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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8화


8화 발드르가 다스리는 영지에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는 싸늘한 눈빛으로 여자를 훑은 뒤 호송관에게 말했다. “이제 유배인은 내가 돌보겠으니 그만 돌아가시오.” '얼마 못 가겠군, 글머 그렇지. 간만에 프랑에서 쓸모 있는 인간을 보내 줄 줄 알았더니.' 아마 가정교사가 필요하지 않았다면 그는 잔느를 그대로 여관에 니버려 뒀을지도 몰랐다. 하나 이 여자가 죽으면 달리 대안이 없었다. 꼴이 썩 미덥지 못하기는 했지만, 자식 교육 한번 제대로 시켜 보자는 일념으로 발드르는 그녀를 저택으로 데려가 꺼져가는 불씨 살리듯 여자의 숨을 붙여 놓았다. 며칠 후 유배인은 깨어났다. 여전히 바람이라도 불면 날아갈 것처럼 비리비리하고 병약한 데다 일어나자마자 안개를 연기로 착각하여 달려 나오는 등 영 못 미더운 짓을 벌이긴 했으나, 식사를 함께하며 대화를 나눠 보니 의외로 박식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 역시!' 지금까지 그가 면접을 본 가정 교사들 중 가장 흡족할 만한 답변들을 두루 내놓았던 것이다. 이제야 마음에 좀 들려는 찰나, 그녀는 자식 교육을 부탁하는 자리에서 냅다 토했다. '괜찮을까?' 발드르는 찜찜했다. '돌아왔더니 죽어 있는 거 아냐?' 비실비실한 게 오래 못 살 것 같은데 가정 교사로 들였다 죽어 버리기라도 하면. 이미 부모를 잃은 조카에게 또 상처를 안기는 게 아닐까? 하지만 이 상황에 마땅한 대안은 없었다. 결국 발드르는 잔느라는 여자를 조카의 가정 교사로 지정한 뒤 다음 날 저택을 떠났다. 매해 여름이면 스카디령의 가장 북쪽 연해 지역을 침략하는 해적들을 괴멸시키기 위해서였다. 물론 몇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해적들과 그는 같은 조상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귀족들이 대귀족인 그를 겉으로는 공경하면서도 무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가 열 번은 바뀔 세월이 아닌가? 뼛속부터 귀족이라고 젠체하던 중앙의 귀족들도 그만큼 거슬러 올라가면 밭 갈던 무지렁이로 살았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의 그는 들의 침략으로부터 왕국을 지키는 방패이기도 했다. 해적들이 여름마다 창궐하는 이유는, 그들이 보통 겨울과 봄 사이 녹기 시작하는 자신의 대지에 작물을 심고 바다의 얼음이 녹는 여름이면 배를 띄워 약탈을 하러 떠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가을이면 약탈품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 작물을 추수한 뒤 겨우내 부서진 배를 보수하고 병장기를 다듬어 또 다음 해의 약탈을 준비하는 것이다. 해적들은 두세 척의 배로 와 소규모로 약탈을 하기도 했지만, 심할 때는 몇천 규모의 대규모 해적 선단을 꾸려 침범할 때도 있었다. 대규모의 해적단이 연안에 한번 상륙하면 그곳은 남는 것이 없었다. 식량을 뺏는 데 그치지 않고 마을에 불을 지른 뒤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도망친다. 나중에 소식을 듣고 군사들이 도착하면 때는 너무 늦어 마주하는 것은 황폐화된 마을뿐이었다. 잔혹한 자들을 상대할 땐 그보다 더 잔혹해져야 하는 법이다. 발드르는 공작이 된 뒤부터 그들이 돌아간 겨우내 요새를 축성해 연안마다 잇달아 요새 도시를 만드는 것으로 응수했다. 해적들은 전처럼 연안에 상륙했다가 그들이 오를 수 없는 거대한 성벽을 마주하곤 당황하다 화살받이가 되었다. 그럼 발드르는 해안가에 말뚝을 박은 뒤 그 화살받이가 된 시체들을 꽂아 바닷새들이 다 뜯어 먹도록 전시해 두었다. 혹여 해적들이 해안가에 상륙하면 동료나 이웃 주민이었을지 모를 시신을 보고 자신도 그렇게 될 수 있음을 알도록. 이어서 발드르는 해적들의 공격을 기다리지 않고 해적들의 본거지를 역으로 습격했다. 그의 목적은 약탈이나 전리품이 아니라 죽음이었다. 바다 너머로 약탈을 하러 떠난 남편을 기다리던 여인과 노인, 아이들만 남아 있던 마을을 치는 것은 쉬웠다. 그는 해적들이 한 것과 마찬가지로 마을에 불을 질러 그들의 씨를 말려 버렸다. 그 덕분에 해적들의 대규모 침략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전처럼 배를 띄워 떠났다 약탈품을 싣고 돌아왔을 때 가족들이 다 죽어 있는 것을 볼까 봐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전술로 발드르는 영지민의 목숨을 지켰지만, 본국인 랑시스에선 전쟁을 좋아하며 피에 탐닉한다는 불명예를 얻었다. 물론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잔혹한 별명이 대외적으로도 대내적으로도 적들을 두려움을 떨게 하기에 좋았기 때문이다. 그해 여름에도 발드르는 해적 잔당들을 해치우는 데 시간을 보냈다. 그는 자신의 병사들을 데리고 해안가를 누비면서 근면 성실한 농부처럼 적들을 죽였다. 그리고 가을이 되기 전 다시 저택으로 돌아왔다. 피와 피곤에 전 발드르가 말에 탄 채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본 것은 정원의 풀밭에 앉아 화관을 쓰고 재잘거리고 있는 두 여자였는데, 한 명은 양녀였고 다른 한 명은 모르는 여자였다. 머리에 화관을 쓴 여자는 소녀처럼 갈색 머리를 굵게 땋아 한쪽 어깨로 늘어뜨렸는데, 그 굵게 땋은 머리칼 사이에도 꽃이 끼워져 있었다. '누구지?' 그가 인상을 찌푸리는 모습을 보고 여자는 사냥개를 마주친 토끼처럼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각도에 따라 녹색으로도 갈색으로도 보이는 여자의 커다란 눈을 보고 생각했다. '저런 여자가 저택에 있었나?' 이내 발드르는 저 낯선 여자가 자신이 저택을 떠나기 전 고용한 가정 교사라는 것을 깨달았다. 전보다 얼굴이 훨씬 보기 좋아져 있어 몰랐다. 그는 저택으로 향하는 말을 멈추지 않으며 그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전 가정 교사들의 실수를 답습하는군.' 공부는 가르치지 않고 아첨하느라 여념이 없다니, 그는 여자를 가정 교사로 고용했지, 보모를 부탁한 게 아니었다. 발드르 드 스카디는 저택에 돌아가는 즉시 가정 교사를 해고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목욕 시중을 받은 뒤 밀린 정무 중 시급한 것을 처리했다. 한숨 돌릴 즈음이 되자 해가 져 있었다. 머리에 화관을 쓴 여자가 생각난 것은 그때였다. 그는 양녀를 불렀다. “내가 해적들을 소탕하고 있는 동안에 너는 무엇을 했느냐?” 발드르는 집무실의 의자에 앉아 싸늘한 눈빛을 던지며 물었다. “여름 내내 시골 처녀처럼 화관이나 만들며 논 것은 아니겠지?” 궁금증 때문에 던진 질문이 아니었다. 그는 아직도 제 신분이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하는 아이에게 화를 낼 작정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두려움에 머뭇거리긴 했어도 뜻밖이었다. “저는⋯⋯ 선생님께 글을 읽고 쓰는 법을 배웠어요. 또⋯⋯ 역사도 배웠고요.” “역사? 네가 글을 읽고 또 쓸 수도 있다고?” 그렇게 쉽게 될 일이면 이전 교사들이 양녀더러 멍청이라 했겠는가? 그는 아나의 말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그 거짓말을 추궁하려 그는 시종에게 손가락질해 필기구와 책상과 의자를 가져오게 했다. “그럼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을 받아 적어 보거라.” 그리고 발드르 드 스카디는 곧 아나의 말이 사실임을 알게 되었다. 아나는 그가 불러 준 문장들을 서툴게나마 받아 적었다. 어려운 단어는 간혹 철자를 틀리기도 했지만. 그뿐만 아니라 아나는 그가 물어보는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이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대해 거의 다 대답했다. 세부적인 부분은 헷갈려 했어도 이 나라의 과거에 어떤 일이 일어났으며 왜 일어났는지, 또한 그 일이 이후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가 머릿속엔 마치 한 편의 이야기처럼 들어 있었다. '어떻게?' 아나를 가르쳤던 가정 교사들은 아이에게 글을 읽을 수 없는 병이 있다고 했다. 발드르도 내심 그렇지 않을까 싶었고. 그런데 이렇게 단시간 내에 전에는 못 하던 걸 할 수 있게 되었다고? '그 여자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이만 돌아가라.” 발드르는 양녀를 돌아가게 한 뒤 가정 교사를 불렀다. 곧 도살장에 끌려온 소 같은 표정으로 가정 교사가 들어왔다. '잔느라고 했나? 성이 뭐였지? 톨루즈? 툴르주?' 이번엔 굵게 땋은 머리가 아니라 단정하게 묶어 틀어 올린 머리였다. 발드르는 잠시 상황도 잊고, 낮에 봤던 것처럼 꽃으로 장식해 한쪽으로 땋아 내린 머리가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아몬드형 눈에 불안한 빛을 가득 띠고 두 손을 모아 쥐었다. “공작 각하,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비굴해 보이기까지 한 태도였다. 구부정한 등 때문일까, 그는 가냘픈 상반신에 달라붙은 장식 없는 드레스에 시선을 던졌다. 전보다 혈색은 나아 보였지만 여전히 가정 교사의 몸과 두 팔은 앙상한 나뭇가지 같았다. '이곳 음식이 입에 맞지 않나? 아니면 지금 그곳의 음식이 더 맞다고 시위라도 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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