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7화 377화
페레니케 377화
“더워.”
“움직이니까 덥죠.”
그늘에 쪼그려 앉은 덱시코스가 현자처럼 말했다. 한참 연무장을 달리고 돌아온 페레니케가 그늘 밖에서 무릎을 짚고 숨을 골랐다.
“개들이 괜히 헥헥거리는 게 아니라고요. 저기 세이리오스를 보세요. 저렇게 괜히 뛰어다니다가.”
“내가 개라는 거야?”
“그럴 리가요. 개는 착해요.”
천진난만한 목소리 밑에 의도가 숨어 있다. 페레니케가 덱시코스의 발을 톡 차며 그늘 밑으로 들어왔다.
“물.”
“나한테 맡겨놨나?”
그녀더러 들으라는 듯 중얼거리면서도 덱시코스가 나무 밑동 아래 바구니를 뒤적거렸다.
귀여운 것. 소년이 기껏 내미는 작은 물 항아리는 무시하고, 페레니케가 그의 머리칼을 마구잡이로 쓰다듬었다. 덱시코스가 질색했다.
“귀여워.”
“안 귀엽거든요!”
항변하면서도 물이나 얼른 마시라고 들이미는 손이 직업적 의무감에 차 있었다. 역시 철이 일찍 들었다.
그때 창 자루를 무더기로 짊어진 람코스가 그들에게로 왔다.
어린 소년들이 쓰는 짤따란 것이라고는 해도 저렇게 한데 묶어 놓으면 여간 무게가 아닐 테지만, 람코스는 일찍이 비범했다.
몇 년 후 만나게 될 좋은 오르테아가 그의 육체를 미리 휘두르고 있기라도 한 것일까?
“페레니케!”
저를 도와달라는 뜻 같아 페레니케는 슬그머니 옆으로 두 걸음 옮겨 자리만 비워주었다. 짠 것처럼 덱시코스도 동시에 그렇게 했다.
“이 비열한 인간들.”
이윽고 그들이 떠난 자리에 창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우수수 쏟아졌다. 페레니케가 발끝으로 멀리 굴러온 창 하나를 걷어차 제자리로 되돌리며 물었다.
“웬 힘자랑이야?”
“네 왕자가 시켰어. 검수하래.”
“보나 마나 대련에 졌겠죠.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전하께 달려들어선.”
“건방진 것. 데우칼리온이 너를 찾아.”
덱시코스가 람코스의 전언을 의심하듯 쪼그려 앉은 그대로 빤히 올려다보자 람코스가 재촉의 발길질을 했다.
“발 좀 가만히들 두세요. 다들 교양에 문제가 있다니까!”
“앙칼지긴.”
떠나는 덱시코스의 뒤통수에 대고 람코스가 희롱하듯 말하고는 얼굴을 바꾸어 물을 구걸했다.
“그 물 좀.”
“진짜 데우칼리온이 덱시를 찾았어?”
“아니. 미래의 왕자비 전하께 복수할 수는 없으니 대신 저놈에게 했지.”
페레니케가 좁다란 입구 아래 양쪽으로 고리 모양 손잡이가 있는 작은 항아리를 비스듬히 들고는 람코스에게 물을 뿌렸다.
람코스가 잽싸게 몸을 틀어 유유히 피했지만 절반은 흙먼지 묻은 튜닉에 쏟아졌다.
페레니케가 그 꼴을 보고 무심히 감탄했다.
“빠르네.”
“아, 침 뿌리는 것도 아니고.”
질색하는 말과 달리 젖은 옷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기색으로 람코스가 창 자루 더미를 뒤적였다.
“네가 원하면 그것도 뱉을 수 있어.”
“제발 왕자비답게 처신해. 페레니케.”
애늙은이처럼 미간을 찌푸린 소년이 안타깝다는 듯 충고했다.
“난 아직 왕자비가 아니니 괜찮아.”
“태어날 때부터 네 아버지 딸이었지 않아? 바실리오스 장군의 위신도 생각해야지.”
“아버지는 네가 생각해 주니 나까지 생각하지 않아도 괜찮아.”
“니케. 요즘 1왕자 전하가 안 보여.”
연신 창 자루를 뒤적거리던 람코스가 문득 그녀를 떠보듯 작게 말했다.
“그가 안 보이면 안 보이는 거지, 첩자처럼 속닥거릴 건 뭐야.”
“이상하잖아.”
“1왕자는 원래 여기에 자주 보이는 게 이상한 사람이야.”
“그러니까. 이미 이상한 사람이었잖아. 형제 사이가 좋아진 것 아니었어?”
람코스는 허공에 손가락질을 하는 어른처럼 창 자루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가상의 악토르와 데우칼리온 사이 선을 긋듯이.
그 끄트머리에 맞을 뻔한 페레니케가 무릎으로 그의 창을 날렸다.
“앗.”
“그렇게 생겨놓고 호사가 노릇은 그만하고, 람코스.”
“내가 어찌 생겼는데.”
“돌. 나랑 대련이나 해.”
페레니케가 창을 집어 들며 심드렁하게 제안했다.
“방금 페레니케 네가 땡볕에서 어리석게 할당량을 채우는 걸 봤는데.”
대련할 힘이나 남아있느냐는 것이었다.
“페레니케. 그러게 아침에 달리기를 왜 미뤘어? 우리랑 같이 하지.”
“낮에 달리면 살아있는 게 느껴져.”
“편하면 못 느껴?”
“심장 위치도 느껴지고.”
“심장 위치? 죽으려고 그러는 거 아니야?”
앞으로 날아드는 창에 그가 잽싸게 땅에서 창 한 자루를 주워 가운데로 막았다.
“페레니케, 넌 살아있는 교훈이야. 항상 귀찮아서 미루고 나중에 고생하잖아. 신에게 벌 받는 여자 같이.”
“어찌 알았어?”
“뭐?”
그 순간 페레니케의 창이 람코스의 측면을 파고들었다.
방심했던 람코스가 서둘러 뒤로 물러나는 순간 그녀가 반대쪽 측면을 찔렀다.
람코스가 간신히 몸을 비틀고 그녀의 팔 사이로 길게 손을 뻗어 창을 잡고 빼앗았다.
페레니케가 생글거리며 웃었다.
“졌네, 람코스.”
“네 창이 내 손에 있는데?”
“그러니까. 졌잖아.”
“…….”
“내게서 창을 뺏을 필요가 없었어야지.”
생각해 보니 그랬다. 람코스가 그녀와 제 창을 차례로 바닥에 툭 던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페레니케의 시선이 제 너머를 보고 있는 것을 깨닫고 뒤를 돌아보았다.
“……저 여자가 그 여잔가? 그 유명한 1왕자의….”
파이라를 발견한 람코스가 말을 다 잇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1왕자 전하의 무엇이더라? 사촌 누이랬나? 할머니라고 했나? 이모던가? 동생인가?”
“네 주군을 닮아 편견이 없네, 람코스. 저 여자는 1왕자의 누이 겸 이모야.”
“누이면 누이고 이모면 이모지, 뭐야? 괴이쩍어.”
“무엇이든 되고 싶겠지. 내버려 둬.”
“왜 저렇게 온몸을 싸맨 거지? 문둥병자같이.”
페레니케가 그 말에 눈썹을 비스듬히 들었다. 파이라는 이마와 귓가로 흘러내린 붉은 머리칼 외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가린 차림이었다.
그 순간 눈이 마주쳤다. 페레니케의 몰골을 천천히 훑어보는 듯한 눈길에 멸시가 스며 있었다.
그것을 어찌 해석했는지 람코스가 화들짝 놀란 것처럼 페레니케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속삭였다.
“귀신 같아.”
“비슷하네.”
“저 여자가 널 노려보는 것 같은데.”
“그것도 맞을걸.”
람코스가 다시 뒤를 흘끗 돌아보더니 찝찝한 얼굴로 페레니케를 가렸다. 딴에는 ‘왕자비’를 지켜주려는 모양새였다.
그가 미심쩍게 중얼거렸다.
“라브렌티오스가 왜 저기로 지나가는 거지?”
페레니케야 답을 알고 있었다.
저 길은 악시오테아의 처소와 통하는 길이고, 파이라 라브렌티오스에게는 중대한 용무가 있으니.
며칠 지나지 않아 그들은 악시오테아 처소 뒤편으로 난 좁은 길 위에서 서로를 맞닥뜨렸다. 파이라는 등 뒤에 거느린 이가 조금 있었고, 페레니케는 데우칼리온뿐이었다.
그것이 도리어 약간의 위압이 되었을 수는 있었다.
왕자의 수행원은 보통 왕자를 지켜줄 것처럼 여겨지지만, 왕자를 상대하는 이가 숨 막혀 죽는 일이 없게 만드는 역할도 했으므로.
파이라는 제가 데우칼리온 왕자를 얼마나 증오하고 혐오하며 멸시했는지를 다 떠올리기 어려울 정도로 한순간 얼어붙었다.
“니케, 악터의 누이야.”
“그러네.”
파이라의 존재에 관하여 먼저 말한 쪽은 데우칼리온이었다. 친절하게도 진실보다는 파이라의 주장을 따른 표현이었다.
왕자의 누이. 악토르의 누이. 그것은 파이라에게 일종의 칭호이자 왕관이었다. 그녀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언제나 자랑스러운 기분을 느껴왔다.
그러나 막상 데우칼리온이 저를 두고 ‘악터의 누이’라 담백하게 말하자, 원인도 알 수 없는 수치심이 느껴졌다.
말수가 몹시 적은 악토르가, 언젠가 데우칼리온 왕자에 관하여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 애는 내 형제입니다. 누님.’
‘…….’
‘그 애의 정혼녀도 내게 누이나 다름없고요. 그들에 대해 누님이 말하는 것이 즐겁지 않습니다.’
‘그들은 전하의 진짜 형제가 아니잖아요. 제가 전하의 누이예요. 제가….’
‘파이라 라브렌티오스. 내 모후의 친족인 것은 압니다. 하지만 당신은 내게 낯선 사람입니다.’
악토르의 그 말을 떠올리자 왕자의 눈을 직시하기가 어려웠다. 마치 제가 가당찮은 위세를 부렸던 것처럼.