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48화
48화
“그건 내가 물을 말이군, 이 야심한 밤에 뭘 하고 있소?”
“그게, 잠이 오질 않아⋯⋯ 산책을 나왔습니다.”
나는 궁색한 변명을 했다. 하지만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무도회의 주최자인 그가 대체 왜 이곳에 있는가? 내 말에 공작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산책 나왔소.”
“⋯⋯.”
“내가 내 장원을 산책하는 데 누구 허락이라도 맡아야 하오?”
“그럼 무도회는 어쩌시고요?”
“내가 저곳에 있어 보았자 무얼 하겠소?”
'무도회에서 뭘 하긴, 춤을 추겠지?'
하지만 공작이 그렇다는데 할 말이 없었다. 나는 급히 허리를 구부려 땅에 두었던 등잔을 집어 들었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원수는 도처에서 만난다던가. 나는 그의 산책을 방해하고 싶지도 않았고, 사실 지금 그를 마주한 것만으로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를 보고 싶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으면서도, 막상 이렇게 만나니 가슴을 바늘로 찔리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주제넘는 것을 원해서 벌을 받은 것만 같아.'
내 것이 될 리 없는 사람을 원하는 데서 오는 고통이었다. 얼른 등잔을 쥐고 언덕을 내려가려는데 내 손목이 무엇인가에 걸렸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내 손목을 쥐고 있었다.
“여기 좀 더 있으시오. 날 피해 도망치려는 게 아니라면.”
그는 화가 난 얼굴이었다.
“왜 나를 피하시오? 내게 화라도 났소? 왜? 화를 내야 할 것은 오히려 내가 아니오?”
“⋯⋯.”
“아니면, 두렵기라도 한 것이오? 그렇다면 안심하시오. 내가 그대에게 다시 같은 제안을 하는 일은 없을 테니. 만약 내가 그대에게 내 요구를 강요할 생각이었다면 이미 하지 않았겠소? 그대의 처지가 딱하고 가여워서 해 본 제안일 뿐이오.”
그 말에 나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
가을밤의 차디찬 공기가 내 폐부를 얼어붙게 했다.
“그러니 내게 화가 났거나 두려운 게 아니라면, 전처럼 오다가다 말이라도 합시다. 나는 그대와 대화하는 게 그리 싫지 않았소.”
그가 그렇게 말한 순간 나는 그대로 등을 구부려 마른기침을 토해 냈다. 아주 한참이나.
그는 말을 하다 말고 내 등을 어루만졌다. 두꺼운 외투 위였는데도 그 손의 감각이 열상을 입은 것처럼 등에 남았다.
“괜찮소?”
“피하려는 게 아니라, 공작 각하, 정말 몸이 좋지 않아 돌아가 보려 한 것입니다. 생각보다 날이 추운 탓에, 결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도대체 왜 저택에서 도망치려 했을까? 진정으로 도망칠 수도 없으면서. 내 가슴은 후회로 가득 차올랐다. 방금 전 그의 말을 듣는 것보다 그냥 침대에 누워 공작과 공주 전하의 춤을 상상하며 잠 못 이루는 편이 더 나았다.
내게 정부 자리를 제안한 것이 내 사정이 딱해서였다니. 그의 동정심 때문에 잠 못 이루며 마음을 썩였다니. 기침이 때마침 터져 나온 것이 다행이었다.
“돌아가고 싶습니다, 공작 각하.”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았다. 너무 피곤해서 자리에 눕고 싶은 마음만이 간절했다.
“그럼 같이 내려가지.”
더 이상 고집을 부리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기에 나는 공작님과 함께 언덕을 내려갔다. 저택으로 향하며 그가 말했다.
“이 저택에서 무도회가 열린 건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난 후 처음이오.”
“⋯⋯.”
“아나는 그대 말대로 춤을 잘 추더군, 배우게 한 보람이 있었소. 귀족 자제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아나에게 춤을 청하더군.”
“⋯⋯.”
“그대도 혹시 무도회에 가고 싶었소?”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대충대충 말했다. 깊게 생각하지 않고 그저 떠오르는 대로.
“전혀요. 제가 그곳에서 뭘 하겠습니까?”
내가 궁금한 것은 무도회에서 공주 전하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그가 공주 전하와 몇 번이나 춤을 췄는지였다. 이미 공주 전하가 머무른 지 달포에 이르고 있었다.
“뭘 하긴, 춤을 추겠지.”
“누가 저 같은 죄인과 춤을 추어 줄까요?”
만일 공주 전하께서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면, 나는 차라리 공주 전하 또한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길 바랐다. 그래서 그가 공주 전하의 질 나쁜 즐거움을 위한 장난감이 되지 않기를 말이다.
공주 전하가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 것이다. 나 또한 사랑에 빠졌으니까. 그 누가 그와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세상에, 고작 그딴 이유로 날 정부로 삼으려 하다니.'
공작의 말을 듣고 마음이 아픈 동시에 나는 그가 걱정되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세상에, 양녀의 가정 교사 처지가 불쌍해 정부로 삼으려는 남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 정도면 다정도 병이었다. 그가 내게 뭐라 하려 했을 때 나는 다시 기침했다. 이번엔 심장이 튀어나올 정도로.
“몸이 많이 좋지 않소?”
“죄송합니다.”
“내일 아침 의사를 보내리다.”
“정말 괜찮습니다. 자고 나면 나을 정도입니다.”
“그건 의사가 판단할 일이요.”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공주 전하께서는⋯⋯ 정말 아름다우신 분이시지요? 보게 된 순간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을 정도로. 제가 궁정에 있을 때도 그분의 미모는 정평이 나 계셨답니다.”
“그런가, 그런 것도 같군.”
“어찌나 춤을 잘 추시는지 그분과 한 번 춤을 추는 것이 소원인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렇군.”
“공주 전하께서는⋯⋯.”
할 말을 더 쥐어짜 내 보려 했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점점 더 마음이 어지럽고 슬퍼졌기 때문이다.
나는 발걸음을 빨리했다. 불빛이 새어 나오는 저택 앞에 도착하자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오려 했다.
“그럼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쉬시오.”
나는 하인들이 사용하는 계단을 통해 방에 돌아가 침대에 누웠다. 그가 내 처지를 동정했기 때문에 내게 정부 자리를 제안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허탈하면서도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하기야⋯⋯.'
다음 날 일어나는데 정말 몸이 좋지 않았다. 약속대로 공작이 지시해 두었는지, 오전 중 의사가 방문했다. 의사는 내 상태를 진찰하곤 버드나무 달인 물을 많이 마시고 푹 쉴 것을 권했다. 공주 전하께서 온 후로는 수업도 없었으므로 나는 물을 많이 마시고 방에 누워 있었다.
침대가 푹 꺼져 바닥없는 아래로 가라앉는 기분을 느끼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어 보니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서 있었다.
“누구십니까?”
“나는 공주 전하의 시녀인 에트올 남작 부인이다.”
중년의 여성이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공주 전하의 시녀?'
“네가 이곳에 유배 온 툴루즈 가문의 여식이냐?”
“그렇습니다.”
“채비할 시간을 줄 터이니 가장 좋은 옷을 입고 따라오거라, 공주 전하께서 네게 긴히 할 얘기가 있으시다.”
그 말에 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인 뒤 드레스를 찾으러 옷장 문을 열었다. 내가 속옷 차림으로 드레스를 갈아입는 동안 에트올 남작 부인의 시선은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얼음처럼 차가운 시선이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품평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틀어 올리자 그녀가 말없이 방을 나갔고, 나는 그녀의 뒤를 쫓았다.
그나저나 공주 전하께서 내게 대체 무슨 용무가 있으신 것일까?
공주 전하께서는 저택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방에 기거하고 계셨다. 에트올 남작 부인의 눈짓에 방문 앞에 서 있던 하녀가 문을 열며 ‘남작 부인이 왔습니다.' 하고 외쳤다. 나는 에트올 남작 부인의 어깨 너머로 공주 전하를 볼 수 있었다.
어깨가 드러난 디자인에 눈꽃처럼 흰 드레스로 단장한 공주 전하는 장의자에 앉아 삼단 같은 긴 머리칼을 손질하고 계셨다. 길고 풍성한 머리는 의자의 등받이 뒤로 흘러내렸고, 그 머리칼을 브러시로 다듬고 있는 것은 시녀로 보이는 귀족 여성이었다. 그 밖에도 세 명의 여성이 그 자리에 서 있거나 앉아 있었다.
전하께서는 나를 바라보며 손짓하셨다.
“자, 가까이. 이리로 와 앉도록 해요.”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짓이 가리킨 곳은 그녀가 앉은 긴 의자에 딸린 발을 올려놓는 스툴이었다. 나는 홀린 듯이 그곳에 앉았다.
그녀가 등받이에 머리를 기댄 채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가까이서 공주 전하를 뵌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에게선 좋은 향기가 났다. 마치 천국의 것 같은 달콤하고 포근한 향기가.
무심결에 경탄이 나올 정도였다. 풍성한 머리칼을 장식하는 별 모양 보석 장신구보다 그분의 두 눈이 더 아름답게 빛났는데, 무례인 것을 알면서도 한번 시선을 사로잡히니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