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26화
26화
“저는 그 방이 마음에 듭니다.”
“새 방으로 옮기고 나면 생각이 달라지지 않겠소? 방을 옮겨 보고 불편함이 생긴다면 말하시오. 다시 바꿔 줄 테 니.”
“그러겠습니다.”
공작까지 나서서 강권하는데 하는 수 없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서재에서 물러날 수 있었다.
'그런데 원래⋯⋯ 이렇게 말이 많았나?'
다음 날 아침, 식사가 끝나자마자 폴린느 부인이 와서는 내게 새 방을 보여 주겠다고 했다.
나는 폴린느 부인과 함께 내게 새로 배정된 방에 갔다. 새 방은 과연 넓었다. 천장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내 방과 달리, 방 천장과 벽에 벽지도 제대로 발려 있는 데다 채광이 넉넉한 큰 창 너머로 정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저 방이 외풍이 심하긴 했구나. 창이 이렇게나 큰데도 훨씬 따뜻해.'
바닥 전체에는 양탄자가 깔려 냉기가 올라오지 않았다. 방 한편에는 수납장이, 둥근 탁자와 의자는 방 한가운데 에, 내 방에 놓인 것보다 훨씬 크고 장식이 화려한 벽난로 곁에는 침대와 발 받침대가 딸린 소파가 있었다. 찻잔과 찻주전자, 티스푼 등 차를 우려 마실 수 있는 도구가 든 유리장도 갖춰져 있다.
“욕실도 보시겠어요, 잔느 양?”
가장 놀라운 곳은 이 방에 딸린 욕실이었다. 이곳엔 고양이 발이 달린 널찍한 도기 욕조가 있었다. 그간 썼던 욕조는 쭈그려 앉아 하반신만 담글 수 있는 반신 욕조였다. 그런데 이곳에 있는 욕조는 두 명이 들어가 두 다리를 쭉 펴고 누울 수 있을 정도로 컸다.
'이 방을 나한테 줘도 괜찮나?'
손님방으로 써도 손색이 없겠다, 생각하는데 폴린느 부인이 말했다.
“본래는 손님방으로 쓰던 곳인데 몇 년간은 가구에 덮개만 씌운 채로 방치되어 있었답니다. 방이란 쓰지 않으면 습해지고 낡기 마련이니 잔느 양이 여기 머물러 주시겠어요?”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날 점심 식사 전에 나는 새 방으로 이동했다. 과연, 방을 바꾸고 나니 이전 방은 생각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
점심 식사 후 아나가 찾아왔다.
“선생님! 방이 정말 예뻐졌어요! 제 방만큼요!”
“그렇지요?”
아나는 내가 방이 바뀐 걸 몰라 잠시 헤맸다고 했다.
그날 우리는 침대에 앉아 저녁 식사 전까지 두 명이서 할 수 있는 카드놀이를 했다. 카드는 이 놀이를 가르쳐 주기 위해 전에 내가 일일이 그림을 그려 만들었다.
놀이에 집중하다 보니 금방 뉘엿뉘엿 노을이 졌다.
“선생님, 저 오늘 선생님이랑 같이 저녁 먹고 싶어요.”
아나의 말에 나는 오늘 저녁 식사가 예정되어 있다는 걸 떠올랐다. 그리고 그 식사 자리에서 원하는 것을 말해야 한다는 것도.
나는 아나에게 오늘 공작 각하와의 만찬에 초대받았다고 했다.
“같이 식사하자 말씀드려 볼까요?”
“⋯⋯아니요.”
그 말을 한 것만으로도 아나는 살짝 주눅이 들더니 순순히 자신의 방으로 물러갔다.
'그런데 뭐라고 하지?'
혼자 남은 나는 아직 정리를 다 하지 못한 트렁크에서 드레스들을 꺼내며 생각했다.
'뭘 요구하지?'
아름다운 드레스를 여러 벌 펼쳐 놓고 고심하고 있을 때였다. 머릿속에 번뜩, 하고 내가 그간 절실히 원해 왔던 것 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걸 들어줄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사람, 바로 공작뿐이라는 사실도.
그날 내가 고른 옷은 크림색 실크 드레스였다. 정찬실에 들어와 자리에 앉는데 나를 빤히 바라보던 그가 막상 내가 바라보자 사람이 무안할 정도로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혹시 무슨 문제가 있나?'
나는 괜히 뺨을 만지고 드레스의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만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작 각하.”
“음.”
얼마 후 식사가 시작되었다. 전체 요리가 나왔을 때 나는 새 방이 마음에 든다고 감사를 표했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게 식전주를 권했다.
“드시오.”
그렇지 않아도 목이 마르던 나는 유리잔 속 투명한 술을 아무 생각 없이 들이켰다. 보통 식전주는 산뜻하고 도수가 낮은 술이 제공된다. 하지만 마치 물 같은 맑은 술을 마셨을 때 나는 그만 그대로 술을 뱉을 뻔했지만, 추태를 보일 수 없어 이를 악물며 머금은 술을 꿀꺽 삼켰다.
'⋯⋯세상에!'
입안이 홧홧하고 속에 불이 붙은 듯한 기분이었다. 술이 어찌나 독한지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나는 유리잔을 들어 안의 내용물을 노려보았다.
'이게⋯⋯ 제대로 나온 것 맞나?'
추운 지방일수록 술을 독하게 빚는다는 말은 들었다. 하지만 이전의 정찬에서는 이 정도로 술이 독하지는 않았는데?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 싶어 나는 술을 찔끔찔끔 핥듯이 마시며 힐끔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술잔을 비우고 있었다.
'그렇구나, 원래 이런 건가?'
나는 술을 아주 조금씩 입에 대며 더 마시지 않도록 조심했다. 그러나 이미 마신 한 잔이 입안뿐만 아니라 속을 달궜다. 이윽고 몸 전체가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정찬실이 덥게 느껴지고 머릿속이 뒤흔들렸다. 나는 손등으로 뺨을 식히려 노력했다.
'정신 차려야겠다.'
하지만 이미 마신 한 모금이 몸에 불을 붙이고 말았는지, 두 눈이 뜨거워지고 동공이 열렸다.
그날 술의 효과는 대단했다. 술기운에 무서울 것이 없어진 것이다.
“그런데 그 드레스는 어떻게 구한 것이오?”
공작이 물었다.
“산 것이오?”
“아닙니다. 이 드레스는 폴린느 부인께서 주셨습니다. 마님께서 입던 것을 받았는데 보관하고 계셨다고⋯⋯.”
공작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내 어머니의 드레스겠군. 어쩐지 눈에 익다 했소.”
그 말에 나는 당연한 사실을 깨달았다.
'폴린느 부인의 마님, 그렇구나!'
폴린느 부인이 모시던 여주인은 그의 어머니였다. 어째서 이 당연한 두 가지를 지금껏 연결시키지 못했을까? 나는 괜히 손으로 드레스의 구겨진 부분을 쓸어내렸다.
“그대는 내 어머니에 대해 아시오?”
“아주 조금 알고 있습니다.”
정말 아주 조금, 역사의 한 귀퉁이만큼이었다.
“국왕 폐하의 고모님이신 마리 아델라이드 공작 부인이시라고⋯⋯.”
선대 국왕은 야만족의 우두머리에게 봉토를 내린 뒤 어떻게 영향력을 행사했을까? 봉신이긴 하나 같은 조상을 가진 이방인이 여름철마다 남하하는 야만인들을 막는 방패가 되는 대신 오히려 뒤에서 야합하여 나라를 집어삼킬지도 모르는데?
보통 이런 때 쓰는 아주 좋은 방법이 있었다. 혼인이었다.
선대 국왕들은 스카디 가문의 가주들을 자신의 딸들과 맺어 주었고, 피치 못하게 딸과 맺어 주지 못할 때는 조카들을 활용했다. 내가 알기로 전대 공작의 부인은 전대 국왕의 여섯 공주들 중 셋째 따님이었다. 그 말인즉, 현 국왕 폐하와 공작은 사촌 관계라는 뜻이다.
“그렇소. 내 어머니는 현 국왕의 셋째 고모요. 열여섯이 될 때까지 따뜻한 프랑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와 생을 마쳤지. 스카디 공작의 부인으로 말이오. 그런데 그 드레스는 입어 보니 어땠소?”
“⋯⋯.”
“입어 보니 어떤 느낌이 들었소?”
드레스를 입으니 어떤 느낌이 들었느냐고? 금방 할 말이 떠올랐지만 나는 잠시 그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머뭇거렸다.
여느 때와 같았다면 나는 찬사를 늘어놓았을 것이다. 너무나 아름답고 한 세대가 지났는데도 전혀 유행에 뒤처진 느낌을 주지 않는다고. 하지만 술이 용기를 주었다. 진실을 말할 용기를.
“이 드레스는⋯⋯ 너무 얇습니다. 이곳 기후를 견디기엔. 그래서 옷을 수선할 때 안에 두꺼운 천을 덧댔습니다.
아름답지만 여기서 이 드레스는⋯⋯.”
“입을 수 없지, 드레스는 아름답지만 전혀 실용성이 없소.”
공작은 이미 내 대답을 알고 있었다는 듯 다시 한번 어깨를 으쓱했다.
“옷에서 알 수 있다시피 어머니는 고향을 잊지 못했소. 아버지와 혼인하여 아들을 둘이나 낳았는데도 죽을 때까지 스카디에 적응하지 못했지. 타국도 아니고 같은 나라 안인데 말이오. 내 어머니는 평생 프랑과 궁정을 그리워하셨소. 그리고 그곳에서 유행한다는 드레스를 주문하여 부지런히 입으셨지. 어차피 돌아갈 수도 없는데, 그곳의 유행에 뒤처지지 않으려 말이오. 하나 이곳에선 여름에도 그렇게는 입을 수는 없소. 그 옷 때문에 어머니께선 결국 병을 얻으셨소. 폐병이었는데, 어쩌면 향수병이었는지도 모르지.”
“⋯⋯.”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했소. 나는 그게 아버지께 내린 저주라고 생각하오. 자신의 영지와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여자를 알면서도 사랑하는 것이. 차라리 애인들이라도 좀 거느리고 사는 편이 낫지 않았겠소?”
거기서 그는 말을 멈췄다.
“실언을 했군. 듣지 않은 것으로 해 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