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12화
11.
디터는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니, 사실 그 전날부터 거지 같았다. 요새 들어 기분 좋은 날이 별로 없지만, 어젯밤부터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좋을 일은 별로 없을 것 같았다.
디터는 요새 내에서 제2인자였다. 그는 요한을 언제나 그림자처럼 따랐고 단 한 번도 그에 대한 충성이 흔들린 적 없었으며, 요한에게 그를 시험당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 요즘엔 자꾸 자신의 충성을 시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샤 같은 년에게 저를 붙여 놓는 이유가 그것 말고 무엇이 있겠는가.
물론 이 연극에 대해 아는 이를 최소화하려는 요한의 생각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행여나 일이 틀어질까 조심하려는 것은 알겠지만 이곳은 요새이다.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자들은 들어올 수 없고, 확인된 자들은 모두 검증받은 군사들이었다. 그들이 아는 것은 오로지 명령과 복종뿐, 섣부른 호기심조차 갖지를 않는다. 그러니 이런 일은 적당한 계급의 병사 하나를 붙여 주면 되는 것이다. 행여나 새어 나갈까 걱정이 된다면 쓸모를 다한 이후에 죽이면 된다. 수천의 군사 중 한 명이 사라진다고 그것을 의심할 자들도 없었다. 적어도 실질적 1인 군사 독재 체제인 이 도첸에서는 말이다.
그는 복도를 성큼성큼 가로질렀다. 그와 마주치는 군인들이 자리에 멈추어서 거수경례를 했다. 그러나 디터는 그것을 받지 않았다. 언제나와 똑같았다. 그러다가 계단을 올라 사샤의 방에 도달했다. 그는 노크도 없이, 그 어떤 언질도 없이 사샤의 방문을 벌컥 열었다.
디터를 보자 사샤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성경을 방패처럼 제 가슴에 안고 있었다. 그 꼴을 보니 더 화가 치밀었다. 저 값비싼 성경책은 본디 소장의 것이었다. 성스러운 성경책은 그에 걸맞은 사람이 들고 있어야 한다. 디터는 그녀를 보자마자 문을 닫는 것도 잊고 저벅저벅 걸어가 뺨을 후려쳤다.
퍽, 하고 둔탁한 소리가 났다. 사샤는 의자에 부딪히며 바닥에 쓰러졌다. 디터가 그녀의 몸 위에 올라탔다.
“왜 이래!!”
사샤는 겁을 먹고 저항했다. 그러나 디터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실크 셔츠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가슴을 더듬었다.
“아아악!!”
그녀는 혼비백산했다. 디터가 그녀의 뺨을 한 대 더 후려쳤다.
“닥쳐!”
그러더니 그녀의 스커트를 걷어 올렸다. 사샤는 턱이 빠질 것 같은 괴로움에 신음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디터는 그녀의 허벅지에서 단도를 찾아냈다. 사실이었다. 도로시가 한 말이. 그녀의 목에 남았던 그 상처.
“이 버릇없는 계집…….”
디터는 단도를 보며 이를 씹었다. 도로시의 말이 맞았다. 네르아의 계집은 몸에 칼을 숨기고 있었다. 언제부터 숨겼는지는 모른다. 아마 도로시가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면 영영 그 존재도 몰랐으리라. 이 계집은 무기를 가져서는 안 된다. 포로가 어떻게 무기를 갖는단 말인가. 들키면 처형감이다. 게다가 이것은 값비싼 보석이 세공된 제법 고가의 물건이었다. 이런 하찮은 년이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단도, 어디서 구했어?”
디터는 그녀가 그것을 훔쳤다고 확신했다. 사샤가 대답을 못 하자 디터가 멱살을 잡아 흔들었다.
“어디서 났냐고!”
“…….”
사샤는 대답하지 않았다. 말해 주고 싶지 않았다. 요한이 준 것을 알면 그는 어떤 표정을 할까? 분명 재미있는 얼굴을 할 터였다. 아니. 아니야. 믿지 않을 거다. 요한의 핑계를 대며 얕은 수를 쓴다고 더 두들겨 패겠지. 지금보다 더 무자비하게. 더 지독하게. 완전히 그의 이성을 잃게 만들 수 있었다. 긁어 부스럼일 뿐이다. 결국 사샤는 입을 다물기로 했다.
디터는 씩씩대며 계속해서 사샤의 멱살을 흔들었다. 그러나 눈을 질끈 감고 입을 꽉 다문 그녀를 상대로 더는 방법이 없었다. 죽일 수도, 더 곤죽이 되도록 팰 수도 없었다. 자신이 여기에 온 이유 때문이었다. 오늘부터 매일 그녀를 데리고 성당에 가야 한다. 이게 다 그 빌어먹을 신흥 종교들 때문이다. 세상 살기가 편해진 탓이다. 이 와중에 이 여자의 애완견 노릇을 해야 하는 저는 또 무슨 죄란 말인가.
디터는 그녀의 멱살을 풀었다. 적어도 그녀가 걷고 말할 수 있는 정도로는 멀쩡해야 했다. 그러니 오늘은 참아야 했다.
“일어나.”
그가 호흡을 고르자 사샤는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섰다. 멀찌감치 날아갔던 성경책도 챙겨 들었다. 디터는 그녀가 자신을 지나갈 수 있도록 한 걸음 비켜섰다.
사샤는 소매로 입술을 훔쳤다. 따끔한 통증과 함께 피가 배어 나왔다. 혀로 몇 번 만져 보니 터진 곳에서 시린 피 맛이 났고 부어올라 얼얼했다.
요한은 제 앞에 서 있는 노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 노력하였다. 잘 차려입은 그는 요한을 만나기 위해 기차를 타고 먼 길을 달려왔다. 자신의 토지를 지키기 위해서.
“부디 철도 사업을 철회해 주시오. 부디 서기장님을 설득해 주시오.”
그의 이름이 뭐였더라. 요한은 잠시 그의 이름을 기억하려 미간을 찌푸렸다가 곧 기억해 냈다.
“프랍츠 씨.”
그는 도첸의 한 지방의 영주였다. 그의 직업은 지금까지 대대로 그러했듯이 영지에 소작농을 들여 일한 후 그 임대료를 받는 일이었다. 프랍츠는 오랫동안 그것으로 자신의 가문과 성을 유지해 왔다. 전쟁 중에는 야전 병원으로 유용하게 쓰이기도 했다. 프랍츠는 헌신적인 국민은 아니었으나, 적당히 권력에 허리를 굽힐 줄은 아는 자였다. 아마도 그는 그것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다 했다고 여겼을 것이다. 제 성을 내어 주고, 공짜로 병사들을 먹이고 재워 주고 입혀 주었으니 그것으로 더는 국가가 자신을 건드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틀렸다. 도첸이 그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보다 더 큰 것이었다. 이유가 있다면 단지 철로를 놓기 적절한 땅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이유였다.
“이것은 나라에서 결정한 국책 사업입니다. 제가 왈가왈부해 바뀔 일이 아닙니다.”
“아니!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철로를 깔기 위해 사유지 근처의 댐을 폭파시키면 내 영지는 완전히 수장되고 마네!”
“그것에 대한 보상은 충분히…….”
“아니! 충분하지 못해! 절대로 충분하지 못하네! 대대로 명맥을 이어 온 내 성과 땅, 그 땅에서 벌어 먹고사는 소작농들까지! 당장 기백 명의 사람이 길거리에 나앉게 생겼는데, 내게 고작 그깟 돈 몇 푼을 먹고 떨어지란 소리인가! 나는 내 영지의 사람들을 보호할 책임과 의무가 있어!”
“…….”
요한은 프랍츠가 흥분하는 꼴을 뻔히 바라보다가 제 두 손을 천천히 마주 비볐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프랍츠는 한 풀 꺾인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아…… 알겠지만, 영지의 사람들은 모두, 모두 무지렁이들이야. 그들이 어디에 가서 제 목숨을 건사하며…… 살 수 있겠나.”
“도첸은 모든 국민에게 공평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나라입니다. 프랍츠 씨. 영지의 주민들이 오랫동안 글을 모른 채 살아왔다면 그 자체로 당신은 반역죄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프랍츠는 요한의 말에 발끈했다.
“시골 촌구석에 처박혀 있다는 것을 이유로 제대로 된 병원도! 학교도! 제공하지 않은 것이 누구인가! 당신들이 원할 때, 나는 내 사유 재산과 토지를 아무 조건도 달지 않고 개방했네! 공기 좋고 물 좋아 요양하기 최적화된 시골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지! 그래 놓고 정작 우리가 필요로 할 때 당신들은 외면했지 않은가! 그래 놓고 이제 와서!”
“이제라도 제대로 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이야기죠.”
요한의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영주의 땅에서 농사나 지으며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소작농이란 이젠 중세 시대의 유물 같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들은 이제 제대로 교육받은 산업화 사회의 일원이 될 겁니다. 그곳에서는 노력한 만큼 돈도, 명예도 얻을 수 있죠. 이제 당신의 시대는 끝났어요. 프랍츠 씨. 더는 부를 세습할 수 없어. 타고난 피로 우위에 설 수 없어. 이제 이곳에서는 누구든 벌거벗고 태어나 자신이 노력한 만큼 가지게 될 겁니다.”
“요한 윌렌도르프!”
프랍츠가 고함을 쳤다. 노인의 갈라진 목소리가 바닥에서부터 천장까지 쩌렁쩌렁 울렸으나 요한은 그것에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여전히 엇나간 시선을 하고 두 손을 반복적으로 비비고 있을 뿐이다.
“……폰.”
뭐? 프랍츠가 미간을 구겼다.
“요한, 폰, 윌렌도르프.”
멍하게 제 이름을 고쳐 주고 요한은 비로소 노인을 마주 보았다. 프랍츠의 마르고 주름진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절반의 분노와 절반의 두려움.
“…….”
텅 비어 있어서 더 광인처럼 보이는 눈이었다. 반들거리는 책장과 사무용 집기들은 분명 열대 지방의 활엽수로 만든 마호가니일진대, 꼭 날카로운 쇠붙이를 엉겨 만들어 놓은 전쟁 무기 같았다.
“하고 싶은 말씀은 다 하셨습니까?”
“뭐라고?”
요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저벅저벅 문으로 향했다. 프랍츠는 그가 하는 양을 멍하게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는 제 집무실의 양 문을 벌컥 열었다. 그러자 약한 바람과 함께 대기하고 있던 군인 네 명이 발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나무 바닥에 울리는 그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요란했다. 그러더니 한 명씩 프랍츠의 양어깨를 잡고 팔짱을 꼈다.
“뭐, 뭐 하는 겐가!”
노인은 기겁했다. 갑작스레 커다란 장정들이 들어와 제 몸을 붙잡으니 저항하는 것은 당연했다. 프랍츠는 몸을 뒤틀고 버티며 벗어나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무쇠 같은 자들의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왜 이러는가! 대체!”
“오신 김에 사인은 하고 가시죠.”
요한이 뻣뻣한 가죽 바인더에 끼운 종이를 펼쳐 들었다.
[영지 양도 각서.]
노인의 얼굴이 시꺼먼 잿빛으로 변했다. 그는 한동안 말문이 막혀 입만 뻐끔거렸다.
“물론, 사인과 지장은 천천히 찍으셔도 됩니다. 버틸 수 있는 데까지는 버텨 보십시오.”
“뭐, 뭐! 뭐라고!”
요한이 서류철을 다른 군인에게 넘기고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사내들은 프랍츠를 더욱 바짝 조인 후 땅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그의 몸을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프랍츠의 구두가 바닥에 끼익, 끼익 마찰했다.
“요한! 이보게! 요한! 요한!!”
프랍츠는 집무실의 문이 닫힐 때까지 그의 이름을 부르며 절규했다. 마치 신의 이름을 부르듯 그를 부르며 구원을 청했다.
그러나 요한은 신이 아니었다. 신과 기적을 믿는 자도 아니었다. 그저 주어진 것을 쓸 수 있는 만큼 쓸 뿐.
멀리 창밖에서 성당의 타종 소리가 들렸다. 그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천천히 창가로 걸었다. 햇살이 나무 바닥으로 감옥 같은 그림자를 투사했다. 요한의 그림자가 그 안에 함께 걸려 있었다. 그는 신부 수업을 갔을 사샤를 떠올렸다. 그녀의 에메랄드 빛 눈동자와 포도 향이 나는 달콤한 숨소리를. 규칙적인 종소리는 마지막 타종을 끝으로 긴 여운을 그렸다.
정오였다.
사샤는 한 시간이 조금 넘게 성당에 머물렀다. 성당의 사제는 ‘디디에 마우러’라는 이름을 지닌 네르아의 사람이었다. 매우 곤란한 세월을 견딘 그는 네르아가 도첸의 빅토리아가 되기 전부터 그곳을 지키고 있다고 했다. 사샤는 신을 믿지 않았다. 그러므로 자연스레 목회자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디디에라는 사제는 마치 고향 마을에서 보고 자란 거대한 거목처럼 느껴졌다. 반쯤 벗겨진 새하얀 백발에, 나무거죽처럼 주름진 얼굴이 꼭 그렇게 보였다. 그는 진정으로 사제다웠다. 참된 신앙인의 평온한 얼굴을 가진 것이다.
“실례지만, 어디 출신이신가요?”
수업이 끝날 무렵, 디디에는 책을 접으며 물었다.
“네?”
“죄송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과 무척 닮아서요. 혹시나 접점이 있나 하고.”
대답은 못 하고 눈만 휘둥그레 뜬 사샤를 보며 디디에는 멋쩍게 웃었다.
“지금은 빅토리아시로 통합되었지만, 예전에 아주 커다란 세퀘이어 나무가 서 있어 ‘신수 마을’이라고 불리던 곳이 있습니다. 정말 커다랗고 웅장한 나무죠. 보는 순간 경외감이 들 정도예요. 아주 오래전, 고대 문명이 태동하기도 전에 싹이 튼 나무라고 하니 보잘것없는 우리 인간들에게는 당연하겠지요. 아마 신이 만물을 창조하며 당신의 존재를 잊지 말라고 심어 두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
사샤는 여전히 동그랗게 뜬 눈으로 그를 보았다.
“그 마을은 나무를 중심으로 그 위에 올라가면 보이는 곳까지가 나무의 정령이 지켜 준다 하여 신수 마을이 되었죠. 정말로 신의 선물을 받은 것인지 신수 마을에서는 아름다운 것들이 많이 태어났답니다. 꽃도, 짐승도, 사람도.”
디디에는 사샤의 윤기 흐르는 갈색 머리와 한없이 투명한 녹색 눈을 바라보며 회상에 젖어 들었다.
“그 마을의 원주민은 모두 사샤 양과 같은 빛나는 갈색 머리와 녹색 눈을 했답니다. 제가 목회를 했던 당시에 당신과 꼭 닮은 여성분이 있으셨지요.”
“그분의 이름을 아세요?”
“성은 기억나질 않지만 이름은 똑똑히 기억하지요. ‘샤엔’.”
사샤는 갑작스레 고개를 숙였다. 성경책을 잡은 그녀의 두 손이 하염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디디에는 그녀가 몹시 불안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샤엔의 아름다웠던 얼굴을 떠올렸다. 정말이지 보면 볼수록 사샤와 많이도 닮았다. 그때 그녀가 몇 살이었더라. 지금의 사샤 나이 또래던가, 아니면 그보다 좀 더 어렸던가, 만일 샤엔이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다면 그렇다면 딱.
“제 어머니세요.”
지금의 사샤 또래일 것이다.
“제 어머니세요. 샤엔 메드셀라.”
“…….”
디디에는 말문이 막혔다. 그래. 샤엔이 결혼했다면……. 하지만 디디에는 몰랐다. 샤엔이 결혼하기 전에 이곳 요새로 목회지를 옮겼다. 그러니까 이곳이 ‘요새’가 되기 전에 왕가의 몰락한 성이었을 때 이곳으로 왔다. 디디에와 그의 늙은 스승은 전쟁이 터지자 가장 먼저 나서서 국적을 가리지 않고 다친 이들을 돌보았다. 그리하여 믿음에는 국적도, 신분도, 인종도 없음을 몸소 실천하며 신앙인의 삶을 살아 왔다.
그러나 그 인생에 한 점 부끄러움도 없느냐고 물으면 결코 아니었다. 그에게도 부끄러움은 있었다. 성에 도첸의 깃발이 걸렸을 때, 그 아래 전향하지 않는 자의 목이 효수되었을 때, 네르아의 토착민들이 전쟁의 광기에 휩싸인 군인들의 손에 몰살당했을 때, 디디에는 참된 ‘선’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선인지, 아니면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을 위하여 같이 저항하는 것이 선인지.
디디에와 스승은 전자를 택했다. 그들이 택한 것은 신념의 위대함이 아닌, 생명의 고귀함이었다. 왜 거기에 부끄러움이 없었으랴. 자신의 선택을 놓고 고민하고, 방황하고, 그것만이 방법이었는지 숱한 밤을 후회했다. 그래. 샤엔의 성은 ‘메드셀라’였다. 사샤와 똑같은 눈빛을 한 그 착하고 심성 곱던 소녀는. 어째서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녀에게 자식이 있을 거란 생각을.
사샤의 앞에, 이제는 디디에의 손도 같이 떨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어떻게……. 신수 마을 사람들은 모두, 모두 학살당했는데…….”
“모두는 아니에요. 몇 명은 살아남았죠. 덩치가 작아서 좁은 곳에 숨을 수 있었던 사람들만요. 그러니까 어린아이들이요. 오빠와 저는 살아남았어요. 그래서 도망쳤어요. 국경의 반대편으로요. 오빠의 이름은 존이에요. 난민 자격을 취득해서 시민권을 얻으려고 전쟁에 파병했죠. 그리고……. 그리고 사라졌어요.”
“……사샤.”
디디에는 그녀의 이름을 탄식하고 떨리는 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가 곧 책 위에 얹은 그녀의 손을 꽉 쥐었다. 그것에 사샤는 하염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참으로 오랜만에, 그녀는 자신을 온전히 알고 있는 누군가를 만났다. 자신의 처참함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자를. 그래서 사샤는 울음을 터트렸다. 부들부들 어깨를 떨며 흐느끼는 동안 하염없이 뜨거운 눈물이 주름진 신부의 손등 위로 떨어졌다.
“너무나, 너무나 마음이 아프군요. 정말이지…….”
디디에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푹 꺼진 노인의 두 눈덩이가 더욱 깊어졌다. 평생 살이 쪄 본 적 없어 자작나무처럼 마른 그는 참담하게 다물고 있던 입을 간신히 열었다. 말해야만 하는 것들 때문이었다.
“샤엔의 무덤이 있어요.”
사샤는 눈물로 얼룩져 있는 얼굴을 들고 좌우로 저었다. 디디에는 그녀의 손등을 두드리며 한 번 더 천천히 말했다.
“무덤이 있어요.”
“그럴 리가 없어요. 모두 구덩이에……. 마을 사람들은 모두 구덩이에 묻혔어요.”
사람들은 마치 죽은 지렁이들 같았다. 그 광경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살면서 그토록 충격적이고 처참하고 소름 끼치는 장면을 본 적이 없다. 사샤와 존이 아무리 흙을 긁어 덮어도 다 덮을 수 없을 만큼 깊이 박혀 있던 수많은 이들의 사체. 어찌할 방도가 없어서, 그 구덩이에 들어가 부모의 시체를 들고 나오기엔 너무나 어리고 연약해서. 그래서 두고 돌아서야 했다. 살기 위해 뛰어야 했다.
부모의 죽음보다 무서웠던 것은 부모의 부재. 그리고 존마저 사라지고 난 이후에는 혼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가장 무서웠다. 사는 것만으로도 처절했던 시절, 그러므로 사샤는 부모를 잊었다고 생각했다. 지렁이처럼 흙바닥을 뒹굴고 있던 부모의 시체를, 그 괴로움을, 후회를, 그들의 죽음을 잊고 살아야만 했다.
불현듯 찾아오는 불면의 밤, 꿈인 듯 몽상인 듯 떠오르는 마지막 처참한 모습은 그녀에겐 가장 끔찍한 악몽이었다. 그것에서 벗어나고 싶어 얼마나 발버둥 쳤던가. 부모의 시체를 두고 돌아서야 했다는 죄책감을, 제대로 된 작별 인사조차 하지 못하고 도망쳐야 했던 비겁함을.
“학살이 일어난 후, 제가 다른 사제와 수녀님들을 모시고 그곳에 갔습니다. 모두 찾아 한 구 한 구 땅에 묻었어요. 그리고 아는 분의 무덤에는 이름을 표시해 두었어요. 샤엔은, 샤엔은 제 손으로 묻었습니다. 아버지의 시체도 묻혀 있습니다. 신원을 파악하지 못해 나무 십자가만 박아 두었지만……. 분명 묻었어요. 한 구 한 구, 모두…….”
아이를 꼭 안고 있는 부모의 시체는 아이와 함께, 혹시나 멀리 떨어져 죽은 이들도 자신이 안다면 모두 곁에 묻었다.
“밤낮을 꼬박 새워서 열흘이 걸렸지요. 역병이 돌기 전에 묻어 주어야 했으니까요. 그 이후로, 세퀘이어 나무가 죽었어요.”
“…….”
“뿌리부터 썩어들어 가기 시작해 죽어 가더군요. 결국, 요한의 명령으로 그것을 잘랐어요. 고대 때부터 버텨 온 생명을……. 그 위대한 나무를……. 아직, 나무의 흔적이 남아 있긴 해요. 다 썩어들어 간 밑동만 남았죠.”
신부는 멍하게 그녀에게 겹친 자신의 손을 보다가 천천히 눈을 들어 사샤를 보았다.
“사샤 양. 저는 솔직히, 세퀘이어 나무가 죽은 이후로……. 가끔 생각하곤 해요. 이 땅에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닐까. 네르아는 그날 다 같이 죽은 것이 아닐까……. 사람들에게 인생의 희망과 고귀함을 늘 이야기하지만…….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런 생각을 하고는 한답니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사샤가 부모를 잃은 날, 그날은 누군가에게 네르아의 희망을 잃은 날이 되었다. 그리고 세퀘이어 나무가 죽어 가기 시작한 날이 된 것이다. 그 수많은 시체가 흘린 피들이 세퀘이어 나무로 흘러 들어가는지도 모른다. 사람의 피를 먹고 나무는 시든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 것이다. 시체의 고름을 먹으며 세퀘이어 나무도 시체가 되었다.
“요한이 희망을 앗아 간 거예요. 그 남자 탓이에요.”
사샤는 요한을 들먹이며 이를 갈았다. 그러나 디디에는 다소 쓸쓸한 얼굴로 말했다.
“진실을 이야기하자면……. 사샤 양. 저는 윌렌도르프 소장이 선한 이인지, 악한 이인지 확답할 수가 없답니다. 물론 누구나 이중적인 면을 가지고 있지만, 그자는 좀 더 특별해요. 어떤 면에서는 누구보다 선하다고 할 수 있고 또 그래서 악하다고 할 수 있지요.”
사샤가 고개를 갸웃했다. 디디에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요한이 이곳에 정착하기 전, 그는 당시 네르아의 학살을 주도했던 병사들을 모두 죽였어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다요.”
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그들이 마을 사람들에게 했듯이 구덩이 앞에 세워 총으로 쏴 죽였지요. 살아남은 네르아의 시민들이 모두 그 장면을 목격했어요. 요한은 도첸을 향한 네르아의 분노를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똑같은 방법으로 그들의 복수를 대신해 주었고 그 후…… 누구도, 도첸의 국민이 되는 것에 저항하지 않았어요.”
“…….”
“저는 그것이 진정한 위안을 받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잔인함에 대한 공포 때문인지 아직도 해답을 찾지 못했답니다.”
사샤는 그것이 참으로 요한다운 방법이라 여겼다. 그는 잔인하고 명쾌했다. 무엇이든 배배 꼬아 돌려 생각하거나 말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간결했고 그가 하는 말들에는 모두 일정한 규칙과 의도가 있었다. 요한은 그런 남자였다. 사리가 분별하고 명쾌하고 그래서 더 무서운 사람.
“나를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사샤 양?”
디디에는 참담한 빛으로 물었다. 사샤는 멍하니 생각에 잠겼던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무엇을요, 신부님?”
“당신의 부모를 구하지 못한 나를…….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저는…… 저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어요.”
누가 누구를 용서한단 말인가. 사샤 역시 부모의 시체를 등진 채 도망쳤다. 그 이후론 잊는 것이 최선이라며 살았다. 한 번도 이곳에 돌아와 부모를 찾으려는, 고향을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누군가, 용서를 구해야 할 자가 있다면 핏줄을, 천륜을 어긴 부도덕한 자신이었다.
“도첸의 국민이 된 내가 밉지 않습니까?”
디디에가 다시 물었다. 사샤는 가만히 그의 낯빛을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모르겠어요……. 제가 신부님을 미워해야 하나요? 제가 버리고 간 부모님의 시신을 거두어 땅에 묻어 주신 분을……. 제가…… 그래야 할까요?”
“그렇군요. 제가 어리석은 질문을 했군요. 사샤 양에게 참회하여 구원을 얻으려 하였나 봅니다. 제가. 바보 같지요.”
디디에는 씁쓸히 웃고 사샤의 손을 더 굳게 잡았다.
“사샤 양. 어쩌다 이곳까지 와 보반 의원과 결혼하게 되었는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보반 의원은 세계 대전을 일으킨 도첸 공화당의 재선 의원입니다. 사실상 1인, 1당 독재 체제인 이 나라에서 그것은 많은 의미를 지닌답니다.”
“이건 결코 제 의지가 아니었어요.”
사샤는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제 부모를 묻어 준 은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디디에는 그녀의 손을 잡고 사샤가 내뱉는 모든 이야기를 한 글자 한 글자 진중하게 곱씹어 들었다. 그녀가 울 때는 함께 울고, 그녀가 절망할 때는 신을 부르며 기도했다.
교회를 나오며 디디에가 말했다.
“사샤 양. 무엇이라도 돕겠습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요. 결코, 사샤 양은 혼자가 아니에요.”
그 말만으로도 고마워 사샤는 고개를 몇 번이고 끄덕였다.
“조만간 부모님의 묘지에 모시고 가겠습니다. 그때까지 부디 몸조심하세요.”
“네.”
성당 밖으로 나오자 디터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마뜩잖은 표정을 숨기고 신부에게 인사했다. 자못 경건한 표정이었다. 아주 오래전, 요한이 그가 독실한 신자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것은 사실인 것 같았다. 그 표독스러운 남자가 디디에의 앞에서는 순한 양의 표정을 했다. 그를 부리는 자는 요한일지 몰라도, 그를 선하게 만드는 자는 디디에가 유일할지도 모른다.
“정말 훌륭한 아가씨입니다. 디터 소령님. 잘 보살펴 주세요.”
디디에가 그의 손을 잡으며 부탁하자 디터는 당황하였다. 그는 진실한 믿음과 자신의 사상 사이에서 갈등했다. 그러다가 끝내, 그는 겸손한 태도로 거짓을 고하기로 마음먹었다.
“네. 디디에 신부님.”
그것이 디터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 목자에게 찝찝한 대답을 하게 한 원흉이 제 앞을 걷는 것조차 못마땅했다. 그래서 디터는 얌전히 앞만 보고 걷는데도 사샤에게 계속해서 시비를 걸었다. 그러다가 디디에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까지 멀어지자 부로 발을 걸어 넘어지게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샤는 앓는 소리 한 번 내지를 않았다. 어쩌면 그런 점이 디터를 더 화나게 했는지도 모른다.
디터는 사샤를 숙소 안에 처넣고 곧바로 요한에게로 향했다. 그의 집무실 문을 두드리고 기척을 기다리다, 참지 못하고 벌컥 문을 열었다. 요한은 막, 누군가와 통화를 하던 중이었다.
“네. 다시 전화 드리죠.”
“소장님.”
“문을 박차고 들어올 이유가 분명해야 할 거야, 디터.”
요한이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경고하자 디터는 곧바로 단도를 꺼내 그의 책상에 올려놓았다. 요한은 가만히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디터는 씩씩거리며 말했다.
“사샤 로랑에게서 빼앗은 겁니다.”
“…….”
요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디서 훔쳐 온 것이 분명해요. 이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입니다. 사샤 로랑은 엄연히 도첸의 포로입니다. 제아무리 자유 부인을 흉내 낸다고 해도요.”
“어디서 났는지는 물어보았어?”
“물어볼 필요조차 없지 않습니까. 이것은 훔친 것입니다. 보세요. 이것은 값비싼 단도입니다. 분명 어디선가 훔친 겁니다.”
요한은 값비싼 보석으로 세공된 단도를 가만히 쓸었다가 손에 쥐어 보았다.
“어디서?”
어디서? 그것이 뭐가 중요하지? 이 값비싼 귀부인용 단도가 어떻게 해서 그녀의 손에 흘러 들어갔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적어도 디터에겐 이 단도를 그녀가 숨기고 있었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어디서건요. 소장님. 그녀는 무기를 소지해서는 안 됩니다!”
요한은 건성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 태도에 디터는 더 강하게 나가야 했다.
“반드시 그녀를 처벌해야 합니다. 채찍 형이나 그에 준하는 형벌을 반드시 내려야 합니다.”
형벌 이야기가 나오자 요한이 디터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물었다.
“낼모레 결혼할 신부의 등을 난도질하자고?”
마치 제정신이냐고 묻는 것 같았다. 절로 두 주먹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
“이대로 묵과할 순 없습니다. 소장님.”
디터도 애초에 요한이 이 사실을 알고 펄펄 뛰리라 예상하지 않았다. 그는 그런 남자가 아니니까. 하지만 적어도 자신의 의견에는 동의할 것으로 생각했다. 마땅히 그래야 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오히려 자신을 나무라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소장님. 어째서 이토록 사샤 로랑에게 관대하십니까?”
이왕 이야기를 시작한 것, 디터는 끝장을 보기로 했다. 그는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었다.
“그 여자를 수용소 대신 실험용 벙커에 가두었을 때부터 저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소장님의 뜻이기에 따랐습니다. 사샤 로랑을 마치 훈련시키듯 대하시는 것을 보면서도, 일부러 제 열쇠를 바닥에 떨구어 사샤 로랑이 벙커 밖으로 나오게 유도하신 것을 알면서도, 저는 소장님의 뜻에 따랐습니다. 그것이 도첸을 위한 것이라고 믿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소장님의 저의를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모든 일이 정말 도첸을 위한 일이 맞습니까? 소장님께서 사샤 로랑에게 유달리 관대하신 이유가, 적국의 포로가 몸에 무기를 소지하고 있음을 아시면서도 그녀를 규율에 따라 처벌하지 않으려는 이유가, 정말로 도첸을 위한 일이 맞습니까?”
요한은 그의 말이 끝날 때까지 잠자코 듣다가, 책상을 돌아 그의 앞으로 걸어왔다.
“디터.”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디터 역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제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서 슬픔도, 분노도, 안타까움도 무엇 하나도. 그토록 냉랭하고 무감각한 목소리로 저를 부른 그는, 그러나 손길만은 매서웠다.
요한은 디터의 얼굴을 손등으로 후려쳤고 그는 얼굴이 돌아간 방향을 따라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참으로 기계적인 손길이었다. 쇠처럼 단단하고 무겁고 또한 냉랭했다.
요한의 구둣발이 나무 바닥 위에서 둔중한 소리를 냈다. 뚜벅. 다음 순간 그의 군홧발은 바닥에 엎어진 디터의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디터는 짧게 신음을 토하고 나머지 비명은 속으로 삼켰다. 소리를 내면 두개골이 그대로 으깨질 것만 같았다.
“네가 이렇게 말이 많은 줄 몰랐어.”
요한의 발에 더욱 무게가 실렸다. 눈알이 튀어나올 듯한 압력이었다.
“사샤 로랑은 포로지만 너는 군인이지. 사샤 로랑이 내게 말대꾸를 하면 저항이겠지만 네가 하면 반역이야.”
“……으…….”
“너는 내 뜻을 이해할 필요가 없어. 이해 못 한다고 해도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낼 이유도 없지. 왜냐하면, 나는 너의 상관이고 너는 내 부하니까. 나를 추궁하고 싶다면 군복을 벗고 의회로 가. 어때? 그럴 생각이 있어?”
디터는 대답할 수도 고개를 흔들 수도 없었다. 입을 벌리면 앓는 소리만 나왔고 입을 다물면 요한의 찍어 누르는 압박에 질식할 것 같았다. 요한이 그의 머리통에서 구둣발을 치웠다. 디터는 그제야 숨을 토하며 몸을 굽혔다. 팔다리를 모아 엎드린 그는 구르는 굼벵이처럼 보였다.
요한은 문밖의 보초병을 호출했다. 소총을 든 사내 둘이 즉각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디터 소령. 너를 3개월 감봉에 일주일 근신, 그리고 명령 불복에 대한 처벌로 채찍 형에 처한다. 흐트러진 다른 군인들에게 아주 좋은 본보기가 될 거야.”
두 명의 군인은 바닥에 엎어져 있는 디터에게 시선을 주지 않으려 애썼다. 무슨 상황이었든지 그들은 알고 싶지 않았다. 디터가 누구인가. 피도 눈물도 없이 잔인한 냉혈한이었다. 그는 포로에게 대하는 것과 같이 군인들을 대한다. 누구에게나 잔인하고 모질다는 이야기다.
“데리고 나가.”
요한이 명령했다. 그들은 기계적으로 디터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디터는 그것을 뿌리쳤다. 무슨 일이 날까 두려워 그들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행여나 난동을 부리면 어쩌나 겁이 나면서도 소총을 단단히 쥐었다. 디터가 요한에게 달려든다면 규율에 따라 그에게 총을 겨냥하고, 여차하면 쏴야 했다.
그러나 디터는 군복을 툭툭 털고 일어나 요한에게 정중하게 경례를 했다. 요한은 그것을 보고 아주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나자 디터는 제 발로 집무실을 걸어 나갔다. 요한은 그가 능히 그러리라는 것을 알았다.
디터는 언제나 완벽해지고 싶어 한다. 완벽해져서 누구도 자신을 깔볼 수 없고, 넘볼 수 없는 자가 되고 싶어 한다. 그는 언제나 요한이 되고 싶어 했다. 요한이 되고 싶어, 누구보다 그의 신뢰와 애정을 갈구했다. 신에게 유일한 독생자가 있는 것처럼, 그는 자신이 요한의 유일한 후계자가 되고 싶은 것이다.
그런 이유로 디터는 자신에게 경쟁자가 붙었다고 생각하면 예민해지고 그로 인해 잔인해지고는 했다. 디터에게 지금 경쟁자는 사샤 로랑이었다. 그는 사샤를 늘 하찮은 네르아 계집애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그를 폭발하게 한 것이다. 도저히 같은 선상에 올릴 수 없는 여자를 경쟁자로 여겨야 하는 자신의 처지에 연민을 느끼고 있었다. 그 요란한 자기 연민이 애꿎은 화살을 주변에 돌리게 했다. 사샤에게. 요한에게.
그것이 요한으로 하여금 디터를 신뢰할 수 없게 만드는 아주 커다란 이유였다. 물론 이유는 무한히 많았다. 디터가 모르는 사실은 요한은 그 어느 누구도 신뢰하거나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요한은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래서 끊임없이 시험해 본다. 요한은 누군가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그래야 하는 이유를 몰랐다.
만약 디터가 진정으로 인정받는 군인이 되고 싶다면, 그래서 성공하고 싶다면 요한에게서 애정이나 신뢰를 갈구하지 않으면 된다. 그것만이 현명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요한은 집무실에서 나와 사샤의 방으로 향했다. 누구의 방에 들어갈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노크하지 않았다. 그저 손잡이를 잡고 돌려서 열리면 그대로 벌컥 열고 들어갔다.
사샤는 실크 네글리제 차림으로 멍든 자리에 연고를 바르고 있었다. 낑낑거리며 몸을 돌려 등을 문지르다가 그녀는 요한을 발견했다. 그녀는 순식간에 당황한 것 같았다. 얼굴을 붉히며 의자 위에 벗어 놓은 실크 가운을 들고는 허둥지둥 그것을 입다가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일순 태도가 바뀌어 태연자약한 얼굴이 되었다.
그 짧은 순간에도 그녀는 참으로 많은 얼굴을 했다. 첩자로서는 빵점짜리였다. 생각하는 모든 것이 얼굴에 쓰이는 것 말이다. 요한은 그녀가 훌륭한 첩자가 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은 진작 알고 있었다. 그녀는 배움이 느리고, 잔정이 많으며, 자기감정에 지나치게 솔직했다. 모든 것이 군인으로서는 하자였다.
“손이 안 닿아서 그러는데, 이것 좀 발라 줘.”
사샤가 연고를 내밀며 말했다. 요한은 딸깍, 문을 완전히 닫고 다가가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붉었다. 얼굴에서 피어난 홍조가 그녀의 귀와 목덜미까지 물들였다. 요한이 통을 받아 들자 그녀는 서둘러 몸을 돌렸다. 어색한 얼굴로 말이다.
“달리, 부탁할 사람이 없어서 그래.”
사샤가 구태여 말을 덧붙인다. 요한은 그녀의 시퍼렇게 멍든 등을 살피며 대꾸했다.
“누가 물어봤어?”
“…….”
사샤가 부끄러움에 제 목을 한 번 매만지고 크게 호흡을 내뱉었다. 무슨 각오라도 다지듯이. 이깟 일이 대수인가. 그리 긴장할 일도 아니다. 요한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손가락에 연고를 묻혔다.
사샤의 등은 발레리나의 것처럼 곧고 길쭉했다. 도드라지는 목뼈, 그 아래 툭 튀어나온 날개 뼈, 척추를 따라 곧게 피부가 작은 도랑을 이루었다. 요한은 그녀의 등을 따라 연고를 펴 발랐다. 그의 손이 닿자 피부의 솜털이 뾰족하게 일어섰다. 손길이 차가워서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아니면, 너무 뜨겁거나.
요한의 손이 그녀의 등줄기를 따라 훑었다. 약을 바르는 것인지 매만지는 것인지, 사샤는 그의 저의를 알아낼 수 없었다. 그녀는 순간순간 미간을 흠칫 구기면서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괜스레 다시 그에게 면박당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드레스 디자인을 수정해야겠어.”
그가 손길을 멈추지 않고 말했다.
“뭐?”
사샤는 불안스레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그가 무슨 소리를 했는지 잘 듣지 못했다.
“결혼식 당일까지 멍이 빠지지 않을 때를 대비해서 말이야. 최대한 몸을 가리는 편이 좋겠어.”
“…….”
그 정도로 심각했나. 하긴 옆구리의 멍 자국을 보자면 그럴 만도 하지. 사실 뼈가 부러지지 않은 게 신기할 지경이었으니까.
“벗어 봐.”
요한이 네글리제의 끈 한쪽을 밀어 내렸다. 사샤가 놀라 그것을 잡았다.
“사람 몸은 질리게 봤어. 네 알몸도 이미 예전에 봤고.”
“…….”
그랬다. 처음 요한을 만났을 때가 고문을 받고 더러운 바닥에 쓰러져 있을 때였다. 그렇지만 그때는 어두컴컴했다. 지금은 눈이 아플 정도로 밝고.
“네 상처를 확인해야겠어. 벗어.”
“…….”
사샤는 잠시 망설이다가 네글리제를 살며시 내렸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반, 절반은 자신을 본 그의 얼굴이 어떨지 호기심이었다.
요한은 사샤의 몸을 돌렸다. 명료하고 밝은 녹색의 눈동자, 오뚝하고 보드라운 콧날, 도톰하고 붉은 입술과 여린 턱 선을 지나, 반듯한 쇄골, 완벽한 물방울 모양의 가슴, 빛을 받아 번들거리는 밝은 선홍색의 유륜과 유두. 편편한 배에 새로로 길게 파인 배꼽. 그리고 그 아래까지 그는 한 발 떨어져 차근차근 훑었다.
디터가 만들어 놓은 푸른색 멍 자국이 허벅지와 복부를 엉망으로 물들인 채였다. 다른 이였다면 참담함에 몰골을 구겼을 광경이지만 요한은 침착한 표정으로 그녀의 몸을 꼼꼼히 살폈다. 그러다가 손을 들어 그녀의 젖가슴 바로 아래를 감싸 쥐었다.
사샤가 ‘흡’ 하고 숨을 들이켰다.
“아파?”
“…….”
그는 그녀의 갈비뼈가 멀쩡한지 양손으로 눌러 확인하였다. 사샤는 고개를 푹 숙이고 도리질을 하였다. 그러고는 까닭도 없이 울음을 터트렸다. 두 손에 얼굴을 묻고 그녀는 어깨를 떨었다. 요한은 그녀를 이해할 수 없다. 왜 우는지. 제가 멍든 부위를 누르는 통증 때문은 아니었다. 그것 때문이라면 오히려 요한은 명확하게 그것을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샤는 그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 이유를 모른다.
늘 이렇게 몰랐다. 그는 사샤의 갈비뼈를 감싸 쥔 채 멍하게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사샤의 고개가 그의 가슴으로 떨구어졌다. 위안이 필요한 것인지 아니면 흐느끼다 중심을 잃은 것인지 마치 그 모양새가 안기듯 했다. 요한의 손이 본능적으로 그녀의 등을 감쌌다. 그러면서도 요한은 왜 자신이 그녀를 감싸 안는지 몰랐다. 왜 이렇게 되는지 말이다.
“흑…….”
안도감이 느껴져 사샤는 소리 내 울기 시작했다. 소름이 돋은 그녀의 몸이 너무 서늘했다. 요한은 그녀의 등을 손으로 서툴게 어루만지다가 말했다.
“사샤. 가운을 입어.”
그러나 사샤는 그의 말을 듣기는커녕 더욱 그에게 몸을 기울였다. 요한은 덜컥 겁이 났다. 알몸의 여자가 몸을 붙여 온다는 것보다는 그녀의 몸이 시리도록 서늘한 것이 겁났다.
“사샤.”
요한이 그녀의 양어깨를 쥐고 제 품에서 뗐다. 그러자 사샤가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표정이 이상했다. 요한은 도저히 그것을 읽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앵무새처럼 했던 말을 반복했다.
“가운을 입어.”
피하고 싶었다. 눈물로 번진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것이 기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젖은 그녀의 녹색 눈동자에 빨려들어 갈 것 같았다. 요한은 사샤를 스쳐 지나 의자 위에 구겨져 있는 실크 가운을 가져와 그녀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자꾸만 흘러내리려는 것을 그는 몇 번이고 고쳐 올렸다.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무슨 말을 하려고 들어왔더라 떠올려 보려 애쓰다가 그녀의 얼굴을 보고는 다시 잊어버리고는 했다. 내가, 가만……. 내가 무슨 일로 들어왔더라.
마침내 사샤가 제 손을 가운의 소매에 넣고 허리끈을 여몄다.
“미안해.”
그녀는 눈물을 닦아 내며 사과했다. 왜 사과를 하지?
“아니. 사과할 필요 없어.”
요한이 알기로 사샤가 잘못한 일은 없다. 이 상황에 사과해야 할 사람은 없었다. 그저, 아주 잠시 벌어진 해프닝일 뿐이었다. 도저히 자신은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그러나 사샤는 자신이 사과해야 하는 명백한 이유에 대해 알았다. 연고를 발라 주는 그의 손길은 너무나 따듯했고, 제 몸을 살피는 그의 눈도 그랬다. 그래서 갈비뼈를 만져 보고 아프냐고 묻자, 사샤는 완전히 무너졌다. 누구보다 이성적이고 차가워져야 할 상대 앞에서 날이 갈수록 감정적이 되어 간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팠어. 사실 아팠어. 늘 아팠지. 그래서 누군가가 아프냐고 물어봐 주길 원했다. 아프냐고 물어보면 몇 번이고 대답하고 싶었다. 괜찮다고, 아니라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견딜 수 있는 척하는 대신 응. 아파. 그래. 난 아파. 매일 아파. 너무나 아파. 맞아. 아파. 그렇게.
그런데 아무도 아프냐고 물어봐 주지 않았어. 아무도. 당신 말고는 그 누구도.
“좀 힘든 일이 많았어. 봐서 알겠지만.”
사샤는 애써 태연하게 대답했고 요한이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 사샤는 손 안에 든 것을 확인했다. 제 손에 딱 맞는 단도.
“어떻게 가져왔어?”
사샤는 손등으로 코를 훔치며 놀란 듯 물었다.
“디터가 줬어.”
“…….”
“내가 디터의 상사잖아.”
물론 그렇지. 하지만 그 잔인하고 괴팍한 남자가 고분고분 이것을 주는 그림이 상상되지 않는다. 사샤가 아는 모습이라고는 늘 발로 차고 때리고 욕하고……. 오로지 그뿐이었다. 상상만 해도 치가 떨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진저리를 쳤다.
“잘 지니고 있어. 누구에게도 들키지 말고.”
사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한이 말을 이었다.
“그 단도는 비밀스러울 때에만 가치가 있어. 그러니 누굴 위협하거나 공격할 때 쓰지 마. 딱 한 번, 네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반드시 상대를 죽여야 할 때만 써.”
사샤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요한의 말을 완전히 이해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지금껏 그래 왔듯 행위로 사샤의 머릿속에 내용을 각인시키기로 했다. 요한은 사샤를 잡고 발을 걸어 뒤로 밀었다. 엇 하는 사이에 사샤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요한은 그 위에 앉아 팔꿈치로 사샤의 목을 지그시 눌렀다. 고통스러운 강도는 아니었으나 침을 삼킬 때 불편한 정도는 되었다.
“자. 해 봐.”
“…….”
“날 벗어나 봐.”
무방비하게 뒤로 넘어갈 때 이미 사샤는 단도를 놓쳤다. 고개를 돌려 바닥을 보았을 때, 그것은 저 멀리 날아가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곳에 떨어진 채였다. 요한도 분명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를 위협하거나 죽일 방법이 없다는 것을. 완전히 빈손이라는 것을.
만약 손에 단검을 들고 있었다면 그것으로 어디든 찌를 수는 있을 것이다. 목이나, 힘이 좋다면 관자놀이에 칼날을 박아 넣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무방비였다. 버둥거려 보았자 그를 더 자극할 뿐이라는 것을 안다. 오히려 목에 가하는 압력만 세지리라.
사샤의 숨결이 점점 더 가빠졌다. 요한이 더 힘을 주어 누른 것도 아닌데 그랬다. 사샤는 요한을 응시했다. 풀잎같이 싱그러운 녹안이 차가운 얼음이 담긴 벽안을 고요히, 깊이, 숨이 멎은 듯. 다시금 요한은 눈앞이 어지러웠다. 심장에 미약하게 무언가가 지펴졌다. 태동 같기도 한 작은 소음이 시작을 알리듯 둥, 둥 규칙적으로.
사샤는 요한의 머리를 잡아 저에게로 끌어 내렸다. 순간적으로 팔에 힘이 들어가 의도치 않게 목을 더 눌렀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끌어당기고 입을 맞추었다. 입술이 부딪히고 숨결이 얽혔다. 치기 같기도 하고, 오기 같기도 하고, 더러는 위협인 것도 같은 입맞춤.
목을 더 눌러 질식시킬 수도 있었다. 강제로 그녀의 혀를 깨물고 벗어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요한은 그녀를 내리누르는 대신, 팔꿈치로 그녀가 무겁지 않게 제 상체를 지탱했다. 범해지는 대로 입안에 구르는 혀를 내버려 두었다.
눈을 감았다. 목을 누르던 팔을 빼냈다. 그녀의 뺨을 쥐었다. 귀를 만져 보고 고개를 틀어 그녀의 보드라운 혀에 제 혀를 섞었다. 비단 같은 갈색 머리카락을 쥐었다. 둥! 둥! 가슴이 요동쳤다. 좀 더 더러워지고 싶었다. 그녀의 얼굴을 핥고 싶었다. 그녀의 체액으로 범벅이 되고 싶었다. 아니 그냥 이대로. 아니면 조금 더. 예측하지 못했던 상황을 조금만 더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고 싶었다.
사샤가 그의 목에 손을 감아 조이듯이 안았다. 요한이 그녀의 팔과 허리를 훑었다. 사샤가 몸을 뒤틀었다. 무게 중심이 이동하고 말았다. 요한은 아래에 깔리고 사샤는 그의 위에 앉았다. 입술이 쪽,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쿵, 그의 머리가 바닥에 충돌했다. 사샤가 제 밑에 뻗은 요한의 목을 두 손으로 짓누르며 헐떡였다.
“…….”
요한이 항복의 표시로 두 손바닥을 내보였다. 사샤는 벗어났다. 그녀가 이겼고 자신은 졌다. 깔끔하게 그는 그것을 인정했다.
“단검을 몸에 지니고 있었다면. 지금 날 죽일 수 있었을 거야.”
요한이 단조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사샤는 그의 멱살을 한 번 당겼다가 밀었다. 쿵. 하고 요한의 머리가 다시 바닥을 찧었다.
“입 닥쳐.”
사샤가 하악질을 하듯 위협했다. 그 모습에 요한이 웃음을 터트렸다.
“깔보지 마. 내가 이겼잖아.”
“맞아. 네가 이겼어. 깔보는 게 아니야. 그저 재미있을 뿐이지.”
“…….”
“이제 내 몸 위에서 내려와 줄래?”
“…….”
“아니면 목을 조를 참이야?”
아니야. 사샤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숨이 찼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불이 난 것처럼 뜨거웠다. 특히나 그와 맞닿아 있는 하체는 열기로 녹아내릴 지경이었다. 대체 이게 뭘까. 왜 이렇게 뜨거운 걸까. 그를 보았을 때, 그의 손이 저에게 닿았을 때, 그가 다가왔을 때, 그의 입김이 얼굴에 닿았을 때, 그의 눈동자를 올려다보았을 때, 심장이 뛰고 경련이 났다. 증오와 비슷한데, 명료해지는 시선이나 세차게 뛰는 심장 박동은 동일한데 이상하게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이것은 정신병이다. 그에게 너무 집착하다 보니 이제 정신병이 온 것이다.
미쳤다. 저는 미친 거다. 내려가라는 소리를 듣고도 계속 이렇게 그의 위에 주저앉아 있고 싶은 것을 보면, 이렇게 허리 아래를 부비고 싶은 것을 보면, 흥분으로 저릿한 것을 보면 분명히 미친 것이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곡해해 듣고 싶은 것을 보면 확실히 그렇다. 그는 예전과 변한 것이 없어 보이는데, 저는 미쳐 버리고야 말았다.
“사샤. 비켜.”
요한이 더 낮게 명령했다. 이번에는 들을 수밖에 없었다. 사샤는 그의 몸 위에서 일어났다. 머리가 어지러워 그녀는 이마를 짚고 숨을 골랐다. 요한이 천천히 일어나 제 옷을 털었다. 사샤가 보기에 그것은 마치 그의 몸에 달라붙어 있던 그녀의 열기나 오기 따위를 터는 것 같았다.
요한은 바닥에 나동그라진 단도를 집어 그것을 사샤에게 건넸다.
“자. 주워 주는 건 이게 마지막이야. 그리고 디터가 알게 하지 마. 미쳐 날뛸 테니까.”
사샤는 단도를 다시 받아 들었다. 이번엔 놓치지 않도록 손에 꽉 쥐었다.
“그럼 디터를 내 옆에 오게 하지 마. 그 새끼는 항상 미쳐 날뛴단 말이야.”
“당분간 디터는 널 데리러 못 올 거야. 신부 수업을 받는 시간에 맞추어서 다른 이를 보내도록 하지.”
“당분간?”
“그래.”
“왜 당분간이야? 그 대신 누가 오는데?”
요한은 작게 웃었다. 긍정의 뜻도 부정의 뜻도 아닌 알 듯 모를 듯 묘한 미소. 당신은 언제나 참으로 빨리 식고, 빨리 정리되고, 그리고 늘 알 수 없는 남자가 되어 버려.
“그럼 쉬도록 해. 사샤.”
그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예의 바른 신사가 품위 있는 숙녀에게 하듯이. 그러나 엉망으로 뒤엉킨 머리카락과 여며 쥔 가운의 구김이 방금까지 단정치 못한 일을 했음을 여실히 증명했다. 사샤는 가운을 여미며 그를 향해 눈을 흘겼다. 결국, 조롱에 지나지 않은 장난일 뿐이니.
요한은 사샤의 방에서 나와 문을 닫고 한참 동안 그 앞에 멈추어 있었다. 침잠된 얼굴에 흐린 눈으로 그는 복도의 마룻바닥 어느 한편을 바라보다가 제 블레이저 안, 가슴께에 손을 얹어 보았다. 찌르르. 간지럽고 오한이 돋는 뭔가가 손바닥을 울렸다.
요한은 둥둥 뛰던 북소리를 기억했다. 미약하던 그것이 세차게 뛰던 순간도 기억했다. 갑자기 코끝이 시렸다. 그는 손바닥으로 코끝을 한 번 쓸어 내렸다. 손끝이 입술 위에서 머물렀다. 살갗이 찌릿하게 아파 왔다. 물어뜯긴 것도 아닌데 그랬다. 제 입술도 사샤의 그것처럼 붉게 부풀어 있을까.
요한은 흐릿하던 시선을 분명하게 다잡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계단까지 쭉 뻗어 있는 긴 복도가 명확하게 보였다. 텅 비고, 밝고, 작은 먼지들이 다이아처럼 떠다니고 있었다.
곧 안뜰에 형틀이 세워질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디터가 묶일 것이다. 요한은 사람을 나눌 때 충직함, 정직함, 충성심, 애국심, 도덕 따위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사람이란 필요가 있느냐, 없느냐로 나뉘었다. 그것은 제아무리 디터라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을 무어라 칭하든, 우정이라 칭하든. 전우애라 칭하든, 아니면 존경이라 칭하든 요한은 그것을 믿지 않았다.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감정을 누군가 준다 해도, 그것은 무용했다. 받아들이기도 어려웠다. 그는 사람의 정을 믿지 않는다. 가치 없는 것이다. 요한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러니 앞으로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디터는 요새의 안뜰에 묶여 그곳의 모든 군인과 사용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열 대의 채찍을 맞았다. 등의 살갗이 벗겨지고 피가 흘러내리고, 참지 못해 비명을 지른 후, 그는 요한의 발밑으로 쓰러졌다. 혼절하기 직전 올려다본 그의 상관은 언제나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차갑고 냉혹하고 거만했다. 디터는 그것에 안도를 느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증오가 들끓었다. 누군가, 이 치욕을 받아야만 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저가 아니다. 사샤 로랑. 그 여자였다.
디터는 들것에 옮겨지며 이를 갈았다. 당장은 납작 엎드려 있는다 해도 언젠가 기회가 되면 그 여자를 죽이리라. 결코, 이 치욕을 잊지 않으리라, 등에 시퍼런 핏줄기가 새겨질 때, 고통이 타오를 때, 그는 수만 번 다짐했다.
요한은 디터의 처벌이 끝나자 집무실로 돌아갔다. 몇 통의 편지를 보내고, 몇 통의 전화를 한 후 메모지 위에 무언가를 휘갈겨 썼다.
[아미나답, 개발 완료.]
카렐과 방첩부가 그토록 해독하지 못해 안달이 난 그 네 글자의 단어를 요한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연합국이 쓰는 암호는 두 번의 변형을 거친다. 알파벳으로 푼 문자를 다시 다른 언어로 풀어야만 그 뜻을 알 수 있었다. 도첸처럼 기계를 돌려 얻어 내는 암호가 아니므로, 변환하기 전의 언어만 안다면 누구나 풀 수 있는 간단한 공식이었다.
문제는 도첸의 기호 학자와 수학자들은 남방계 소수 민족의 언어인 ‘마자브어’를 모른다는 것이다. 마자브어를 아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연합국으로서는 남방계의 소수 언어를 북방계 민족으로 이루어진 도첸국에서 알아챌 사람이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합당한 판단이었다. 도첸국은 그 암호를 풀지 못해 지금도 끙끙대고 있으니까.
그러나 요한은 달랐다. 그는 마자브어를 모두 알고 있었다. 변경되는 코드와 추가되는 단어까지 모두 다 말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카렐 장군에게 알릴 생각은 없다. 라울에게도 마찬가지다.
연합국이 화학 무기인 ‘아미나답’의 개발에 성공했다는 사실을 알면 라울은 겁을 먹어 도망가거나 아니면 미쳐서 날뛰거나 둘 중 하나였다. 상대방이 화학 무기를 쓰기 전에 먼저 사린 가스를 풀어 버릴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좋지 않다. 라울이 겁을 먹고 도망가면 위기감은 꺾일 것이고, 사린 가스를 풀어 버린다면 말 그대로 인류의 종말이 될 것이다.
요한은 집게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메모지에 갈겨쓴 글자를 응시했다. 연합군에서 이 화학 무기를 쓸까? 라울은 연합군의 영토를 향해 사린 가스를 던진 적이 없다. 오로지 자국 내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진압용으로 썼을 뿐이다. 그것이 그가 멍청한 겁쟁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 일이 연합군의 불안감을 고조시켜 화학 무기를 개발하게 만든 것 같았다. 그러나 터질 일은 없을 것이다. 레드본의 입김은 도첸보다 연합국에 더 강할 테니.
똑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시계를 보았다. 창밖에는 달이 뜬 지 한참이었고 시침은 자정의 근처에 머물고 있었다. 이 시간에 저를 찾아올 이는 많지 않았다. 위급 상황이 아니라면 말이다.
“네.”
요한이 대답했지만, 문은 곧바로 열리지 않았다. 급한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잠시 후 끼익, 문이 열렸다. 보는 이가 답답할 만큼 느렸다.
“사샤.”
요한이 먼저 그늘진 실루엣을 알아보았다. 사샤는 문을 열고 머뭇머뭇 말했다.
“침실로 찾아갔는데, 당신이 여기에 있다기에.”
“내 침실은 어떻게 알고?”
“물어봤어. 지나가던…… 남자한테.”
그녀는 문을 잡고 서 있다가 한 발짝 안으로 들어와 조심스레 문을 닫았다. 요한은 턱을 괴고 제 인중을 집게손가락으로 눌렀다. 여러모로 그녀가 찾아오기에 적절한 시점이 아닌 것 같았다.
“너무 늦었어. 돌아가.”
“…….”
거부였다. 요한이 자신의 방문을 거부하고 있었다. 갈비뼈 부근에서 뭔가가 조각났다. 우수수 떨어져 발끝까지 저리게 만들었다. 잠이 오지 않았어. 머릿속이 너무 복잡하고 마음이 너무 심란했어. 너를 보고 싶었던 게 아니야. 너를…….
사샤는 치밀어 오르는 것을 삼켰다. 눈물인지, 분노인지 모르는 비참한 것을 꿀꺽 삼키고 두 손을 말아 쥐었다.
“할 말이 있어서 왔어. 내일 성당에 갈 때, 혹시 도로시를 보낼까 봐, 그럴 거면 보내지 말라고. 나 그 여자랑 사이가 정말 안 좋으니까.”
“…….”
“차라리 나 혼자 가겠어. 그 말을 하려고 왔어.”
그녀는 문가에 서 있었다. 들어온 것 같지도 않은 어중간한 위치. 환영받지 못한 손님은 차마 거기서 한 걸음만이라도 벗어날 배짱도 없는 것이다. 이제 와 무엇을 바라는가, 사샤는 자신이 무엇을 바라는 것인지도 몰랐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머리와 가슴이 따로 놀았다.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정의하고 싶지 않았다. 따져 묻고 싶지도 않았다. 저의 행위가 가리키는 것이 무엇이든 외면하고 싶었다.
그녀는 어색한 동작으로 더듬더듬 문고리를 잡았다. 무어라 작별의 말을 하기도 어려워 서툰 낯빛으로 그에게서 몸을 돌렸다.
“내가 갈 거야.”
요한의 말이 사샤를 붙잡았다. 그녀는 그의 말을 확인하기 위해 몸을 되돌렸다. 그가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희미한 조명등 아래에 그의 실루엣이 어둠처럼 푸르렀다가, 빛처럼 붉었다가를 반복했다.
“내가 갈 거라고.”
“…….”
그 말이 뭐라고. 뜨거운 무언가가 또 가슴에서 솟아났다. 화산처럼 왈칵 터져 뜨겁게 흘렀다. 이것이 무엇이든 그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는 걸 안다. 들켰더라도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안다. 사샤는 애써 모든 것을 닦아 내고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단조롭고 무덤덤하게 대답하려 노력했다.
“응.”
군인처럼 딱딱한 대답을 하고, 딱딱하고 어설픈 동작으로 사샤는 방을 나갔다. 문 앞에서 미적대다가 쏜살같이 나가는 것이 마치 그러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보였다. 요한은 그녀가 사라진 문가를 바라보다가 손으로 제 이마를 짚었다. 그러고는 목석처럼 움직이질 않았다. 무거운 목재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집무실이 어둠 속으로 침잠되어 있었다. 그것은 숨이 막힐 정도로 고요하고 위험할 정도로 암담했다.
어째서 사샤에게만 관대한 것이냐는 디터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요한은 쾅 책상을 내리쳤다. 바닥으로 떨어진 고개가 들릴 줄을 몰랐다. 이마를 짚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하얗게 색이 바랬다.
안 돼, 사샤.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