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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60화


60화 자신을 보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그녀를 보자 발드르는 새삼 다시 알게 되었다. 얼마나 그녀가 보고 싶었는지를. 정말이지 너무 보고 싶었다. 끌어안아 버리고 싶은 것을 참으며 발드르는 간신히 자리에 앉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지만 막상 만나게 되고 나니 그 고민이 무색하도록 말은 술술 나왔다. 대부분이 머리를 거치지 않고 나오는 말이었다. 발드르는 그 말을 하면서도 속으로 망했다고 생각했다. 모든 일을 지금 이 입이 망쳐 버리고 있다고. 누가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자신과 함께 스카디로 떠나 주겠는가? 이제 와서, 유배형을 당한 것도 아닌데. 그러나 자신의 말을 들은 잔느는 전혀 다른 말을 했다. “지금 제가 사는 집을⋯⋯ 보셨지요? 저희 가문은 영락할 대로 영락해 공작님께서 만족할 만한 지참금을 드릴 수 없습니다.” 지참금에 대한 말을. 자신이 그걸 모르고 여기 왔겠는가? 지참금을 원했다면 공주와 혼인했을 것이다. 잔느가 아니라. “저와 결혼하시면 귀천 상혼이라 다른 귀족들에게 조롱받게 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저는⋯⋯ 제 가문은 제 대에서 유명무실해지게 될 것입니다.” “개의치 않소.” “아예 혼인하지 않으시겠다면 모르겠으나 혼인하실 계획이시라면⋯⋯ 저보다 더 좋은 분들이 많을 겁니다. 랑시스의 공주님이 아니더라도⋯⋯.” “그대가 말하지 않았소? 사랑하는 사람과 혼인하는 행운을 누리라고?” 그 외에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오로지 바라는 것은 잔느의 마음뿐이었다. “모든 게 빈말이었소?” “아닙니다.” “그럼 마음이 변했소?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소?” 그 말에 잔느는 고개를 저었다. “방금 전에 말한 것 외에 다른 이유가 있소?” 그 말에도. “그럼 되었군.” 발드르는 간신히 날뛰는 마음을 갈무리했다. '그렇군.' 정말로 잔느는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청혼을 받아들여 주었다. 그 사실이 발드르를 너무나 놀라고 기쁘게 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던 감정이 그를 당황스럽게 했다. 낯설고 간지러운 이 감정이 행복감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잔느를 앞에 두고 그 감정을 처음으로 음미했다.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후회하지 않았어.' 형은 정말로 후회하지 않았으리라. 지금의 자신과 같은 감정을 아내에게 느꼈었다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잔느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대가 나와 혼인해 주길 바라오. 나와 혼인하겠소?” “예.” 잔느의 대답에 그는 다시 한번 지극한 행복감을 느꼈다. 이 행복한 기분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결정을 후회하지 않도록 해 주겠소.” 잔느가 청혼을 승낙하긴 했지만 준비를 마치고 다시 정식으로 맞이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다. 그는 떠나기 전에 무언가 증표를 주고 싶었다. 변심하지 않겠다는 사랑의 증표를. 그 순간 그는 반지를 끼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그가 작위를 물려받음과 동시에 상속받은 인장 반지였다. 발드르는 반지를 꺼내 잔느의 손가락에 끼워 주려 했지만 그 어느 손가락에도 맞지 않아 엄지에 끼워 줘야 했다. “예의를 갖춰 곧 다시 방문하리다.” “아니에요. 같이 가겠어요.” 발드르는 잔느의 단호한 말에 놀랐다. 그러나 곧 온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 차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토록 행복할 수 있을까? 그는 이제 현실을 의심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렇게 하겠소?” 그리고 그날 점심 무렵 발드르와 잔느는 마차에 올랐다. 마차가 덜컹이며 움직이자 그는 물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였소? 언제부터⋯⋯ 나를 마음에 두게 되었소?” 그동안 차마 묻지 못했지만, 잔느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안 순간부터 궁금했었다. 그의 질문에 잔느의 얼굴은 곧 잘 익은 사과처럼 붉어졌다. “전에⋯⋯ 제게 책을 선물해 주셨던 것 기억나십니까?” “책?” “제 조부의 책 말입니다.”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떠올랐다. 발드르는 잔느에게 책을 건넸었다. 일전에 들은 잔느의 말에 의존하여 서재의 장서 중에 혹시 그녀의 조부 서재에서 흘러들어온 책이 있는지 뒤졌던 것도. 하지만 그것은 그에게 있어선 정말 별 일이 아니었다. “우화집이었지.” 그래서 완전히 잊고 있었던 일이었다. “그렇습니다.” 잔느는 고개를 끄덕인 뒤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살짝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 책이 저를 이끌었습니다. 공작님에 대한 사랑으로요.” 발드르는 놀랐다. 한 번도 예상해 본 적 없는 계기였기 때문이었다. “그 책이?” “⋯⋯그렇습니다.” 그는 인상부터 찌푸렸다. 그 책이 어떻게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연결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그냥 낡은 책일 뿐이지 않은가. 게다가 그의 기억으로는 그 책을 건넨 지 얼마 되지 않아 잔느에게 거절당했었다. “어떻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잔느는 그 우화집에 나오는 우화 한 편을 들려주었다. “그 이야기를 읽고 저는 깨달았습니다. 사랑에 빠졌다는 걸.” “⋯⋯.” 발드르는 왜 그 우화가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연결되었는지 여전히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도 그 책으로 인해 잔느가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다 하니, 전국 각지에서 책을 모아들여 유산으로 남겨 준 아버지가 처음으로 고마워졌다. “공작님께서는 저를 언제부터 사랑하셨나요?” 잔느가 물었다. 그 말에 발드르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언제부터였지? 뚜렷한 계기는 떠오르지 않았고 대신 그녀와 함께 보낸 무수한 순간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사실 함께한 시간은 고작 일 년이었다. 그조차 매일 만난 것도 아니고. 그런데 그 시간 동안 그는 정말 재미있었다. 잔느를 만나기 전에 보낸 그 긴 시간보다도. “처음부터였던 것 같소.” 그렇다. 잔느가 오기 전에 그는 일상이 너무 지루했었다. 더 이상 살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생각할 만큼, 그를 지탱한 것은 작위의 무게와 의무뿐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오고 나서는⋯⋯. “나는 그대가 처음부터 좋았소.” 재미있었다. 그녀가 하는 행동과 대화, 그 모든 것이. “나도 미처 몰랐지만⋯⋯ 아마 첫눈에 반하지 않았을까.” 발드르는 고백했다. 그의 고백에 잔느는 가슴이 부풀 정도로 크게 숨을 들이켰다. “처음 식사했을 때 저는⋯⋯ 공작님 앞에서 토하지 않았었나요?” “그랬었지.” “그 전엔 며칠 못 씻어서 시궁쥐처럼 더러웠고요.” “그랬나? 그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소.” 그 부분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도대체 제 어디가 좋으셨습니까?” 잔느가 닦달하듯 물었다. 그는 결국 자신의 마음을 좀 더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대는 함께 있으면 재미있고 말도 통하고 취미도 비슷하고⋯⋯ 모르겠소. 그런 건 이유가 되지 못하고 그냥 그대의 전부가 좋았소. 운명이었던 것 같소.” 잔느는 놀라워했다. “그런 말도 할 줄 아시는군요.” '그런 말이 뭐지?'라고 그는 생각했지만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 잔느는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마차의 의자 등받이에 푹, 하고 등을 파묻었다. “생각해 보니, 저도 운명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모든 건 정해져 있었던 것일까요? 이 순간을 위해?” 그랬을까? 발드르도 그녀를 바라보았다. 햇살에 반짝이는 호수 같은 눈을 바라보는데, 그 눈 속의 호수가 그에게로 옮겨오는 듯했다. 그리고 호수는 그를 발끝부터 채워 가기 시작했다. 서서히, 이윽고 머리끝까지. 발드르는 잔느의 눈동자 속에서 충만해졌고, 이윽고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채워지고 나서야 그는 아주 오랜 시간 자신이 비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텅 비고 말라 있었다는 것을. 마차가 또 한 번 덜컹였다. 그는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서서 잔느에게로 다가갔다. 옆자리로 다가가 발드르는 잔느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는 고개를 수그렸고, 잔느는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긴 속눈썹을 바라보며 발드르는 자신의 입을 잔느의 입술 위로 포갰다. '지금까지의 삶은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존재한 것이 아닌가?' 그 따뜻함과 부드러움이란 이루 말로 다 드러낼 수 없었다. 그는 잔느를 꽉 끌어안고 지금 자신이 움켜쥔 것을 결코 놓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나는 지금 이 순간을 위해 견뎌 왔던 것이 아닌가. 그 의미 없었던 삶을.' 잔느의 두 손이 그의 목에 얽혔고 그다음 그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지극한 기쁨이 그의 얼어붙은 몸을 녹여 갔을 뿐이었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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