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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1화


1화 항해하는 중에 길을 가로막는 세찬 바람이 불어온다면 우리는 주저앉아 바람을 원망해야 할까, 아니면 언젠간 바람의 방향이 바뀌리라는 희망을 가져야 할까? 정답은 모르겠지만 내가 한 일은 우선 돛을 바로잡는 것이었다. 바람이 배를 집어삼키지 않도록. 설령 그것이 귀족 세계의 불문율을 깨는 일이라 할지라도. 귀족은 왕국을 위해 봉사할 뿐 돈을 벌기 위해 일하지 않는다. 그것은 귀족 세계를 구성하는 질서의 근간이었다. 많은 귀족들이 왕궁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기 원하고 때로는 귀부인들이 귀족이나 왕족 자제를 가르치기도 했지만, 그들의 재산은 직업이 아니라 막대한 영지에서 나와야 했다. 명예가 아닌 빵을 위해 일을 하는 귀족들은 같은 귀족의 체면을 갉아먹는 수치스러운 존재로 여겨졌다. 하지만 빵이 없다면 제아무리 귀족이라도 굶어 죽을 수밖에 없다. 툴루즈 백작가의 장녀였던 내가 가정 교사로 일하게 된 이유 역시 간단했다.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체면과 위신을 내다 버리고 귀족 세계의 불문율을 깼다고 손가락질받아도 어쩔 수 없었다. 툴루즈 백작가는 선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국왕 폐하의 직속 봉신인 유서 깊은 가문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아버지가 작위를 받았을 때는 영지라 부르기도 부끄러울 만큼 작은 땅뙈기와 저택, 학자였던 할아버지께서 물려주신 천여 권의 장서가 유산으로 남았을 뿐이었다. 그렇다 해도 소지주로서 먹고 입는 것 정도는 걱정하지 않고 살 수 있었다. 앞으로도 천천히 영락해 갈 가문의 미래를 걱정한 아버지의 공격적인 투자가 실패하지만 않았더라면 말이다. 내 나이 열다섯 때, 아버지는 가진 재산을 담보 삼아 무역 회사의 주식에 투자했는데 2년 뒤 그 무역 회사는 파산했다. 무역 회사의 규모가 막대했기 때문에 이 일로 인해 우리 가문뿐만 아니라 많은 귀족들이 파산하거나 그에 준하는 피해를 입었다. 귀족들은 이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고개를 숙이고 왕궁으로 들어가 봉급 귀족이 되거나 그대로 길거리에 나앉거나. 우리 가문은 일단 영지와 할아버지의 책을 팔았다. 하지만 불운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투자 실패는 심약한 아버지의 죄책감을 자극했고 또 다른 불운을 몰고 왔다. 아버지가 파산의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병을 얻은 것이다. 어머니는 아버지 간병에 매달렸지만 아버지는 결국 1년 후 돌아가셨다. 거액의 빚더미만 남기고. 그리고 나는 알게 되었다. '나밖에 없어.' 툴루즈가를 구할 사람은 이 가문의 장녀인 나뿐이라는 것을. 나는 가족들을 설득해 돈 잡아먹는 괴물인 저택을 처분했다. 저택의 유지비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마련한 돈으로 가족들을 데리고 수도인 프랑으로 이주했다. 왕궁이 있는 프랑에 일자리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일을 시작하면 좋을까? 다행히 할아버지는 내게 무형의 유산을 물려주셨다. 할아버지의 서고에서 나오는 지식이었다. 할아버지가 살아 계시던 동안 나는 이름난 시인이자 학자였던 할아버지께 많은 것을 배웠다. 또한 할아버지의 인맥은 입주 가정 교사 자리를 구하는 내게 큰 도움을 주었다. 나는 할아버지와 친분이 있었던 귀부인 중 한 분께 사정을 알리는 편지를 써 그녀의 손녀를 돌보는 가정 교사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가정 교사란 위치는 무척 미묘했다. 아이를 가르치는 일에 보람을 느끼고 싶었지만 고용주인 자작 부인은 같은 계급이면서도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는 나를 업신여겼고, 하인들은 내 존재를 꺼림칙하게 여겼다.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겉돌았다. 그 분위기는 내가 가르치게 된 자작가의 둘째 아가씨에게도 이어졌다. 그녀는 처음엔 공부방에서 폭군처럼 굴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이후 내가 후작 부인인 할머니와 편지로 교류할 만큼 친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태도가 손바닥 뒤집듯 바뀌었다. 후작 부인은 겨울 축제 때마다 손녀들에게 보석이 박힌 반지나 진주 목걸이 등을 선물 하곤 했던 것이다. 나는 첫 제자의 머릿속에 내가 아는 교양과 지식을 최대한 넣어 주기 위해 애를 썼다. 그 모든 것이 사교계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3년이 순식간에 흘렀고, 열여덟 살이 된 그녀는 성공적으로 사교계에 데뷔했다. 내 교육 덕분인지 아니면 사랑스러운 외모 덕분인지, 혹은 사교계에 데뷔하기 전에 몰두한 무용 수업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가씨는 장녀인 언니보다 더 나은 가문의 첫째 아들에게 시집가게 되었다. 만족한 자작 부인은 나를 좀 더 빨리 만났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고, 그제야 애석해 하며 내게 다음 고용처를 소개해 주었다. “방타두르 공작 부인의 도련님을요?” 이번엔 공작 부인의 아드님을 가르치는 자리였다. '그런데 공작가의 아드님쯤 되면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을 가정 교사로 구할 수 있지 않나?' 왕실 사정에 완전히 무지했던 나는 처음에 그 일을 단순히 공작가의 도련님을 교육 하는 자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방타두르 공작 부인은 공작가의 안주 인이 아니라 국왕 폐하의 메트레상티트르, 한 명뿐인 공식 정부였다. 왕궁에 기거하는 그분의 시녀가 바로 내 고용주인 자작 부인이었는데, 나를 좋게 본 그녀가 마침 가정 교사를 찾고 있던 자신의 상관에게 나를 소개한 것이다. 메트레상티트르는 정부이긴 하나 왕비 바로 다음가는 자리로, 그녀가 낳은 아들딸들은 공식적인 '왕의 아이'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정식 왕비의 아들은 아니기에 대외적으로 ‘공작 부인의 아드님' 혹은 ‘도련님'으로 불려 오고 있던 것이었다. 단순히 다음 가정 교사 자리를 구하고 있던 나로서는 꽤 복합적인 위치에 있는 학생을 맡게 된 셈이었다. '왕궁은 정치와 모략이 난무하는 곳이라던데⋯⋯ 괜찮을까?' 상황을 알게 된 나는 망설였다. 현재 왕비에게는 딸들과 장성한 두 아들까지 있었다. 왕비 소생의 왕자가 둘이나 있는데 메트레상티트르 소생의 왕자가 왕위 계승권 다툼에 휘말릴 위험은 없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 자리는 그 모든 위험 부담도 감수할 수 있을 만큼 보수가 좋았다. '내가 어디서 이만한 돈을 받을 수 있을까?' 결국 나는 두 번째 가정 교사 자리를 받아들였다. 내가 맡게 된 학생의 이름은 마엘이었는데, 이제 막 열세 살이 된 도련님은 방타두르 공작 부인의 외모를 물려받아 곱슬거리는 금발에 청금석 같은 눈, 아름다운 외모를 갖추고 있었다. 심지어 첫 학생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예의도 발랐다. 첫 대면에서 도련님과 잠시 대화를 나눠 본 나는, 그가 이 어린 나이에 그토록 폭넓은 지식을 가졌다는 데 감탄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도련님이 던지는 질문은 하나같이 날카롭고 핵심을 꿰뚫는 것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교양을 쌓으셨습니까? 선생님도 없이.” “제게는 그럴 시간이 많았습니다. 왕실 도서관에 며칠을 틀어박혀 있어도 그 누구도 저를 찾지 않았으니까요.” 도련님은 그렇게 말하곤 수줍게 웃었다. “선생님을 만나 다행입니다. 지금까지 읽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책이 많았거든요. 부디 저를 많이 가르쳐 주세요.” 그날 나는 제대로 된 학생을 만났다는 기쁨에 잠을 설칠 정도였다. 이후 나는 왕궁에 기거하며 마엘 도련님의 머릿속에 내가 아는 지식을 모조리 부어 넣었다. 그를 제자로 둔 것은 내게 돈 외에도 큰 보람이자 즐거움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그와 더불어 나는 서서히 왕실의 생리를 이해하게 되었다. 이토록 총명하고 훌륭한 자질을 가진 도련님이 대체 왜 하잘것없는 경력을 가진 몰락한 귀족 가문 출신의 여자 가정 교사를 쓸 수밖에 없었는지 말이다. 방타두르 공작 부인은 십여 년 동안 국왕 폐하의 가장 큰 총애를 받고 있었지만 국왕 폐하의 애인은 부인만이 아니었다. 또한 왕실은 왕세자를 아들로 둔 왕비 전하의 세력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왕비 전하는 방타두르 공작 부인을 공공연한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었다. 국왕 폐하가 연로하시고, 메트레상티트르의 힘도 왕이 부재하는 순간 아침 서리처럼 사라지는 것이다. 당장 내일이라도 왕세자 저하께서 왕위를 물려받을 수도 있는데 왕비 전하의 반대편에서 방타두르 공작 부인에게 힘을 실어 줄 귀족은 없었다. 마엘 도련님이 지나치게 총명하다는 것도 문제였다. 누구라도 조금만 대화를 나눠보면 도련님이 총명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엘 도련님이 만약 왕비 소생의 장자였다면 그 영리함은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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