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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42화


42화 남편이나 아내가 있는 이가 애인을 만드는 것은 흠이 아니었고, 오히려 애인을 따로 두지 않으면 매력 없는 사람 취급을 받았다. 젊은 귀족 남자들은 약혼녀나 부인이 있으면서도 내게 추파를 던졌다. 물론 그들의 약혼녀나 부인도 다른 귀족들과 사랑을 나눴다. 아무리 결혼이 가문 간의 계약이라 한들, 환멸이 나는 광경이었다. 나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내 마음을 단단히 졸라매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렇게 단단히 매어 둔 마음을 풀어낸 자는 없었다. 단 한 명도.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지. 이렇게나 속이 울렁거리다니. 난데없이 할아버지의 책을 만나 동요한 것뿐이다. 나는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숨을 골랐다. 책상에 책을 내려놓고 마음을 가다듬으려 할아버지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는 책을 펼치는데, 우연일까 운명일까, 내가 처음으로 마주한 우화의 제목은 <눈먼 사랑을 이끄는 광기>였다. [사랑이 눈멀지 않았던 시절, 사랑은 광기와 함께 놀다 다투게 되었다. 다툼 끝에 광기는 분노하여 사랑의 눈을 찔렀고 사랑은 눈이 멀었다. 사랑은 지팡이 없이는 단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고, 눈을 찾아 주는 것 외에 그 무엇으로도 사랑이 입은 피해를 보상할 수 없었다. 사랑은 두 눈을 감싸 쥔 채 울부짖으며 신들에게 피해를 호소했다. 상황을 파악한 다른 신들은 광기에게 사랑의 잃어버린 눈이 될 것을 명령했다. 이때부터 광기는 사랑의 하인이 되어 그의 길잡이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곳에는 할아버지와 나눈 필담이 남아 있었다. [할아버지, 광기가 사랑의 길잡이를 한다는 게 무슨 뜻이죠?]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거란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아홉 살이었고, 아무리 읽어도 이 우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내가 알던 사랑은 가족을 향한 것이었다. 그때 내 사랑은 눈멀지도 않았고 광기와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그간 잊고 있었던 우화를 읽으며 등골에 흘러내리는 소름을 느낀 것은, 이제 내가 이 우화에 담긴 뜻이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알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주 자연스럽게. 사랑은 그 대상을 가리지 않고 광기와 함께 온다. 설마 내가 사랑에 빠진 것일까? 방금 전 그가 내게 선물한 책 한 권 때문에? '그럴 리 없어.' 가슴을 스쳐 지나가는 선뜩한 불길함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책을 닫았다. 더 이상 책을 읽을 마음이 들지 않아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등잔의 불을 끄고 누워 눈을 감아도 쉽사리 잠은 오지 않았다. 쿵쿵쿵쿵쿵. 심장은 계속해서 빠르게 두근거렸다.     결국 그날 나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날뿐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로부터 내리 사흘간, 잠자리에만 들면 누군가의 얼굴이 아른거려 졸리고 피곤한데도 계속해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내가 생각한 것은 그의 눈이었다. 차가워 보이면서도 보석같이 아름다운 눈. 빛나는 눈. 그동안 그 눈이 아름다운 걸 왜 몰랐을까? '미리 알았더라면 조심이라도 했을 텐데.' 눈을 감아도 떠도 그의 얼굴이 사라지지 않았다. 눈뿐만이 아니라 그의 모든 것이 떠올랐다. 머리칼과 얼굴, 강인해 보이는 턱과 넓은 어깨, 그리고 내 손을 덮던 커다란 손까지도. 이제까지 전혀 의식하지 않던 것이 한번 의식하자 도저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미칠 것만 같았다. 아니, 이미 미친 것 같았다. '대체 왜 이래?' 그러는 와중에도 만찬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그 시간이 기다려지기도 했고, 이상한 불안감에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두렵기도 했다. 나는 내가 그를 만나고 싶은 건지 아닌 건지 알 수 없었다. 피곤함에 전 낮의 나는 돌연 불안하다가도 진정되었고, 진정했다가도 불안해졌다. 마음이 마치 이곳의 날씨 같았다. 맑은 하늘에 해가 뜨나 싶더니 눈보라가 치고, 어둑해지는 날씨처럼. 나는 내 마음을 종잡을 수도, 제어할 수도 없었다. '내가 갑자기 그를? 그럴 리가 없어.' 한편으로 나는 이 마음을 부정하려 애썼다. '설마, 내가 처음으로 사랑하게 된 남자가 바로 공작 각하라고?' 이곳에 도착한 첫날 내게 이 사실을 말해 주었더라면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 내게 그는 설화에 나오는 괴물처럼 보였다. 그런데 어떻게 그를 사랑하게 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만찬 날이 다가왔다. 여느 때와 같은 날이었다. 달라진 것은 오직 내 마음뿐이었다. 식사 시간이 시시각각 다가올수록 나는 그날따라 숨이 가쁘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몇 벌 되지 않는 드레스가 다 마음에 들지 않아 한참이나 입었다가 벗기를 반복하고, 머리를 빗어 틀어 올렸다 다시 내리기를 반복했다. 그래 봤자 헛수고인 건 분명했다. 그가 평생 한 번이라도 누군가에게 마음이 흔들린 적이 있을까? '아니, 애초에⋯⋯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그에게 잘 보여서 뭐? 대체 뭘 바라는데?' 마음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상대는 나를 흔들고 있지조차 않은데도. 내가 흔들린다는 것도 모르는데도. 내가 헛수고를 하는 동안 창밖에서는 비바람이 치고 있었다.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 휘어졌고, 그중 몇 개는 결국 부러지기도 했다. 결국 선택한 드레스는 처음 골랐던 옷이었다. 드레스를 입은 것만으로도 기진맥진해진 나는, 그냥 될 대로 되란 생각이 들었다. 그가 내가 오늘 입은 옷에 눈길이나 주고 기억이나 할까? 그런 생각이 들자 허탈한 웃음이 튀어나왔다. '설마.' 잠깐 다정함에 흔들린 것이리라. 이 일로 사랑에 빠졌을 리 없다. 나는 마음이 더 이상 흔들리지 않게 단단히 갈무리하고 정찬실로 들어섰다. 그러나 여느 때와 같이 먼저 정찬실에 앉아 있는 그를 발견하자 나는 와르르 요동쳤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아.' 내가 광기에 휩싸였다는 것을. 나는 자리에 앉으며 그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오늘은 말이 별로 없군.” 식사를 하던 중 그가 물었다. “아, 예.” “음식도 줄지 않고⋯⋯. 입에 맞지 않소?” “그렇지 않습니다! 음식은⋯⋯ 늘 그렇듯 맛있습니다. 다만, 제가 오늘 몸이 좀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실 나는 몸보다는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날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내 이상한 반응을 예리하게 눈치채어 물어보았고, 황급히 변명하는 내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그는 나를 걱정하며 식사 후 내게 따뜻한 차를 보내 주겠다고 말했다. 그가 너무 다정해서 나는 죽을 것 같았다. 그는 대체 왜 내게 다정한가? 사실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아나의 가정 교사이니까. 다른 사람으로 대체하기 어렵고 아나도 날 좋아하니까. 그 당연한 결론이 나를 마음 아프게 했다. 다정하긴 하나 그의 행동에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런데 그걸 알면서도 요동치는 이 감정이란 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내 이성으로는 도저히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는 갑자기 내 폐 속으로 들어온 겨울바람 같았다. 내 속을 시리게 하고 아프게 했다. 마치 감기처럼. 그날 밤, 나는 몸에 좋다는 차를 마시며 생각했다. '숨기자.' 이성적으로 생각하자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이것을 병이라 여기고 자연히 낫기를 비는 것이었다. 내가 병에 걸렸다는 것을 깨달은 후부터 나는 다른 일에 몰두하려고 노력했다. 브륄과 시간을 많이 보내고, 서재에는 발길을 끊었다. 만찬 시간에는 가능한 한 말을 아끼고 그의 시선을 피했으며, 그가 생각나는 시간에는 책상에 앉아 등잔을 켜고 편지를 썼다. 하지만 편지를 쓰면서도 나는 그에 대한 생각을 떨치질 못했다. 잘 지내고 있다는 글을 쓰고 있다가도 고통의 신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에 지금 이 마음을 사실대로 적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정말 내가 왜 이러지?' 이곳에서 사랑하면 안 될 분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이다. 이뤄질 리 없고 이뤄지기를 바라지 않으며 보답받지 못할 마음을 키워 나가게 되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 마음에 대해 적지 못했다. 일기장에도 솔직한 마음을 적지 못하는 사람처럼 그 어디에도 내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고 앓기만 했다. 언젠간 낫기를 바라면서. ❖ ❖ ❖ 내가 열병을 앓는 사이, 긴 겨울이 가고 봄이 되었다. 전과는 다른 촉촉하고 따스한 비가 내린 뒤 꽝꽝 언 땅이 포근히 풀리나 싶더니 이내 얼어붙은 모든 것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바람이 불면 아직 쌀쌀했지만 해가 비치면 외투를 입지 않아도 밖에 나갈 만했고, 호수도 해빙되어 사슴들이 눈 대신 물로 목을 축이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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