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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17화


17화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살며시 눈을 떴다. “그렇군. 무슨 책이지?” “그, <의무론>입니다.” 그 말을 들은 공작 각하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그럴 필요 없소. 그 책은 나한테 있으니까.” “예?” “전에 나무 아래서 잠들었을 때 발치에 책이 굴러다니고 있는 것을 보았소. 그래서 내가 가져왔지. 비를 맞게 할 순 없으니까.” “그래서?” “예?” “재미있었소?” 나는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군. 서재 열쇠는 계속 사용해도 좋소. 가정 교사가 교양을 쌓는 것은 좋은 일이니까. 겨울에는 책 읽는 것 말곤 할 것도 없을 테고.” 그리고 그는 잠시간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미소 지었다. 저 남자가 웃을 줄도 아나? 의외의 면모를 발견한 터라 나는 얼어 버렸다. '내가 지금 뭘 잘못 봤나?' 하지만 곧 그 미소는 씻은 듯이 그의 얼굴에서 사라졌다. “이제 말을 제법 탈 줄 알게 되었다고 하던데.” “예.” “승마에 재미는 좀 붙였소?” “예, 그렇습니다.” 나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사과를 씹고 있는 브륄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런데, 이름은 왜 브륄이오?” “예?” “말에게 왜 그런 이름을 붙여 준 것이오?” “아. 그⋯⋯ 브륄레에서 땄습니다.” “브륄레?” “크렘 브륄레라고 왕궁에서 유행하던 음식인데, 커스터드 크림을 그릇에 담은 뒤 그 크림 위에 단단한 설탕 막을 입혀 만든 것입니다. 뜨거운 스푼으로 설탕을 녹여 막을 만드는데, 겉은 바삭하고 쌉쌀하고 그 아래 커스터드 크림은 부드러워 무척 맛있습니다. 말의 털이 그 설탕 막과 색이 비슷해서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 음식을 좋아하오?” “그렇지요. 먹어 본 사람 중에 그걸 안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렇군⋯⋯.” 그런 대화를 하는 바람에 사과는 까맣게 잊었다. '그런데 내가 말에게 브륄이란 이름을 붙여 준 것은 어떻게 알았을까?' 방에 돌아오고 나서야 잠시 의문이 들었지만 내가 나도 모르게 말한 것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그가 우연히 들었거나.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지만 그럴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일어나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바구니를 든 하녀 아이가 서있었다. “공작 각하께서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 “사과입니다.” 보고 있으니 나도 안다. 바구니 안에는 사과가 잔뜩 들어 있었다. 일단은 바구니를 받아 든 나는 그 무거움에 놀랐다. 사과와 아이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자 아이가 머뭇대며 말했다. “저⋯⋯ 바닥에 굴러다니는 것은 야생 사과라 알도 작고 시큼하고, 겨우내 굶주릴 짐승 먹으라고 놔둔 것이다. 그보다는 과수원에서 기른 사과가 훨씬 크고 맛도 좋을 것이다.” “⋯⋯.” “라고 공작 각하께서 전하라 하셨습니다.” “⋯⋯그렇구나. 감사드린다고 말씀드리고⋯⋯ 너도 좀 먹겠니?” 아이는 사과 다섯 알을 받고 돌아갔다. 남은 사과 바구니를 탁자 위에 내려놓은 나는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봤구나.' 내가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고 땅에 떨어진 사과를 줍고 있던 것을. '봤어.' 정말 부끄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실제로 바구니 속에 든 사과는 바닥에 굴러다니던 사과와는 다르게 샛노랗고, 알이 훨씬 굵고 탐스러웠다. 사과 하나를 꺼내어 그대로 물자 입안에 무척이나 다디단 과즙이 퍼져 나갔다. 그러나 창피함이 그 단맛을 이겼다. 사과를 더 먹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뜨린 나는 독이라도 든 것처럼 몸부림쳤다. '왜! 왜! 도대체 왜 그런 모습만 보여 주는 건데?' 아무리 처지가 이렇게 되었어도 귀족 집안 자제인데 그런 모습을 들키다니, 나는 부끄러움으로 죽을 지경이었다. ❖ ❖ ❖ 그날 이후 한두 번 비가 내리고 나자 나무에선 울긋불긋하던 나뭇잎이 모두 떨어져 앙상한 나뭇가지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온 세상이 스산한 회색빛으로 변한 동시에 믿을 수 없을 것 같은 추위가 찾아왔다. 가을과 겨울, 봄 날씨가 그리 다르지 않은 곳에서 살아온 나는 아침에 일어나 공기를 삼키고 난 뒤 폐가 얼어붙을 것 같아 놀랐다. 공작 각하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살을 에는 추위에 가을 초입에 장만한 옷은 도저히 입을 수가 없어 다급히 겨울옷과 방한용품을 주문해야 할 정도였다. 찬 공기를 데우기 위해 저택의 모든 방 난로에 불이 지펴지던 어느 날, 저택이 잠시 부산스러워지나 싶더니 공작 각하는 사병 무리를 이끌고 저택을 훌쩍 떠났다. 이상하게도 노새가 끌고 있는 여러 대의 수레는 비어 있었다. 짐이 실려 있지 않은 탓에 수레의 바퀴가 요란하게 덜컹거리는 것이 여기까지 들려왔다. '또 어딜 가지?' 전과 달리 나는 이번엔 그가 어디로 가는 것인지, 또 언제 다시 돌아오는지 궁금했다. 그 답은 의외로 아나 아가씨가 알고 있었다. “공작님께서는 사냥을 가시는 거예요, 선생님.” “사냥이요?” “스카디령에선 눈이 내리기 전에 겨울 사냥을 해 짐승들을 잡거든요. 귀족들은 큰 곰이나 산돼지, 늑대처럼 덩치 큰 짐승을 사냥하고 주민들은 토끼나 새를 잡아요.” “그런가요?” “폭설이 내리고 나면 먹을 게 없어지는데 짐승들이 너무 많으면 먹이를 두고 다투다 다 죽어 버릴 수도 있거든요. 그럼 봄에 살아남은 짐승이 없어지니까 우리도 손해고요. 또 곰이나 산돼지가 마을로 내려와 가축을 해칠 수도 있고요, 그래서 눈이 오기 전에 한 번 솎아 주는 거예요. 농한기라 손이 남는 시간에요. 남는 가죽과 고기는 옷도 해 입고 염장해서 겨우내 먹을 수도 있고요.” “그렇군요.” '대체 그런 지식을 어디서⋯⋯?' 정말 수상할 정도로 농가 사정을 잘 아는 아가씨였다. “선생님 사는 곳에선 겨울에 사냥을 안 하나요?” “저희는⋯⋯.” 왕궁에서도 사냥을 하긴 했다. 그저 재미로. 그런데 그걸 사냥이라 부를 수 있을까? 왕궁에서 가끔 하던 사냥이란, 야생 짐승을 잡는 게 아니라 그전부터 사냥을 위해 키우던 여우를 정원에 푼 뒤 개를 풀어 잡는 행위였다. “하긴 하는데 아가씨가 생각하는 사냥은 아닐 겁니다. 여기선 겨울엔 또 뭘 하나요?” “호수가 얼면 썰매를 타요.” “썰매요?” “썰매 안 타 보셨어요, 선생님?” 아나는 썰매가 무엇인지 모르는 나를 위해 종이에 썰매를 그려 주었다. 썰매란 사람이 앉을 만한 널빤지 양옆에 나무를 덧대고 얼음 위를 잘 미끄러지도록 그 아래 긴 칼날 같은 쇠붙이를 대어 만든 물건이었다. 그 위에 앉아 양손에 쇠꼬챙이를 쥐고 얼음을 찍으며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고 아나 아가씨는 설명했다. “눈이 오면 눈썰매도 탈 수 있고요, 스키도 탈 수 있고요. 눈썰매는 바닥에 이런 날이 없고, 그냥 널빤지 위에 올라타 눈 쌓인 언덕 위에서 아래로 미끄러지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또 스키는⋯⋯.” 이야기를 하는 아나 아가씨는 잔뜩 신이 나 보였다. “그런데 이곳은 겨울에 정말로 호수가 어나요?” 프랑에서 얼음은 무척 귀한 물건이었다. 아무리 추워도 그렇지, 그 많은 물이 한 번에 언다니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눈, 나는 눈을 실제로 본 적이 없었다. 내가 눈을 본 적이 없다고 고백하자 아나 아가씨는 하늘에서 내리는 하얀 얼음인데 손으로 뭉치면 얼음이 되지만 얼음보다 훨씬 폭신폭신하다고 했다. “조금만 지나면 엄청 많이 보게 될 거예요, 질릴 정도로요. 눈이 정말 많이 내리면 선생님, 밖에 나갈 수도 없어요.” '그렇구나.' 이방인인 나 말고 이곳의 모두가 겨울 준비로 분주한 듯했다.     약 사흘 뒤, 나는 드디어 눈을 보게 되었다. 환기를 위해 창을 열었더니 회색빛 찌뿌드드한 하늘에서 하얀 솜 같은 것이 내리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온 세상이 그것으로 하얗게 덮여 있었다. 나는 두 손을 밖으로 뻗어 그 하얀 것을 만져 보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손에 닿았다 금방 녹아 버렸다. 차갑고,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가벼웠다. 그러고 보니 하얀 솜은 창틀에도 쌓여 있었다. 나는 그것을 모아 쥐어 뭉쳐 보았다. 그러자 그것은 얼음처럼 단단해졌다가 곧 녹아 물기를 남기고 사라졌다. 차가움으로 손이 아려서, 나는 덜덜 떨며 창을 닫았다. '그렇구나.' 겨울이 시작되었음이 그제야 실감이 났다. '이게 스카디령의 겨울이구나.' 나는 눈을 밟아 보고 싶었지만 너무 추워 몸이 상할까 봐 포기했다. 첫눈은 그날 내로 녹아 버렸다. 며칠 후 주문한 겨울옷들이 도착했다. 외투며 드레스며 모두 옷의 형태가 도톰하고 다이아몬드 형태의 무늬가 있는 것이 독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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