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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58화


58화 그래서 그는 고독을 택했던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곁에 남게 할 방법을 알지 못했으므로. 하지만 그녀는 나를 사랑하지 않나. 정부가 되지 않아도 좋았다. 발드르는 그냥 그녀가 남아 있어 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아나의 가정 교사라도 좋으니까. 하지만 잔느는 그러지 않았다. 그도 잔느를 붙잡지 않았다. 붙잡아 보았자 잡히겠는가? 바람이나 물을 안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잔느는 마차를 타고 떠나갔다. 아이의 가정 교사가 떠나갔을 뿐이다. 수많은 고용인들이 저택을 거쳐 가듯이 이번에도 그저 한 사람이 머물렀다 사라졌을 뿐. 그러나 저택은 그녀가 떠나자마자 빛을 잃고 어둠에 휩싸인 것만 같았다. 기분 탓일까? 그럴 것이다. 잔느의 마차가 그의 시야에서 사라진 후 그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어 그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의 기억으로는 순식간에 해가 저물고 밤이 되었다. 하인이 정찬 시간을 알려 왔다. 그는 식사를 거르겠다고 말했다. 당연하게도 그날 밤 발드르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당연하게도. '떠났나? 정말로?' 떠나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음에도 발드르는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그렇다. 그리고 마음속에서는 그녀가 떠났다는 답변이 들려왔다. 그 답변을 들을 때마다 그는 고통스러워 몸을 뒤척였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본다면, 그는 언제라도 잔느를 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만나는 일을 피해 왔다. 왜? 가질 수 없는 것을 바라보는 게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그렇다면 오히려 그녀 쪽에서 떠나 주어 잘된 것 아닌가? 이제 그는 혹시나 잔느를 마주칠까 봐 서재에 발걸음을 끊지 않아도 되었다. 아나는 이제 글도 깨쳤고 많이 지혜로워졌으므로 다른 가정 교사를 고용하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그래, 다른 가정 교사를 구하자. 이번에는 유배형이 풀리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 버릴 유배인이 아니라 스카디에 사는 사람으로. 여자가 아닌 남자가 좋겠다. 그리고 새 가정 교사와는 절대로 교류하지 않을 것이다. 정을 주는 일에 이젠 지쳤다. ⋯⋯라고 발드르는 생각했다. 정작 정을 준 이도 몇 없건만. 그는 끊임없이 다른 생각을 하는 것으로 잔느라는 존재를 잊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녀의 존재는 그의 안에서 한없이 강력한 힘을 갖고 커져 갈 뿐이었다. 발드르는 잔느를 생각하지 않는 법을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오직 잠, 작은 죽음으로 도피하는 것 외에는. 그래서 그는 억지로 눈꺼풀을 닫고 잠을 청했다. '떠나.' 그리고 그는 짙은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다. '일어나. 떠나.' 어딘가 익숙하지만 누구인지는 떠오르지 않는 낯선 남자의 목소리를. 잔 것인지 잠들지 못한 것인지 불분명한 상태로 발드르는 일어났다. 심각한 두통이 그를 덮쳤고 그는 곧 목소리를 잊어버렸다. 고통스럽다 해서 할 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그는 일했다. 차라리 일을 하는 편이 나았다. 그동안에는 아주 잠시나마 누군가를 떠올리는 것도 잊을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는 지금은 죽을 것 같지만, 언젠가는 그녀 또한 잊히게 되리란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가 잃어버린 사람들처럼. 발드르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사람처럼 일했고 여느 날과 같이 식사도 했다. 식욕은 전혀 없어 모래를 씹는 것 같았지만 떠나 버린 사람 때문에 일상을 잃어버릴 만큼 동요하고 있다는 흔적조차 누구에게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그저 가정 교사 한 명이 잠시 머물렀다 떠난 것이다. 자신은 그 가정 교사를 잠시 사랑했을 뿐이고. 그게 뭐 대단한 일이란 말인가? 살다 보면 그런 인연도 자연스레 지나가는 법인데, 그럼 이 세상 모든 사랑이 이루어지기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 이미 끝난 일이다. 그는 잔느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생각을 몰아내려 일에 몰두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따금, 차오르는 의문을 막을 수 없었다. '만약 내가 그녀에게 정부가 아니라⋯⋯ 아내가 되어 주기를 바랐더라면 청을 받아들였을까? 그랬더라면 왕세자의 마차가 왔어도 떠나지 않았을까?' 그는 자꾸만 이어지는 궁금증을 털어 내기 위해 몇 번씩 고개를 저어야 했다. 그러나 한번 떠오른 가정은 그를 단단히 사로잡았다. '잔느는 내가 청혼했더라면 받아들였을까?' 발드르는 뜬눈으로 며칠 밤을 지새웠다. 잠을 제대로 자면 상황이 좀 더 나아질 것 같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잠들기 위해 침대에 눕기만 하면, 눈꺼풀을 감기만 하면 검은 막 위로 잔느의 얼굴만이 아른거렸다. 그는 잔느를 생각하지 않기 위해 어두운 밤 두 눈을 부릅떠야만 했다. 보고 싶었다. 상상 이상으로 큰 고통이 그의 가슴을 부쉈다. 정말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어쩌란 말인가? '일어나.' '나더러 대체 어쩌라고?' 고통에 몸부림치다 아주 잠시 선잠에 들 때마다 그는 낯설지는 않지만 어디서 왔는지 모를 목소리를 꿈결에서 듣길 반복했다. 그건 어서 일어나라는, 떠나라는 목소리였지만 그는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도 알지 못했고 너무 지쳤으며 그 말대로 한다 한들 어디로 떠나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이러다 죽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에 이른 것은, 잔느가 떠난 지 일주일가량 지났을 무렵이었다. '왜지?' 잠도 오지 않았고 아무리 해도 음식이 넘어가지 않았다. 그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이별을 겪었지만 이토록 고통스러운 적은 없었다. 도대체 왜인가? 왜? 잔느가 아버지, 어머니, 형 그리고 다른 몇몇 고용인들과 대체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이성을 향한 욕망? 그 때문인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단지 그것 때문만인 것 같지는 않았다. 마음을 자각한 뒤 오랫동안 그녀를 욕망해 오긴 했지만 잔느가 떠난 지금은 그저⋯⋯ 보고 싶을 뿐이었다. 만지거나 자고 싶은 것이 아니라. 단 한마디 말도 나누지 않아도 좋으니. 대체 왜? 그녀는 겨우 일 년 남짓 이곳에 머물렀다 떠났을 뿐인데. 무엇이 저로 하여금 그녀를 간절히 소망하게 하는가? 그녀를 잊는 것을 원하지 않게 하는가? 타는 듯이 고통스럽고, 더할 수 없이 슬프게 하는가? '그녀가 대체 무엇이라고? 몰락한 백작가의 여식이 대체 얼마나 대단한 존재라고?' 그는 의문에 휩싸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아나가 그에게 알현을 요청했다. 그녀가 저택에 온 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발드르는 아나의 알현을 허락했고 집무실로 아이가 찾아왔다. 아나는 전보다 많이 여위었고 두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마치 그처럼. “선생님을 다시 데려와 주세요.” 아나가 그전에는 한 번도 보지 못한 단호한 눈빛으로 말했다. “제겐 선생님이 필요해요.” “세상에 선생이 그 여자 하나만 있는 건 아니야.” 그는 막 시작된 대화가 벌써부터 피로했다. “네가 그 선생을 좋아했던 건 안다. 하지만 내가 선생을 해고한 게 아니라 선생이 떠나길 원했어. 유배가 풀리자마자 말이다. 선생은 집으로 돌아갔으니 그만 잊거라. 이번에는 타지 사람이 아닌 자를 선생으로 찾아 주마. 저택에 좀 더 오래 머무를 수 있도록.” “저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잔느 선생님을 원해요. 선생님을 다시 데려와 주시면 안 되나요?” “⋯⋯” “공작님께서 설득해 주시면 안 되나요?” “왜?” 발드르는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 선생이 너한테 잘해 줘서?” “선생님은 저를 사랑해요.” 아나가 말했다. “그리고 저는 절 사랑하는 사람이 필요해요. 정말이에요.” 아나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저한테 잘해 주는 사람은 이미 많아요. 하지만 아무도 저를 사랑하지 않아요. 저는 누구도 절 사랑하지 않는 곳에 있고 싶지 않아요. 선생님을 데려와 주시지 않을 거라면 저를 차라리 마을로 돌려보내 주세요.” 그 마을은 불탔으며 사람들도 모두 죽었다는 말을 하는 대신, 그는 다시 한숨을 내뱉었다. 그때였다. 벼락같은 깨달음이 다가온 것은. '그렇군.' 그녀가 다른 사람과 대체 무엇이 다른지를, 무엇이 그를 절절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지를. 잔느는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해 주었다. 그렇다. 다른 이들은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해 준 적이 없었다. 실제로는 사랑하고 있었을지라도. 그는 지금까지 살면서 단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녀가 말했다. '제가 공작님을 사랑하니까요.' 그리고 그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날 밤이었다. 칼에 찔리는 듯한 아픔을 느끼며 잠자리에 누웠을 때였다. 지친 몸을 뉘고 두 눈을 감자마자 또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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