는 존재였다. “제가 원하지 않으면 아무도 들어올 수 없어요.” 보반은 저를 노려보는 사샤의 녹안에 이글거리는 무언가를 보았다. 그는 입을 한일자로 꾹 다물었다. “지금도, 결혼한 후에도 마찬가지예요.” 사샤의 말에 그는 파르르 눈가를 떨었다. 하이에나처럼 고개를 숙이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형세였다. “난 이 결혼을 위해 조강지처를 버렸어. 자네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네는 보반이라는 성을 받을 거야. 보반가의 이름과 혈통을 이어 갈 거라고. 결혼하는 그 순간부터 보반이 되어 죽는 순간도 자네는 보반으로 죽는 거야. 내게 속하는 거란 말이야.” “뭐라고 해도 상관없어요. 내가 보반으로 죽는대도, 내가 원하지 않으면 누구도 내 방에 들어올 수 없어요.” “…….” 그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모욕을 받은 듯 그의 가슴이 크게 부풀었고 거기서 멈추었다. 화가 나면 몸을 불리는 복어처럼 잔뜩 성이 났다. “맘대로 해. 하지만 명심해 둬. 우리는 한편이야. 한배를 탔어. 날 적대적으로 대해 보았자 네 손해야.” 협박하듯 툭 말을 던지고 보반은 제 방으로 휙 들어갔다. 사샤는 그가 방문을 닫는 것을 보고, 제 방문도 닫았다. 성경책을 침대에 던져 놓고 그녀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방의 모든 물건을 세심하게 관찰했다. 꽃병을 들어 보고 냄새를 맡아 보고, 서랍을 모두 열어 보고 침대 시트를 들추어 보고 그다음에는 모든 물건을 자신이 기억하기 쉽게 다시 배치해 두었다. 그러고서야 그녀는 벽을 탐구했다. 어디엔가 은밀히 숨겨 있는 왕의 미로를 찾기 위해서였다. 두드리는 곳마다 단단한 소리가 났다. 콩콩, 콩콩, 그녀는 벽을 매만지고, 어디선가 틈새에서 바람이 새어 들지는 않는지 볼을 대 보고 손으로 형태를 더듬었다. 그러다가 다른 곳과 소리가 다른 벽을 찾아내었다. 그녀는 손잡이가 될 만한 것이 있는지 형태를 손으로 더듬었다. 당길 만한 것은 없었다. 사샤는 벽에 두 손을 대고 힘껏 밀었다. 삐걱, 하는 소리와 함께 벽이 뒤로 밀려났다. 오랫동안 아무도 열지 않았던 것이 확실했다. 부식이 될 대로 된 경첩이 그녀의 행동을 방해하는 것을 보니 말이다. 사샤는 마침내, 제 눈앞에 드러난 새하얀 벽의 새까만 공간을 발견했다. 매캐한 먼지 냄새가 났다. 남들의 눈을 피해 정부의 침실을 드나들던 통로를 찾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이제 문제는 어떤 문이 어디로 나 있는지였다. 사샤는 어둠 속에서 벽을 더듬었다. 혹시나 통로 안까지 전기를 들였을까 싶었지만, 벽을 아무리 더듬어도 스위치로 여겨질 만한 것은 없었다. 사샤는 다시 제 방으로 물러섰다. 이 어둠 속에 저 좁은 미로를 손으로 더듬으며 헤쳐 나가고 싶지는 않았다. 디디에나 타리프에게 손전등을 빌려서 다시 도전해 볼 생각으로 그녀는 미로 밖으로 나와 문을 당겼다. 따르릉―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전화가 울린 것은 그때였다. 사샤는 행동을 멈추었다. 따르릉― 다시 소리가 났다. 분명 전화가 울리는 소리였다. 사샤는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소리는 점점 더 분명하게 들렸다. 따르릉― 사샤는 눈을 게슴츠레 떴다. 어디서 나는 소리일까. 그녀는 뭔가에 홀린 듯 다시금 미로 속으로 발을 들였다. 따르릉. 따르릉. 그녀는 소리를 지표 삼아 자신의 청각을 쫓았다. 별안간 소리가 툭 멈추었다. 사샤는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자신이 온 거리를 재 보았다. 제법 깊이 들어왔다. 그러나 아직 열어 놓은 곳에서 빛이 환했다. 지금이라도 빛을 따라가면 얼마든지 방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따르릉. 몸을 돌리려는 찰나에 다시 소리가 울렸다. 사샤는 걸음을 서둘렀다. 소리가 또 끊기기 전에 진원지를 찾고 싶었다. 따르릉, 따르릉. 규칙적으로 몇 번이고 반복되는 소리를 따라 걸음을 옮기니 희미하게 빛이 보였다. 햇살이 은밀히 어둠 속에 발을 들인 채였다. 사샤는 망설이지 않고 문을 열었다. 벌컥 열린 문의 너머 새하얀 빛이 쏟아져 들었다. 그 방은 자신의 방과 같은 크기에 다른 색의 침구와 커튼이 있었다. 피처럼 붉은 침구, 피처럼 붉은 카펫, 암흑처럼 어두운 벨벳 커튼, 눈부신 금색의 휘장. 사샤는 그곳이 요한의 방임을 직감했다. 따르릉, 따르릉. 무언가를 생각할 시간도 없었다. 사샤는 곧바로 탁자로 가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 순간, 침묵이 흘렀다. 얼마나 오래 흘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찰나의 순간 같기도, 영겁의 순간 같기도 했다. ―사샤. 목소리를 듣는데 심장이 떨렸다. 손끝이 떨렸다. 입술이. 눈가가, 어깨가 다리가, 발끝이 간지럽고도 아프게. 당신일 거라고 생각했지. 왠지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만일 운명이 나를 무언가로 인도한다면, 그건 당신일 거라고 생각했어. “어떻게 알았어?” ―몰라. 그냥 네가 받을 것 같았어. “…….” ―내가 전화를 걸면, 네가 받을 것 같았지. “…….” ―사샤. 듣고 있어? 왜 당신은 한순간 차가웠다가, 또 다음 순간은 이토록 부드러운 목소리를 하는가. 그러면 내 마음은 다시금 파도친다. 아무리 쥐어도, 아무리 뜯어 눌러도 흐르는 물처럼, 내리는 비처럼, 덮치는 파도처럼 새어 나가고, 또 새어 나가고 다시 새어 나간다. 사샤는 두 손으로 부표를 잡듯 전화기를 꽉 잡았다.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언제…… 언제 돌아올 거야?” ―몰라. “결혼식 전에는 돌아올 거야?” ―모르겠어. “내가 걱정되진 않아?” ―……. “당신 없이, 내가…… 내가 어떻게 지낼지 걱정된 거잖아. 그렇지? 그래서 전화한 거잖아. 그래서……. 그래서 문도 열어 두고 간 거잖아. 내가 받지 않았으면, 받을 때까지 했을 거잖아. 그렇잖아.” ―모르겠어. 사샤…… 모르겠어. 난 알아. 따르릉, 전화기가 울렸을 때, 이 전화가 당신이란 걸 알았을 때, 당신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마침내 알게 됐어. 당신은 모르는 것을 나는 알아. 당신이 내게 바라는 것을 알아. 그건 내가 당신에게 바라는 것과 같은 거야. 크기나, 형태나. 모양은 달라도 분명 그것은 내 것과 같은 거야. “적어도 당신이 하루에 한 번쯤은 나를 떠올렸다는 거 알아.” ―……. “어쩌면 그것보다 많이.” ―……. “돌아와. 요한. 가능한 한 빨리. 그것 말고 당신에게 바라는 것 없어.” 사샤는 제 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 수화기를 붙들고 있어도 영영 요한의 대답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침묵이 말한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그의 대답이 말하고 있었다. 당신도 나를 좋아하는 거야. 요한. 그래서 나처럼 방황하는 거야. 나처럼 두려운 거야. 고통이다. 한번 물리면 빠져나갈 수 없는 덧이었다. 눈앞이 아득했다. 날개가 잘려 추락하는 까마귀가 된 것 같았다. 마음이 아팠다. 사랑이 죽음 같았다. 달아나. 요한, 지금처럼 달아나. 나는 이 사랑에 죽고, 너는 이 사랑에서 힘껏 달아나, 그리하여 사는 거다. 너는 영원히 살고, 나는 아득히 떨어져 죽을 테다. 죽을 테다.

고객센터 Suppo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