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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6화 396화


페레니케 396화 늘씬한 체격은 적당히 컸고, 집무실에서 종일 지내는 사내치고는 단련이 잘된 몸이었지만 이온 파트로스에게서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언제나 웃을 듯 말 듯 모호한 저 눈이었다. 그 다음은 특이한 인상을 한 준수한 얼굴이다. 페레니케는 빤히 그를 올려다보며 며칠 전 제 집에 멋대로 다녀간 포이베와 닮은 구석을 잠시 찾아 보았다. 오누이는 이복남매지만 모두 선대 파트로스 공을 닮아 에로스 신의 조각 같은 연갈색 고수머리를 지녔고, 여우 같은 눈매도 제법 닮았다. 이외에는 각자의 모친들을 따라갔지만, 누가 보아도 그들이 혈연 관계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숙부를 왜 그리 보느냐?” “숙부를 보니 포이베가 생각나서요.” “날 보면 그 망종이 생각난다고? 큰일이군.” 파트로스가 손을 들어 매끈한 얼굴을 쓸었다. 그는 아직 혼인하지 않고 아이도 없어서, 제 또래 사내들보다 몇 해는 어려 보였다. 그리하여 그는 원로원에서도 ‘젊은 파트로스 공’으로 불리고는 했는데, 그가 스물이라는 젊은 나이에 아비의 지위를 물려받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실상은 그가 아직도 결혼하지 않은 사내임을 빗대어 희롱하는 것이었다. 매끈한 외관이 아니었다면 그리 놀림 받지도 않았을 테지만. 페레니케의 옛 기억 속 이온 파트로스는 끝까지 혼인하지 않고 홀로 살았다. 요절한 형제의 아이를 양자 삼아 키우며. 그리 살아야 했던 이유야 뻔한 것이다. “파트로스 숙부. 포이베는 대체 언제쯤 혼인 시키실 건가요? “그 애를 그리 해치우고 싶으냐? 아직 멀었다만.” “제 계모가 되겠다고 자꾸만 저한테 치근덕거린다고요. 그리 바실리오스 부인이 되고 싶다면 아버지한테나 가서 추근거릴 일이지, 왜 저를 못 살게 하는지 모르겠어요. “바실리오스 부인이라니, 네 아비가 들으면 기겁해 도주할 소리군. 단지 여아들끼리 노는데 핑계가 필요한 것 아니겠느냐?” “누가 남의 아버지를 보고 침을 그리 흘리며, 포이베 같은 숙녀가 저 같은 어린애랑 무얼 하고 놀겠어요?” “딱히 못 놀 만큼 어린애 같지는 않구나. 바실리오스 아가씨. 너는 이 숙부와도 종일 놀아줄 수 있잖니.” 이온의 커다란 손이 페레니케의 머리를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메티온이 코웃음을 쳤다. “형님에게는 ‘파트로스 숙부’군요.” ‘파트로스 숙부’는 ‘메티온 숙부’와 달리 제법 격식을 갖춘 호칭이었다. 메티온이야 부를 때나 숙부일 뿐, 실상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오라비에 가까워 마구잡이로 이름을 불러도 됐지만 이온 파트로스는 그녀의 아버지와 같이 자란 사내였다. 또한 악시오테아와 함께 자란 사내이기도 했다. 이온 파트로스는 타소스 공의 이름난 제자 중 하나였다. 그가 나직하게 웃으며 페레니케를 내려다보던 그대로 대꾸했다. “내 눈에는 너 또한 별다를 바 없는 꼬맹이다. 메티온.” “그 어린애가 어른보다 키가 더 크기도 합니까?” “너는 키만 자랐잖느냐.” “메티온 숙부는 가을에 혼인해요. 그럼 파트로스 숙부가 더 ‘젊어질’ 걸요.” “혼인을 하면 그리 순식간에 늙는다니, 일생 혼인하지 말아야 하겠다.” 이온이 웃는 눈으로 친우의 어린 딸로부터 시선을 떼고는 메티온에게 조용히 말했다. “메티온. 아르고 왕국에서 왕의 사자가 왔다. 네가 원하던 소식을 가지고.” “아.” “그가 폐하를 알현하기에 앞서 오흘리도스에 있는 내 피호민의 집에 며칠간 머무르며 피로한 몸을 쉬었지.” 페레니케는 대화를 알아듣지 못하는 척 메티온의 옷자락으로 손장난을 치며 한가로이 제 그림자를 보았다. 파트로스 공이 거느린 피호민의 수가 수천이었다. 그 중 어느 집에 아르고 왕의 사자가 머물며 한낱 나그네 행세를 했을지 그 자취를 알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으리라. 오로지 파트로스 공만이 오흘리도스의 그 집을 알고, 어쩌면 그 집에서 친히 왕의 사자를 맞이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르고 왕의 사자는 오로지 제 주인의 뜻만을 품고 정결한 머리로 에브도키아 왕을 알현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파트로스와—혹은 타소스와 우선 타협한 머리로 에브도키아 왕궁에 들어가는 것이다. 페레니케가 슬며시 눈을 들어 이온을 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사내가 소녀와 비밀을 주고받듯 희미하게 웃어 주었다. “형님께서 번잡한 수고를 해 주셨습니다.” “아르고 왕이 너를 높이 산 것이 컸다. 그에게 보낼 대가는?” “타소스의 소금입니다. 단지 작은 부탁이니, 작은 것을 주기로 했습니다.” 메티온은 어린 누이를 옆구리에 달고 있는 소년처럼 비딱하게 서서 별달리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이온에게 대꾸했다. ‘작은 것’, 하고 말할 때는 페레니케의 머리통을 꾹 눌렀지만. 이전에도 파트로스 공과 메티온은 어떤 일에서나 서로가 서로의 가교였다. 남들의 시선을 피하고 우회할 때 필요한 통로였고, 어떤 물건이든 더 가까이 있는 자가 더 멀리 있는 자에게 집어 건네주었다. 고로 이번에는, 메티온이 파트로스의 길로 우회했다. ‘단지 작은 부탁’을 위해서. 그 작은 부탁이 무엇인지는 페레니케도 잘 알고 있었다. “그쪽에서는 그리 작게 여기지 않는 듯하던데.” “몇 년간 아르고에서 소금이 귀했잖습니까. 그러나 에브도키아로 들어오는 소금은 그 지경으로 귀하지 않습니다.” “왕께서 기꺼워 하시겠느냐.” “기껍지 않으실 테지만, 한 번은 눈감으실 겁니다.” 한 번의 눈감음으로. 작은 부탁과 작은 대가로. 살아 있는 한 가장 가까운 곳에 두고 매일같이 그 얼굴을 보아야 했던 비아노르와 달리 파이라는 이렇듯 뤼케로부터 멀리 보내버릴 수 있었다. 비아노르는 그들 진영의 기둥 중 하나인 고르기아스 공의 촉망 받는 조카였고, 왕자의 오른손으로 내세우기 위해 고르기아스 일가가 조각처럼 깎은 소년이었다. 그러나 파이라 따위가 라브렌티오스의 무엇이겠는가? 페레니케는 사냥터에서 비아노르를 활로 쏘아 죽일 적에 살해의 필요성 따위를 따지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제 손으로 비아노르에게 복수한 적이 없었고, 레우케가 더 자라지 못한 세월만큼 비아노르가 자라날 유년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소년을 살해했다. 그 애는 끝내 그 시절에서 생명이 끊기고 하루도 더 자라지 못했으니, 이제는 너도 영원히 자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웃고 울고 기뻐하고 화내며 생을 누리고 어른이 되어가는 것을, 레우케는 하루도 누리지 못한 그 모든 시절을 사는 비아노르를 제 눈으로 다시 보느니 그녀는 죄를 지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비아노르가 이제는 한낱 무고한 어린아이라도, 정당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적어도 비아노르 고르기아스는 어른이 되어 보았지 않나? 다시 아홉 살도 되어보았지. 그러나 레우케는 세 살에 죽었고, 다시는 태어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 비아노르는 이미 태어나 살아 숨 쉬었지만, 두 번째 레우케는 제게 반드시 약속된 미래가 아니다. 최초의 레우케가 영영 세 살배기 어린아이로 남아야 한다면, 마지막 비아노르 고르기아스도 영영 아홉 살배기 어린아이로 남아야 한다 여겼다. 반면 오늘의 파이라 라브렌티오스에게는 얼마나 관대했던가? 그 손에 있던 소중한 것은 이미 다 앗아보았다. 가장 사랑했던 아들과 그만큼 사랑하지는 않았던 딸, 남편. 원하는 곳은 어디든 갔던 발을 잘랐다. 다시는 무엇도 쥘 수 없게 손을 잘랐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상실의 고통을 다 느낀 다음에야 죽게 했다. 그러니 파이라 라브렌티오스의 죽음은 단지 필요의 문제였다. 파이라 라브렌티오스는 필요하지 않으면 죽이지 않아도 되었다. 실상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 정도밖에 되지 않을 존재였다. 그리고 이론적으로는, 뤼케의 권세로부터 멀리 떨어트려 놓으면 다시는, 무슨 짓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아비의 손을 잡고 에브도키아의 국경 밖으로 쫓겨날 적에도 누군가는 그런 생각을 했을 테고, 결과적으로는 그 생각이 틀렸다. 파이라는 기억력이 좋았고, 잘 살아남았다. 새들처럼 돌아왔다. 그리고 모두가 저를 경시할 때, 누구도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 그녀는 적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눈여겨 보았다가 단숨에 낚아챘다. 개를 때려 죽이게 한 손으로 아이를 끌고 성벽으로 간 것처럼. 여종의 아름다운 얼굴 위에 끓는 물을 부은 것처럼. 페레니케에게는 레우케였고, 메티온에게는 알키오네였던 것. 그녀와 레온이 뤼케에 없었다면, 메티온이 무슨 짓을 해도 알키오네는 지금과 같지 않았으리라. 정신이 나간 파이라조차도 그 사실만은 알기에 그 일을 해냈다. 복구할 수 없을 정도의 손상,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을 안길 것이라는 확신으로. 그러나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것은 저 하나뿐이다. 파이라 라브렌티오스는 소금 속에 빠져 죽을 것이다. 페레니케가 지루함을 못 견디는 아이처럼 메티온의 손 아래에서 머리를 슥 빼내어 제멋대로 총총 멀어졌다. 저 없이 대화를 더 편히 하라는 뜻이었지만, 페레니케를 두고 ‘아이가 앞에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어른은 이곳에 아무도 없었다. 이온이 그녀의 뒤통수를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제 아비를 닮아서 걸음걸이가 주도적이야.” “어린 게 어딜 가든 허락을 구하는 법이 없다는 소리를 잘 돌려 말하시는군요.” “네 누이도 그랬지. 제가 원하면 어디든 갔어.” 그가 잔잔하게 웃고는 페레니케로부터 시선을 돌리며 무심히 표정을 바꾸었다. “그자는 먼 길을 온 김에 왕제의 신부와 함께 귀환하길 원하더군. 파이라 라브렌티오스는 신부가 될 준비를 마친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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