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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32화


32화 '다는 아니더라도?' 그 생각이 발드르의 마음을 술렁거리게 했다. '차라리 그 서신을 읽지 말아야 했을까?' 어둠 속에서 그는 눈을 감았다 번쩍 뜨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유배자의 편지를 검열하는 것은 보수 주인으로서 당연한 일 아닌가.' 물론 이제까지 그의 영지로 들어온 유배자의 서신을 검열하는 하찮은 일을 발드르가 직접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 솔직히 서신에 어떤 내용이 적혀 있을지 궁금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세간을 떨게 한 악명과는 달리 스카디 공작 각하는 무척 다정한 분이십니다. 제가 가정 교사로 일하면서 이렇게 많이 고용주와 함께 식사를 한 적이 있을까요? 또 이렇게 좋은 방을 갖게 된 적은요? 일이 아무리 힘들어도 사람이 좋으면 이겨 낼 수 있는 법이지요. 저는 정말 잘 지내고 있습니다.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어쩌면 궁정에서보다 더 말입니다. 그리고 서신을 읽은 지금은, 궁금증은 풀렸으나 마음이 어지러웠다. '원래⋯⋯ 이런 건가?' 왜 이렇게 정신이 사나운가? 누군가를 마음에 품으면, 원래 이런가? 이렇게 마음이 들뜨고 제대로 된 사고를 하기 어려운가? 이 정도면 병이 아닌가 싶었다. '자자. 일단은.' 다 잊고 잠을 청하려 해도 가슴이 벅차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고, 어딘가 다치기라도 한 듯이 욱신거려서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두 눈을 떴다. '살 수가 없군.' 그대로 누워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발드르는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커튼을 젖혀 보니 둥근 보름달이 떠 있었는데, 달을 보자 가슴이 수상할 정도로 더 수런거렸다. 만월 속에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발드르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커튼을 닫았다. '원래 이런 거야?' 누구라도 잠들었을 게 분명한 밤, 그는 갑자기 가정 교사를 깨워서라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화의 주제는 아무것이나 좋았고, 접촉 따윈 없어도 좋았다. 그냥 좀⋯⋯ 얼굴을 바라보고 싶었다. 그것뿐이었다. 뭐 대단한 걸 바라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정말이지, 원래 이렇게 보고 싶은 건가? 잠도 자지 못할 정도로?' 심지어 보고 싶다면 언제나 볼 수 있고, 대화하고 싶다면 언제든 불러 대화할 수 있는 여자였다. 제 손바닥 위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여자인 것이다. 다음 날이 된다고 어디 도망가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대화하고 싶었다. 지금 당장. '저택 안을 좀 돌아다녀 볼까?' 저번에는 우연히 부딪쳤었다. 몽유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복도를 서성였던 이유는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아서였다. 홀을 돌아보았다가 응접실을 찾았다가 서재에도 갔다가 복도를 걷다 보니 방으로 돌아가던 그녀와 마주쳤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를 말리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주친 건 가정 교사뿐이 아니었다. 그는 며칠간 여러 사용인을 기겁하게 만들었고, 결국 야밤에 저택을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짓을 그만두었다. '그게 아니면 깨워 볼까? 지금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혹시 나뿐만이 아니지 않을까?' 정말 대화뿐이다. 대화만 하면 된다. 그러면 이렇게 달아오른 마음을 좀 식힐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야기 좀 하자는 게 뭐가 문제지? 다른 뭘 하려는 것도 아닌데? 아나가 잠에 들지 못한다니까 책을 읽어 주는 여자가 아닌가? 그런데 지금 잠을 이루지 못하는 건 나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것도 그 여자 때문에. 그럼 내게도 그만큼을 해 줘야 하지 않나?' 지금이라도 발드르는 그녀의 방에 찾아가 문을 두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한 가닥 남은 이성이 미쳤느냐고 그를 가로막았다. 그리고 아침이 되었다. '제정신이 아니야.' 그는 다음 날이 밝자마자 어젯밤 자신이 미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라이칸스로프, 만월을 보면 미쳐 버리는 괴물처럼. '이러다 분명 무슨 짓을 저지르겠어.' 가정 교사를 깨워 달밤에 산책하자고 말하지 않아 다행이었지만, 또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뭔가 대책을 세워야 했다. 온종일 발드르는 그놈의 대책을 세우기 위해 고민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의 마음속에서 날뛰기 시작한 감정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이제 그만 두 손을 들고 그 여자에게 빠졌음을 인정한 뒤 정부로 삼는 것이 현재로선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 여자에게도 나쁜 제안은 아닐 것이다. 내 정부가 되는 건.' 아나의 가정 교사를 해 보았자 몇 년을 더 하겠는가? 길어야 5년? 발드르는 잔느가 번 돈 대부분을 가족 계좌에 저축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편지를 읽어 보니 스스로 자립할 수 있을 만한 가족도 없어 보였다. 잔느는 가정 교사 일이 끝난다 해도 훌쩍 이 영지를 떠날 수 있는 입장도 아니다. 그녀의 발은 그녀가 받은 형벌에 의해 묶여 있었다. 그 이후에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가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면 말이다. 정부라고 해도 그에겐 아내가 없으니 안주인이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결혼을 훼방 놓으려 눈에 불을 켜고 있는 국왕조차도 귀족의 사사로운 연애사에 간섭할 수 없으니 더 잘된 일이 아닐까? 하지만 만약 그녀에게서 아들이 태어난다면?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후계 문제야 일이 벌어지고 나서 생각해도 늦지 않지. 지금도 오늘내일하는 노인네가 그때까지 살아 있을지도 알 수 없고, 새로운 왕이 왕권을 다지려면 가장 필요한 것은 나 같은 대귀족의 충성 맹세가 아닌가?' ⋯⋯라고, 발드르는 달걀이 부화하기 전부터 병아리를 세기 시작했고, 머릿속에서 병아리는 끊임없이 불어나 닭이 되고 또 달걀을 낳았다. 하지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자면 가장 중요한 것은 달걀의 의사였다. 달걀에게 부화할 의지가 있는가, 또 애초에 달걀을 부화시키려 노력할 의지가 있는가. 그래서 그 모든 것이 머릿속에서처럼 좋게 풀린다 하더라도 발드르가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고 사랑을 고백할 의사가 있는가? 발드르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그는 멈칫했다. “⋯⋯.” 그는 이미 아버지와 형의 말로를 보았다. 사랑에 빠진 두 남자가 결국 어떻게 비참한 끝을 보았는지 잘 알았다. 자신이라고 그러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발드르에게 있어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은 삶의 주도권을 쥐여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주도권을 쥔 여자가 자신의 삶을 망가뜨리길 원한다면? 가진 모든 것을 버리라 명령하거나 자신을 증오하여 인생을 빈껍데기로 만들어 버린다면? 잔느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도 못하는데 그런 모험을 단행할 수는 없었다. '그래, 다짜고짜 애인으로 삼을 수는 없지.' 결국 발드르는 돌고 돌아 잔느에 대해 알고 싶어졌다. 과연 그녀가 자신이 마음을 줘도 될 만큼 안전한 여자인지 말이다. 그리고 사실은 그 과정에서 자신이 실체가 아닌 환상을 사랑했다는 것을 깨닫기를 바랐다. 그가 가장 하고 싶은 것은 사랑에 빠지는 일이 아니라 어쩌면 자신을 집어삼킬지도 모를 이 열병에서 낫는 일이었으니까. 마음을 굳힌 발드르는 하인을 시켜 잔느를 불렀다. “저를 부르셨습니까?” 수 분 후, 어리둥절한 표정의 잔느가 그의 앞에 섰다. '역시⋯⋯.' 그는 말없이 한참 동안 잔느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내가 사랑에 빠진 게 맞구나.' 잠시 제 마음이 착각이었길 기대했지만 웬걸, 그녀는 사랑스러웠다. 보기만 해도. 그렇지만 객관적으로 보자면 잔느는 입이 떡 벌어질 만한 미인은 아니었다. 발드르는 한참 동안 이렇게 무해해 보이는 여자가 자신의 마음을 어지럽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나치게 아름다웠으면 미리 경계라도 했을 텐데.'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미 일이 그렇게 된 것을. 발드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자신을 의아해하며 바라보고 있는 잔느에게 말했다. “만찬을 함께하고 싶소.” “아, 예!” “오늘부터 매주 금요일마다 말이오.” “예? 오늘부터⋯⋯ 매주⋯⋯ 저와요?” 여자는 토끼처럼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두 손을 모아 쥐고, 머뭇거렸다. 이제 그런 소심한 태도마저 그의 눈엔 귀엽게 보였다. '미쳤나, 정말?' 발드르는 정말로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저, 공작 각하, 제가 혹시 그 연유를 물어도 마음이 상하시진 않으실는지요.” “그대와 나 사이에 아나 말고 말할 것이 있겠소?” 요동치는 마음을 숨기기 위해 발드르의 말은 평소보다 더 딱딱하게 나왔다. “내가 그간 너무 아나에 대해 무신경했더군. 그대와 식사를 하면서 아나의 교육 성과와 앞으로의 지도 방안에 대해 들어야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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