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11화
11화
그리고 식사 시간마다 아나 아가씨를 무릎 위에 앉혀 등 뒤에서 그녀의 두 손을 쥐고 식기 사용법을 천천히 하나하나 알려 주었다. 옛날에 내 여동생에게 했듯이.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작은 성공에도 크게 칭찬하고 실수를 해도 야단을 치지 않는 것이다. 매를 아끼는 것이 아이를 망친다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내 여동생은 자존심이 센 성격이라 실수를 많이 하면 아예 그것을 하지 않으려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누구라도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들어주고 싶기 마련이다. 또한 사랑하는 상대가 좋아하는 것을 하고 또 인정받고 싶어 한다. 나 또한 그러하니까.
나는 처음엔 수업이나 성과에 매달리려 하지 않고 아나 아가씨와 친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그녀는 내 예상보다도 내게 훨씬 더 빨리 마음을 열었다. 사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 역시 이 황량한 데서 사랑이 필요했으니까. 나는 이곳에서 외로웠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마음 둘 곳이 없는데 이 사랑스러운 아이가 학생으로 나타났다.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지루한 단어를 외우는 것부터 시작했지만 아나 아가씨는 잘 따라왔다. 그리고 금방 그림이 있는 동화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동화책은 어디에서 구했느냐고? 공작의 서재에서 찾아냈다. 공작의 서재에는 그게 무슨 종류든 책이라면 다 있는 것 같았다.
아나 아가씨의 책 읽는 실력은 빠르게 늘어, 나는 부인에게 자주 열쇠를 빌려야 했다. 춥다고 소문나 있던 이곳도 여름 햇살은 따스했다. 우리는 볕 좋은 날에 저택 밖 가까운 뜰에 앉아 야외 수업도 많이 했다.
'가까운 곳은 나가도 괜찮겠지, 학생도 함께니까⋯⋯.'
몇 번은 눈치를 보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 같았다.
아무튼, 햇볕을 쬐며 나는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듯 이 나라를 포함하여 강대국들의 역사에 대해 가르쳐 주었다. 나중 아나 아가씨가 어느 나라의 왕비가 될지 알 수 없었으므로.
내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으면 아나 아가씨는 곧잘 토끼풀과 다른 여러 가지 들꽃을 엮어 풍성한 화관을 만들어 주었다. 한두 번 만들어 본 솜씨가 아니었다. 어느 날 내가 화관을 아름답다 칭찬하자 어머니께 배웠다 말했다.
“선생님, 저, 엄마가 보고 싶어요⋯⋯.”
곧 그녀의 커다란 눈엔 눈물이 어렸다. 아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울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아이를 끌어안았다가 그만 같이 눈물이 났다.
'나도 보고 싶어. 울면 안 되는데.'
다시 어머니를 뵐 날이 있을까? 동생은?
공작 각하께서 저택에 돌아온 날도 우리는 야외 수업 중이었다. 누군가 말을 타고 오다 우리를 바라보기에 고개를 들었다 깜짝 놀랐다. 갑옷 차림에 흑마를 탄 남자를 발견한 것이다.
'누구더라? 아!'
사실 그동안 나는 그가 저택을 떠난 것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저 갑옷에 묻은 건 피인가?'
그는 우리를 싸늘하게 노려보고는 못 볼 것이라도 본 것처럼 지나쳤다. 그리고 나는 저녁 무렵에 그의 집무실로 불려가 내가 '정식 가정 교사'가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정식?'
나는 그간 내가 임시인 줄도 몰랐다.
'정식'이 되어 좋은 점은 있었다. 유배인 신분으로 돈도 벌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도 아주 많은 돈을. 왕실 가정 교사로 일할 때도 이만한 봉급은 받지 못했다. 아나 아가씨가 잘한 것이 내 덕이 아니라 말했지만 그는 내가 마술이라도 부린 줄 아는 듯했다. 처음에 든 생각은 이 많은 돈을 여기서 어떻게 쓰나, 였는데 해결책이 금방 나타났다.
공작 각하 알현 후 늦은 밤, 잠자리에 들려는데 폴린느 부인이 찾아왔다.
“아나 아가씨의 정식 가정 교사가 된 것을 축하드리러 찾아왔습니다. 공작 각하께서 아가씨의 학문적 성장을 흡족하게 여기셨다더군요.”
“감사합니다.”
“제가 늦은 시간에 방문해 실례를 저지르는 것은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전혀요. 들어오시겠습니까, 폴린느 부인.”
“그보다는 제 방으로 가 이야기를 나누실까요? 간단한 다과도 준비되어 있답니다.”
그렇게 나는 폴린느 부인의 방에서 부인에게 다과를 대접받으며 품위 유지비로 지급된 금화 한 닢을 어떻게 쓰고 싶은지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우선은 옷을 사고 싶은데요. 제가 이곳에 올 때 옷을 가져올 형편이 되지 않았던지라⋯⋯.”
공작에게 옷을 지적당했을 땐 할 수만 있다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나라고 왜 깔끔하고 단정한 옷을 입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하녀를 통해 옷이 필요하다고 말했을 때 지급받은 것은 이 갈색 드레스 세 벌과 속옷 세 벌이 전부였다. 그 세 벌을 돌아가며 가능한 한 깔끔하게 입어 보려 노력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폴린느 부인은 내 말에 놀랐다.
“저런, 제가 그간 신경을 못 써 드렸군요. 필요한 것을 주문할 수 있도록 옷 짓는 상인을 불러 드리도록 하지요. 그리고 잠시만 보자, 제가 가진 좋은 옷이 몇 벌 있으니 옷이 준비되는 동안 우선 그것을 수선해 입으시면 어떨까요. 이 저택에도 재봉 일을 하는 아이가 있으니까요. 예전 주인마님 옷인데 좀 오래되긴 했어도 요즘 입는 모양으로 수선하면 괜찮을 겁니다.”
부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 한구석에 있는 커다란 궤에서 얼핏 보기에도 무척 값나갈 만한 아름다운 드레스 여러 벌을 꺼냈다.
“마님께서 선물로 주신 옷들입니다. 제 몸에는 맞지 않는 터라 보관만 하고 있었습니다만, 잘 손질하면 지금도 입을 수 있을 만한 것들이지요.”
그렇게 말하며 부인은 옷들을 한 벌, 한 벌 펼쳐 들어 보였다. 과연 부인의 말이 맞았다. 부인이 모셨던 마님의 옷이라면 처음 지어졌을 때보다 시간이 많이 흐른 것일 텐데도 보기에 전혀 낡거나 오래된 티가 나지 않고 오히려 세련되게 느껴졌다. 나는 옷에서 여주인의 미감을 느낄 수 있었다.
“한번 입어 보세요. 얼마나 수선해야 할지 알아볼 겸.”
“괜찮습니다.”
“어서요.”
“그럼⋯⋯ 한 벌만.”
거절했지만 폴린느 부인은 계속해서 권했다. 호의를 연거푸 거절하는 것도 실례일 것 같아 나는 입어 보기로 했지만, 그러자면 먼저 옷을 벗어야 했다. 뒤늦게 후회했지만 나는 그녀 앞에서 속옷 차림이 되었다. 부인이 고른 것은 안감이 분홍색인 짙은 녹색 공단 드레스였는데, 네크라인이 좀 깊이 파여 있긴 했지만 빛의 각도에 따라 원단의 색이 아름답게 변했다.
입고 나니, 드레스는 내 몸에 맞춰 만든 듯이 꼭 맞았다.
“옷이 제 주인을 찾아갔군요.”
옷을 입는 것을 도와준 폴린느 부인은 나를 전신 거울 앞에 세우고는 경탄에 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좋은 옷을 주셔도 괜찮을는지요?”
“옷 입장에서도 궤에서 낡아 가는 것보단 이편이 훨씬 좋을 겁니다. 아, 참, 그리고.”
부인은 허리춤의 벨트에 걸린 열쇠 꾸러미에서 열쇠를 찾아 꺼냈다.
“이건 서재 열쇠입니다. 새 열쇠가 마련되는 데 시간이 걸릴 테니 우선 이것을 먼저 쓰시지요.”
그 밖에도 부인은 내게 이런저런 형편을 신경 써 주었다. 나는 달라진 부인의 태도에서 내가 '정식'으로 이 저택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저, 그런데 부인. 이전의 가정 교사들도 혹시 뜀걸음을 했나요?”
“뜀걸음이라니요?”
“아침마다 뒤뜰의 연병장을 돈다거나⋯⋯.”
“그게 무슨 소리지요? 그곳은 뒤뜰에 있는 병사들이 쓰는 곳이라 여인들이 출입할 만한 곳이 못 됩니다.”
그 말을 들은 폴린느 부인은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그럼 그렇지.'
세월이 좀 지나긴 했어도, 분명 한 벌 한 벌 무척 값이 나갈 드레스를 한 아름 가득 안고 돌아오는데 의문이 떠나질 않았다.
'내가 왜 뜀걸음을 해야 한단 말인가?'
그것도 앞뜰이 아니라 병사들이 사용하는 연병장에서.
'그것도 다른 가정 교사들은 안 그랬으면서 나만? 왜지? 유배인이라서? 하지만 왜? 아이도 잘 가르쳤다면서?'
나는 고용주의 생각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 ❖ ❖
다음 날 새벽녘에 일어난 나는 생각했다.
'정말로⋯⋯ 정말로 거길 가서 뛰어야 하는 건가?'
공작 각하께서 질 나쁜 장난을 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머리를 휩쌌다. 그러나 설령 연병장에 갔다가 어제 한 말을 정말로 사실로 알고 여기 왔느냐는 핀잔을 듣고 창피를 당한다 하더라도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진지 공사는 싫어, 정확히 뭘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다른 가정 교사들과는 달리 해고당하면 집에 가는 게 아니라 노역을 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돈을 주잖아? 그것도 아주 많은 돈을⋯⋯ 가족에게 돈을 보낼 수 있다면 영혼까지 팔 수 있는데 그깟 뜀걸음 정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